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발굴 금지령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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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병 종식이 선포된 지도 어느덧 11개월, 루카스가 이 세계로 말려들어온 날짜로부턴 19개월이나 흘렀다.
지난 비스마우어 일족의 강림의식사건은 훗날 역사학자들에 의해 '카이므 대란'으로 기록되어 상당히 비중 있게 다뤄지게 되는데, 그것은 이때를 기점으로 폐쇄적인 요정족이 인간 종족과의 무역 및 문화교류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현재 이 교류의 출발점이자 핵심역할을 차지한 타미아르 국은 정신없는 변화를 겪는 중이었다.
더욱이 당대 타미아르 국왕인 '그레이엄 리처드 맥타비쉬 3세(Graham Richard McTavish)'가 국내외의 영향력을 키울 수 있는 호기를 공고히 하고자, 오드노아의 총통 '샌더스 미들턴(Sanders Middleton)'을 직접 대면하여 그의 요청과 편의를 한계치까지 수용하면서부턴 그 규모 자체가 이전과 비교불가 수준으로 달라졌다.
물론 이러한 급진적인 여파는 국가단위로만 퍼진 건 아니었다. 무역 비중이 왕실상단만으론 소화 불가한 정도로 커짐에 따라 신규 상단과 연합이 우후죽순 발생했으며, 이미 각 주요 대도시에선 기존 상권세력과의 팽팽한 기싸움과 충돌이 심심찮게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또한 이보다 더 작은 단위의 백성의 삶 역시 난리도 아니었다. 그래도 그것의 대부분은 매우 긍정적인 아우성이었다.
여하튼 타미아르 국왕이 재빠르게 움직여 독점하다시피 한 무역가교 역할은 주변국의 많은 자원의 이동과 직결됐으며, 이에 딸려오는 부수적인 이익들은 타미아르 백성들의 생활을 한층 윤택하게 만들어줬던 것이다.
게다가 최근 파격적인 왕명이 포고됨으로 인해, 수많은 평민들이 신분상승에 대한 달달한 꿈까지 꾸며 취해가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런 흥분과 막연한 기대감은 루카스가 공용어를 익히고자 머물고 있는 이 도시, 비리디아에도 마찬가지로 진하게 흐르는 중이었다.
"다음은요. 비.리.디.아."
"비이이...리이...디아앙..."
"아이참, 철자가 틀렸잖아요오~!"
"음? 틀려? 다시다시... 뷔리이..디...야아아."
하루 중 그림자가 가장 짧은 점심 무렵. 상점 문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걸터앉아 루카스에게 '받아쓰기'를 연습시키고 있는 바네사가 유독 눈에 띄었다.
"에이~, 그것도 아니에요! 자자! 이거랑 잘 비교 해보세요, 루루 삼촌."
전과 다르게 눈에 확 띄는 점을 2가지 꼽으라면 그 중 하나는 말끔해진 바네사의 옷차림이었고, 다른 하나는 보수공사와 마감공사를 전체적으로 다시 한 것 같은 포리스트의 연금술 상점이었다.
"여기랑 요기 뒤에 철자가 잘못 됐어요. 이렇게 쓰셔야 정답이에요."
바네사는 루카스가 나뭇가지로 흙바닥에 적은 단어 끝부분을 훌훌 지우고나서 꼼꼼히 교정해줬다.
"아하! 그렇군! 지적 감사하다!"
"이긍~, 방금 그 말도 틀렸어요. 아랫사람한테는 '고맙다'. 이게 올바른 표현이라고 전에 말씀 드렸죠?"
"큼... 어렵네."
아마도 인근 행인들이 지나가면서 피식피식 웃는 건, 군말 없이 서있으면 범접할 수 없는 위압감을 내뿜는 사내가 자신의 허리춤에도 못 미치는 소녀 앞에서 절절 매는 꼴 때문일 것이다.
"히이~, 몇 번 반복하면 금방 익숙해지실 거예요! 조만간 이곳 저곳으로 여행 다니실 거라고 하셨잖아요. 도시 안 밖을 오가는 상인들이 이름이랑 출신지 정도는 정확하게 쓰실 줄 알아야 검문소를 쉽게 통과한다고 이야기해줬어요. 그러니까 더 엄격하게 배우셔야 해요."
