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법, 꼼수. 그리고 잔머리 (2)
그에게 깊은 회한이 밀려왔다. 정략결혼을 통해 완만히 복속시켰다 생각했던 두 제후, 아니 두 장인들이 도리어 주도적으로 자신을 겁박하고 있으니 배신감보다 허탈감이 더 크게 쏠려왔다.
'나도 형님처럼 제후들 몰래 기반을 만들고 키웠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이렇게 일방적으로 밀리진 않았을 터......'
때늦은 후회란 언제나 부질 없었다. 서로 결탁한 다섯 제후들에게 일찌감치 회유 당한 근위대는 밀착호위라는 명목 하에 국왕과 여러 왕족들을 구류 중이었고, 그가 평소 왕실상비군이라 부르며 자랑스러워했던 정예 병력은 순식간에 ‘칼리드 추살대’로 탈바꿈되어 출병한지 오래였다.
'더군다나 이 나라의 기둥인 여덞 제후들 중 다섯이나 작정하고 반기를 든 상황이야. 보나마나 이 자리에 없는 작자들은 다른 제후들을 일대일로 맡아서 견제 중이겠지. 사실상 이곳에 내 편은 한 명도 없다고 봐야 한다.'
그의 거부권은 의미도 없었고, 애당초 고려되지도 않았을 터였다. 이렇게 본성을 장악한 제후들에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현 국왕까지도 갈아치울 방책까지 마련되어 있다고 여겨야 옳았다.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때문에 샤하브는 그들이 예의상 내밀어준 손을 잡으며 마지막 협상을 시도할 수 밖에 없었다.
"두 분을 포함한 제후들의 중론이 그러하다면... 제가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오오, 저하의 어려운 결단에 깊은 감사..."
"다만, 한 가지만 부탁 드리고자 합니다."
""?""
"이 사안이 사안인 만큼, 제가 직접 이번 일을 주관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십시오. 참고로 저는 추살이 아닌, 강제연금으로써 가급적 마무리 짓고 싶습니다."
""......""
제후들은 간청에 가까운 샤하드의 부탁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인상을 와락 구겼다. 되도록이면 칼리드의 숨통을 끊지 않겠다라는 그의 결의가 여실히 드러난 탓이었다.
이런 그들의 속마음을 읽은 샤하브는 서둘러 사족을 달았다.
"대신에 왕좌를 걸고 두 분께 약조하겠습니다. 만약 칼리드 형님이 제 설득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저항하시오면 그땐... 그땐 제 손으로 직접... 처리하겠습니다."
""......""
"그 편이 여러분들의 입장에서도 더 좋은 그림이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 상황이 매우 못마땅할 몇몇 제후들을 고려한다면 말입니다."
"흠... 알겠습니다. 저하께서 그렇게까지 강경하게 말씀하시오면 어쩔 수 없지요. 지금 바로 선발대에 연락을 띄우고, 저하를 모실 후발대를 구성하겠습니다."
"...이해해줘서 고맙습니다."
제후 대표들의 온화한 수긍에 가슴을 쓸어 내리며 자리 떠나간 샤하브였으나, 그것은 이참에 왕권을 아주 밟아버릴 심산인 제후들의 탐욕을 얕잡아본 것이었다.
"크흠, 씨도둑질은 못한다더니만 샤하브 왕자도 은근 고집이 있으시구려."
"그러게나 말이오. 줄곧 평화주의자를 자처하시기에 대단히 무난한 국왕이 되시리라 여겼소만... 허허, 참..."
"흐음... 칼리드 왕자의 독니를 미처 알아채지 못한 지난 과오를 우리가 또 다시 반복해선 안 될 터인데 말이외다."
"나 역시 그 말에 깊이 공감하는 바입니다."
"......"
"......"
이렇게 서로 속마음을 스리슬쩍 떠본 그들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하며, 다소 생뚱맞은 듯한 화제를 거론했다.
