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법, 꼼수. 그리고 잔머리 (6)
* * * * *
그로부터 한나절 뒤.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이는 거품물기 직전의 주소걸을 내려다보는 칼리드의 복잡한 심경이었다.
'...갑자기 왜?'
반격의 시작은 분명 더할 나위 없이 좋았었다. 만 명의 정예 기사단도 능히 격파할 수 있는 행운의 카드가 그의 손에 들려졌으니, 어쩌면 확정된 잭팟이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칼리드가 주소걸의 힘을 빌어 도합 5천의 왕실군을 즉결처분하지 않겠다란, 나름 최선의 결단을 내릴 수도 있었고 말이다.
최근 나라 전역에 걸쳐 시시각각 빈번해지는 트로돈 게릴라부대의 출몰횟수를 고려하면, 바워 장군과 같은 괘씸한 실력자도 사형하기 보단 죽을 때까지 우려먹는 형벌이 여러모로 효율적이었다.
때문에 칼리드는 주소걸이 왕실군 본대에 난입하여 적당히 교란하는 동안 전장을 이탈한다란 계획을 세웠고, 그 노림수는 그의 의도대로 먹혀들었다.
친위대에게로 하여금 삼삼오오 도망치되 반드시 흔적을 남기라 명한 그의 꼼수가, 뒤늦게 제정신 차린 왕실군에게 큰 혼선을 가져다준 것이다.
이렇게 급조된 그의 작전은 거의 완벽했었다. 어디까지나 '거의' 말이다.
딱 한 가지. 이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된 후에 다시 집결하기로 한 장소가 문제였다. 만약 그들의 재집결지가 정령왕의 봉인지만 아니었더라면, 주소걸을 앞세우며 이동중인 칼리드의 머릿속은 본궁 탈환작전을 짜기에 정신없었을 터였다.
"끄으으으으으!!!"
그런데 아무도 없을 것이라 여겼던 봉인지는 십수 명의 선객들이 들어차 있었다.
솔직히 그가 예상 못한 요정족의 존재야 대수롭지 않았으나, 바워 장군 및 휘하 왕실군을 마음껏 희롱하다 싱글싱글 웃으며 돌아온 주소걸에게서 급작스레 일어난 발작증세는 치명적인 재난이었다.
“으아으으으윽!”
<죽어! 죽어!!! 내가 그렇게 신신당부했건만! 이 빌어먹을 필멸자 새끼!!!>
"끄읔... 아으으으... 이건... 내, 내가... 의도한 게 아니.. 읔!"
<시끄러! 천상의 존재가 날 똑똑히 알아봤다고! 난 이제 끝났어!>
"절대 일부러... 의도하지 않... 았... 끄으으어어어어..."
<버티지 말고 어서 뒤져! 얌전히 폭사하란 말이다!>
"시... 싫소... 우리 대화로... 풉시... 으어어어..."
<닥치고 지금 당장 화신체랑 같이 죽어! 그래야 너나 나나 마지막이 편해!>
"...가가가각! 아아으으윽!"
칼리드는 시뻘건 빛을 내뿜는 금관을 붙잡은 채로 나뒹구는 주소걸을 어떻게 도와야할지 몰랐다.
'도대체...'
이 발작의 원인을 알아야 뭐라도 시도해볼진대, 가장 의심되는 요정족들 또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지라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았다.
단순히 치유물약 등으로 해결될 일이 아님을 인지한 그는, 아우 샤하브와 친위대장 사티바라그를 포함한 5명의 수하들이 조성중인 심란함에 동참하는 것외엔 본인이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신께서 보내신 사자만 믿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이렇게 인근의 모두가 손 놓고 지켜보거나 발만 동동 구르는 그때였다.
- 번쩍!
나디아의 정수리 위로 황금빛이 물결처럼 일렁였다.
- 화아악~!
"""?!"""
