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oot : 대악마의 직계자

형벌적 윤회 (7) + 적의 적 (1)

* * * * *

루카스는 결국 로비샤를 설득하기 위해 거짓약속을 해야 했다. 쳇바퀴처럼 제자리에서 맴도는 그녀의 고집을 꺾을 길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안전한 방법을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당신이 가끔씩의 만남이라도 괜찮다면 말입니다.”

“...정말이시죠? 꼭이에요?”

“최선을 다하리라 약속합니다. 필요하다면 맹세라도 하겠습니다.”

“좋아요. 그 말씀을 믿고 서방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다 할게요.”

“잘 생각했습니다, 나의 로비샤.”

그가 아는 범위 내에선 로비샤가 이프리티아로 위상을 회복하는 순간 자신에 대한 기억만 쏘옥 도려내는 것만이 거의 유일무이한 정답이었다. 실제로 그것이 아리사엘이 나디아와 야스민 등등에게 사용하려고 단단히 벼르는 수단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천상과 선계의 불가침 협약이란 장벽 때문에 사실상 없는 선택지나 마찬가지였고, 다른 방법은 없었다.

“벌써 가시게요?”

“너무 외로워 마십시오. 단지 그대 눈에만 띄지 않을 뿐입니다. 내 마음은 항상 당신을 향해 있습니다.”

“치이... 말만 잘 해.”

이후의 후속조치는 당초 계획대로 착착 이뤄졌다. 로비샤의 병환이 깊어졌다는 소문을 공공연히 영주성 내부로 퍼트려 그녀가 방에서 두문불출하게 된 근거를 마련했고, 이곳으로 파견된 150명의 병력 중에서 차출한 대원 10명을 대역으로 위장하여 교대로 순환시켰다.

또한 그렇게 외성 바깥으로 나온 루카스는 러셀패밀리가 운영중인 허름한 여관을 임시거처로 삼았다.

하지만 이곳은 어엿한 지부가 아닌, 조직원들이 종종 거치는 일종의 휴게소 정도로 사용되던 숙박시설이었던 터라, 외부에서 흘러 들어오는 자들에 대한 조사는 그가 직접 발로 뛰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잡음이 좀 생겼다. 이 영지를 오가는 상인들과 여행객 등등이 덩치가 유별난 그가 다가오려는 낌새만 보일라쳐도 꽁지가 빠져라 내빼버렸기 때문이었다.

“흠, 파르하드 영주님. 당신은 이 불쾌한 반응의 이유를 짐작합니까?”

“예. 안타깝게도 용병들이 원인인 참극이 근래에 국내외 가리지 않고 많았더랬지요. 아마도 그래서 루카스 님과도 같은 분들을 더욱 경계하는 걸로 생각됩니다. 조금 다른 방법을 강구해보시지요.”

“......이해했습니다.”

원인파악을 끝낸 루카스는 문제해결을 위해 별도의 인력을 운용하기로 결정했다. 허나 그렇다고 하여 아무나 고용할 순 없었기에, 과거 로비샤를 위한답시고 야스민을 덜컥 납치했다가 평생 불구자로 살 뻔한 그 아이들과 접촉했다.

그가 찾아낸 아이들은 지저분한 몰골로 시장 인근에서 열심히 구걸 중이었다.

“선생님, 너무 배고파요! 동전 한 닢만...”

“어, 그래. 오랜만이다.”

“히익! 괴, 괴물이닷!”

처음 얼마 동안은 트라우마 때문에 그와 눈도 못 마주치던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로비샤를 위한다는 대의명문과, 먹을 것도 주고 돈도 준다는 달콤한 실익에 그만 눈이 멀어버렸다.

‘저, 저 돈만 있으면!!!’

물론 그들이 속해 있는 고아원은 로비샤 덕에 경제적 지원과 혜택을 충만히 받고 있긴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고아원의 형편이 개선됐을 뿐, 고아들의 장래까지 보장하지 않았다.

꿈과 희망이 결여된 촌구석 고아들. 특히 곧 16세가 되어 고아원에서 떠날 처지의 남아들에겐 악마의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독하게 결심만 하면 개척마을 등등으로 시집갈 수 있는 여아들과 달리, 안정적으로 자립할 건더기가 없는 까닭이었다.