"...거 제가 듣자 하니 폐하를 모시는 시종계집 중에 배가 점점 불러오는 여아가 있다지요?"
"험험, 그 소식은 나도 익히 들었소. 치매 든 양반이 밤마다 그렇게나 왕성하시다고 하더이다."
"아하하하, 하지만 제 개인적으론 다음달 출산 예정이라는 베르섹 경의 손주에게 거는 기대가 큽니다."
"커흠!!! 이래서 제가 아슬라니 경을 싫어할 수가 없다니까요! 음허허허!"
의견이 찰떡 같이 합치된 제후들은, 이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개떡 같은 가능성을 읊어댔다.
"그나저나 내 참으로 걱정이오. 칼리드 왕자의 폭정을 제압하시려는 샤하브 왕자님께서 부디... '무사히' 환궁하셔야 할 텐데 말입니다. 허허허."
"이런 우연이! 내 우려 또한 그것과 꼭 같습니다. 치열한 난투 중에 샤하브 왕자께서 눈 먼 화살을 '우연히' 맞게 되시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머릿속에서 당췌 가시질 않아요!"
"하하하."
"허허허."
그 날 밤, 암어로 적힌 명령서를 챙겨 든 전령기수들이 긴급 구성된 후발대에 앞서 본성을 나섰다.
* * * * *
한편 루카스 일행의 여정길은 당초 예정보다 두 배는 족히 길어지고 있었다. 이는 위태위태한 1대 정령왕의 재봉인 작업을 도와달라는 샌더스 수장의 요청을 루카스가 흔쾌히 받아들인 결과였다.
그래도 재봉인 자체는 순탄하기 그지 없었다. 이번 일에 대한 반대급부로 로비샤에 대한 경제적•물리적 지원이 예정된 탓에 루카스가 적극적으로 임하기도 했지만, 다른 무엇보다 아리사엘이 '대량생성 모듈 시험'이랍시고 봉인수정을 자그마치 1,000만 개나 떨궈준 덕이 컸다.
만약 아리사엘의 봉인수정이 없이 루카스가 자력으로 처리해야 했더라면, 대규모 지역 피해는 필연이나 다름 없었을 것이다.
{어, 어째서! 저 너머의 존재가 이곳ㅇ...}
"다물어라."
{끄아아아아!}
이와 같은 작업은 일주일 간격으로 두 차례 연달아 이뤄졌다.
결과적으로 지난 흐나파스 사건 당시 루카스에 의해 가사상태에 빠진 조각과, 약 한 달 전 쯤 타미아르 국에서 가르디엔의 주도로 작업된 1개, 그리고 타국으로 파견된 요정족 특전대대가 해결한 1개까지 합하면 도합 12개 중 5개의 조각이 안전하게 재처리된 것이라 하겠다.
앞으로 루카스가 기아니크 국경에 인접한 헤트만 외곽 지역에 있는 조각까지 성공적으로 갈무리 한다면, 힘이 반 토막 난 1대 정령왕의 위협은 완전히 제거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설령 나머지 6개가 한 번에 모조리 풀려나는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당대 정령왕이 그것들을 이면세계로 싸그리 불러들여 무난하게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 되는 까닭이었다.
정말로 이 계획대로만 된다면 1대 정령왕에게 희망을 두고 있었던 악령들은 구심점을 영영 잃게 됨은 물론, 단체로 무기력증에 빠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이는 제니티아 저택 쓰레기소각장 한 켠에서 절규중인 나셴-바실커스만 봐도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왕이시여, 저를 구하러 오셨군요!}
{...미안, 나도 잡혔어.}
{크흑... 이, 이럴 수가... 이럴 수가!!! 크어으흐흑... 꺼으흐흑...}
하지만 세상사 모든 일엔 크고 작은 굴곡이 지기 마련. 루카스 일행의 앞길에 별 일이 별안간 등장한 시기는 그들이 마지막 경유지에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 카가가가강!