간만에 유별스러운 생성효과까지 동반한 그 이적은, 아리사엘이 의도한 바 그대로 군중의 이목을 확실하게 사로잡았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나디아를 통해 양피지 다발을 전달받아 읽고난 루카스는, 요정족 무리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나와 주소걸을 내려다보며 담담히 선언했다.
"추수와 번영의 신, 아드퍼드로스여."
사방 내려앉은 몇 초간의 정적.
"나는 거래를 원한다. 그대가 일방적인 손해를 입지 않으리라 약속한다."
이 말을 끝마쳐짐과 동시에 금관과 주소걸의 혈색은 본래의 색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 * * * *
필요성에 때문에 협상 자체는 빠르게 개최됐지만, 물과 기름 같은 양측의 만남은 초장부터 삐그덕 거리는 게 당연했다.
"허허, 천신 양반. 진짜로 그리 전하란 말이오? 그건 좀 초면에 결례가 심하지 않소이까?"
<쯧, 이대로 계속하면 나만 속 터질 거 같으니까 넌 뒤로 빠져. 내가 직접하겠다.>
"예이~, 예이~."
현 상황 자체가 못마땅한 아드퍼드로스는, 삽시간에 주소걸의 의식을 밀어내고서 화신체의 주도권을 잡았다.
- 드드드드드드...
그리곤 약간의 권능을 펼쳐 자신과 루카스의 공간을 임시로 단절시킴으로써 다른 필멸자들의 귀동냥을 전면차단했다. 이제 초월자에도 못 미치는 어줍잖은 힘으론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엿듣기는 불가능해진 것이다.
{제길, 음침한 마계 마족 따위랑 거래까지 하게 되는 신세가 될 줄이야! 내가 어쩌다가! 젠장!}
아드퍼드로스의 푸념을 들은 루카스 역시 보안과 편의상 똑같이 신어(神語)를 구사했다.
{좋게 생각해라, 선계의 신이여.}
{됐고, 듣보잡 마족께오서 나한테 제안하실 게 뭔데? 내가 마계로 추방 당하고 오갈 곳 없을 때 친히 위로해주겠단 식의 같잖은 헛소리라면 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나를 모른 척 해라, 그러면 우리 쪽에서도 너를 못본 척 할 것이다.}
{뭐? 우리?}
조금 전 나디아에게서 발현된 이적을 돌이켜 곱씹은 그는, 문득 떠오른 가능성 위에 본인의 상상을 한 큰술 보탰다.
{하하하! 참~ 대단한~ 후원자를 두셨었네~. 첩자... 아니지, 변절자인가? 아무튼 우리 마족 나리께선 꽤나 좋으시겠어~.}
{말 조심해라.}
{뭐 내가 틀린 말했나? 그렇게 단언할 정도면 천상 내에서도 위치가 엄청나단 의미 맞잖아?}
{너무 넘겨 짚었군. 틀렸다.}
{날 바보 취급하지 마! 대악마의 동조자가 아니고서야 품계 높은 천사가 특정 마족의 뒤를 봐줄 리가 없어! 솔직히 고위천사가 뭐가 아쉽다고 마귀따위를? 안 그래?}
{후... 난 시간낭비 싫어한다. 그러니 네게 특별히 딱 두 가지 사실을 알려주겠다.}
{...뭐 그러시던가.}
아드퍼드로스의 말투는 여전히 틱틱 거렸으나, 쫑끗 거린 그의 귀는 마음 속 호기심을 다 가리지 못했다. 덩달아 떠오른 묘책을 포함해서 말이다.
'별 거 아니기만 해봐라! 어? 아니지! 차라리 그걸로 트집 잡아 이 놈을 뚜까 팬 다음 선계로 질질 끌고 가면? 후후후, 덤으로 천상의 변절자까지 꼰지르면 내 죄는 충분히 상쇄되고도 남지 않을까? 내가 비록 전쟁의 신은 아니지만 진심으로 상대하면 이깟 듣보잡 정도야...'
