내일은 영주님 (3)
"주군을 뵈옵습니다!"
이제 막 방 안에 들어온 보고자의 의복 곳곳에 묻은 핏자국들만 봐도 그가 조금 전까지 무슨 작업을 하다 왔는지를 유추할 수 있었다.
"예상보다 빨리 왔군. 발언을 허한다."
"그게 그...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상관 없다, 숨김 없이 말하라."
"다시 잡혀온 죄수들을 심문한 결과 이들의 소속은 '딜레-둠브라'로 밝혀졌습니다."
"쯧, 확실한가?"
"예, 말이 가능한 죄수 7명 모두 똑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망할, 심문 작업이 오래 걸리지 않았던 이유도 납득이 되는군!"
딜레-둠브라(Dile-Dumbra), 이는 통칭 범죄자 길드라고도 불리는 범죄조직이었다.
중심거점이 헤트만 동북부의 '시토(sito)' 사막 어딘가에 있다고만 밝혀진 세력으로, 약 9년 전 여리보 공국이 타미아르에 흡수편입되는 것에 반기를 든 대장군 '호르헤 발데스(Jorge Valdes)'가 자신의 파벌을 이끌고 떨어져 나갔던 일이 바로 그 기원이었다.
그들은 호전적이고 대쪽같은 군인출신답게 금액만 맞으면 지저분한 해결사 노릇부터 청부살인까지 마다하지 않았으며, 핵심전력이 상주하는 시토 사막의 본거지를 제외한 나머지는 소규모 점조직 형태로 운영했다.
그리고 각 지역의 점조직은 지역 흉악범 혹은 전범, 용병출신 범죄자들이라도 실력만 뛰어나면 자유계약 형태로 고용하여 구성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당연히 이 은밀성따윈 개나 줘버린 듯한 특이성엔 나름의 노림수가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약 10년 간 이들 때문에 골머리 썩고 있는 알푸샤리카가 제일 잘 알았다.
“육시랄 놈들! 그것들의 본거지가 사막 어느 구석에 처박혔는지를 알아내기만 하면 반드시!”
그가 홧김에 점조직들의 토벌을 단행한다 한들 곁가지치기에 불과할 것이 뻔했다. 그들의 줄기와 뿌리를 제거하지 않는 이상, 지방 구석구석을 청소시킨다 하여도 그때뿐이리라.
물론 그가 작정하고 총병력을 긁어모아 시토 사막에 풀어버린다면 조금은 다른 양상이 될 터이나, 별다른 실익도 없는데 드넓은 사막을 무작정 헤짚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1황자와 몇몇 제후들의 날선 대립이 갈수록 심해져가는 정치적 상황까지도 고려해야 했다.
‘중립도 힘이 있어야 외칠 수 있는 법. 이런 때에 무의미한 전력낭비만은 참아야 한다.’
알푸샤리카는 치정의 걸림돌인 딜레-둠브라를 두고 혀를 찼다.
“쯧, 야간 병력의 피해가 심했던 이유도 절로 납득되는군. 썩을 놈들, 바퀴벌레처럼 보이는 족족 잡아 죽여도 또 어디선가 나타나 바글거리겠지. 내 체면상 가만놔둘 수도 없고 이거 원!”
그는 훗날을 막연히 기약해야 하는 현재의 처지가 몹시 못마땅했다.
"후~, 내 잠시 홀로 쉬고 싶으니 모두 물러들 가라."
"""예, 주군!"""
자리에 앉아 잠시 머리를 식혀낸 제후는, 이내 발걸음을 옮겨 마법통신 수정구들이 설치된 커다란 밀실로 향했다.
"R.F.를 연결해라."
"예, 주군의 명을 받드옵니다."
이곳에 상시 대기중이던 마법사는 수납장의 수많은 수정구들 중에 하나를 꺼내어 밀실 중앙의 전용거치대에 부착했다.
그리곤 일련의 활성화 과정을 거쳐 연결된 수신측 관리자와 몇 마디를 주고 받은 뒤, 제후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지금 달려오는 중이라 합니다. 그럼 저는 차음막을 치고 밖에서 대기토록 하겠습니다."
"그래."
마치 서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마법사가 방에서 모습을 감춤과 동시에,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인의 얼굴이 수정구에 드리워졌다.
“오랜만이군, 러셀.”
<아이고~, 알푸샤리카 제후님이 아니시옵니까?! 허허허, 어떻게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안녕치 못했다. 자네에게 직접 연락할 만큼 말이지.”
