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벌적 윤회 (2)
“아! 맞다! 금방 알아봐 드릴께요!”
레이첼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깜박했었다는 표정 덕에 루카스의 수사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음침한 노림수가 그녀의 이면에 존재했더라면 에드와 샤비의 최근 동향에 무지할 리가 없으니 말이다.
하여 루카스는 의심과 경계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아니다. 안 그래도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지금요?”
“아마도? 나디아의 진찰이 끝나면 바로 향할 예정이다.”
“흠흠!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무척 바쁘지만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특별히요!”
“아니, 괜찮다. 폴라가 상세약도를 친절히 그려주고 갔다. 참석해야 되는 회의가 많아 미안하다면서 내게 사과도 했다. 그게 왜 미안한지는 모르겠지만.”
“...칫, 도무지 방심할 수가 없네.”
“음? 뭐가 말이지?”
“아, 아니에요. 혼잣말이었어요.”
레이첼은 불쌍하게 이곳 저곳으로 끌려 다니고 있을 폴라를 경계하기보다, 지금 당면한 문제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래도 제대로 된 안내역이 있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글쎄다. 딱히...”
“선물도 사셔야 하잖아요!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설마 빈손으로 가시려고요? 참고로 이 도시의 유명한 가게란 가게는 제가 다 꿰고 있답니다!”
“오해했군. 난 빈손 아니다. 예쁜 물건을 몇 개 챙겨뒀다. 자, 이거 봐라. 이거는 바네사와 샤비. 또 이거는 에드 꺼다.”
“......”
레이첼은 루카스가 꺼내 보인 장신구들, 즉 앙증맞은 크기의 옷핀 2개와 유려한 목걸이 1개가 지닌 가치를 대번에 알아봤다.
‘이런 건 또 어디서 구했대?!’
한때 오마르 가넴의 수집품이자, 헤트만에서 내로라하는 최고 장인들의 손을 거쳐 태어난 세공품들은, 오드노아들조차 무시 못할 정도로 우아함과 화려함의 균형이 잘 잡힌 명품 중의 명품이었던 것이다.
“...제, 제법 괜찮... 아주 최고급품은 아니지만 뭐... 나쁘진 않네요.”
“후훗, 열심히 골랐다. 각자에게 어울릴만한 걸로.”
목을 꼿꼿하게 세운 루카스가 레이첼 앞에서 본인의 안목을 뻐기는 사이, 베스퍼가 문이 활짝 열려 있던 대기실 안쪽으로 들어섰다.
“말씀은 다 나누셨나요?”
“오, 벌써 다 됐습니까?”
“네, 간단한 검사일 뿐이래요. 다행히 수술 후유증이나 이상징후는 없다고 하네요. 다음 검진은 7일 후로 잡혔어요.”
“나 대신에 수고 많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까?”
“네, 루카스 씨의 지인들을 만나러 간다고 잔뜩 기대하는 눈치던데요?”
”음... 그대가 불편하지 않다면, 당신도 나와 동행해줄 수 있겠습니까?”
“어머, 저도 같이요?”
”물론입니다. 나는 친구들에게 당신 또한 소개시키고 싶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부담된다면 거절해도 됩니다.”
“저야 영광이죠!”
이전엔 없었던 베스퍼의 귀걸이 및 목걸이가 그녀의 환한 미소만큼이나 반짝 빛났는데, 레이첼은 그것들의 세공양식이 좀 전에 다른 장신구들과 매우 흡사함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이어서 루카스가 ‘좋은 하루가 되길 바란다’란 인사만 남긴 채 훌훌 떠나간 직후 접객실에 홀로 남겨진 레이첼은 작은 소리로 툴툴댔다.
“베스퍼 언니는 좋겠다. 예쁜 선물도 받궁...”
값비싼 보석도 보석이지만, 루카스가 베스퍼를 자기사람으로 온전히 받아들였다는 사실 자체가 더 가슴 아렸다.
“힝, 부러워...”
* * * * *
포리스트의 거주지 찾기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못 찾으면 바보라 생각될 정도로 수월하기 짝이 없었다.
“아하! 그 연금술사 포리스트 씨요?”
“그럼요! 알다마다요! 이 시대 최고의 연금술사 아닙니까!”
“우오호홋?! 으아닛?! 포리스트 선생님의 지인이시라 굽쇼?! 아이고~, 세상에나~ 정말 반갑습니다!”
그의 명성은 단순히 오드노아의 중심영역 안에 사는 소수 종족이라서 기억되는 수준을 가뿐히 상회하고 있었다.
특히, 겉보기 등급이 인간기준으로 40대나 50대쯤인 오드노아 중장년층의 반응은 뜨겁다 못해 광적이었다. 심지어 어떤 이는 포리스트의 이름을 역사서에 대문짝만하게 새겨 넣어야 한다는 둥의 칭송을 하기도 했다.