그러나 그가 이어서 듣게 된 한 토막의 정보는, 얼핏 그럴싸했던 아드퍼드로스의 즉석 타계방안을 뽀얀 밀가루처럼 곱게 빻아놓았다.
{첫째로 나는 루치펠... 님의 직계자다.}
{?!}
찰나지간. 아드퍼드로스의 의식 한편에 지옥 세력을 양분하는 대악마 루치펠을 일컫는 수많은 칭호가 자동 출력됐다. 그리고 그는 이중에서 유독 긴장하게 만드는 어느 한 수식어에 집중했다.
- 지옥의 족쇄으로부터 자유로운 유일한 대악마.
천상에서 축출된, 뒤집어 말하면 그런 천상 외엔 어디든 오갈 수 있는 대악마의 존재란 참으로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루, 루치펠의 직계자라니... 그거 뜬소문이 아니었어?'
그래서일까? 여지껏 삐딱했던 아드퍼드로스의 자세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올곧아졌는지도 모르겠다.
{저, 정말로? 니가?}
{그리고 또 한 가지. 지금의 난 화신체가 아니다.}
{그렇단즉슨...}
{아마도 그대가 생각하는 그게 맞을 거다.}
{꺾!}
궁금증은 모두 풀렸고, 산 허리를 가리고 있던 안개도 걷혔다.
'루치펠의 직계자가 진신체 그대로 이 땅에 현현했다고?!'
재미없는 거짓부렁이나 허세로 치부하기엔, 앞뒤 정황이 떡하니 버티며 루카스의 이야기를 보증해주고 있었다.
'헛! 그래서 천상에서 발 벗고 개입했던 거구나! 이 차원의 질서가 파괴되는 걸 막으려고!'
마계제일이란 수식어를 붙여도 이상치 않을 마족이 하위 차원에서 본연의 권능을 여과없이 발휘한다?
이는 있어선 안 되고, 발생되선 더더욱 안 될 일이었다. 선계의 최고신들이 루카스를 처리하기 위해 현현할 것이므로, 최악의 경우 해당 차원의 붕괴까지 고려해야할 사안이었다.
'선계의 규율이 쓸데없이 엄한 이유도 이와 같은 불상사를 예방하기 위함이니, 천상의 이례적인 간섭 또한 충분히 납득이... 그래, 당연한 조치겠지! 음? 그나저나 어떤 뒷거래가 오갔길래 직계자가 하위차원에서 날뛰지 않는 거지?'
아드퍼드로스의 침묵이 불필요하게 길어지자, 루카스가 한 번 더 주위를 환기시켜줬다.
{충분한 설명이 된 거 같으니, 이제 거래를 시작하고 싶다.}
{그, 그래.}
루카스의 정체를 알고난 이래로 바싹 쫄은 그였지만, 억지로 건방진 말투를 고수하며 체면을 챙겼다.
{조, 조건은?! 아까 그대로겠지?}
{변함 없다. 서로의 존재를 묵인한다. 그게 끝이다.}
{간단명료해서 좋긴 한데... 너무 좋아서 껄끄러워! 정말로 널 못본 척만 하면 내 치부가 드러나지 않게 되는 게 맞아? 확실해?}
{물론이다. 그대가 직접 신탁자를 통해 확인해봐도 좋다.}
아드퍼드로스는 황금빛 이적의 중심이었던 나디아를 떠올렸다.
{끄응... 아까 그 쪼끄만 꼬맹이가 천사의 대리자란 말이지.}
{어렵게 생각하지 마라. 그대나 나나 서로 불편한 사태를 회피하는 것 뿐이다.}
{...조, 좋아! 거래하겠어! 나 아드퍼드로스, 지고한 주신의 팔천 팔백...}
{아아, 잠깐.}
루카스는 자신의 존재를 걸고 서약하려는 그의 행위를 중단시켰다.