<하하하, 어떤 정보를 원하시옵니까? 언제나 그렇듯 파마 길드보다 저렴한 값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러셀과 알푸샤리카의 대화가 잠시간 이어졌고, 그로부터 2일 후 개러스는 '특별 감찰관'란 임시직과 함께 예덴 섬 토벌대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었다.
* * * * *
며칠 뒤, 비아반 대교 인근.
"보고드립니다, 개러스 감찰관님. 이넨카 해안에 집결중인 함대는 앞으로 6일 안에 출항완료 예정이라 합니다."
"'알겠습니다. 저희도 내일 정오 중에 출발하면 당초 예정대로 합류하게 되겠군요. 계획대로 진행하시고 만반의 준비를 부탁합니다."
"예, 감찰관님."
군기가 바짝 서린 기사단원을 내보내고 임시 막사에 홀로 남겨진 개러스. 그는 비록 임시일 뿐이나 총 2만에 달하는 토벌대를 통솔하고 있는 당금의 현실이 꿈만 같았다.
그는 알푸샤리카가 친히 내린 명령서와 인장 반지를 마르고 닳도록 만지작 거리며 감동해 마지 않았다.
'딱 4년! 4년만 버티자! 그럼 정말로 영주가, 진짜 귀족으로 거듭나게 되는 거야! 아아~, 진심 감사합니다, 신녀님!'
기득권의 시기질투에 힘입어 '조건부 귀족임명'이 이뤄진 것이 흠이였나, 5년 안에 영주가 되리라던 나디아의 예언이 정확하게 적중한 꼴이라 개러스의 입장에선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특별한 사고만 안 치면, 자리를 도로 빼앗길 일이 없이 변방 귀족으로 살 수 있다는 보증수표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쩝... 내일이면 우리 신녀님과도 안녕이겠네? 크흠, 그건 좀 많이 아쉽다~, 아쉬워~.'
나디아와 정이 깊이 들었다기 보단 그녀의 능력에 대한 미련이었다. 특정조건의 인과율을 구체적인 숫자로 도출하는 그녀만 옆에 있으면, 그가 촌구석 영주보다 훨씬 더 높은 자리를 노려봐도 괜찮지 않을까란 욕심이 싹튼 것이라 하겠다.
'흐흐, 일단 조만간에 또 만날 수 있는지부터 여쭤보자. 자, 어디보자~, 우리 신녀님께서 좋아하시는 달달한 간식 꾸러미를 내가 어따 놨더라?'
개러스는 현 시대에선 졸부들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달콤한 과자바구니를 비장하게 챙겨 들었다. 그리곤 경계순찰 병사들에게 묻고 물어 임시 야영지 끝자락에 있는 어느 공터로 향했다.
"""와아아-!"""
땀내나는 병사들의 우렁찬 함성! 그가 인산인해를 이룬 고추밭 가운데서 한 떨기 꽃과 같은 알쿤다 자매를 찾아내기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아삐이! 화팅!"
나디아의 응원을 따라 자연스레 공터 중심부를 구경한 개러스는, 시커먼 사내들이 이토록 뜨겁게 열광하는 이유 또한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무리한 부탁을 흔쾌이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리온 마법사님!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 끄덕.
루카스의 긍정 어린 고갯짓을 확인한 어느 장군이 크게 외쳤다.
"특임소대 전진 앞으로!"
"""전진 앞으로!"""
각 7인씩 4개조로 이뤄진 병력은 천인대장의 명령에 따라 길쭉한 얼음방망이를 들고 있는 루카스를 향해 살기를 피웠다.
"분대별 각개전투 실시!"
"""실시!!!"""
- 척. 척. 척. 척.
반원을 그리듯 영역을 적절히 꿰찬 분대장들의 외침은 거의 동시에 이뤄졌다.
""""결!""""
- 터더더덕.
특임소대의 일원답게 각 분대원들의 움직임은 마치 하나의 생명체 같았다. 각 조의 4인이 대형방패으로 웅장한 철벽을 세우는 일과, 남은 3인이 개량형 쇠뇌를 조준하는 자세는 물 흐르듯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발사!!!""""
- 퉁, 퉁, 투두퉁!
총 12개의 볼트가 일제히 루카스를 향했다.
- 까가가가강!
인근에서 모의전을 구경중인 병사들은, 한 번 휘둘러진 얼음방망이에 투사체가 모조리 튕겨나가는 광경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커허어~. 히햐~.”
"와씨... 아니, 저게 된다고?"
특히 안전상 사각방패를 땅에 대고 관람중인 대기진영 1열의 몇몇은, 튕긴 화살촉 몇 개가 방패에 박히다 못해 뚫고 나온 모양새를 뒤쪽 친구들에게 보여주며 놀라워 했다.
