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순례자 (1)
* * * * *
마법.
모종의 에너지를 인위적으로 제어하거나 다른 성질로 치환시키는 행위. 혹은 특정한 힘 또는 제물을 매개체로 삼아 시전자의 심상을 구체적으로 발현시키는 일.
마법학이 눈부시게 진보한 오늘날의 마법사들은 마나석이나 마정석과 같은 효율적인 매개체 이외에도, 숙련된 기사와 같이 기운을 체내에 축적시키는 방식을 도입하여 사용해오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힘의 원천, 즉 같은 에너지를 활용하고 있음에도 기사는 '프라나', 마법사는 '마나'라 명명된 개념의 경계는 여전히 통합될 조짐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상극처럼 갈라지고만 있는데, 이는 이 에너지 운용 및 제어방식에 대한 양측의 접근견해가 기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며, 수련법에도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까닭일 것이다.
마법사의 경우엔 마법을 운용함에 있어 자신의 마나를 온전히 소진하기 보다, 외부의 기운을 임의로 조작 통제하기 위한 촉매제나 매개체와 같은 수단으로......
- 탁.
레이첼이 대충대충 훑던 책자를 덮었다. 그녀가 참고하려 했었던, 어느 인간 마법사의 '마법학 개론'은 어느샌가 훌륭한 불쏘시개로서 용도가 빠르게 변경됐다.
"칫, 시시해."
인간문명 중에선 '마법학의 종주국'으로 불리는 헤트만이라지만, 오드노아 내에서 엘리트 과정을 수료한 그녀에겐 시답잖게 느껴졌다.
그녀는 모닥불에 던지기 전에 후루룩 살펴본 중간중간의 몇 장을 다시 떠올리며 구시렁거렸다.
"무엇보다 재미없어."
물론 오드노아에 비해 수백 년은 족히 뒤떨어진 인간 종족의 마법학 따위가, 본토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자인 그녀에게 어떠한 감흥을 불러일으킬 거란 기대감부터가 어불성설이긴 했다.
그러나 그것이 애꿎은 자갈을 강물 속으로 집어 던지며 괜한 심술부리는 그녀의 속상함의 결정적 원인은 아니었다.
"힝~, 이게 뭐야~. 내가 꿈꿔온 모험은 이딴 게 아니었는데......"
투덜대던 그녀는 공감을 바라며 임무차 동행하는 요원 둘을 바라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무미건조한 응대뿐이었다.
"당장 보충이 필요한 물품 우선순위도 정리 마쳤으니 이만 움직이도록 하죠. 곧 도착할 영지에선 환전부터 시작해서 의외로 준비할 것들이 많습니다."
"네네, 그러시죠. 폴라 씨."
"지도상으론 타미아르 내의 마지막 마을이기도 합니다. 세금 때문에 국경을 넘는 순간부터 가격이 달라지는 물품도 있다고 하니, 여유롭게 내일 하루 꼬박 정비하면서 필요한 용품을 보충하셔야 합니다."
"예예, 그럴게요. 페이 씨."
“......”
그녀의 건성건성 대답과 태도 등이 퍽 못마땅한 페이가 한 마디를 더 보탰다.
“헤트만은 여성경시 풍조가 유독 강한 편이라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인간사회는 여성의 인권수준이 아주 형편 없는...”
“아, 그거 우리랑은 무관계에요. 애초에 종족도 다르거니와, 인간들의 성향이 그렇듯 귀족이랑 마법사처럼 영향력 있는 부류는 늘 논외니까요. 그리고 막말로 어느 왕실이 우리 종족이랑 반목하고 싶겠어요?”
“......”
객지의 위험성을 에둘러 경고하려던 페이는 논리에서 밀려 말문을 닫았고, 반면 레이첼은 평소에도 비교적 말수가 적은 자신의 일행들을 넌지시 바라보며 한숨 쉬었다.
'쩝... 내가 얼마나 더 이 사람들랑 같이 떠돌아야 하는 거야?'
세월의 흐름 속에 성숙한 아가씨로 자라난 그녀는 더이상 이야기책에 흠뻑 빠진 소녀가 아니었다.
‘치. 내가 뭐, 눈부신 꽃미남까진 내가 바라지도 않아.’