{어? 왜? 이런 경우에 맹약은 기본 아냐?}
{번거로운 절차가 불필요한 단순거래다. 서로의 가벼운 언약만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이씨, 그걸 어떻게 믿냐! 자칫 내가 실수로라도 친구들에게 떠벌릴 수도 있는 거잖아. 너도 그럴거고!}
마족따윌 어떻게 신뢰하느냐는 아드퍼드로스의 우회적인 표현을 어렵지 않게 이해한 루카스는, 곧장 대검을 소환하며 본인의 입장을 완고히 표명했다.
{그야 본인의 행동에 본인이 책임지면 된다. 말해주고 입단속을 잘 시키거나, 아니면 아예 화근을 제거하거나. 뭐가 됐든 귀찮은 잡음만 안 생기면 아무 문제 없지 않나?}
{......}
{미리 경고하건대, 하찮은 실수를 저질러서 나와 다시 대면하는 불상사가 안 생기길 바란다.}
- 스릉~.
대각선으로 길게 늘어진 포르투스 클라베스의 아찔한 자태는, 선계 신의 말문마저 틀어막았을 정도로 설득력이 매우 강했다.
{다른 할 말 없으면 끝내도록 하지.}
{...아, 알겠다.}
한시라도 빨리 루카스에게서 멀어지고 싶은 아드퍼드로스는, 자신이 몇 분 동안 임의단절시켰던 공간을 원상태로 복구함과 동시에 화신체의 주도권을 다시 주소걸에게 넘기고서 잽싸게 도주해버렸다.
"오오, 신의 사자시여!"
"아삐이!"
양측 무리가 눈앞에 나타난 그들을 각각 반겼는데, 특히 칼리드 측 인원들은 다시금 상태 멀쩡해진 주소걸을 확인하고 몹시 기뻐했다.
"신의 사자께서 무사히 돌아오셨다!"
"좋았어! 이제 됐어! 됐다고!"
그런데 어느 한 인물의 위치선정이 왠지 기묘했다. 응당 다른 무리를 이끌고 있어야 할 대표자가, 반대편 무리 속에서부터 불쑥 튀어나왔던 것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루카스 님! 이 나라의 제1계승권자 칼리드 구르파샨! 지극히 높으신 천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존재께 인사올립니다!"
"?"
루카스는 미처 그의 인사를 받아주질 못했다. 스스로 신분을 밝혀온 칼리드가 땅에 이마를 맞대고 있는 상황부터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반면 루카스가 아드퍼드로스와 간단한 밀약을 나눈 사이, 온갖 계산을 머릿속으로 알뜰히 마친 칼리드의 언행엔 거침이 없었다.
"존귀하신 루카스 님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
다만 절제가 부족했던 게 흠이었다. 예언자 나디아를 발견하고 극도로 흥분한 나머지, 그만 단어선별에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따,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뭐?"
"제가 평생 받들어 모시고 살겠습니다! 이렇게 머리 숙여 간곡히 청합니다! 따님이신 나디아 님을 제게 주십시오! 저희 헤트만, 아니 모든 세계의 안녕을 위하ㅇ..."
- 으득!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다시 되물었던 루카스의 이마에 선명한 힘줄이 불끈 돋아났다.
"...뭐지? 이건 헤트만식 선전포고인가?"
"핫! 그, 그게 아니라..."
칼리드는 별도의 정제과정 없이 세 치 혀를 잘못 놀렸다가 3대가 쫄딱 망하게 되는 좋은 예시로 전락할 위기에 놓였다.
"흔쾌히 받아들이겠다, 너의 전쟁선포."
"오, 오해입니다! 말이 헛나왔습니다!"
"닥쳐라! 마귀도 성노리개 대상으로 안 삼는다, 열여섯 미만은!!!"
"제대로 다시 설명드리겠습니다!"
"곧 죽을 놈이 말이 많구나!"
"헉!"
"헤트만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오늘부터!"
"잠시만요! 잠시만!!!"
눈깔이 홱 뒤집힌 채로 '전쟁! 결코 다시 전쟁!'을 부르짖는 루카스를 진정시키기까진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필요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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