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하늘, 흐르는 빗물
* * * * *
해도 없고, 달도 없었다.
하늘은 그저 우중충한 구름만 잔뜩 머금고 있을 따름이었다.
땅 역시도 하늘을 닮아 있었다. 삽으로 움푹 떠낸 찰흙덩이처럼 마계와 완전히 단절된 대저택의 정원엔, 흔하고 흔했던 바람조차 자취를 감춰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보다 정확하게는 아무런 날씨의 변화도 없이 제니티아가 주문을 발동시키던 그 때 그 상태로써 모든 것이 고정된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너의... 뜻을... 이루...렴... 내... 아가...]
제니티아가 마지막 한 줌의 영체마저 소멸되기 직전에 남긴 유언. 지금도 이 말이 루카스의 귀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었으나, 막막함이 휘몰아치는 그의 가슴엔 영 닿지 못한 채였다.
먼지처럼 사라진 알베른에 대한 갑작스런 헤어짐조차 그의 마음속에서 다 퍼내지 못했건만, 연이어 들이닥친 제니티아와의 이별이란 이 나쁜 놈은 그저 야속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렇지만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그에겐 이토록 범람하는 상실감에 허우적 잠겨 있을 시간마저 허락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살아야만 한다, 타샤. 제발..."
수정체로 완벽히 변질된 어머니의 사체 밑에서 타샤를 끌어안은 루카스가 뜨겁게 애원했다. 그의 목소리엔 제니티아의 영멸로 촉발된 타샤의 소멸을 막을 대책이 없어 생긴 간절함이 진하게 녹아있었다.
"헤헤... 살다보니 이런 일도... 생기네요. 아흐흐... 포근해라."
인간 형태로 돌아와 있는 타샤가 퀭한 눈으로 힘겨운 미소와 농담을 곁들였다.
"진작 이렇게... 안길 걸... 그랬나...봐요. ...이히히..."
그러나 루카스는 오히려 이러한 타샤의 행동 때문에 혀끝에 스민 눈물의 짠맛만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타샤! 내가 꼭 방법을 찾을께! 그러니 그때까지 어떻게든 버텨줘!"
검은 피가 입술 사이로 주르륵 새어나올 만큼 루카스가 절규했으나, 타샤는 이미 본능적으로 마지막 시간이 임박했을 인지한 상태였다.
"죄송...해요... 도련님... 아무래도... 그건 힘들... 거.. 같아요. 에헤헤헤..."
타샤의 발가락 끝에서 시작된 석화가, 무릎 너머 허벅지 위로 번져 오르고 있었다. 이것은 마치 제니티아의 결정화 과정을 비슷하게 재현하는 것만 같았다.
"아아... 내, 내가! 마법을 열심히 공부했었더라면!"
"히히, 도련님. 영혼예속을... 너...무... 우습게... 생각하시는 거... 아니...에요?"
타샤는 점점 딱딱하게 굳어지던 손가락을 들어 루카스의 눈물을 쓰윽 닦아주며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건... 도련님 답지... 않아요. 연구실에... 틀어박힌... 도련님이라니... 후훕... 세상에나...! 상상조차... 힘들어요... 도련님은... 도련님만의... 색깔이 있으시잖아요."
때로는 쓴소리도 마다 않은 누이 같았고, 어떤 때는 칭얼거림 귀찮은 동생과 같았던 그녀.
루카스는 전생의 가족보다 더 인연을 깊이 나눈 그녀마저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잃고 싶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려놓기엔 이미 앞서 받은 이별의 충격이 너무 크기도 했다.
"뭔가 방법이 있을 꺼야, 타샤! 나는 어머니의 직계이니까 어쩌면 의외로 쉽게 이전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헤헤...마음만으로도... 감사해요... 도련님."
그것을 끝으로 타샤는 더 말하지 않았다. 아니, 말을 더듬더듬 이어갈 힘조차 밑바닥을 보이는 중이었다.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니 타샤도 제발!"
어느덧 그녀의 허리춤 위까지 진행된 석화를 보고 루카스가 소리쳤지만, 타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그저 작게 웃을 뿐이었다.
"...에헤헤헤."
루카스는 대답대신 먹쩍은 웃음으로써 대충 얼버무리는 타샤가 너무 미웠다. 그러나 차마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지 않으려는 그녀의 심정 또한 알기에 비난을 쏟아내지도 못하는 그였다.
"도련님... 저... 이만... 쉴래요."
"아, 안 돼! 안 돼!!!"
"안녕... 히... 헤헷...!"
이윽고 뱀은 돌이 되었다. 그리고 알베른이 그랬던 것과 같이 작디 작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안 돼! 안 된다! 이런 건 결코 용납할 수 없어! 절대로 안 된다!!!"