이들을 제일 먼저 반겨준 것은, 어느 복면인과 불꽃 튀기며 전투 중인 샌더스 총통의 친위대였다.
"제5형으로 돌진!"
"으윽, 뚫어낼 수 없습니다!"
"1분대 3형으로 대응! 2분대 바람 정령과 대지 마법으로 공격 보조! 서둘러!"
각 대원들의 움직임은 명령에 거의 즉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일사 분란했다. 송곳과 같았던 집중형 대열은 2인 1조의 방사형으로 변화했고, 이때 후미로 빠져 나온 4명의 인원은 복면인을 향해 뛰어드는 4개 조에 힘을 더해줬다.
"음하하하핫!"
하지만 그들의 날카로운 공격이 복면인에게 닿는 행운은 일어나지 않았다.
"실로 뛰어난 연계로다!"
"이익!"
직접 무기를 섞고 있는 당사자들은 죽을 맛이었고, 구경하는 자들 또한 모두 경악하기 바빴다. 특히 페이와 폴라의 충격이 남달라 보였다.
'오잉?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 요기 또 있네?'
겨우 한 사람이 요정족 특수부대원 중에서도 엘리트만이 선출되는 친위대원을, 그것도 무려 16명이나 되는 인원을 문자 그대로 농락하고 있으므로 '실로 경이롭다'는 한 줄 평가가 딱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음, 호쾌하다! 스승님께 무공을 전수받던 지난 날이 무심코 떠오르는군.'
루카스 또한 꼭 낯설지만은 않은 복면인의 기예를 흥미롭게 관찰했다.
- 파파팟! 쐐애액!
- 휘이잉~.
"으하하하핫! 무재들이로다! 무재! 어디 본좌에게 보여줄 재주는 더 없느냐?"
현재 요정족들의 몸놀림을 잘 벼린 무기에 비유한다면, 이를 맞상대중인 복면인의 움직임은 아무리 베어내려 해도 절대 가를 수 없는 호수를 닮아 있었다.
'어? 가만... 이 느낌은 분명...'
우연히 포착된 특이점은 루카스의 촉촉한 감성을 한 순간에 증발시켰다.
'엇?! 저건 신력이다! 틀림없다!'
마계 마족의 음침하고 스산한 기운과는 상반된 힘의 향기. 선계 초월자들이나 신들이 내뿜는 특유의 그것은 루카스의 이목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행동거지를 보면 일단 올림푸스나 발할라 쪽은 아니다. 무릉도원이나 정토 측이려나?'
"저기... 루카스 님, 저희가 도와줘야 할 거 같은데요?"
"...자, 잠시만 기다려라! 화, 확인할 게 있다!"
문득 압도적인 실력차를 체감한 레이첼이 나서서 물었지만, 현재 그는 마나와 프라나가 소용돌이처럼 난무하는 저 싸움판이 마음에 든다고 하여 섣불리 끼어들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선계의 개입은... 역시 내가 원인인가? 그쪽은 분명 아리사엘 님께서 철저히 관여하고 계셨을... 아, 그것 또한 나 때문일 수도...'
루카스 자신이 이 행성에서 간간히 마력을 사용했던 사건사고를 돌이켜 보니, 선계에서 알아챘다 하더라도 딱히 희한할 게 없었다.
'쩝...'
이와 더불어 천상의 미온한 대처와 처리지연에 불만을 품고 자체정화를 주장하는 부류가 충분히 생길 법도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지레 납득되질 않는 이질감도 있었다.
'화신체는 화신체인데... 그런데... 어째... 어딘가 좀 오묘하다?'
여기서 루카스가 언급중인 화신체란 초월한 신격을 보유한 신들이 하위차원의 법칙을 어그러뜨리지 않고 현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으로서, 일종의 분신 따위를 일컬었다.
'아, 아니지. 지금 그딴 걸 신경 쓸 게 아니다. 내가 마족임이 밝혀지는 문제를 더 우선해야 한다. 아직 마계로 돌아갈 수단이 미확보 된 시점이니까...'
