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그 시각 그 사람들 (2)
"일단 너 먼저 계속 읊어봐. 거기 정황을 듣고 나도 말해줄 테니. 네가 언급한 전조라는 거에 비하면 크게 대단친 않으니까."
"예, 폐하."
- ...딸깍.
그렇게 따끈한 찻잔이 밋밋하게 식는 사이, 디마우스와 그레이엄 국왕 간의 정보교환이 세세하게 이뤄졌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래저래 네가 헤트만으로 가보긴 해야 하단 소리네?"
"예, 제 제자와 종자 한 명만 데리고서 급히 다녀올까 합니다."
"야, 그걸로 되겠어? 군대가 가도 부족할 판에?"
"외람되오나 그 둘만 있어도 근위대가 부럽지 않습니다."
"에잉, 내일 내가 당장... 흐음... 그건 아니다. 생각해보니 이건 헤트만 국에서 사절을 통해 공식요청한 사안도 아닌데 정규군을 붙여주기엔... 쩝, 모양새가 좀 그렇긴 하겠네."
"가급적 소수 인원이 움직여야 양국간의 외교문제가 야기되지 않을 겁니다."
"더불어 우리 타미아르의 공식입장이 아님을 명확히 하고자 개인휴가를 신청한 거다?"
"예, 정확하시옵니다. 여튼 저도 진행하던 일이 있어서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돌아올 터이니, 너무 심려 마시옵소서."
"하던 일?"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던 국왕이 이내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무릎을 탁 쳤다.
"아아, 마왕 추적한다던 거? 야, 그거 대충 2년은 넘지 않았냐? 아직까지 요정족들이랑 같이 조사중이었어?"
"비록 현재까지 별다른 성과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사건 당시에 느꼈던 마기로 미뤄봤을 적엔 결코 낮은 가능성이 아니었던지라... 이렇다저렇다할만한 결정적 증거가 나올 때까진 계속 진행해보려 합니다."
"음... 뭐... 그렇게 네가 다방면에서 요정족과의 끈을 유지해주면야 내 입장에선 바람직한 일이지. 진짜 고생이 많다."
"하하, 아닙니다. 그들의 사고방식이 제 좁은 식견을 일깨우는 경우가 더 많아서 대체로 즐겁게 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자~, 그럼~! 그 안건은 그렇다 치고!"
턱을 쓰다듬던 국왕의 심심한 눈빛이 돌연 예리하게 변질되어 디마우스를 향했다.
"그럼 국내에서 벌어진 요상한 사건들은 어찌해야 할까... 야, 잘난 네가 먼저 조언 좀 해봐."
"방금 말씀하신 대로라면 의심되는 수준에 불과하니, 으레 하시던 대로 궁정마법사들 중에 적당한 인물을 뽑아 조사단을 편성하시어..."
"아냐, 그놈들은 영 미더워."
"...그래도 그들은 실력이 굉장히 뛰어난..."
"나도 알아, 고것들의 파괴마법 어쩌구가 대단한 건. 그렇게 용을 써가며 가려 뽑고, 피같은 예산까지 매년 막대하게 들이붓고 있는데, 그게 그냥 무쓸모였으면 내가 진즉에 싹 갈아치웠겠지, 안 그러냐?"
"그것도 그렇... 아, 죄송합니다."
국왕은 무심결에 툭 튀어나온 디마우스의 본심을 듣곤 피식 웃었다.
"뭘 죄송할 것까지야. 내 성격 더러운 거야 세상 다 아는 기정사실 아니냐. 하여튼 내가 맘에 안 드는 건, 힘 있는 귀족들에게 빌붙어서 정치질하는 꼬라지야, 꼬라지! 지난번 강림의식 때만 해도 그래. 널 견제한답시고 네 제자의 주장이 과잉대응이네 어쩌네 하면서 게거품 물었잖냐?!"
"끊임없이 지식에 탐구해야 하는 동류의 마법사로써 그건 부정 못하겠습니다."