"알았다. 나는 매우 납득했다."
"그럼 이번엔 이름을 한 번 써보죠. 자~, 루.카.스."
"루우우... 카아아.. 스으으..."
며칠 전부터 본격적으로 문자를 배우기 시작한 루카스가 뒷머리 긁적이며 땅바닥에 철자를 써내려 가고 있는데, 바네사보다 훨씬 어려봬는 아이 둘이 이쪽 방향으로 총총총 뛰어오며 꽥하고 소리쳤다.
"어어언~니이이이이~!!"
"누나아아아!!!"
"?"
아직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네사와 같은 흑갈색 머릿결을 지닌 여동생 샤비와 남동생 에드의 전율이 물씬 풍겨왔다.
"서, 설마...? ...된 거니?"
이에 헐레벌떡 뛰어온 동생들은 숨도 안 쉬고 외치며 확답을 원하는 그녀에게 즉각 대답해줬다.
"누나!!! 나 붙었어! 최종 합격이야!"
"나도! 나도 붙었어, 언니!"
"어머나! 저, 정말?! 애들아, 그게 정말이야?"
"응, 포리스트 아저씨께서 우리 대신에 신청서를 써주고 계셔! 금방 오실 꺼야!"
"맞아, 맞아! 진짜야, 누나! 공짜로 마법을 배울 수 있게 해준데! 담당 심사관님이 왕립사관학교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훠얼씬~ 더 영광스러운 거랬어!"
바네사는 동생들을 꼭 끌어안고 감격에 못 이겨 눈물을 살짝 흘겼다.
"아아......! 엄마, 아빠... 하늘에서 잘 보고 계신가요? 이렇게나 자랑스런 아이들이랍니다!"
"누나도 같이 평가 받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흐~, 이 바보야, 우리 바네사 언니는 마법사가 아니라 최고의 연금술사가 될 거거덩?"
"피이... 난 우리 바네사 누나랑도 같이 가고 싶었단 말이야..."
현재 타미아르 도시 전역에선 요정족으로부터 마법을 직접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 즉 1천 5백 명의 유학생 선발심사가 10~12세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신분에 관계없이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두말할 것도 없는 이 엄청난 기회는 처음부터 이렇게 모든 계급에게 열려있던 건 아니었었다. 애당초 재능여부 관계없이 왕족과 유력 귀족 자제들만으로 구성됐던 유학생들이 요정족의 칼 같은 퇴짜와 함께 고대로 되돌아온, 국제적인 망신 사례가 발생했던 고로,국왕의 열화와 같은 칙령에 따라 이런 식으로 확대된 것이라 하겠다.
"오! 나도 기쁘다! 에드. 샤비. 잘 됐다, 엄청나게 축하한다!"
엄지를 척 올리는 루카스를 본 샤비가 바네사의 품에서 쏘옥 빠져 나와 그에게 폴짝폴짝 매달렸다.
"이이잉~, 루루~ 삼촌~, 말로만요?"
"어? 응?"
"헤헤~! 나, 나! 사탕! 샤비는 달콤한 사탕과자가 먹고 시퍼용~!"
"루루 삼촌! 나도! 나도! 사탕과자!"
애드 또한 콧소리 가득한 샤비의 어리광에 가세한 반면, 바네사는 이 광경에 민망해져서 얼굴을 붉혔다.
"아니, 얘들아! 그렇게 조르면 못 써! 그동안 내가 몇 번을 다그쳤는데도 계속 이러니!"
"피이....."
"루카스 삼촌도 너무 매번 받아주지 마세요! 동생들 버릇 나빠진다니까요?!"
"하하하, 나는 괜찮다. 나 기뻐할 돈이 충분히 있다. 늑대랑 곰 가죽 다 팔렸다. 돈을 매우 많이 받았다. 그... 뭐냐... 위탁...판매? 경매? 그거 수수료 떼고서."
"어후, 그게 한두 푼도 아니고... 늘 죄송해서 그러죠. 곧 두루두루 여행도 다니실 건데, 여관비용만 해도..."
루카스는 부끄러움에 열불 내는 바네사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곤, 풀 죽은 상태인 에드와 샤비에게 양손의 검지를 각각 내밀었다.