최우선 화두를 정립한 루카스는 선계의 신으로 추정되는 복면인이 자신을 인지하기 전에 가브리엘의 신물을 서둘러 착용했다.
'휴, 이거라면 쉽게 발각될 리는 없겠지. 헌데... 아리사엘 님의 별도지시는 아직인가?'
그는 안전관계상 자신과 멀찍이 떨어져 있던 나디아를 힐끔 쳐다봤다. 이는 자신을 예의주시하는 아리사엘이라면 지금쯤 어떤 길을 제시하진 않았을 까란 은근한 기대감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 우웅, 웅. 웅.
하지만 나디아에게서 무언가 발현되기 이전에 복면인이 착용한 일자형 머리띠 형태의 금관이 먼저 은근한 빛을 머금었다.
"...음?!"
- 타닷.
외마디 탄식과 함께 순간적으로 요정족 대원들에게서 몇 미터 멀어진 복면인은, 그들과 일정거리를 유지한 상태로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웅얼거렸다.
"아니, 갑자기 왜요? 허허이~, 내 간만에 신바람 났었... 아아, 알았소, 알았소이다! 그리 다그치지 좀 마오! 아니, 내가 이 나이에 편두통으로... 어허, 거 참. 내 알았다는데도 그러시네!"
그렇게 입맛 씁쓸히 다신 그는 자신과 대치중인 친위대 조장을 향해 외쳤다.
"허허허! 아쉽지만 놀이는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십시다. 모처럼 뛰어난 무재들을 만나 몹시 즐거웠소."
"웃기지 마라! 누구 맘대로!"
요정족 대원이 표독스럽게 쏘아댔지만 복면인은 그것을 능글맞게 흘려냈다.
"나 역시 조금 더 어울리고 싶으나, 사정상 그럴 수가 없게 됐음을 이해하시오. 오늘은 비긴 셈 칩시다."
"시끄럽다! 네 녀석의 정체와 목적을 밝혀라!"
"이보오, 낭자. 내 정녕 범인이 아니라니까? 심히 억울하오! 나 또한 조사차 이곳에 왔었..."
"거짓말 하지 마라! 모든 증거들이 너를 지목하고 있어! 더군다나 깨진 결계 속에서 봉인석을 만지고 있던 네 모습을 우리 모두가 똑똑히 목격했다! 절대 그냥은 못 간다!"
"아니, 내 말뜻은 그것부터가 오해라 그 말ㅆ...."
"닥쳐라! 전원 돌격!"
조장의 성화에 못이긴 대원들이 나름 최선을 다해 복면인의 그림자를 쫓았다.
- 파팟. 팟. 팟. 파팟.
"반드시 잡아야 한다! 절대 놓쳐선 안 된다!"
그러나 악을 써봤자였다. 정면으로 승부 걸어도 어쩌지 못했던 인물이 작정하고 도망치겠다는데, 그들이 그의 발목을 묶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뭐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아!!!"
"허허허, 저돌적이고 여장부 같은 면모가 참으로 내 취향이시구려! 혹시 정인은 있으시오이까?"
"이익!"
"어이쿠~, 그럼 이만!"
이후 가능한 마법과 온갖 정령들까지 총동원 됐으나, 임무실패라는 암담한 결과가 거짓말처럼 뒤집어지는 기적은 발현되지 않았다.
"거기 서지 못해!!!"
"하하하! 나중에 인연이 되면 차라도 한 잔 나누십시다!"
"잡아! 잡으라고!!!"
안타깝게도 그녀의 서슬 퍼런 외침에 잔뜩 긴장하여 난색이 된 이들은 그녀의 소대원들이었다.
'어이쿠야, 히스테리 돋았네!'
'오늘 잘못 걸리면 죽음 확정이겠다.'
'젠장, 끽 소리 말고 숨만 쉬어야겠군.'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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