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셔야 하는 독주 (1)
* * * * *
요 며칠 사이 타미아르 왕성 내부가 귀빈접대에 혈안이 되어 마구 들썩거렸다. 그 소란의 주요 원인은 헤트만 2인자로 꼽히는 샤하브가 사절로서 직접 행차한 일에 있었다.
당연하게도 뒤치닥거리와 허드렛일을 도맡던 이들은 아주 죽을 맛이었다.
“어후, 미치겠네! 시종장이 사사건건 걸고 넘어지고 난리도 아냐!”
“아이고~, 이러다 죽갔다~. 숨도 못 쉬겠어!”
그러나 그들은 꿈에서도 짐작 못했다. 이 정도는 우습게 여겨질 사태의 전조가 왕궁의 제3접객실 내부에서 유유히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흠... 디마우스야, 다시 말해봐라.”
“예, 폐하. 오드노아 측에서 정식으로 제게 초청장을 보내왔습니다. 외부 종족의 침공 관련하여 의견을 좀 나눌 게 있나 봅니다.”
실상은 루카스의 사전연락 이후 크게 식겁한 그가 루카스에게 청구하다시피 하여 이뤄진 결과였으나, 있는 그대로를 국왕에게 아뢸 순 없었다.
”하여 얼마간 자리를 비울까 합니다.”
“아니, 그거 말고.”
“...예?”
”그 이전에 말한 거.”
다행히 다른 쪽으로 관심이 지대한 그레이엄 국왕은 그의 거짓말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는 디마우스의 입장에선 잘 된 일이었으나, 그렇다고 대면보고가 무난하게 마무리됐다란 의미를 내포하진 않았다.
”야잇, 네 스승이자 8성 대마법사이신 아카반 총장이! 우리나라에 방문한다매! 그것도! 요즘 소문 무성한! 신탁자 일행이랑! 함께 말이다!”
또박또박 끊어말하는 국왕의 의도야 알지만, 진짜로 아는 체할 순 없었다.
“아! 예예, 그렇습니다. 헌데 이게 말이 방문이다 뿐이지, 그저 드레프타의 워프게이트를 이용하기 위해서 잠깐 스쳐지나는 수준에 불과...”
“흠흠, 디마우스. 아니, 우리나라의 대마법사님아.”
“?”
“너 지금 일부러 말귀 못 알아듣는 척 하는 거지?”
“......”
이어서 한 박자 쉬고 잇따른 그레이엄의 음성엔 서운한 기운이 잔뜩 서려 있었다.
“야. 내가 니 애제자를 양심없이 굴려먹은 일은 꽤 미안하긴 한데,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냐? 인간적으로 나한테 귀빈들과 안면 틀 기회는 줘야하는 거 아니냐, 응?”
“그, 그건 오해이십니다, 폐하! 아무렴 제가 운 한 번 안 띄워봤겠습니까? 다만 그쪽에서 몹시 부담스럽다며 완곡히 거절을 하셔ㅅ...“
디마우스의 변명은 안타깝게도 그레이엄 국왕의 진상을 유발해버렸다.
“아이구~, 그러셨구나~! 우리나라 대마법사님께오서 지금 나한테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계신 거였구나! 이~햐~, 내가 눈치도 없이 미처 몰랐었네?! 어이고~, 세상에나~, 내가 그걸 몰랐었어!”
“......”
”지금 이 순간부터 내가 제대로 각 잡고 삐져도 불평불만 갖지 마세요~. 잘 알아들으셨습니까, 우리 대마법사님?”
디마우스는 ‘엘로디의 성격은 외가쪽에서 무작위로 대물림된 가족내력이란 가설이 드디어 증명됐다!’란 표정으로 거하게 한숨을 뿜었다.
“푸후우우우우우......”
“어이고, 이게 뭘 잘했다고 한숨이야? 그리고 너 왜 대답을 안 하는데? 어어? 어쭈? 이것봐라? 너 입이 댓발 나왔다?”
“...폐하께서 하루나 이틀의 일정만으로도 만족하실 수 있다 하시오면, 제가 어떻게든 설득해보겠습니다.”
그의 항복선언에 국왕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활짝 만개했다.
“크크크! 오케이! 진즉에 그럴 것이지! 근데 디마우스야, 이거 하나는 확실히자. 무조건 2박 3일이다, 2박 3일! 솔직히 1박은 너무 정 없잖냐, 응? 내 말이 뭔 말인지 알지? 그럼 난 너만 믿는다?!”
“......”
”으하하핫, 난 이 면담 끝나자마자 왕성 전이마법진이랑 드레프타랑 연결하라고 명령 때릴 꺼야. 국왕으로서의 체면도 체면이지만, 거기 드레프타의 민심이 사실 아직도 밑바닥이잖냐! 아무래도 내가 친히 드레프타로 가기보단 귀빈들을 이리로 잠시 모셔오는 편이 옳지! 니 생각에도 그렇지?”
“...예, 국왕 폐하의 생각이 무조건 옳으십니다.”
홀로 신명나게 떠들던 국왕의 눈꼬리가 문득 치켜올랐다. 정말이지 다채로운 감성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었다.