움켜쥐려고 아무리 노력한들 그의 주먹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가는 타샤의 흔적을 잡을 수 없었다.
"으아아아아...!!!"
그야말로 망연자실. 넋을 잃은 그는 이후로 애끓는 눈물만 하염없이 쏟았다.
* * * * *
며칠? 몇 주? 몇 달? 루카스는 시간의 흐름조차 잊은 망부석처럼 제니티아의 시신과도 같은 마력 수정체 앞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전생에서 '형제여, 언젠가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라며 주고 받던 죽음과는 아주 많이 다른, '영멸'이란 말뜻의 무게가 너무나 숨막힐 정도로 버거웠던 탓이이었다.
그의 이성은 당장 서고로 달려가 이곳에서 벗어날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며 주기적으로 강권하곤 했으나, 의욕마저 허탈해진 그의 몸뚱이는 한결같이 요지부동이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좀 더 나중에...'
이렇듯 만사 귀찮아진 그가 이런 생각으로 행동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루카스의 머리 위로 틈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 치지지지지직...
어떤 전조도 없이 하늘에 생성된 균열은 열린다기보단 강제로 벌려지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마치 외과의사가 환자의 환부를 칼로 길게 도려내는 것만 같았다.
- 꾸드드드드...
잠시후, 거인 형상의 무언가가 틈새 사이를 꾸역꾸역 비집고 힘겹게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전체적으론 제니티아의 본래 형상과 비슷했기에 그녀의 동족인 타락천사 정도로 여겨졌다. 더불어 제니티아보다 날개가 1쌍이 더 많다라는 사실에 근거하면, 보다 높은 품계의 존재라는 사실 또한 추측할 수 있었다.
단지 그렇게 멀쩡해 보이진 않았다는 게 약간의 흠이었다.
- 피이이... 쿠웅-!
타락천사가 추락했다. 그래도 썩 대단찮은 높이였기에 지면충돌로 인한 걱정은 딱히 들지 않았다.
'...적? ...아니, 아니지. 그렇진 않을 거 같군.'
이것은 상당히 피폐한 몰골의 타락천사가 힘겹게 일어나 앉는 모양새를 무심히 관찰한 루카스가 내린 결론이었다.
한편으론 자신을 처리하기 위해 보낸 베엘제불의 측근이 아닐까란 의심이 들기도 했으나, 제대로 확인한 이후에 행동방향을 결정해도 괜찮으리라 판단한 것이었다.
"끄으음... 그대가 루카스인가?"
"그렇소."
"흠흠, 나는 '아모스델(Amosdel)'. 위대하신 왕의 명을 받들어 이렇게 찾아왔다. 헌데... 보아하니, 지원하기엔 이미 늦은 것 같군."
"...뭐? 지원...? 늦어...?"
루카스는 순간 울컥했다. 만약 제니티아가 루치펠의 유산을 발동했던 당시에 적절한 도움이 이뤄졌다면, 소중한 세 사람을 한꺼번에 잃는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건 제니티아의 잔재인가? 젠장, 왕께서 아끼시는...... 정말로 좋은 아이였는데... 진짜 미안하다."
"......"
하지만 제니티아의 수정체를 보며 탄식하는 아모스델의 사과가 먼저 훅 들어오는 바람에, 루카스는 어이없게도 성낼 적기를 놓쳤다.
"대체 그쪽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래서 루카스는 지각사유를 묻는 것으로 대화방향을 틀었다. 혹여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이제 왔다고 한다면, 그는 아모스델이 루치펠의 종자건 나발이건 간에 정면으로 들이받아 죽여버릴 작정이었던 것이다.
물론 아모스델이 쌩쌩했다면 겨자씨 반톨만큼도 안 먹힐 불가능 자체였겠으나, 이미 심각한 부상은 입은 지금이라면 실제로도 어떻게든 가능할지 몰랐다.
"베엘제불의 급습이 있었다."
"......"
그러나 아모스텔은 나름의 중대한 이유를 전했다.
"서열 싸움에서 밀려난 네스모데가 결국 자신들의 부하들을 데리고 변절했다. 그놈이 내부에서 돕는 바람에 적들에게 속절없이 밀리다가... 급기야 우리의 왕께서도 베엘제불에게 치명상을 입으셨지. 그래도 무저갱으로 몸을 감추시기 전에 힘을 짜내어 나를 이곳으로 파견하셨다."
"그게 사실입니까?"
"오직 진실만을 전했음을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망할... 이건 뭐 화낼 수도 없고."
그간의 정황을 듣고 어쩔 수 없이 납득한 루카스는, 혼잣말처럼 투덜거리다가 아모스델에게 물었다.
"혹시 저를 다시 마계에 보내주실 수 있습니까?"
"그렇다. 물론 가능하다."
