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상한 혼잣말 (3)
* * * * *
그 다음날은 새벽부터 이래저래 부산스러웠다. 특히 아카반 총장은 대규모 전이 마법진 작업에 매진하느라 오전까지 시간이 싹 증발됐렸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휴, 드디어 끝났군! 아이고~, 허리야~. 팔십이 넘어서 그런가, 이젠 정말 몸뚱이리가 예전 같지 않아. 마법으로 신체강화를 해도 그 때뿐이니... 은퇴를 앞당기던가 해야지 원. 아이고오~."
"제가 보기엔 아직 정정하십니다, 총장님."
"허허허! 말이라도 고마우이. 아무튼 이제부턴 지르츠 부장 자네 주도 하에 가장 가까운 지부 몇몇과 순차적으로 연결해서 시험해보게. 잘 알고 있겠으나 최소한 5번은 검증해봐야 해."
"예, 총장님."
그래도 총장이 있었기에 망정이었다. 그만큼 임의로 다중 좌표와의 연결과 해제가 가능한 마법진 설치는, 집행부 마법사들이 떼로 달려들어 하루 반나절이 꼬박 소요됐을 고난이도 중의 고난이도였기 때문이었다.
- 이이이잉...
"시험운용 이상 없습니다!"
"안정적입니다! 발견된 문제 없습니다!"
"이동완료된 인원들의 건강상태도 양호합니다!"
모처럼 차를 마시며 심신의 피로를 풀던 아카반 총장은, 아랫사람들의 보고에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바로 옆자리의 폴라에게 넌지시 말했다.
"헛헛헛, 그렇다고 하는군요. 이제 폴라 양의 동료들을 부르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네, 그럼."
폴라는 통신대기 중이었던 페이를 찾았다.
"이제 해당 좌표로 연결해도 돼, 페이."
<오케이! 자자, 너희도 들었지? 리스베트 특전대 출동!>
<아오, 페이 선배! 후배들 앞에선 체통 좀 지키세요! 내가 다 쪽팔려, 진짜!>
<이쓍! 왜 나만 미워하고 그래?!>
<선배만 자꾸 그러시잖아요!>
<시끄러! 가서 다치지나 말고 무사히 돌아와!>
약간의 미세잡음이 섞여 들려왔으나,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마법진이 빛을 안정적으로 머금었다.
- 우우우우우웅...
이제 리스베트 팀의 장거리 전이가 이상 없이 완료되면, 그것을 기점으로 헤트만 전역에 있는 지부의 짱짱한 실력자들이 차례차례 집결할 예정이었다.
‘휴~, 이제야 좀 숨통이 트이겠구먼.’
한편, 본격적인 티타임에 돌입한 아카반 총장은 어젯밤의 소동을 돌이켜보며, 루카스의 놀라운 인맥과 저돌적인 행동력을 담담히 인정했다.
'의외로 만만찮은 위인이란 말이지.'
사실 루카스가 실행한 해법 두 가지 자체는 누구나 떠올릴 수 있었던 단순한 계획였다.
그 중 하나는 요정족을 끌어들여 이번 사태를 공론화시킨 것. 지금 시각이면 아래와 같은 내용이 헤트만 인근의 주요국가들에게 한창 통보되고 있을 터였다.
<오느노아 일족의 대표자로써 흑마법사들이 일으킨 이 참극을 도무지 좌시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부대를 긴급파견할 예정이오니, 아무쪼록 각국에선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사안이 급박하여 구두로 먼저 협조요청 드리오며, 며칠 내로 사절을 파견하여 정식서안을 전달하겠습니다.>
말이야 거창하게 긴급파견이지, 대외적으로 알리지 않은 실제 투입인력은 고작 10명에 불과했다. 참고로 그 외의 대원들은 출발지점의 마법진 관리와 알쿤다 자매의 호위를 위해 남은 것이다.
설사 이 파견규모가 밖으로 드러나도 상관은 없었다. 누가 뭐래도 각 개개인의 전투력이 6성 마법사와 견주는 샌더스 총통의 직할부대였거니와, 이 파견 핑계 덕에 헤트만 마법사 연맹이 '자국의 심각한 문제에 우리가 손 놓고 있을 수 없다'라고 주장하며 나라 전역의 뛰어난 마법사들을 총동원할 수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해법 하나는, 칼리드 왕자를 압박하여 연맹의 동원령을 두둔하게끔 만든 일이었다.
