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퍼드 가의 최종병기 (1)
* * * * *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는 태양.
잔잔함도 모자라 평온하기까지 한 물결.
그리고 수면위를 시원하게 쭉쭉 뻗어나가는 범선.
이렇듯 무난하기 짝이 없는 지난 사흘동안의 바닷길은, 예덴 섬을 경유했던 장거리 여행객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만드는데에도 크게 일조했다.
많은 사람들은 매우 안정적인 갑판 위 이곳저곳으로 흩여져 선선한 바람이 피부결을 매끄러이 스치는 감촉을 양껏 즐기곤 했다.
물론 뱃멀미에 고통받는 인원들은 예외였다. 갑판 위의 한 곳을 점령중인 개러스와 선실 안에서 문밖으로 나올 줄 모르는 야스민처럼 말이다.
"웩... 우우욱..."
루카스는 꾸덕꾸덕한 귤 말랭이가 담긴 작은 가죽 주머니 세 개 중 하나를 개러스에게 건넸다.
"이거 받으십시오. 도움된다고 했습니다."
"가, 감사... 우욱!"
거기서 두어 번 더 헛구역질을 한 개러스는, 달달하고 신 맛이 매우 강한 간식으로 빈 속을 억지로 채우며 화답했다.
"하아... 하아... 제가 원래 뱃멀미하는 사람이 아닌데, 갑자기 긴장이 한 번에 확 풀려서 이러는가 봅니다. 곧 괜찮아지겠지요. 에헤헤헤..."
“흠, 그러면 차라리...”
“예?”
이참에 개러스를 제니티아 영역으로 한 번 넣어볼까 했던 루카스가 아차하며 생각을 즉시 돌이켰다. 그런 위험천만한 실험은 응당 곤충과 가축 순으로 먼저 진행해야 옳기 때문이었다.
"아니, 별거 아닙니다. 신경쓰지 마십시오. 그나저나 곤살로 부부는 염려 안 해도 됩니다. 내가 많은 돈을 지불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반드시 보호한다고 약속했습니다."
"헤헤, 그 지점장이란 분의 열성적인 태도만 봐도 확실히 안심이 되더군요. 연신 뾰로퉁하던 저희 누이도 큼직한 오팔을 하나 선물 받더니만 얼굴색이 확 달ㄹ...... 웁?! 우웨에에엑!"
루카스는 말을 하다 말고 물고기 먹이를 바다에 흩뿌리는 개러스를 안타까운 눈으로 얼마간 바라본 후, 알쿤다 자매가 있는 객실로 조용히 내려왔다.
"힘들겠지만 이거 먹어라. 친절한 선장이 이런 게 많이 도움된다고 줬다."
"...감사합니다. 여, 여보님."
“우리만 있을 땐 불편한 호칭은 생략해도 된다. 그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때만 신경 써라.”
“네에...”
심한 몸살기운까지 만연한 야스민의 음색이 다 죽어갔다. 그나마 구토증상까지 동반되진 않아 다행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아삐이~, 나능! 나눈! 나눈!"
"흠..."
루카스는 혀 짧은 소리로 제몫을 요구하며 살갑게 안겨오는 나디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예지능력 때문일까? 아니면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애라서? 뭐... 어느 쪽이든 별 상관 없나?'
루카스는 다 큰 어른들도 골골대는 스트레스를 똑같이 겪었음에도, 매일 같이 꿋꿋하기 짝이 없는 나디아를 무릎 위로 앉히며 남은 간식 주머니를 그녀에게 넘겼다.
- 암냠냠냠. 옴뇸뇸뇸.
"네 입맛에 맞나?"
"녜! 큐울 너므 죠아효!"
"훗..."
그는 밤톨만한 강아지처럼 우물거리는 나디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제니타아와의 지난 추억을 잠시 회상했다.
'자아가 봉인된 시기의 나도 어머니께 이렇게 치덕대곤 했더랬지.'
눈치 없이 분위기 탄 습기들이 루카스의 눈가에 은근슬쩍 고이려 하는데, 이를 본 나디아가 귤 말랭이 한 개를 그의 입가 부근에 쑥 내밀었다.