실제로도 그들이 지금처럼 구걸을 하고 있는 이유와 목적도 내년이면 고아원을 떠날 예정인 형들의 노잣돈 마련에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루카스의 제안이 저항할 수 없는 유혹으로 느껴진 것이라 하겠다.

“다소 위험할 순 있다. 대신 보상은 그것에 비례해서 지급한다. 기본급은 매일 아침에 지급. 계약금으로 일당 일주일 치를 당장 주겠다. 생각 있나?”

“...하, 할게요! 무조건 합니다! 저희 진짜 잘할 수 있어요!”

그렇게 꾸려진 임시정보망은 의외로 효과를 톡톡히 발휘했는데, 제대로 된 입질이 나타난 시점은 그로부터 보름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 딸랑~, 딸랑~.

루카스가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여관건물의 1층 주점으로 들어선 사내 2명이 있었다.

“여긴가? 어후, 내부 꼬라지 봐라. 빈민가는 어딜 가나 거기서 거기구먼.”

“뭐 어때, 어차피 자고 갈 것도 아닌데.”

“하긴.”

상대적으로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의 사내가 다른 동료의 어깨를 툭툭 치며 나지막이 말했다.

“어이, 이봐. 저기.”

“음, 힘 깨나 쓰게 생겼는데? 그 꼬맹이의 말이 전혀 과장된 게 아니었어.”

”씁, 주먹으로 겁박하긴 글렀다고 봐야겠군.”

멀찍이 떨어진 문 앞에서 소곤대는 말들은 루카스의 귀에까진 안 들릴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좀 아쉽구먼. 별 거 아닌 놈이었으면 바로 족쳐서 나불대게 만들었을 건데 말이야.”

“쯧쯧, 생각 좀 하고 살아라. 이렇게 좁은 영지에서 사고 쳤다간 바로 지명수배야. 외지인이 적어서 빼도 박도 못해.”

“목격자도 치워버리면 그만이지 뭘.”

“미친 새끼, 크크크.”

실실 쪼개며 웃는 그들은 바텐더를 겸하고 있는 주인장에게로 어슬렁 다가와 맥주 2잔을 주문했다. 그리곤 팔을 뻗으면 닿을듯 말듯한 위치에 있는 루카스에게 넌지시 시선을 주며 말했다.

“베엘제불, ㅆ새끼.”

암어를 들은 루카스가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관심을 주자, 그들은 한 마디를 더 내뱉었다.

“흠흠... 루치펠, ㄱ새끼.”

“......”

순간 루카스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이는 아이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경우에만 덧붙이기로 약속된 암어였기 때문이었다.

요긴하게 부려먹고 있는 꼬마 정보원들을 건드린 값은 매우 비싼 축에 속했으므로, 루카스는 테이블 위에 은화 몇 개를 늘어놨다.

- 탁. 짤그락.

“주인장, 오늘은 일찍 문 닫고 들어가라.”

“아, 예. 마침 다른 손님도 안 계시고, 전혀 문제 없습니다.”

금전의 의미를 파악한 여관주인은 서둘러 지하 냉동고의 열쇠를 그에게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청소도 깨끗이 해놨습니다. 마음껏 사용하십시오.”

“그래.”

그러나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사내들은, 재빨리 가게의 문이란 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 사라지는 여관주인의 모습을 구경하는 가운데 태연히 물었다.

“그 듣자 하니~, 자네가 이 동네에서 꽤 잘 나가는 정보상이라고?”

“그렇다. 용건은 조용한 곳에서 나누도록 하지. 여기선 말소리가 밖으로 잘 샌다.”

“하하하, 이거 의외로 그럴싸한데? 왠지 믿음이 가는군!”

“이쪽이다.”