"걱정 없다. 나 돈 많이 필요 없다. 여행은 원래 노숙이다. 그것이 기본이다. 그러니 사탕과자 정도는 별 거 아니다. 자, 가자! 빵집 가게로!"
"우와와왕~! 우리 삼촌 최고!"
"루루 삼촌 최고!"
루카스가 내민 검지를 아이들이 환호성 터트리며 맞잡은 그때, 벙거지 모자를 눌러쓴 웬 중년사내가 이들에게로 성큼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어이쿠~, 세상에 원! 이거 깜박 몰라볼 뻔 했네!"
"어머! 제프리 아저씨?!"
"아저씨이~!"
"제프리 아져씽!"
"이햐~! 그동안 쑥쑥 자랐구나!"
때마침 가게로 되돌아온 포리스트 또한 이 방문객을 알아보고선 그 누구 못지않게 기꺼워했다.
"헛, 제프리?"
"여어~, 포리스트!"
"하하하! 아니, 이게 누구야?! 나라에서 공증 받은 도굴꾼 아니신가?!"
이들의 돈독한 우정은 오가는 얄궂은 농담에도 버젓이 녹아 있었다.
"허어참, 이 존귀한 고고학자님께서 친히 걸음하셨건만, 어디서 연금술 나부랭이 따위가 감히 시비를 털어?"
"풉, 존귀는 개뿔! 어쨌든 어서 오게나, 이 친구야! 잘 왔어!"
"며칠 공짜밥 얻어먹을 요량이니까, 내가 마지못해 참아준다! 크흐흐흐!"
서로 어깨를 정겹게 투덕이던 제프리가 재건축이라도 한 것 같은 상점과 어정쩡하게 서 있는 루카스를 힐끔 보고 나서 말했다.
"오오~, 그나저나 염려돼서 서둘러 와봤더니만, 오히려 신수가 아주 훤~해졌군! 약초 캐다 금궤라도 발견했는가?"
"크크크, 뭐 비슷해."
"엉?"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 하세나. 아아, 이쪽은 루카스. 에... 루카스 씨? 이 놈은 내 친구인 '제프리 스카르프고르드(Jeffery Skarfgord)'라고 합니다. 바네사 남매의 공동 후견인이기도 하지요."
"나의 이름은 루카스입니다. 안녕? 아니 아니, 반갑습니다? 안녕합니까?"
"허허, 멀고 먼 타지 사람이신가보오?"
"이놈아, 목에 힘 빼고 정중히 모셔라. 나와 바네사가 지금도 멀쩡히 숨쉬고 살 수 있게 해주신 은인이시니까."
"엇?! 그, 그래?!"
루카스의 어눌한 발음으로 생겼던 제프리의 단순한 흥미는, 뒤이은 포리스트의 부연설명으로써 큰 호감으로 급변했다.
"아이고, 정말 반갑소이다! 부디 편하게 제프리라고 불러주시오! 모름지기 우리 바네사의 은인이라면 내게도 은인이나 다름없으니까! 어후~, 이 양반 손이 진짜 쇳덩이 같으시네! 으하하핫!"
"우리 밖에서 이러지 말고, 이만 안으로 들어 가세나."
"어어, 그러세~."
이대로 분위기에 같이 휩쓸려 딸려 들어가고픈 마음이 없는 루카스는 곧장 입을 열었다.
"포리스트 선생, 나 아이들이랑 시장에 갑니다. 과자랑 고기를 사서 돌아올 겁니다."
"하하, 그래요? 덕분에 저도 오늘 든든하게 얻어 먹겠네요. 천천히 다녀오십쇼, 루카스 씨."
바네사는 바네사 대로 자기할 일을 찾았다.
"저는 가서 따뜻한 차 좀 내올게요. 제프리 아저씨, 민들레차 괜찮으시죠?"
"아휴~, 우리 귀여운 바네사가 주는 건 뭐든 좋지! 이 아저씨는 네가 주는 거라면 돌이라도 씹어먹을 수 있어요!"
“힛.”
바네사는 주방으로, 포리스트는 앞장서서 제프리가 루카스와 힘찬 악수를 나누려 내려놨던 짐 꾸러미 하나를 집어 들곤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 딸랑~, 딸랑~.
"으허허허! 오우~, 이런 맙소사!"