“에이씨~, 가만 생각하니까 이거 괜히 열 받네?! 귀족파랑 장군 몇몇이 지랄하던 말던 이런 쓰임새를 미리 예상하고서 워프게이트를 왕성 인근에 만들었어야 했는데 말야!”
“고정하십시오, 폐하. 외부위협을 최소화하고 싶었던 장군들이 귀족파의 힘을 빌렸던 것뿐입니다. 부디 그들의 충심을 곡해하지 마시옵소서.”
”그래, 그래. 알았다~. 흠... 그나저나 이번 귀빈, 아니지. 국빈의 접대는 왕비한테 전담시켜야겠어. 이런 방면으론 우리 아내님을 따라갈 자가 없으니, 알아서 완벽하게 준비해주겠지.”
“...모두 폐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소신은 그저 따르겠사옵니다.”
디마우스는 아직 장본인들에겐 말도 꺼내지 못한 방문일정을 제멋대로 기획하는 그레이엄 국왕을 보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푸후우으으......”
“이긍~, 디마우스야~, 삐졌냐?”
“예, 솔직히 조금 삐졌습니다. 을의 입장인 제게, 절대 갑인 루카스 님을 강제로 설득하라는 게 말이나 됩니까?”
“흐흐, 미안하다. 그래도 내가 널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이젠 그만 알고 싶사옵니다.”
“...야.”
한편.
면담종료 후 전해진 신탁자의 깜짝 방문소식을 듣고 희번뜩한 왕비의 준동은, 많은 시종들로부터 피눈물을 강물처럼 뽑아내고야 말았다.
“힝... 바닥청소하고 있는데 대걸레가 지저분하다고 30분 내내 영혼까지 털렸어! 원래 쓰다보면 더러워지는 게 걸레 아냐? 흐끅...”
“말도 마! 오늘 중으로 기어이 별궁 구석구석을 살피시겠다더라! 지금 별궁의 손님용 침실 52개를 돌아다시니면서 손가락으로 창문틀을 훑고 계셔! 오죽하면 정원사들까지도 야외 의자에 광내러 나갔다니깐!”
”흐엉~, 그 깐깐하던 시종장이 순둥이로 보일 지경이야! 정말 못된 시어머니와는 비교도 안 돼!”
”아아, 우리의 시종장이 한낱 최약체였다니!”
”흑흑, 헤트만 사절 담당으로 빠진 애들이 오히려 우리를 불쌍한 눈으로 쳐다봐! 아오, 짜증나!”
시녀들의 몇 마디 불평불만도 잠시 뿐이었다.
- 이 구역 담당이 대체 누구더냐-!
그녀들은 왕비의 일갈이 메아리치는 장소로 냅다 달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나다 싶으면 뛰어라.’
이는 봉급이 절대 밀리지 않는 왕궁에 계속 붙어 있기 위한 노동자들의 철칙이었다.
* * * * *
타미아르의 왕비가 저녁식사조차 자진하여 거른 채 아랫사람들을 달달달 들볶고 있는 시각.
본성에서 수백 km 떨어진 드레프타에서도 누군가에게 온종일 시달리는 사내가 있었다.
“야야, 메토! 메토! 이거 봐! 어때? 어때? 어디 이상한데 없어?”
“아, 네네. 참 잘 어울리십니다. 엘로디 아가씨.”
“참나, 눈길도 안 주고 건성건성 대답하는 뽄새 보소? 정녕 죽고 잡냐?”
“......”
”야, 그러지 말고 잘 좀 봐봐. 나 진짜로 오랜만에 드레스 입는 거라서 완전 어색하단 말야. 어때? 이 정도면 루카스 님께서 마음에 들어하실까?”
본인의 애인도 아닌, 그냥 여자사람일 뿐인 엘로디의 패션쇼를 끊임없이 품평해야 하는 일은 정말이지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저기... 죄송하지만, 저 말고 딴 인간한테 부탁하시면 안 됩니까?”
“야, 너처럼 나한테 입바른 소리해대는 녀석이 흔한 줄 알아? 그리고 너만큼 루카스 님이랑 친한 사람이 여기 또 어딨어?”
“그렇다고 드레프타까지 쫓아오셔서 절 괴롭히실 건 또 뭡니까?”
“후훗, 내 입장에선 니가 따라붙은 거야! 안 그래도 우리 가르 남작님이 친절하게 연락주셔서 드레프타로 이동할 채비중에 있었다니깐?!”
그녀의 말을 가만 듣고 있던 메토가 발끈했다.
“뭐요? 아니! 이 제자 양반, 진짜 안 되겠네! 나름 기밀인 정보를 아무데나 막 팔아?”
“팍씨! 내가 아무데나야? 그리고 우리 가르 남작님은 무죄야! 무죄! 오늘 니가 마법진으로 드레프타에 간다는 소식은 우리 아빠가 귀띔해주신 거거든?!”