"아삐도! 아~."
"...어, 그래. 고맙다."
"히이~."
"......"
아주 단순한 몸짓이었지만 루카스는 순간적으로 그것에 스며있는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요 며칠 간의 행동들을 돌이켜 볼수록 강한 확신이 섰다.
'틀림 없다. 생각없는 어린애가 아니라, 오히려 일찍 철이 든 아이다.'
정신적 핍박과 물질적 가난에 적나라하게 노출된 채로 자란 나디아는 주변인의 감정에 무척 민감했다. 또한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적대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어떤 상황에서든 본인의 표정과 행동을 해맑게 유지하려 갖은 노력을 아까지 않았다.
여기서 슬픈 사실은 이것이 약아빠진 성격에서 비롯된 게 아닌, 고된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체득된 습관이자 생존본능이란 점이었다.
'후우... 그래. 비뚤게 엇나가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이 아이는 칭찬 받아 마땅하다.'
아직 루카스는 이 알쿤다 자매의 과거사에 대해 전부 다 알진 못했다. 그러나 이렇게 드문드문 발견되는 단편적 진실만으로도 그 내면의 따뜻한 면이 뭉클 동하곤 했다.
'에... 선원이 지금까지 온 만큼만 더 가면 도착이라고 말했으니까...'
그 말인즉, 루카스가 의자에 앉을 적마다 찰떡같이 엉겨붙어서 떨어질 줄 모르는 나디아의 응석부림이 최소 4일 이상은 지속될 거란 의미였다.
'크흠! 뭐 가끔은 이런 식으로 느긋한 것도 나쁘지 않군.'
흡족한 표정의 나디아를 다독이던 그의 손길이 한층 더 다정해졌다. 하지만 세상 일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심술을 부려왔다.
- 땡. 땡. 땡. 땡. 땡. 땡. 땡. 땡.
급하게 때려지는 경종의 이유는, 곧 뒤이어진 경계병의 외침에 의해 낱낱이 밝혀졌다.
"비상! 비사앙!!! 전방에 캐럭(Carrack)급 5척! 소속 미상! 빠르게 접근중!"
* * * * *
난데 없이 평온을 빼앗긴 루카스. 그는 급하게 양해 구해온 어느 선원의 뒤를 따라 갑판으로 이동해야 했다.
'쯧, 이거 귀찮게 됐군.'
본디 그는 여느 승객들과 마찬가지로 선실 내부로 비상대피하여 안전하게 머물렀어야 했다. 그 역시도 정당한 삯을 지불한 고객이기 때문이었다.
"모셔왔습니다, '란디프(Randeep)' 선장님!"
"번거롭게 해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바리온 마법사님."
그랬다. 예상치 못한 나비효과였다. 위장신분으로써 안전과 편의를 도모해보자는 개러스의 제안을 수락했던 그 결과가, 이 응급상황과 맞물려 귀찮은 상황으로 열매 맺은 것이었다.
"흠흠, 나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내 마법성취는 낮습니다. 큰 도움이 안 될 겁니다, 이전에 말 했듯이."
루카스는 정직하게 본인의 실력을 알렸다. 물론 '마계 기준'이란 꼬리표는 확실히 제거하고서 말이다.
한편, 두꺼운 콧수염이 멋드러진 란디프 선장은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으로 껄껄 웃었다. 루카스의 답변을 입바른 겸양으로 이해한 것 같았다.
"하하하, 겸손이 지나치십니다! 과연 개러스 씨께서 강력추천하신 분 답군요! 허구헌날 잘난 체로 일관하는 별종들보다 훨씬 믿음이 갑니다! 으하하하!"
"역시 의미 전달에 문제가 있ㅇ......"
"아하! 따님과 아내분의 안전 때문이셨군요!"
급박한 전시상황을 맞이한 선장은 루카스의 의중을 신속히 재해석해냈다.
"좋습니다! 마법사님께서 전투참여를 약속만 해주신다면, 그분들을 이 배에서 가장 튼튼한 귀빈실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항해를 마칠 때까지, 추가요금 없이 말입니다. 물론 이 정도론 마법사님의 성에 안 차겠지만, 이게 당장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전부임을 부디 고려해주십쇼!"
