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적 (3)
* * * * *
배째라 식으로 여덟 천신들에게 책임을 전가시킨 루카스. 그가 로비샤와 함께 꿀같은, 그리고 때늦은 신혼을 만끽한지도 어느덧 열흘이나 지났다.
하지만 정작 항사룡은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다. 로비샤에 대한 소문을 러셀과 그 인맥을 빌어 헤트만 전역에 전파됐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왜 안 오지?”
오늘도 어김없이 주점의 한 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루카스가 푸념하듯 말하자, 맞은 편에 앉은 주소걸이 뺨을 검지로 살살 긁으며 반응했다.
“글쎄...올시다?”
“준비된 함정을 눈치챈 건가?”
그 순간 영인고가 옅게 빛을 발했고, 얼마간 이마에 손을 대고 집중하던 주소걸은 천신들의 생각을 전달했다.
“에... 그렇진 않은 것 같다고 하시는구려.”
“음? 같다고는 무슨 말이지? 항사룡과의 계약은 유지되고 있지 않나? 어떻게 자기들 사도의 머릿속도 못 읽는 거지?”
“공식적으론 다들 근신중인 상태인지라, 하위 차원에 대한 개입은 반드시 호기를 틈타야만 가능하다고 하외다.”
“이해가 잘 안 된다. 천신들은 지금도 네게 말을 걸고 있지 않은가?”
“아, 그건 말이오.”
억지논리이자 꼼수였다. 천신들의 억지논리에 의하면 선계의 신물인 영인고를 가지고 노는 것일 뿐, 하위차원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아니었다.
“...그런 처지에서 잘도 나를 물 먹였었군.”
“이프리티아 님을 위해 연막을 촘촘히 치느라 요즘 여력이 마땅찮은 거라며 구차하게 변명을, 아니아니 설명하셨소이다.”
“후훗, 그 이유라면 계속 납득할 수 있다. 앞으로도 수고해주길 바란다.”
“헛헛헛! 참으로 매정하시구려! 하기야 나도 신혼 땐 팔불출이 따로 없다며 주위에서 제법 손가락질을 받곤 했었...”
옛 추억과 감성에 젖어 들던 주소걸이 갑자기 미약한 두통증세를 호소하며 하늘을 우러러 섭섭함을 발산했다.
”아이고,~ 왜 그리들 성 내시오이까?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거냐니?!!! 옛날에 사별한 내 아내와의 좋았던 한때를 회상한 일이 그토록 매도할 문젯거리요? 막말로 내가 그대들의 사도이오이까? 참나, 어이가 없구려! 에잉!”
삐침모드로 전환 직전인 주소걸을 얼마간 물끄러미 관망하던 루카스는, 나름의 용건을 가지고 여관으로 들어선 어린 꼬마에게로 관심을 슬쩍 돌렸다.
“어서와라, 쿠노.”
“안녕하세요~, 루카스 선생님~.”
배꼽인사를 꾸벅 올린 쿠노가 이어서 말했다.
“오늘은 무슨 정보지?”
“어떤 아저씨들이 선생님을 조사하고 다녀요!”
“누가?”
“이 동네에서 처음 보는 사람 두 명이었어요. 그 외엔 다른 일행은 없었고요.”
“그래?”
”수고비도 챙겨준다고 식량 좀 사오래서 시키는 대로 다 해줬는데, 갑자기 친한 척 저희 영지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나중에는 선생님의 정보를 집중적으로 캐묻더라고요!”
쿠노는 친절한 짐꾼을 자처하여 알아온 그들의 거취 정보와, 수상한 중년인들은 직접 영지 안으로 진입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는 주관적 의견도 한 술 보태서 고했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남문 검문소에서 쭉 걷다 보면 나오는 강가 아시죠? 거기에 야영지를 만들고 자리 잡았더라고요. 큰 짐마차랑 말도 4필이나 있어서 어렵지 않게 찾으실 수 있을 거에요.”
“음, 수고했다. 자, 받아라.”
루카스는 손에 잡힌 바지주머니 속의 은화를 몇 닢 건네주며 말했다.
“그런데 다음부터 너 혼자 따라가진 마라. 추가수당을 노리는 건 좋지만, 그건 무척 위험한 행동이었다.”
“에헤헷, 감사합니닷! 꼭 명심할게요!”
몇 닢의 대은화에 정신 팔린 쿠노의 시선으로 짐작건대, 그저 대답만 시원하게 했을 뿐 좀 전의 경고는 귓등으로 흘린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철 없는 어린 아이를 붙잡아 훈계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홀로 열 올려봤자 유의미한 변화가 생기지도 않을테니 말이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또 올게요!”
“...그래, 조심히 가라.”