『 나 칼리드 구르파샨은, 헤트만 마법사 연맹의 신속한 대응과 그 노고에 감사를 표한다. 또한 응당 왕실이 주관해야할 중대사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그러지 못함에 통탄하는 바이며, 왕실의 무능함을 고개 숙여 사과하는 바이다. 이번 마법사연맹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나라를 향한 충성심을 절대로 잊지 않겠다. 그대들의 성공과 무사귀환을 간절히 기원하노라. 』
위와 같은 칼리드의 전언이 헤트만 전역 구석구석에 포고되려면 며칠이나 소요될 터. 그러나 마법사연맹을 옭아매던 족쇄를 끊어내기엔 모자람이 없었다.
섣불리 이 공표를 두고 따졌했다간 백성들에게 쫌생이로 비춰질 수도 있는 관계로, 칼리드에게 저항중인 세력들마저 아카반 총장의 결단을 적극 지지한다는 입장을 시시각각 표명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누구나 생각할 순 있어도 아무나 해낼 수 없는 계획을 실제로 이뤄낸 루카스에 대한 평가는, 폴라의 암호전문에도 잘 녹아있었다.
『 (1) 경우에 따라 전략과 전술을 구사함. 평소 주먹구구식의 품행으로 단정하지 말 것. (2) 중요! 타미아르의 대마법사와 모종의 계약이 존재. 상세내용 파악불가. 서약이 적용된 계약임을 확인. 』
이렇게 전이를 끝마친 동료들의 건강상태를 확인하는 척 정기보고를 본토로 전송마친 폴라는, 루카스를 찾으려 베이스캠프의 무기창고로 향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폴라의 복장이 가벼운 이유는, 현재 그녀와 리스베트 팀에게 분배된 역할이 '비상대기'였기 때문이었다.
그 1차 원인은 지르츠의 완곡한 작전협력 거부에 있었다.
“죄송하지만 저희 나라의 일은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폴라 양. 이미 저희가 몇 번씩이나 계속 해오던 일이고, 이번에 많은 인원이 충원될 예정이니 여러분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문제 없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집행부 부장님.”
실질적인 작전지휘권자인 그가 초장부터 노골적으로 선을 그어버렸기에, 그녀는 차선으로 루카스의 임무보조를 희망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어이없게도 그것 또한 루카스의 거센 반대에 부딪쳐 좌절됐지만 말이다.
[불가. 불허한다. 뒤틀린 저주는 결과가 항상 똑같지 않다. 타종족도 감염될 가능성 존재한다.]
[괜찮습니다. 물리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습니까? 다들 자기 한 몸 정도는 능히 건사할 수 있는 실력자들입니다.]
[그건 알지만 거절한다. 전투에 완벽한 가정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 사익 위해 너희를 빌렸다. 그 누구 하나 다쳐선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투입금지다. 너희 목숨값은 비싸다.]
[하지만 위험도를 따지자면 인간이신 루카스 님께서 저희보다...]
[나 인간 아니다. 그건 까마득한 옛날 일이다.]
[?!]
결과적으로 폴라는 루카스의 지시를 따라야했고, 모든 사태가 마무리될 때까지 10명의 후배들과 함께 베이스캠프에서 탱자탱자 먹고 놀아야 하는 숙명을 겸허이 받아들여야 했다.
‘별 수 없지. 인간을 초월한 존재라는 사실을 본인에게서 확인받은 걸로 위안 삼자.’
저 멀리 루카스를 발견한 폴라의 발걸음이 총총총 산뜻하게 빨라졌다.
"역시나 여기 계셨군요, 루카스 님."
"너의 친구들은 잘 도착 했나?"
"네, 다들 이상 없습니다. 과연 8성은 8성입니다. 확실히 저희 장로님들에 비견되는 실력이더라고요."
"그렇군."
적당히 대답 마친 루카스는 땅바닥에 진열해놓은 다섯 자루의 팔카타(Falcata)와 워해머 세 자루를 하나씩 집어들곤 상태를 요리조리 살폈다.
