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진 발자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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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트만 기준으로 남동부에 위치한 아비세르툼 지방. 거짓말로도 풍요롭다고 할 수 없는 이 반건조 지역은 확실히 인구 번성에 유리한 환경이 아니었다.
그러나 실제로 움직이는 물류와 인구 이동량은 의외로 왕성했는데, 그것은 거대한 사막을 가운데 두고 위아래로 인접한 '킬리프로스(Kilipros)' 국과의 무역거점 역할을 수행한다는 강점과, 가뭄에 콩 나듯이 어쩌다 발견되는 고대유적지가 원인이었다.
덕분에 작물재배는 상상도 못할 황량한 이 대지 위에 크고 작은 마을이 알 박듯이 자리 잡았으며, 그곳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생활 또한 그럭저럭 원만했다.
본래는 '원만하다.'가 아닌 '넉넉하다.'는 평가를 받아야 했으나, 위와 같은 지역특성상 하이에나 무리처럼 양심 없이 득실대는 강도들로 인해 그 수준이 격하된 것이다.
실제로 이 지방에서 방귀 좀 뀐다는 대형상단이라면 바지사장을 내세워 자체적으로 운용하는 용병대가 존재했고, 반대로 그만한 여유 없는 중소 무역상들은 상행시기를 정해놓고선 십시일반 각출하여 이름난 용병단과 계약을 맺곤 했다.
통상의 생태가 이렇다보니 인맥의 영향력이 날로 커지는 일은 당연지사.
'장사는 인맥이다.'라는 푸념은 세월의 흐름 속에 '인생은 인맥이다.'로 변질되어 현지 사람들의 기본상식으로 자리잡는 지경에 이르렀다.
"에잉, 차라리 이 근방 도적놈들이 하루속히 다 통합됐으면 하는 바람이라오! 한 놈에게 통행세 얼마쯤 바치고 목숨값 퉁친 다음 빠른 길로 직행하는 편이 낫지 원!”
“그 정도입니까?”
루카스의 심심한 공감은 마부석 옆지라에 앉은 노인 '무라티(Murati)'의 흥분을 더욱 가중시켰다.
”아휴, 그럼 진짜지! 나 같이 하찮은 봇짐장수는 강도들도 관심 안 주는 길목으로 몇날 며칠을 더 빙빙 돌고 돌며 푼돈만 간신히 만지는 형편이라니깐?! 돈도 돈이지만 내 정말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꼽고 서러워서 원!"
"그것도 그렇군요."
취기가 풀풀 올라온 무라티의 이야기는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말도 마시오. 이 썩을 지방 내에선 모든 게 다 인맥이오, 인맥!!! 어이구~, 귀족? 영주? 그딴 건 하등 소용 없다오. 막강한 제후들을 뒷배로 둔 백작이나 어느 자작가의 구성원이 아니면 똑같이 무쓸모요! 이 지역에선 '내가 누구누구 안다'는 이 말 한 마디면 끝나니까. 왜? 어차피 그 놈들끼리도 뒷돈으로 다 엮여 있거든!"
"흠, 나는 이해했습니다."
"크~, 생각하니 또 열받네! 그러니까 몇 년 전에 말이오. 내가 이 고달픈 생활 청산하려고 남는 빈방에 민박 좀 하려 했는데... (하략)..."
초행길인 루카스의 입장에선 나름 유익하긴 했다. 이따금씩 맞장구만 쳐주면 그가 묻지도 않은 지역정보가 콸콸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다만 레퍼토리가 무한궤도로 반복되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루카스의 귀도 슬슬 피곤해졌다.
'디마우스의 입담이라면 상대할 수 있으려나?'
괜한 생각은 아니었다. 어느샌가 짐칸 너머로 슬그머니 도망친 나디아의 행동만으로도, 그의 회피욕구가 잘못되지 않았음이 증명 가능했다.
'그나저나 다음 마을에선 좋은 낙타를 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군.'
현재 그의 마차엔 노인이 빌려준 낙타가 말 대신에 연결되어 있었다. 기존의 말들은 탈진을 동반한 경련으로 죽은지 오래엿던 것이다.
이는 낙타를 사고팔 수 있다는 소도시까진 말들이 버티지 않을까란 루카스의 막연한 기대가 따가운 뙤약볕 아래 신기루처럼 증발해버린 결과라고 하겠다.
'거치는 마을마다 전부 거절 당할 줄이야. 덕분에 애꿎은 말들만 불쌍하게 개고생하다 죽었군.'
그렇게 세상과 등진 2필의 말고기는 알쿤다 자매를 위한 일용할 양식으로써 마차에 실렸고, 말가죽은 우연히 지나치던 상인 무라티의 몫으로 알차게 배분된 실정이었다.