"그럼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럴 수 없다. 나는 너를 마계로 되돌려 보내기 위해 파견된 게 아니다."
할 수는 있지만 하진 않겠다란 황당한 소리를 듣게 된 루카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요?"
이에 아모스델이 그런 그를 향해 설명을 보탰다.
"듣거라. 위대하신 왕의 전언이니라."
"일단. 들어는. 보겠습니다."
"힘의 균형이 무너졌으니, 이젠 마계에서도 전면전이 발발하리라. 비록 베엘제불의 세력이 강력한 직계자 셋을 잃고 다소 약해지긴 했으나, 그 정도 전력은 대악마들에 의해 빠르게 복구될 것이다. 그러니 나와 계약으로 맺어진 직계자여. 나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그대여. 너는 이대로 마계로 향해선 안 된다. 나의 안배에 따라 움직일지어다."
루카스는 마계로 향하지 말라는 루치펠의 명령이 몹시 못마땅했다.
"전력이 비등하다면 더더욱 제가 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모스델은 예상과 딱 맞아 떨어진 루카스의 반응을 보며 칼같이 비웃었다.
"큭큭큭, 직계자여. 왕께 한 조각 권능을 하사받았다고 우쭐대지 마라."
"......"
"너는 제 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그런 하찮은 나부랭이에 불과함을 깨달아라. 하물며 네겐 군대는 커녕, 변변한 수하조차도 없지 않느냐?"
"부하 따윈... 필요 없습니다."
"푸흐흐흐흐, 그러나 고작 그정도로는 네가 베엘제불의 직계자를 절대 이기지 못할 것임을 깨우쳐라. 그 자의 힘은 지옥의 하급 악마에 견줄만큼 강하고 완숙하며, 그가 거느리는 엄청난 수의 군세 또한 용맹하기 짝이 없다. 지금 마계로 간다한들 너는 반드시 패하여 헛된 죽음만 맞이하게 될 뿐이다."
그가 콕 찍어 나열하는 객관적 진실들은 루카스의 뼈 마디마디를 순차적으로 강타했다.
"...크으음."
"너는 차원간의 틈새를 여는 데에 아주 많은 힘이 소요됨을 알고 있느냐? 미리 확실하게 말해두지만, 무의미한 영멸따위나 보자고, 내 귀중한 힘을 낭비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
사실적시로 연이어 두드려 맞던 루카스는 순간 짜증이 북받쳐 언성을 높였다.
"그러면 나는!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겁니까?!!!"
"나도 모른다."
"아니! 전언에 안배라고 했었으니, 나름대로 뭔가 준비된 게 있을 거 아니오!!!"
"흥! 주제를 알고 자중하라, 직계자여. 나는 그저 제왕의 심부름꾼에 불과하다. 너를 특정지점으로 전이시켜 보내는 것. 그것이 나의 일이다."
"...알겠습니다."
이곳에 도착하여 지금까지 안정을 취했던 아모스델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곤 허리춤에서 칼날이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검을 뽑아들며 루카스를 향해 물었다.
"떠날 준비가 됐느냐?"
이 말에 루카스의 시선이 제니티아의 수정체와 대저택을 흘끔 훑었다.
"후우......"
전생보다 추억이 풍부하게 서린 곳이었다. 그에게 한 가닥의 미련도 남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건 새빨간 거짓이었다.
"언제든지."
그러나 막상 루카스는 아모스델에게 고개를 단호히 끄덕였다. 그에겐 루치펠과의 계약과는 별개로 반드시 되갚아줘야할 원한이 있어서였다.
- 촤아아악-!
그의 단호한 의지를 읽은 아모스델의 검이 공간을 길게 찢었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아물어질세라, 그는 양팔로 차원의 상처를 힘껏 벌리며 외쳤다.
"직계자여! 내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 서둘러 진입해라!"
"그럼 안녕히."
"어서 가라! 지고하신 왕의 후계여!"
루카스는 그에게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건네곤 그 상처 너머로 뛰어들었다.
- 휘이이이이이......
그가 목표차원에 무사히 이동한 것을 확인한 아모스델은 힘을 풀어 상처가 원복되도록 놔뒀다. 그리곤 천천히 제니티아 형상의 마력 수정체 곁으로 옮겨가 그 앞에 섰다.
- 스윽, 스윽.
이후 아모스델은 제니티아의 머리부분을 사근사근 쓰다듬었는데, 그 다정다감함은 둘째치고 손짓이 너무나 익숙해보였다.
"...사내녀석이 당찬 너를 많이 닮았더구나."
새롭게 찢겨진 그의 입술상처에선 검은 핏물이 꾸역꾸역 새어나왔다.
"늦어서 미안하다... 내 동생아......"
그렇게 메마른 하늘 밑으로 두 번째 빗물이 주르륵하고 흘러내렸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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