루카스를 따라 지하로 내려가는 그들은, 이때까지만 해도 그들의 인생에 마침표를 찍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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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의 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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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너 명이라면 그럴 수 있었다. 최근 극도로 흉흉해진 인심과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이라면, 정보수집에 동원한 말단 몇몇이 길바닥에서 소리소문 없이 증발했다 한들 단순한 우연으로써 치부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보름간 자히드 남작령에서 연락이 두절된 인원이 스무 명이 넘었다. 물론 딜레-둠브라의 조직규모를 고려하면 미미한 숫자였으나, 추가로 인원을 투입하는 족족 자취를 감춰버리는 집단실종이었던 고로, 조직 간부들의 관심은 필연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딜레-둠브라 측에서 여타의 정보상인들과 접촉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그러나 오늘 저녁처럼 양측의 거물끼리 비밀리에 합석하는 경우까진 없었었다.

“여어~, 오랜만입니다. 이거 딜레-둠브라의 행동대장께서 친히 오실 거라곤 예상 못했습니다.”

“나도 파마길드의 대빵께서 직접 행차하실 줄은 몰랐수.”

“일종의 기막힌 우연이었습니다. 마침 이곳 지부상태를 불시 점검하던 차였거든요.”

“남들이었으면 몰라도, 파마 여신의 신탁자가 그리 말하니까 별로 안 믿기우.”

”그럴리가요. 그저 운때가 잘 맞았던 겁니다.”

“뭐 그렇다고 칩시다. 그게 딱히 중요한 것도 아니고.”

”하하하, 그런데...”

날카로운 체형과 인상의 길드장 ‘바로소 트리파’는, 행동대장 ‘브랑코(Branko)’의 오른팔과 왼쪽 정강이에 붙어있는 부목과, 그의 이마부터 정수리 너머까지 길게 난 흉터에 흘끗 눈길을 주며 말했다.

“새 두목 분의 성격이 듣던 것보다 대단히 과격한가 봅니다?”

“...다 알면서 괜히 신경 긁지 맙시다. 안 그래도 치료한답시고 머리를 박박 밀어버린 바람에 기분이 아주 더러우니까.”

“하하, 단순히 확인하려 했던 것뿐이니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흥, 시답잖은 잡소린 이쯤에서 끝내고.”

브랑코는 한 손에 가득찰 법한 보석꾸러미 3자루를 차례로 꺼내놓은 뒤에 말했다.

- 쩔꺽. 쩔꺽. 쩔꺽.

“정보나 후딱 내주쇼.”

“허허, 두서 없이 너무 하시는군요.”

“거 정말 이러기요? 파마 여신의 총애를 받는 길드장한텐 구질구질한 설명이 하등 필요 없잖수?”

“하하하, 이거 과분한 평가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피차 바쁜 사이에 괜히 간 보지 맙시다.”

“이햐~, 이거 못 뵌 몇 년 사이에 통찰력이 깊어지셨군요?”

“통찰력은 개뿔, 그냥 감이지. 여튼 답이나 주쇼.”

“흠...”

바로소는 앞서 브랑코가 테이블에 늘어놓았던 보석자루 중 1개만을 챙겨 들었다.

“대금은 이 정도만 받겠습니다. 이번만큼은 저도 의외성이 짙어서 말이죠.”

“?”

“저희 여신님께서 즉답을 기피하시는 경우는 흔치 않지요. 근데 이 경우가 그랬습니다. 덕분에 곁가지로 정보를 수집하느라 애 좀 먹었습니다.”

“......”

브랑코는 이후로 얼마간 이어진 바로소의 정보공유가 마무리되기 무섭게 되물었다.

“요정족들이? 그 깡촌에?”

“촌구석이라도 확실히 뭔가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들이 영주일가의 경호를 비롯한 영지방어에 힘쓸 리가 없지요.”

“그건 그렇다 치고. 뜬금 없이 특급 전투사는 뭔 소리요?”

“에... 알고 보면 딜레-둠브라의 입장에선 그렇게 낯설진 않으실 겁니다.”

“?”

“최근 ‘뼈아픈’ 의뢰실패가 두어 번 있던 것으로 압니다만?”

파마 길드장이 ‘뼈아픈’이란 수식어까지 앞에 붙였다면, 그건 기타 점조직에 의한 잡스런 실패 따위가 아닌 본부 차원에서 진행된 굵직한 임무를 언급하는 것이었고, 브랑코도 그것을 곧장 알아들었다.

“...설마......”

“예, 그 설마가 맞습니다. 그 굴욕의 원인이었던 바로 그 특급 전투사입니다.”