"...그런데 아내분은 저대로 방치해도 괜찮은 거요?"
느닷없는 노인의 물음은, 아낌없이 내어주고 떠난 말들의 명복을 빌어주던 루카스의 상념을 툭 깨트렸다.
"아, 괜찮습니다."
"해가 질 시간이 됐긴 했지만서도..."
온몸에 모래주머니를 두른 채 마차 속도에 맞춰 모래벌판 위를 마라톤 중인 야스민의 지친 행색은, 뭇사람의 동정을 받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학대가 아닌 가벼운 훈련입니다. 게다가 본인이 원한 일입니다. 스스로가 포기를 안 합니다. 그러니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잉? 가벼운? 저게요?"
짐덩어리로 살기 싫다는 그녀의 의지로써 한 달 전부터 시작된 기초단련이었지만, 그 속사정 모르는 무라티의 입장에선 심보 고약한 혹사로 비춰질 뿐이었다.
"허허... 그래도 이 늙은이는 자칫 탈이라도 날까 걱정부터 앞선다오. 물도 귀한 지역에서 저리 땀을 비처럼 흘리는 건 뭐랄까... 조금 뭐시기하게 느껴진다오."
"하하, 그것도 괜찮습니다."
루카스는 외부의 마나를 응집시켜 주먹만한 얼음을 만들곤, 또 그것을 그릇에 옮겨 담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줬다.
"잉? ...오오오! 어쩐지 짐칸 물통에서 물이 마르지 않더라니!"
호들갑 떨던 무라티의 말투부터 급변했다. 가히 손바닥 뒤집기가 우스워 보일 정도의 태세전환이었다.
"아이쿠~, 마법사님이셨으면 진즉에 그렇다고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요~."
"?"
루카스가 마법사, 그것도 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계열임을 깨닫자마자 느글느글 굽어진 그의 허리는, 좀처럼 제자리로 되돌아올 줄을 몰랐다.
"이 늙은이의 눈이 하도 옹이구멍이라~ 높으신 귀인을 미처 못 알아뵀습니다. 아휴~, 죄송, 또 죄송합니다~."
식수가 항시 부족한 마을이 지역곳곳에 널려있는 아비세르툼. 때문에 이 지방에서 빙결 마법사의 가치는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도 그런 마법사는 본인의 성취 등급보다 한 단계 높은 대우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들이 마나로 생성한 얼음덩어리는 쉬이 녹지 않아 여러가지로 유용할 뿐더러, 유사시 갈증해결의 수단으로도 활용이 가능했고, 심지어 이들은 땅 밑의 수맥을 찾는 재주까지 뛰어나 마을의 우물확충에 핵심적인 인력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단순히 이 지방에서 숨만 쉬고 있어도 몸값이 치솟는 그런 존재였고, 화염계열 마법사가 혹한지대 사람들의 뜨거운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반대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하겠다.
"이것은 별 거 아닙니다. 내게 사과는 필요 없습니다."
"아이구야~, 우리 마법사님의 마음 씀씀이가 어쩜 이리도 너그러우신지요!"
"......"
그의 지나친 존대가 몹시 부담스러워진 루카스는, 헤트만에서 마법사의 가치란 시장바닥에서 발에 치이는 용병들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라며 설명까지 해줬다.
하지만 무라티로부터 되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아휴~, 그거야 대도시만 그렇습죠~. 마법을 배우는 사람도 연맹지부가 있는 대도시로 가고, 실력 있는 사람도 물자 풍족한 대도시에서 마법에 정진하는지라... 저희 마을과 같은 촌구석에선 귀족보다도 마법사님들이 더욱 희귀하답니다."
"그렇습니까?"
"예예, 말로도 다 못할 정도입니다. 저희 마을이 새 우물 파내려 마법사 연맹에 의뢰한 지도 벌써 반 년도 넘었습니다만, 지금도 깜깜 무소식입지요."
"흠..."
"꾸역꾸역 수배해봐도 사막에 맞닿다시피한 이딴 벽지 마을로 파견나오려는 지원자가 없는 겝니다. 연맹 내에서 체면유지를 위해 강제력을 발동시켜야 마지못해서 오는 터라 10개월은 예사인 형편입죠."
"...그 정도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기회를 포착한 무라티의 입에서 그의 진심이 술술 새어나왔다.