어느덧 그녀의 손에 들린 루카스의 몽타주는 찢길 듯한 기세로 팽팽해져 있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그녀의 속상함은 이내 육성으로 뿜어져 나왔다.
"아오, 보면 볼수록 화딱지 나네! 우리보고 이 골렘 아저씨 꽁무니를 무한정 쫓으라는 임무부터가... 참나! 이게 말이 되나요? 안 그런가요?"
폴라와 페이는 뜬금없이 본심을 토해낸 그녀에게 마지못해 응답해줬다. 그녀들이 레이첼의 투정을 마냥 무시하기엔 ‘대장로의 금지옥엽’이란 지위가 많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우호적인 동맹협약을 맺어야 하는 일도 잊지 마십시오."
"폴라의 말대로 동맹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그것을 거부한다면 어떻게든 약점을 찾아 위험요소를 제거해야 합니다."
"아휴, 답답해! 진짜! 저기요들, 내 말의 요점은 말이죠."
갑갑한 건 레이첼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들 간의 단순한 공감대 형성을 바랐건만, 특수병기로 철저히 육성된 그녀들의 사고체계는 과묵한 중년남성의 메마른 그것을 닮아 원만한 대화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아니, 애초에 저는 이러고 싶지가 않다니까요?! 고작 얼굴 한두 번 본 게 전부인 인간종족인데!! 더군다나 내 취향도 아닌데!!!"
"저희도 팔자에 없는 보모 노릇을 하느라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만?"
“?!”
결국 괄괄한 성격의 페이가 그녀의 응석부림을 참다못해 정면으로 들이박았다.
"레이첼 양, 우리는 지금 종족의 생존과 번영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임무수행 중에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임무엔 싫고 좋고가 없습니다. 무조건 해야만 하는 겁니다."
"그 논리는 억지에요! 전 당신들처럼 특수전 요원이 아니라고요!"
"당신 아버지께서 샌더스 총통 각하와 어깨를 나란히 하시는 원로회의 대장로임을 자각하기 바랍니다."
"아버지는 아버지고, 저는 저에요!"
"그런가요? 잘 됐군요. 말 한번 잘 했습니다."
“...?”
페이는 레이첼의 급급한 변명 중에 섞여 나온 말꼬투리를 움켜잡고선 그동안 쌓아온 불편한 속내를 시원하게 털어냈다.
"당신은 지금 본인의 행동에 대한 죗값을 치르는 중입니다. 아무쪼록 입 다물고 임무에 충실하시길 바랍니다."
"뭐, 뭐라고요?"
"여간 시끄러운 게 아니니, 잔말 말고 입 다물라 했습니다."
"페이 씨!"
"하루 종일 당신의 응석을 받아주는 일은 저희 임무 목록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중하세요."
"...이익! 말 다 했어요?!"
아차 싶어진 폴라가 서둘러 페이의 급발진을 말리려 했으나, 이미 늦을 대로 늦은 상태였다.
"아니요. 이 참에 명확히 하도록 하죠. 레이첼 양은 그저 목표대상을 찾아 저흴 소개시켜주면, 그쪽의 임무는 그대로 종료. 끝입니다. 그 이상 더 바라지도, 뭘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그 이후엔 방해나 하지 말고 본토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
"목표대상과 친분을 쌓고 아양 떨어 동맹을 맺든, 아니면 협상이 틀어져 암살을 실행하든. 그건 저희가 알아서 처리할 일입니다. 이해하셨습니까?"
- 쒸익, 쒸익.
레이첼은 귓불까지 빨개진 채로 콧김을 뿜었다. 딱히 맞설 논리가 없기 때문에 분출되는 분노의 고압 증기였다.
"두, 두고 봐요!"
"흥, 얼마든지요. 딱히 무섭지도 않군요."
"내, 내가! 나중에 원로회 장로가 되면 기필코..."
"뭐? 장로요? 참나, 원로회 장로는 혈통으로만 되는 줄 아십니까? 아직 저희 원로회는 그 정도로 썩지 않았습니다만?"
"...이, 이, 이...!!!"