'쯧, 여기서 거절하면 단단히 삐질 모양새로군.'
루카스는 남은 항해일정을 고려해서라도 의뢰를 수락해야 했다.
"......알겠습니다."
"오오! 협력에 감사드립니다, 바리온 마법사님! 어이, 3항사! 네가 직접 가서 마법사님의 일행분들을 잘 챙겨드려!"
"옙, 선장님!"
루카스는 명령을 받고선 또 한 번 객실로 달음질하는 선원을 잠깐 바라보다가 선장에게 현 상황을 물었다.
"상대와의 전력차가 많이 큽니까?"
"예, 솔직히 굉장히 심각합니다. 무려 다섯 척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
선장도 루카스의 의문에 공감한다는 듯이 말했다.
”저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입니다. 전략상 한 번에 2척씩 뭉쳐 다니는 해적까진 그러려니 하겠는데, 이 항로 부근에서 해적이 5척씩이나 운용? 전 그런 해적단에 대한 이야기를 여태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렇군요."
"게다가 아직 라구루 연합의 영역 내입니다! 그러니 신생 해적이라고 보기도 어렵지요."
"음..."
란디프 선장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며칠 전 라구루 연합 주전력의 대부분이 루카스에 의해 대거 소실됐단 사실은 아직 구석구석 퍼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뒷수습을 쿠마르에게 마무리를 맡기고, 정오가 되기 전 이넨카행 배편에 오른 루카스 역시도 쌩뚱맞은 해적선의 등장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저들은 혹시 해적이 아니라, 해군 소속 아닙니까?"
"아,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군함은 일반 상선과 구조도 다르거니와, 망원경으로 확인해보니 각 선원들의 무기와 복장도 가지각색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저 놈들은 저희의 경고 신호도 무시한 채 접근하고 있습니다. 작정하고 털러오는 중이라고 판단함이 옳습니다."
"흠, 이해했습니다."
"현재 최대 속도를 유지하고 있긴 한데, 빠르면 2시간 안에 사정권 내로 따라잡힐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아무래도 저희가 고용한 마법사님 한 분만으론 감당이 안 된다고 판단ㅎ... 아아, 마침 오셨군요."
란디프 선장은 헐레벌떡 뛰어온, 홀쭉한 장신 체형의 중년 남성을 루카스에게 소개시켰다.
"서로 인사 나누십시오. 이 분은 저희와 전담계약을 맺으신 마법사이십니다."
"반갑습니다. '샤뤼달(Sharudal)'이라 합니다."
자신을 샤뤼달이라 소개한 남성은 챙이 넓고 끝부분이 살짝 올라간 페도라(fedora)를 벗으며 악수를 청했는데, 그가 쫙 빼입은 롱코트의 어깨부분에 새겨진 문양은 루카스도 익히 아는 세력의 것이었다.
"나도 반갑습니다. 바리온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헤트만 마법사 연맹 소속입니까?"
"하하, 이 표식을 단번에 알아보시는군요. 예, 맞습니다. 인디나 지부 소속, 3성 마법사입니다. 부끄럽게도 연구비가 똑 떨어져서 파견형태로 부업중이랄까요? 핫핫핫!”
“그렇군요.”
”그... 실례지만 바리온 님께서는 소속과 등급이 어떻게 되시는지...?"
"나는 먼 곳에서 왔습니다. 수행을 겸한 순례입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말하는 등급이 없습니다."
"아... 예, 그러시군요."
어정쩡한 답변에 샤뤼달의 눈초리가 경계태세를 취했다. 그러자 란디프가 중간에 끼어들어 부가설명을 했다.
“걱정 마십쇼, 샤뤼달 님. 이 분은 항만조합 소속 개러스 씨께서 보증하셨습니다.”
"아아, 개러스 씨가 보증한 사람이라면 믿을만 하죠. 아! 그나저나 곤살로 씨 가게에서 파는 레드와인은 여전히 품절행진이던가요?"
"음? 거기서 와인도 팔았습니까?"
루카스의 어리둥절함을 본 샤뤼달이 허리 숙여 사과했다.