"에고고고~, 저희 마을 촌장이 제 불알친구이온대 요즘 매일밤 잠을 설치곤 한답니다. 기존의 우물은 하루가 멀다하고 버쩍버쩍 말라만 가는데, 자기 딴엔 이러다 비싼 계약금만 날리 게 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
”누가 뭐래도 그 놈의 베알이 베베 꼬일 수밖에 없지요! 하아~, 속상함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물도 양껏 못마시는 애들도 안 쓰럽지만, 하루 속히 깨끗한 물을 확보해야~ 만삭의 아낙네들이 마음을 놓을 터인데..."
"......"
처음엔 무라티가 또다시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구구절절하게 털어놓는구나 싶었으나, 이번만큼은 본론을 꺼내기 위한 철저한 빌드업이었다.
"저기... 그런 긴한 연유에서 한 번 드리는 부탁이긴 합니다만... 제 낙타의 대여비용은 말가죽 대신에... 헤헤, 어찌 좀 안 되겠습니까? 아! 차라리 아예 제 낙타를 마법사님께 바치겠습니다! 에헤헤헤..."
특별한 이유도 없이 거절하면 한순간 인간 쓰레기가 되는 밑밥깔기에 저격 당한 루카스는, 그것을 매몰차게 걷어치우지 못했다.
"흠... 알겠습니다."
"아이고오오~, 감사! 또 감사합니다요! 으어허허허허!"
작게 한숨 쉰 루카스는 이내 고삐를 흔들어 낙타의 머리방향을 약간 조정했다.
'과연, 상인은 상인이다. 늙은 생강이 엄청 맵군.'
그렇게 삽시간에 수정된 목적지는 무라티의 고향 '푸티즈(Putiz)' 마을이었다.
* * * * *
사람의 인연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앗?"
"어?"
이제 막 도착한 푸티즈 마을 어귀에서 루카스를 알아보고 손을 흔드는 사람이 있었다.
"아이고! 루카스 씨!"
"오, 제프리 선생!"
본래 그는 이곳에서 짐마차를 일주일은 족히 몰아야 당도할까말까한 거리에 있어야 하는 인물이었다.
"파하하하! 루카스 씨! 이거 너무 늦으신 거 아닙니까?"
"하하, 미안합니다. 안타깝게도 나는 몇 가지 일에 휘말렸었습니다."
"흐흐! 농담입니다, 농담! 하지만 제가 진짜 목이 빠져라 고대하고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하하핫! 아차, 인사 나누십시오. 이 녀석이 바로 제 친구 토비입니다."
"반갑습니다. 내 이름은 루카스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토비 스티덤입니다. 이 놈처럼 저도 학자 나부랭이 일을 하며 연구하는 샌님이죠, 아하하하!"
깡마른 체구에 둥근 안경을 낀 사내와 악수를 나눈 루카스는, 수줍은 낯빛이 역력한 뒤편의 알쿤다 자매를 그들에게 소개시켰다.
그런데 이 사이 한편에서 무라티와 따로 대화를 몇 마디 나눈 민머리 노인과 그 주변 몇몇의 안색이 급격하게 창백해졌다.
- 속닥속닥.
"뭐이? 저 분이?"
"헉? 이를 어째?!"
그들은 급기야 제프리와 토비 앞으로 쪼르르 몰려와 머리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두 분께 식량과 장비를 즉시 판매토록 하겠습니다!"
"...엥? 갑자기?"
토비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방금 전까지 '얼마를 얹어줘도 못 파니까 배째쇼!'라 했던 민머리 촌장의 극적인 행동변화가 도통 이해되질 않아서였다.
이에 대한 해명은 간곡하게 읊조린 무라티에 의해 자연히 풀어졌다.
"아이고~, 마법사님의 친우분들이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쇼! 외부인에게 물품을 팔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는 윗분들의 지령이 내려왔었다고 합니다요!"
"...허허, 마법사요?"
이번엔 제프리가 고개를 돌려 '이게 무슨 말이오?'라며 눈빛으로 물음을 던졌고, 이에 루카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해줬다.
"그렇게 됐습니다."
"......"
"그보다 지령? 그건 무슨 말입니까?"
답변은 제프리에게서 흘러나왔다.
"보나마나 뻔합니다. 약아빠진 요정족들이 뒤에서 수작부린 거겠죠."
"?"
"에휴, 여기서 떠들 이야기는 아닙니다. 에플키도 마을로 돌아가는 길에 구구절절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뭔가 루카스와 제프리 사이의 대화가 종료되는 낌새가 보이자, 무라티가 잽싸게 끼어들어 목청을 높였다.
"마법사님! 부디 저희 마을에 자비를 베풀어주십쇼!"
"......"
"낙타뿐 아니라 친우분들의 물품도 그냥 꽁으로 상납하겠습니다! 제발 수맥이라도 탐사해주십쇼!"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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