루카스는 쿠노의 인생을 책임져 줄 수 없어 공연한 잔소리를 참아냈고, 이 사이에 마음의 평안을 되찾은 주소걸은 못마땅한 표정의 그를 따라 맥주잔을 기울였다.
“꽤나 총명한 동자요. 머잖아 오늘의 충고를 깊이 깨우칠 거라 생각되니 너무 심려 마시오.”
“그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지 않기 바랄 뿐이다. 세상엔 악마보다 더 나쁜 인간이 너무 많다.”
“허허허, 우리 마족님께오서도 유년시절이 녹록하지 않으셨었나 보오?”
“자연스럽게 떠보지 마라. 아무 말 안 할 거다.”
“허허허, 이거 딱 걸렸소이다!”
주소걸은 소탈하게 웃으며 화제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전환했다.
“그래서 우리의 의뭉스런 친구들에겐 언제쯤 가보실 작정이오?”
“당연히 해지고 나서다.”
“그으... 전부터 내 궁금했는데, 마족은 본디 야행성인 게요?”
“아마도 아닐 거다. 훤히 다 보이는 대낮에 사람을 땅속에 파묻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을 따름이다. 신기하게도 말이다. 다만 필요한 경우엔 밤낮을 딱히 가리지 않는다.”
“......내가 심히 무료해서 그런데, 대신 내가 다녀오면 안 되겠소?”
전혀 심심하지도 않고 여유로운 지금이 딱 마음에 드는 주소걸이었으나, 모처럼의 정보획득 기회를 한 줌의 퇴비더미가 되게끔 방치할 순 없었다.
“나 한 번 믿어보오. 주둥이 나불대게 만드는 기술이라면 나름대로 꽤 자신하외다.”
“하고 싶으면 해라. 난 상관 없다.”
“음허헛, 양보 고맙소이다~.”
* * * * *
모닥불 위에 얹혀진 작은 솥단지 속 내용물이 보글보글 끓어올랐다.
“후룹, 어뜨뜨뜨...”
나무 수저로 맛을 본 브랑코가 작은 목제그릇에다 얼마쯤 나눠 담으며 말했다.
“식칼 잡아본 게 오랜만이라 걱정됐는데 대충 먹을 만 하우. 받으슈.”
“흐흐, 고맙다.”
호르헤는 돌덩이 같은 빵을 염장고기가 그득한 국물에 푹 담가서 뜨끈하게 불려먹었다.
“오우야~, 네 녀석 요리솜씨가 전혀 안 죽었다?! 우리 그냥 이대로 은퇴하고 여관이나 열까? 당연히 1층 식당은 네가 맡고, 2층 관리는 내가 하고. 흐흐, 어떠냐?”
“신소리 그만하쇼. 그동안 조직 키운답시고 뺑이친 게 얼마인데 은퇴는 무슨! 일 없으니까 딴 놈이나 알아보슈. 난 우리 조직 되찾아 누릴 꺼 다 누리며 살라니까.”
“크크크, 이 새끼 이거! 우리나라가 안 망하고 그대로 있었으면 네 꼬라지도 참 볼만 했겠다야.”
“아무리 그래도 ‘타미아르에 복속되선 절대 안 된다!’며 반란을 주도했던 누구만 했겠수?”
“크크크크크, 이거 반박을 못하겠네~. 아~, 그때 카를로스가 아니라 코넌 장군을 포섭했으면, 나도 지금쯤 왕소리 들으며 기깔나게 살고 있었을 건데 말이다~.”
“에이씨, 쓰벌. 나도 그때 줄을 잘 골라 탔었어야 했는데!”
이 한 마디로 여태 무난하던 분위기에 파장이 일었다.
“새꺄, 내가 썩은 동아줄이냐?”
“그럼 아니우? 누구 때문에 내가 이 통밥에도 이처럼 개고생을 하고 있는데?”
“니미... 밥 먹다 말고 한 따까리 하고 잡냐?”
“계급장 떼고 함 뜰 거 아님 관두쇼.”
“당장 일어나, 새꺄!”
감정이 고조된 호르헤와 브랑코는 짐마차로 다가가 무기는 물론 방어구까지 위아래로 모조리 갖춰 입었다.
- 스릉~.
- 치잉-.
이윽고 주무기인 검과 도끼를 서로 겨눈 그들은 살기까지 기세등등하게 피우며 말했다.
“크크크, 쉽게 뒤지지 마라. 대가리 덜 아물었는데 또 깨지면 답 없다.”
“내가 할 말이우. 나중에 요양이 부족해서 다친 거라는 둥 어쨌다는 둥 쪽 팔린 핑계나 하덜덜 마쇼.”