"그러니까 헤트만으로 갈 땐 이 놈은 여기 놔두고 가라."
"...예?"
디마우스는 그레이엄 국왕의 검지가 뜬금 없이 애제자를 향한 것에 몹시 놀랐다. 물론 당사자인 가르디엔은 두 말할 것도 없었다.
"내가 괜히 네 제자까지 데리고 입궁하라고 했겠냐? 난 애당초부터 국내사건 조사를 이 친구에 맡길 생각이었어."
역시 어딘가 찜찜했던 건 디마우스의 기분탓이 아니었다.
"저어... 제 제자를 무척 좋게 봐주셔서 거듭 감사드립니다만, 아직 가르디엔은 정식 궁정마법사도 아니거니와..."
"그래, 안다. 게다가 작위는 커녕 작위승계하고도 거리가 멀고도 아주 먼~, 하워드 고든 백작의 막내아들이지!"
"......"
"딴 놈들보다 훨씬 맘에 들어서 내가 따로 기억해두고 있었다."
한 마디로 침을 왕창 발라놨다는 소리였다.
"......예."
"원래는 다음 달 건국절 연회에서 남작 작위와 궁정마법사 직책을 수여하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상황이 상황인 만큼 까짓것 며칠 땡기지 뭐."
"폐, 폐하! 반대의 목소리가 클 텐데 그렇게까지 무리하실 필요는..."
"짜식, 별 걱정을 다한다. 야야, 임마. 내가 이 나라의 국왕이야, 내가 대빵이라고~! 이렇게 나라의 안전이 위협받는다 싶을 땐 과감히 밀어붙여도 돼! 그리 꼬우면 지들이 들고 일어나서 국왕 자리를 헤쳐먹던가!"
"폐, 폐하!"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야."
"......"
디마우스는 작정하고 빼든 국왕의 칼 아래 쓸려나갈 귀족들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졌다. 본인들의 이익을 위해선 똘똘 뭉칠 줄도 아는 그들이기에 물리적으로 목이 잘릴 가능성은 적었지만, 그래도 성난 호랑이 앞의 들개처럼 깨갱하고 항복하게 될 터였다.
"어쨌든 저 친구는 여기 남아서 내가 시키는 일 하면 되고... 아참, 정작 중요한 네 생각을 안 물었구나? 넌 내 결정에 불만 없지, 가르디엔아?"
있어도 있으면 안 될 일. 신분 격차상 계속 찌그러져 있기만 하던 가르디엔이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평소엔 감히 올려다가보기도 힘든 국왕께서 작위와 보직을 친히 하사하겠다는데, 본인의 계획이 다소 틀어졌다고 한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무, 무엇이든 명령하십시오!!!"
"좋아, 그럼 됐군. 그만 일어나 앉아."
"예, 폐하!"
이어서 그레이엄 국왕은 디마우스에게서 급작스레 귀중한 일손을 빼앗은 게 나름 미안했는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에이~, 디마우스야. 그런 표정 좀 짓지 마라~. 대신에 내가 실력 확실한 녀석으로 하나 붙여줄게!"
"......"
"오호라~, 그러고 보니~ 요근래 '헬퍼드(Halford)' 공작가에 족쇄 풀린 자유로운 영혼이 하나 있었지?! 마침 잘 됐어!"
디마우스는 마법과 무기술을 동시에 운용하는 전투방식으로 이름난 헬퍼드 가문이 언급되자마자 또렷하게 스치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소신이 아둔하여 그 자유로운 영혼이 누군지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폐하께선 헬퍼드 가의 장녀 '엘로디(Elodie)' 양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그래, 맞아. 내 귀여운 조카 엘로디지. 역시 우리나라의 자랑스런 대마법사님은 참으로 예리시단 말이야."
"......"
그녀와의 지난 인연을 떠올린 그가 눈을 질끈 감으며 말을 아끼는 가운데, 얼굴에 철판을 덧댄 국왕이 짐짓 끈적한 탄성을 지르며 딴소리를 했다.