무기들의 출처가 연맹 마법사들이 본인들의 집에 장식으로 널어뒀던 무기들을 불안한 마음에 챙겨온 것들이라 그런지, 저마다 화려한 장식과 눈부신 광택을 자랑했다.
"더 필요한 거 없으세요? 제가 몇 자루 더 받아다 드릴까요?"
친밀한 대화를 이어가고픈 그녀가 호의를 비췄으나 루카스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괜찮다. 연맹 창고에선 이게 최선이었다. 비교적 튼튼한 재질과 마법처리만으로 만족한다."
"으음... 근데 언제 출발이신가요? 이미 떠나셨을 거란 생각도 했었거든요."
"저 사람들 준비가 안 끝났다. 마무리되면 베스퍼 양이 따로 알려준다고 했다."
"아하."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루카스의 손짓을 따라 옮겨갔는데, 베이스캠프와 멀리 떨어진 해당 장소에서 고군분투중인 여느 마법사 무리를 살펴보니 자신도 모르게 측은해졌다.
- 메에에에!
- 꾸윅! 꾸이이이익! 꾸잌!
그들의 작업은 여성진 중 과반수가 양•염소•돼지들의 멱을 따서 중력마법을 이용해 허공에 거꾸로 매달아놓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렇게 가축들의 생피가 밑받친 대형 들통을 가득 채우면 다른 여성진들이 그 피를 가죽수통에 옮겨담아 뚜껑을 밀봉했고, 반면 남성진들은 축늘어진 사체를 인계받아 5kg미만의 고깃덩이로 토막내어 가죽수통에 하나씩 엮은 다음 마차에 차곡차곡 적재시켰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노동의 반복. 그러나 앞서서 고군분투라 표현했을 정도로 그 양이 실로 어마어마했다.
중량 초과 직전의 짐마차 7대와, 또 같은 분량을 싣고 한참 전에 이동한 11대.
여기에 작업자들의 평균 연령이 30대 후반에서 40대 중반인 것까지 고려하면, 저들의 일그러진 표정이 강제노역에 찌든 죄수들의 표정과 동급인 것도 쉽게 수긍할 수 있었다.
"에고, 저분들도 자기네 지부 내에선 나름 한 자리씩하시는 분들일 텐데... 어딜 가나 막내들은 서럽군요."
"공감한다."
"그래도 백 명 이상 달라붙어서 그런지 작업속도가 아주 굼뜨진 않네요. 의외로 금방 끝나겠는데요?"
"그렇군. 나도 슬슬 정리해야겠다."
폴라는 무기들을 챙겨 허공 어딘가로 능숙하게 수납하고 일어선 루카스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뗐다.
"풉, 저기... 이건 제가 생각해도 우스운 말이긴 한데요.”
“?”
”아무쪼록 몸조심하세요, 루카스 님."
"알았다. 너도 고생해라, 폴라."
"아휴, 제가 딱히 고생할 게 있나요."
"눈칫밥. 그거 쉬운 거 아니다."
"헤헷, 그렇긴 하더라고요. 괜히 신경 쓰여서 배식이 끝날 무렵에나 밥 타러 가게 되네요."
"훗, 다 그런 거다."
폴라는 루카스가 어느 땐가부터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고 있다는 사실이 은근히 기분 좋았다.
그가 이전처럼 '저기' 혹은 '이봐' 등의 뭉뚱그린 호칭을 쓰지 않는다는 건, 그녀가 루카스에게 '타인'이 아닌 '동료'나 '친구'로 인식됐다는 반증이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입장에선 그동안 쩔쩔 매던 마음고생이 드디어 결실을 맺는 것 같아 왠지 모르게 보상받는 느낌이 강했다.
'이따가 이 소식을 페이한테 들려주면 뭐라고 하려나~?'
아마 스스로 많이 미안해서 멋쩍어할 페이라면, 오히려 얼굴에 철판 까는 강경한 선택지를 고르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엣헴, 실은 그거 내 큰 그림이었다?! 내 희생에 감사하셔! 키키키키킥!!! 아~ 왜에에~, 진짜라고오-!>
- 작가의말
오늘은 제20대 대통령선거 투표일입니다.
투표를 통해 국민의 소중한 권리와 의사를 표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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