"""정!"""
- 처저저적!
한편 원거리 공격이 무참하게 막힌 분대장들은 돌진을 명령했고, 이에 따라 쇠뇌 대신 땅에 박아놓은 창을 치켜든 분대원들은 앞선 방패병들의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으랴아!"""
힘을 한데 집결시킨 28인의 위세는 성난 코끼리의 진격을 가뿐히 저지시킬 만큼 강건했다.
- 두다다다다다...
그러나 마계 마수들을 간식거리 취급했던 고위마족을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현실 또한 엄연한 진실이었다.
- 쐐액!
날카롭게 휘둘러진 얼음방망이에 실린 마기가, 돌진 무리로부터 빼죽하게 튀어나온 12개의 강철 창날을 걷어냈다.
- 째재쟁-!
그 터무니 없는 속도는 3급 이상의 투사들조차 바람계열의 마법으로 오인할 정도였다.
이후 휘두룬 얼음방망이를 회수하지 않고 그대로 손을 뗀 루카스는, 가로로 긴 직사각형의 얼음장벽을 순식간에 만들어내더니만 그것에 어깨를 대고서 그대로 지탱했다.
"뭐야? 저대로 특임소대의 돌격에 맞서겠다는 거야?"
"에이, 설마요~. 명세기 마법사라는 양반이신데..."
양측의 격돌은 너무나 삽시간에 이뤄졌다. 이번 친선전을 주재한 어느 천인대장의 '명세기 마법사인데 다른 생각이 있겠지요.'란 말이 끝마쳐지기도 전이었다.
"""그대로 갖다 박아!!!"""
- 터엉!!!
"으이이이이익!"
"야, 야, 야! 밀리지 마! 어어어어?!"
"버텨! 버티라고!"
"끄으으으으!!!"
모든 분대장과 분대원들이 악에 악을 썼지만 루카스와의 충돌 후 관성에 의한 1미터 전진이 고작이었으며, 머잖아 그의 힘에 밀려 대형이 우르르 무너지고야 말았다.
- 쿠당탕탕!
"""우와아아!"""
병사들의 격렬한 함성은 믿을 수 없는 루카스의 승리를 찬양했다.
"와아...... 쓰흡,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맙소사, 저게 사람이냐? 거인족도 저렇게는 안 하겠다!"
“아놔, 젠장! 특임소대한테 두 달치 봉급 다 걸었는데!”
“크흐~, 역베팅이 진리였네! 오메~, 겁나 달달하구연~.”
넘실거리는 흥분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그들은, 좀 전에 실시간으로 와해된 대인전술과 그 이전에 있었던 기사단원들의 연이은 패배행진까지 끄집어 웅성웅성 떠들었다.
"아까 내로라 하는 기사들이 대련신청했다가 줄줄이 박살난 것도 굉장했지만, 이건 뭐... 어후..."
"야, 그보다 눈 깜박할 사이에 얼음장벽 만들어 낸 거 못 봤냐? 내 생전 저런 마법사는 들어본 적도 없다!"
"힘과 마법의 완벽한 조화! 저것이야말로 진정한 전사의 완성형이 아닐까?!"
"ㅈ나 볍씨 같은 말인데, 저걸 보니까 왠지 모르게 설득된다! 나도 마법 좀 배울까?"
이들을 얼마간 더 방치해 두면 그 흐름 역시 종국엔 '타미아르 국 헬퍼트 가의 최종병기'란 결론으로 봉착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꺄하하하하! 아삐, 채고!"
"훗, 고맙다. 나디아."
한편 개러스는 남들이 뭐라하든 꺄르르 웃으며 루카스의 품에 찰싹 안기는 나디아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의 눈에 더욱 거슬리는 건, 루카스와 나디아를 중심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천인대장들의 모습이었다.
‘에고...’
루카스에게 말 한 마디라도 붙여보고자 하는 그들의 애잔한 열정만 봐도, 개러스는 괜스레 주눅이 들고야 말았다.
'하아아... 이런, 내가 낄 틈이 없네.'
그렇게 자신을 되돌아본 그는 잠시나마 혹했었던 과욕을 깨끗하게 던져버렸다.
'아오! 꿈 깨자. 꿈 깨! 어설프게 개수작 부리다 가진 것마저 싹 말아먹겠다! 그래, 변두리 귀족조차도 내 주제엔 감지덕지인 게야. 후우...'
그렇게 그는 광적인 천인대장들 사이에 끼어 나디아에게 공손히 공물을 바치고 빠지는 수준에서 오늘의 행동을 마무리했다.
‘가늘고 길게 살자!’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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