"크으~, 진짜 그 아이가 아랫도리에 물건 하나 더 달고 세상에 태어났어도, 내 근위대를 통째로 맡겼을 그런 인재인데 말이야!"
그레이엄 국왕은 여성을 제멋대로 요직에 앉혔다간, 혈연관계건 뭐건 첩실이네 어쩌네 하는 구설수가 따라붙는 당금 사교계의 추잡한 행태를 매우 안타까워했다.
"...확실히 그녀의 기량은, 제 제자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습니다."
"큭, 뭐야? 벌써 한번 붙어봤나 보네?"
"재작년 가을 즈음 막무가내로 자택에 찾아와 제 제자와 대련을 강제했었더랬지요. 덕분에 어쩔 수 없이 안면을 트게 됐었습니다."
"흐흐, 잘 됐네. 가서 잘 꼬드겨봐."
"그래도 엄연히 헬퍼드 가의 기둥이온데..."
골치 아파진 디마우스가 우회적으로 거절하려 했으나, 국왕은 그의 거절을 사뿐히 거절해줬다.
"아~, 이런 이런! 아직 소식 못 들었나봐? 며칠 전에 헬퍼드가 내게 와서 작위승계는 늦둥이 아들내미에게 주기로 결정했다 하더라고! 지 아들놈의 무인 자질이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다며 자식자랑을 듬뿍하면서 말야."
"갑자기 하루아침에 차기 후계자가 바뀌다니... 허허, 지난 8년 동안 갖가지로 보좌하며 고생한 엘로디 양의 기분이 썩 좋지 않겠군요."
"아니, 뛸 듯이 기뻐했다던데?"
"...?"
"내가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이해는 가. 그 아인 지애비를 쏙 빼닮아서 뼛속까지 싸움꾼이거덩. 다만 가문의 차기 후계자란 짐덩어리가 어깨를 짓눌러서 마구 날뛰지 못했을 뿐이었지. 그 구속에서 벗어난 지금은 아주 날아가고픈 심정일걸?"
"......"
디마우스는 이 말을 통해 국왕이 처음부터 그녀를 염두에 뒀다는 진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러니까 네가 좀 데려가. 그 아이 콧구멍에 바람 좀 넣어줘! 혹시 또 알아? 네 짐작대로 티 안나게 감춰놓은 앙금이 엄청 남아있었을지?"
"하, 하지만... 사안이 급박하여 당장 내일 오후에 출발할 예정이온데... 그건 도무지 예의가..."
"에헤이~, 협력 보상으로 여행 중에 네가 마법 몇 가지 살펴봐 준다고 해. 그 집안 혈통들은 마법과 검술이라면 아주 환장하니까 금방 입질이 올 꺼야. 객관적으로도 좋은 경험과 수행의 기회잖냐, 응?"
"....."
"그리고 정~ 걱정되면 은근슬쩍 이렇게 전해. '시험가동을 제외하면 드레프타의 공간이동시설을 첫 번째로 이용하는 거다, 나라의 국왕도 아직 못 타본 거다~'라고 말야. 그럼 시종도 마다하고 곧장 장비 챙겨들 꺼다. 그건 내가 장담해! 서로 가겠다고 부녀지간에 칼부림이나 안 하면 다행일걸?"
"끙......"
디마우스와 국왕은 아무리 허물 없고 친분 두터운 사이라 해도, 결국엔 주종관계로써 땅땅하게 묶인 사이였다.
'후우... 간만에 된통 말린 건가?'
때문에 친한 친구이기 전에 충실한 신하인 그의 입장에선, 나라의 안녕을 두고 내린 주군의 결정에 항거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폐하의 뜻대로 이행하겠나이다."
"오케이~, 잠깐 그대로 앉아서 기다려봐. 바로 헬퍼드에게 보낼 친서 써줄 테니까."