레이첼의 눈가엔 눈물이 왈칵 고인 반면, 페이는 마치 진상 고참과 기싸움할 때와 같이 이따금씩 먼 곳으로 시선 돌리며 레이첼의 눈초리를 아예 무시했다.
"설사 레이첼 양이 운 좋게 원로회에 입적하는 날이 온다 하더라도, 전 그 날로 은퇴할 겁니다. 그쪽처럼 제멋대로인 사람을 상전으로 모시는 건 제 쪽에서 사양하겠습니다."
"다, 당신!!!"
"어허, 어른한테 삿대질하면서 당신이라니 몹시 불쾌하군요. 이름부터 제대로 불러주시길."
"진짜 지금 말 다했...!"
"솔직히 다 못했는데 더 해드릴까요?"
- 으득.
레이첼은 본토로 콱 순간이동을 해 버리고픈 심정이었다. 정말이지 싹 다 내팽개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감정표출이 미숙한 어린아이란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라 차마 실행하진 못했다.
그렇게 불편한 대치가 얼마간 이어졌다. 약이 바짝 오른 레이첼과 이왕 불만 터트린 김에 끝장을 보겠다는 의지의 페이 둘 중 누구도 사과할 기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천만 다행히도 뜻밖의 변수가 돌연 나타나면서 이 대치가 물리적인 충돌로 이어지진 않았다.
"헛? 잠깐! 저건?!"
"갑자기 멋대로 말 돌리지 말ㅇ... 읍읍!"
페이가 당장이라도 사고를 칠 것 같은 분위기인 레이첼를 부리나케 끌어안으며 입까지 틀어막았다.
"쉿!"
"우우웁!"
"레이첼 양, 일단 진정하고 저길!"
버둥대던 레이첼의 몸뚱이가 이상을 감지한 페이에 의해 문제된 방향으로 홱 틀어졌다.
"?"
"11시 방향. 도시 성벽."
지금까지 불안해서 안절부절 못했던 폴라 또한 페이가 탐색마법을 펼쳐낸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
그제야 레이첼도 모종의 특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보통 때라면 의식 않고 지나쳤을 외진 지형. 또 그 부근의 성벽을 거미처럼 소리 없이 샤샤삭 등반중인 듬직한 형체가 있었던 것이다.
비록 그 수상한 인영은 넝마를 옹색하게 뒤집어쓰고 있었으나, 기억력이 좋은 레이첼에겐 결코 낯선 윤곽이 아니었다.
"이제 놔 드릴 테니 확인해 보시죠."
- 끄덕.
이윽고 입이 자유로워진 레이첼은 이미 집중 중인 폴라와 페이처럼 탐색마법을 시전했다.
- 우우웅...
"......네, 아무래도 맞는 거 같네요. 처음 만났을 때와는 근소한 차이가 있지만... 마치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마법이 그대로 투과되는 듯한 느낌은 동일해요."
그녀의 감별에 페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흠, 미리 이야기 듣고도 믿지 않았었는데, 정말로 느껴지는 게 어떤 것도 없군요. 폴라, 너는 좀 어때?"
"나도 너랑 같아. 모처럼 정령들에게도 부탁해봤는데, 아예 저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자체를 꺼려하고 있어. 음... 아무튼 절대 평범한 인간은 아니야. 근데 넌 어떻게 저걸 발견한 거야?"
"그... 사실... 딴 생각을 하다가 우연히 봤어. 근데 내 탐지마법에도 반응이 없는 게 너무 이상해서..."
"......"
직설적인 페이는 레이첼과의 말다툼이 시답잖아 중간에 딴청 피웠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인정했다. 실눈 뜬 레이첼을 의식하여 화제를 돌리면서 말이다.
"임무가 최우선이니 일단 움직이시죠. 흠흠..."
"후... 페이 씨가 너무 솔직해서 화도 더 안 나네요. 그래요, 좋아요. 우리 서로 쓸데없이 얼굴 붉히며 괜히 힘 빼지 말죠. 각자 할 일만 깔끔히 하고 서로 갈 길 가요."
"먼저 목표대상이 맞는지부터 확인하십시다."
"네, 그래요."
불편한 합의가 극적으로 이뤄진 그녀들의 발걸음이 매우 바빠졌다.
- 작가의말
.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