바로소가 던진 추가정보에 브랑코의 심장이 두근세근 벌렁거렸다.

“...그 놈이 그 영지에?”

“자세한 방문목적은 몰라도, 지금 거기에 머물러 살고 있다는 것만은 단언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제가 직접 더 캐보려 했는데 저희 여신님께서 관여하지 말라며 강력하게 경고하셔서 말이죠.”

“그래서 수수료를 고것만 챙긴 거로군.”

”하하핫, 어쨌든 요정족이랑 특급 전투사의 조합이라면, 그쪽 부하들의 연이은 실종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큼...”

브랑코는 까끌까끌한 옆머리를 긁으며 잠시간 고민했다. 책략가 기질이 부족한 그가 생각하기에도 눈에 거슬리는 항사룡을 몰아낼 기회라 여겨진 것이다.

‘이거 어찌저찌 잘만 이용하면...’

그의 반짝이는 눈빛이 다시금 바로소에게로 향했다.

“이 내용, 우리 쪽 악마새끼의 귀에도 들어갔수?”

“아니요, 아직 모를 겁니다. 저희 여신님께서 자칭 ‘군주’라는 그 자를 별로 안 좋아하시는 것 같더군요. 하여 앞으로도 접촉은 가급적 기피할 예정입니다.”

“니미, 썅! 지깟 게 군주는 무슨 씨ㅂ랄! 그냥 통제 안 되는 정신병자지! 먼 과거에 좀 모자라게 태어난 여자한테 고백했다가 까이기라도 했었나~. 아~ 뭔 거지같은 살육에 맛들여 요즘 개지ㄹ인지 빌어먹을!”

“하하하, 감정을 너무 노골적으로 표출하시는 거 아닙니까?”

“여기가 당신네 길드 영역이라 쌍욕 박는 거요. 그 놈이 지난번에 흡혈귀 2마리를 데려와 뭔 계약을 맺은 뒤론 변절자들이 급격히 늘어나서 아주 골치거든. 썩을 놈들! 배알도 없는 박쥐 같은 새끼들!”

“음? 흡혈귀요?”

“카이므의 뿌리라는 비스 뭐시기 종족 있잖수. 흑마법사들을 대거 양산시키는 그 원흉들 말이오.”

”오오, 이런! 비스마우어 일족이라니! 제 의심이 적중했군요!”

의외의 소득에 손뼉까지 치며 기뻐하던 바로소가, 뭐 씹은 표정으로 변한 브랑코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고~, 이거 이거 하루 아침에 2인자로 밀려난 발데스 님의 재기가 쉽지 않겠습니다?”

“그거야 우리 사정이고. 암튼, 현재 나만 아는 정보가 맞는다는 거요?”

“예, ‘카를로스’ 님과의 접촉희망도 완곡히 거절한 상태입니다.”

“엥? 우리 언더보스는 왜...”

“저희 여신님께서 부정한 무리들 하고는 일체 엮이지 말라고 당부하셨는데... 그 무리 명단에 카를로스 님 또한 포함됐다고만 해두겠습니다.”

그 말인 즉슨, 현 조직 서열 3위로 밀려난 부두목까지도 비스마우어 일족의 꼬임에 넘어가 항사룡의 편에 섰다는 의미였다.

“...니미, 씨ㅂ럴......”

브랑코는 탁자 위의 남은 보석꾸러미 2개를 바로소 쪽으로 툭툭 밀면서 말했다.

“일단 알겠수다. 이거 마저 받아가고, 대신에 당신의 여신님이 행여 허락해줄지라도 얼마간은 계속 함구해주쇼. 당장 보스 만나서 의논 좀 해볼라니까.”

“하하,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요. 저도 모처럼 직접 움직인 보람이 있어서 좋았습니다. 아무쪼록 흑마법사들을 각별히 주의하시길.”

“...쩝, 안 뒤지고 살아남으면 나중에 또 봅시다.”

“무운을 빌겠습니다, 브랑코 님.”

그렇게 파마길드 길드장과 갈라진 브랑코는, 시토 사막의 본거지로 돌아왔다. 이후 커다란 개미굴 같은 지하통로를 이용해 목적지 앞에 다다른 그가 두꺼운 강철문을 거칠게 두들겼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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