"배려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얼마간 고급 양피지 위로 열심히 깃털 펜을 놀리던 그레이엄 국왕은, 잠시 손을 멈춘 후 고개를 들어 지나가듯이 말했다.
"흠흠, 디마우스야."
"예, 폐하."
"그으... 고맙다. 내 억지에 잘 어울려줘서."
"에이~, 아닙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거 원. 이젠 포기하고 익숙해질 때도 됐지요."
"야."
"아하하하!"
"아오, 웃지 마! 정 들어!"
"헛헛헛!"
"젠장, 내가 오늘 지은 죄가 있어서 차마 때리진 못하겠고. 쯧!"
이후 오래 지나지 않아 인장으로 마무리된 그레이엄 국왕의 친서가 디마우스의 손에 들려졌다.
* * * * *
한편, 헤트만 국경으로 이어진 도로에서 가까운 어느 호숫가에선 폴라와 페이가 언뜻 봐선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나무밑동을 살피고 있었다.
아직 새벽이슬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간이라 그런지, 스치는 바람이 살짝 쌀쌀했다.
정령들의 친절한 안내에 이끌려온 폴라가 손바닥보다 작은 마법진을 찾고선 그녀의 동기를 불렀다.
"여기야, 페이."
그것은 요정족 어린 아이들이라면 교육의 일환으로 한번쯤 익혀보았을 대지와 바람의 합성마법이었다.
"그, 그럴 리 없어!"
하지만 흥미로워하는 폴라와 달리, 페이는 그 마법진을 보자마자 오만상을 찌푸렸다.
"네 정령들이 오해한 게 분명해!"
"호호호, 레이첼 양이 뭐라고 적었나 어디 한번 볼까?"
폴라가 검지 끝에 마나를 싣고 마법진을 건드리자, 한 줄기 미약한 바람이 일어나 땅에 글자를 새겼다.
{ 현재 이동경로 : 흐나파스 / 대상 목적지 : 아비세르툼(추정값, 변동가능). - 타미아르력 000년 00월 00일. 작성자 : 시르니아 레이첼 스톤.}
"푸핫, 너무 웃기다! 와~, 이거 보이니?! 네가 아니라고 박박 우길까봐 풀네임까지 적어놓은 거?!"
"이런 망할!!!"
"호호, 그러게 왜 도발에 넘어가서 경솔하게 내기를 하고 그랬니~?"
"그야 당연히 내가! ...이길 줄 알았으니까..."
"힛, 나야 덕분에 좋은 구경하겠다야. 자존심 막강한 네가 무릎 꿇고 사죄하는 모습을 보는 게 도대체 얼마만인지! 푸흐흐흡!"
그렇게 말하는 폴라가 이렇게 배를 움켜잡고 깔깔 웃는 모습 또한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크아아아아! 빌어먹으으으을!!! 썩을 인간 자식! 우리 추적을 눈치 챘으면! 다른 마을로! 잽싸게! 튈 것이지!!! 생긴 거랑 안 어울리게 잔머리를 굴리고 ㅈ랄이야, ㅈ랄이!"
페이가 불쌍한 어느 작은 바위를 걷어차며 본인의 경솔함이 빛은 결과에 길길이 날뛰는 광경은, 제3자의 입장에선 무척이나 쏠쏠한 재미를 느끼게 했다.
"푸흐흐~, 그야 모르지. 다른 볼 일이 있었을지도? 어쨌거나 감정 다 추스르면 말해. 난 그동안 레이첼 양에게 걸어놓은 추적마법으로 예상경로 좀 추려볼께. ...응? 어라? 근데 레이첼 양의 이동속도가 왜 이렇게 빠르지? 말이라도 탔나? 뭐... 중간에 합류가 정 힘들 거 같으면, 아예 목적지로 직행해서 기다리는 쪽으로 하자."
"으아아아아아아아!!!"
이렇듯 페이가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고 아지랑이처럼 흐물흐물 절규하는 이 시각. 이들과 7일 거리에 있는 레이첼은 루카스를 뒤따라 다니기에 여념이 없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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