"이크, 죄송합니다! 제가 의심병이 심한 지라 다짜고짜 떠 봤습니다."
"...개러스도 이 배에 올라 탔습니다. 당신이 직접 가서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에고, 거듭 사과드립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저흴 추격해오는 해적놈들의 끄나풀인지 급히 확인해야 했습니다.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길."
"알겠습니다. 당신을 용서하고, 나는 더 화내지 않겠습니다."
"하하하, 선장님. 그럼 바로 대책회의를 진행하실까요?"
그렇게 루카스와 샤뤼달, 그리고 선장과 그 휘하의 중역까지 포함한 8명의 회의가 짧게 이어졌다. 사실 표면적인 모양새만 회의일 뿐, 실상은 각자 수집한 정보의 공유시간이었다.
"...그러니까 쉽게 요약하자면, 각 범선이 선원수나 화포 등이 우리와 비등한 수준. 결국 5배의 전력이란 소리가... 아니지, 저들 배엔 승객도 없이 전원 전투원일 테니 실제 격차는 조금 더 크겠군요."
샤뤼달의 냉정한 종합평가는 회의 참석자들의 숨소리마저 얼려버렸다.
"흠흠.”
그는 이러다 싸우기도 전에 자살자들이 속출하겠다란 경각심이 들기에 즉각 수습에 나섰다.
”하하, 이건 어디까지나 제 개인의 생각일뿐. 바리온 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그가 주위 환기를 위해 루카스에게 물음을 던졌으나, 잠시후 되돌아온 대답은 더 암울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하하, 그런가요?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서 동의가 어려우신 겁니까?"
"전력차이는 '조금 더'가 아니라 '압도적으로' 큽니다."
"엥?"
"우리에겐 숙련된 싸움꾼이 없지만, 저들에겐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
"전투사를 일컫습니다. 3급 2명, 4급 6명, 5급 2명입니다. 이 대륙에서 사용하는 분류기준으론 그렇습니다."
“?!!!”
그 누구보다도 먼저 샤뤼달이 언성 높였다.
"허, 헛소리! 말도 안 됩니다! 그런 수준의 실력자들이 이딴 곳에 왜 옵니까?!"
"당신이 내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는대로 대답했습니다."
그의 상기된 얼굴은 루카스의 무표정과 무척 대조적이었다.
"야이, 엉터리 양반아! 잘 모르면 차라리 솔직하게 모르겠다고 말해! 그럼 중간이라도 가니까!”
“난 사실을 말했습니다만?”
”아니! 그런 전투사들이 무슨 새벽마다 시장바닥에서 자기를 뽑아달라고 외치는 그런 노역꾼들인 줄 아는 거야, 뭐야?!"
귀에 꽂히는 소리가 곱지 않으니, 루카스의 입에서 나가는 말도 곱지 않아졌다.
"난 그렇게 말한 적 없다."
"아놔, 그만한 능력자들이 이 촌구석에서 해적질을 왜 해?! 당췌 말을 해도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는 소릴 지껄어야지! 이 망할 놈의 사기꾼아!"
"믿음은 네 자유다. 그런데 너는 입조심해라. 모욕은 딱 한 번만 용서해준다."
"어디서 감히! 마법사 사칭꾼 따위가!"
이를 보다못한 란디프가 험악한 기류 사이에 끼어들어 중재자를 자청했다.
"하하하, 두 분 다 진정, 진정하십시오! 이 상황에 우리끼리 싸워서야 되겠습니까? 솔직히 바리온 님의 주장은 저희에게도 황당하기 그지 없습니다만 조심해서 나쁠 것도 없지요. 그러니 샤뤼달 님의 가벼운 견제공격으로 확인해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겨우 화포 한 방 날리겠다며 무턱대고 선체를 돌렸다간 적들에게 따라잡을 기회를 주는 꼴이니 말입니다."
"그거 좋습니다, 기꺼이 증명해드리죠!"
사칭꾼에 대한 분노를 감출 생각이 전혀 없는 샤뤼달은 씩씩 거리며 배의 후미로 이동했고, 루카스를 비롯한 회의인원 모두가 그 뒤를 따랐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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