“아이고~, 참으로~ 인맥이 대~단~하십니다~. 그럴 꺼면 차라리 자택에서 이동하시지, 저희 주인님 마법진에 무단으로 난입하셨습니까? 그것도 옷가지를 바리바리 챙긴 것도 모자라, 고용인까지 둘 씩이나 동반해서 말입니다!”
메토는 디마우스의 명을 받들어 루카스 일행을 마중 나가려던 차에, 얼굴에 철판을 장착한 엘로디가 잽싸게 끼어든 아침 나절의 그 난장판을 쉽사리 잊지 못했다.
“야, 비용절감 몰라? 게다가 그 사이에 갑자기 장소가 변동될 수도 있는 거고! 그동안 내가 얼마나 헛물 캤는지 너도 뻔히 알면서 이러기야?”
“어휴, 내가 그냥 말을 말아야지!”
”됐고, 시간 없어! 내일 아침 일찍 드레프타에 도착하신댔잖아! 나중에 니가 날 형수님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데! 자꾸 정 없게 이럴래?!”
“크크크크크, 퍽이나 그러겠습니다!”
“이쒸! 너 말 다 했어?”
”그리고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물어나 봅시다. 제가 그 형님의 여자 취향을 어찌 압니까? 왜 그리 확신하시는데요?”
“짜샤, 같이 술 마시러 다니는 사이에 그걸 모른다고?”
“아~, 루카스 형님은 경우가 좀 다르니까요! 의심병도 심각한 병입니다요, 병!”
”뻥치시네!”
거친 용병들하고 일해본 경험이 풍부한 엘로디는 그들 술자리의 생태를 훤히 꿰고 있었다. 특히 ‘취기 오른 미혼 남성들의 화제에 여자가 빠질 리 없다.’란 보편지식 정도야 일찌감치 깨우친지 오래였다.
“야, 메토! 내가 생판 남도 아닌데, 좀 도와주면 어디 덧나냐?”
“아나~, 진짜 사람 못 믿으시네! 루카스 형님이랑 술판을 벌이면 저만 주로 신나게 주둥이 나불댑니다! 형님은 자신이 공용어가 서툴다고 거의 듣기만 하신다고요!”
“그래도 대충 짐작 가는 건 있을 꺼 아냐!”
“적어도 아가씨... 하아... 아닙니다.”
메토는 ‘적어도 엘로디 아가씨는 아닐 겁니다’하며 빼액 선언한 뒤에 이 상황을 넘기고 싶었으나, 그 말을 여과없이 내뱉었다간 그의 인생이 먼저 마무리될 게 분명하므로 꾹꾹 참았다.
“왜? 뭐? 뭐어?! 왜 말을 하다 말아? 어쭈? 니가 뭘 잘 했다고 눈깔을 막 부라려? 그런다고 내가 멍청하게 속을 거 같아? 남자들의 주사를 뻔히 다 아는데?”
“후우우우......”
함정에 빠진 그는 철부지 같은 엘로디에게 사소하게나마 보복을 가하기로 결심했다.
“좋습니다! 그깟 게 뭐라고!”
“잘 생각했어! 진작에 그럴 것이지!”
”으휴~. 암튼! 제가 봤을 적엔 그 형님의 취향은 딱 두 단어로 압축됩니다.”
“진짜? 뭔데? 뭔데에?”
“잘 들으십쇼.”
“응!”
엘로디의 눈동자가 언제 성냈었냐듯이 초롱초롱해졌다.
”요조숙녀. 그리고 현모양처.”
“앗... 아아...”
그가 아무런 근거 없이 던진 두 단어의 조합은 엘로디에게 생각보다 강력하게 작용했다. 그 두 가지 모두 그녀와 가장 동떨어진 개념이라는 것을 그녀 본인이 제일 잘 아는 까닭이었다.
“그, 그런... 그럴 수가...”
마법처럼 마비된 그녀의 상태를 보며 이때다 싶어진 메토는 흐나파스에서의 일화를 새삼 들춰가며 마무리 일격을 날렸다.
“쯧쯧, 포기하십쇼. 보나마나 엘로디 아가씨는 예선탈락이 확정적입니다. 제 경고를 무시하고 루카스 형님한테 첫인상을 강렬하게 심어줬을 때부터 말이죠.”
“앜?! 안돼! 어똑해! 어똑해!”
“아가씨, 혹시 자업자득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야! 방금 그거 거짓말이지! 니가 나한테 심술 부리려고 뻥친 거지!”
“거참, 말해줘도 화내시는 겁니까? 본인이 믿기 싫음 믿질 마시던가요. 이럴 거면 왜 물어보셨데?”
- 털썩...
“......나, 난 망했어!”
엘로디는 세상 다 잃은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 앉았다. 그녀의 상태는 문자 그대로 망연자실. 엘로디를 보필하는 하녀 2명이 호다닥 달려와 좌우에서 뭐라뭐라 하며 열심히 다독여줘도 그녀는 좀처럼 반응하지 않았다.
‘내 장난이 좀 심했나...?’
사태수습의 필요성을 새삼 인지한 메토가 뒤늦은 이실직고와 동시에 흠씬 두들겨 맞은 사건은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의 일이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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