“오냐.”
온몸에서 꿈틀대던 그들의 프라나가 각자의 무기를 휘감은 찰나. 호르헤와 브랑코의 신형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 파팟-!
과연 1급이 목전인 전투사들답게 각각의 돌진속도는 쏘아진 화살보다도 매서웠다. 심지어 무기에 예리하게 벼려진 프라나조차 홧김에 투덕거리는 수준이 절대 아니었다.
- 후우웅~.
격돌의 충격파가 아닌 거센 풍압이 호르헤와 브랑코의 귓가를 쓸었다. 애초부터 이 두 사람에겐 맞붙을 의향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 싕~.
그렇게 서로를 비껴간 그들의 투로와 살기는 맞은편 수풀 너머를 향했다.
- 푸확! 촤라락!
“...커헉!”
“크흡!”
- 콰직, 콰직!
“아악!”
“엌!”
순식간에 매복조 4인을 정리한 그들은 다시 가운데로 모여와 서로의 등을 맞댔다.
”아따~, 옛날 생각나네~. 추억이 막 돋지 않냐?”
“난 별로요. 솔직히 내가 이래 드잡이할 짬밥은 아니잖수?”
“아나~, 진짜... 그나저나 너 요리뿐 아니라 도끼질도 안 죽었다?”
“그러는 보스 칼질은 쪼매 무뎌진 거 같수다?”
“이 새끼가...?”
호르헤는 그 이상 버럭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목숨에 관심이 지대한 수십 명의 암살자들이 모습을 드러낸 채로 포위망을 좁히고 있었던 것이다.
“아, 쓰벌 졸라 많네.”
“우리 살기에도 주눅들지 않는 꼴이 잃을 거 없는 약쟁이들로만 불러모은 모양이우.”
”잡놈들로 힘 빼려는 수작인 건 뻔히 알겠는데, 여기서 빠져나갈 방도가 마땅찮네. 분명 카를로스가 꾸민 짓이겠지?”
“당연한 걸 굳이 왜 묻습니까? 언더보스... 아니지. 카를로스 그 새끼는 우리가 지치기 전엔 코빼기도 안 보일 거요.”
“하아~, 젠장! 안 되겠다. 개싸움으로 번지면 서로 방해만 되겠다. 따로 놀자!”
“알았수다, 그 등짝이나 간수 잘 하쇼!”
“훗, 지금 누구한테 말한 거냐? 니 체력 배분이나 잘 해!”
이대로 객지에서 비명횡사할 생각 없는 두 사람은, 엉성한 함정 따윈 우습게 찢어발기는 불곰처럼 포위망을 유린했다.
“아아악!”
“끄윽!”
“커꺼컥!”
과연 허접한 그물 따위로는 상위 포식자를 옮아 맬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냥꾼도 그물을 겨우 1겹만 준비한 건 아니었다. 나가떨어진 인원만큼 그들의 살육속도에 맞춰 끊임없이 보충됐다.
“휘유우~, 마약에 찌든 칼잡이들이 원래 이렇게 많았었냐?”
“낸들 아우? 암튼 그 X새끼가 단단히 작정한 거 같수.”
“아~, 미치겠네. 그래도 지까짓게 끝은 있겠지. 야, 일단 나 먼저 박는다?”
“뒤는 맡겨주쇼.”
- 채, 챙! 채재쟁-!
- 퉁~, 퍼억!
어느새 이백 구가 넘는 시체가 쌓였을 무렵부턴, 두 사람의 눈에 익은 인물들도 슬슬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고, 이 새끼들! 작정하고 하극상 벌이니까 좋냐?”
호르헤와 브랑코가 손수 공들여 키웠었던 정예들의 합공 속에 두 사람의 호흡 또한 점점 거칠어졌다.
“후욱, 훅, 칼부림에 망설임 하나 없네! 쌍놈의 새끼들!”
“허억, 허억, 그러게 평소에 잘 해주지 그랬수?”
“잘 봐라, 새꺄. 나보다 널 더 죽이고 싶어하는 눈치 아니냐?”
“훅, 훅. 거 말 시키지 마슈. 힘들어 뒤질 거 같으니까.”
“쪽팔리니까 딴 소리는.”
그들에게 시간은 독이었다. 그것은 암살자들이 호르헤와 브랑코의 손에 죽어나가는 속도가 조금씩 더뎌지는 모습만 봐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헉, 헉, 헉.”
“후욱, 후욱.”
이윽고 두 사람의 프라나가 옅어질 대로 옅어지자, 드디어 오늘의 메인 사냥꾼이 그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하하하, 이거 꼴이 말이 아닙니다, 보스?”
“카를로스, 이 개늠의 자슥아!”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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