제프리는 깔끔한 내부 인테리어와 광택을 번쩍번쩍 자랑하는 고가의 장비들을 둘러보면서 탄성 질렀다.
"자네 정말 어디서 돈벼락이라도 맞은 게야?"
"거의 비슷해. 우리 바네사를 따라 얼떨결에 나랏일에 기여를 좀 했더니, 보상이 기대 이상으로 아주 짭짤했지 뭔가! 참고로 이 건물은 이제 내 거라네, 엣헴!"
"뭬, 뭬이야?!"
"어험~, 방에 여유가 좀 있어서 조만간 민박도 작게 시작해볼 계획이지. 하하핫."
"......허어..."
포리스트는 뭔 개소리냐는 표정과 더불어 설명보충을 닦달하는 제프리의 눈빛을 잠시 즐겼다. 그리곤 진열대 사이에 그가 몰래 숨겨놓았던 작은 나무상자를 집어 계산대 위로 올렸다.
"흐흐, 자네가 그럴 줄 알고 다 준비해놨네. 자, 여기있네. 자네에겐 여전히 이 방법이 더 효과적이겠지?"
"흠... 직접 보라 이건가?"
"어, 맞아. 난 이걸 말로 설명할 자신이 없거든."
제프리는 가죽장갑을 벗곤 포리스트가 차근차근 늘어놓는 돌멩이와 나뭇가지, 그리고 찢겨진 공고문 조각을 순서대로 하나씩 만졌다.
"으으음..."
그는 사물이나 죽은 생물의 신체 일부를 통해 주변 기억을 단편적으로 읽어내는 능력을 십분 활용하여 당시의 조각들을 하나둘 씩 엮어 전반적인 상황을 추론해 나갔다.
"오호~! 자금의 출처가 어딘가 했는데 무려 고든 백작가라니! 여윽시~! 우리 바네사는 참으로 야물딱지다니깐! 공동 후견인으로써 매우 자랑스럽고 대견해!"
"아휴~, 그럼~. 지 엄마의 당찬 면을 쏙 빼 닮았는데!"
"어이, 근데 어째... 내가 정작 궁금해 마지 않는 내용이 하나 빠진 것 같다?"
"후후후..."
"야야, 쫌...!"
범상찮은 루카스에 대한 궁금증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제프리가 애달프게 보채자, 포리스트는 손바닥 반절만한 가죽 주머니를 제프리의 눈앞에서 살살 흔들며 실실 웃었다.
"흐흐흐, 그렇게 알고 싶은가? 하긴... 요게 바로 자네가 군침 삼킬 법한 일이긴 해."
"거참, 드럽게 뜸들이네! 그깟 게 뭐라고! 옹색한 살림살이 청산했다고 너무 우쭐대는 거 아닌가?!"
"후후후, 우매한 녀석. 그깟 게 전혀 아니거든~? 아해야, 이건 돈 주고도 못 구하는 거란다~! 이 자존심만 쎈 헛똑똑이 녀석."
"...?"
"크크, 짜식아. 먼저 나한테 형~님~, 해봐라."
"아니! 이 삼류 연금술 놈팡이가 지체 높으신 학자님께 뭐라고 지껄이는..."
- 탁. 스윽. 탁.
“...?”
맹수의 발톱과 더러운 검은 빛깔의 천 조각, 그리고 인간의 것보다 길고 뾰족한 송곳니 한 개를 가죽 주머니에서 꺼낸 포리스트가 발끈하는 제프리의 말을 딱 끊었다.
"훗, 이게 바로 비스마우어 일족의 송곳니와 의복 쪼가리, 또 이건 그들이 만든 키메라의 발톱이라고 한다면?"
"?!!!"
일순간 정신이 번쩍 떠진 제프리는, 성은이 망극한 충신에 빙의되어 두 손을 공손히 포갰다.
"혀, 혀어엉니이님~!"
"오냐, 오냐."
"이 미개한 놈의 무지와 결례를! 부우디~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허허허! 그래, 용서하마. 난 매우 관대하니까. 크크크..."
얼마 후. 주방에서 잘 우려낸 민들레차를 가져 나온 바네사는, 잠이 덜 깬 몽롱한 표정으로 죽치고 앉아 있는 제프리와 마주하게 됐다.
"...커허... 고대 인류가... 소환... 허어... 이게... 말이 되나..?"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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