“어이~! 마눌님아! 나 잠깐 자리 좀 비울께!”
“아니, 이 양반이?! 가게가 한창 바쁜데 어딜 농땡이 부려요!”
“어이고~, 방금 못 들었어? 이분들이 포리스트 선생님의 친구분들이라고 하시잖아! 그러면 응당 내가 안내해드려야지!”
“어머, 그래요?!”
”커험, 거 이왕 들린 김에 ‘비약’도 한두 묶음 사오고 말이야.”
“엄머머멋... 알았어용~. 조심히 다녀오소셔~, 서방니임~! 오홍홍홍~!”
선뜻 이해하기 힘든 몇몇 기현상들은 포리스트가 판매중인 청록색 시약을 한 병 보여주자마자 곧바로 납득할 수 있었다.
“지친 남성들을 위한 자양강장... 흠흠.”
“하하하, 그게 바로 제 인기의 비결 ‘다우린:D’입니다.”
미성년자들이 귀담아 듣기엔 심히 부적절한 내용이었으므로, 바네사가 자진하여 나이 어린 철부지들을 쓸어 모았다.
“자아~, 우리들은 아이스크림 먹으러 나갈까요~?”
“”“와아아아-!”””
애드와 샤비는 환호성을 터트린 반면, 나디아를 주축으로 한 무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바네사 언니, 아이스크림이 뭐예요?”
“어머, 나디아는 아직 못 먹어봤니? 루루 삼촌께서 그동안 한 번도 안 사주셨어?”
“네.”
”하긴... 보통 다른 나라에선 마법사랑 친해야지만 맛볼 수 있는 귀한 간식이긴 하니까.”
“정말요?!”
”암튼 간단히 설명하자면 아이스크림은 달콤한 과일음료를 차갑게 얼린 과자 같은 거란다. 게다가 이곳에선 누구라도 쉽게 사먹을 수 있을 만큼 가격도 저렴해. 종류도 아주아주 다양하고 말이야~.”
“우와와왕! 진짜요?!”
”어때? 맛있겠지? 기대되지?”
“네에-!!!”
그렇게 바네사의 유혹에 홀린 군중이 벌떼처럼 몰려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남겨진 루카스와 베스퍼는 재개된 포리스트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하하핫, 이건 엄밀히 따지자면 실패작이었습니다.“
“실패작?”
”의도치 않은 실패이긴 한데... 본의 아니게 요정족의 출산율과 부부관계 개선에 큰 이바지를 하게 됐더랬지요. 아하하하...”
그 본인 스스로의 생각에도 상당히 웃픈 추억이었는지, 웃음소리에 씁쓸함이 살포시 묻어있었다.
“이미 전해 들어서 아실런진 모르겠는데, 제가 이 요정족 도시로 이주한 이래로 주력하고 있는 연구주제는 바로 ‘근력강화제’입니다. 기존의 것을 개선하고자 미친 듯이 실험을 거듭하고 있습지요.”
오드노아 영역내에서만 재배되는 식물들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기존 강화제의 부작용을 제거하겠다란 그 원대한 목표는, 안타깝게도 그의 충만한 의욕과 달리 실패만 거듭하는 중이었다.
“일단 부작용을 전부 없애는 일 자체엔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강화효과까지 떨어졌지 뭡니까? 부끄럽게도 기존 비약의 19%밖에 되지 않았지요.“
“음? 그 정도도 대단한 거 아닙니까?”
“에휴~, 처음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관련기관에 평가를 의뢰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합격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최종 탈락됐습니다. 그 놈의 제조원가가 발목을 잡았더랬지요.”
“흠...”
”동일한 원가로 기존 비약 대비 최소 23.87% 이상의 효력을 달성한 후에 다시 도전하라더군요. 유사한 대체재는 이미 그들도 잔뜩 보유하고 있는 실정이라 사업채택이 불가한 건 당연했고요. 여튼 아쉬운 대로 딱 안정성 부분만 인가를 받았었습니다. 추후 실적보고 때 그거라도 첨부하려고 말입니다.”
“아...”
극적인 성공이라 믿었던 안타까운 실패는 저장고의 자리만 차지하는 악성재고로써 그의 골치를 썩였다.
“어쨌거나 모처럼의 야심작을 그냥 폐기처분하기도 뭐해서 근처 단골가게 주인들에게 몇 병씩 나눠줬습니다. 누가 뭐래도 나름 천연추출물 배합으로 만들어낸 비약이긴 했으니까요. 사실 전투가 아닌 일상에서의 19%는 또 다른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근데... 흐흐, 효과가 많이 좋았나 봅니다?”
“으흐흐흐흐, 좋다 못해 아주 뜨거웠지요~. 특히 의무방어전용으로 복용한 요정족들은 그 다음날부터 저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찬양을 하더라니까요? 하하하!”
오직 전투력 평가에만 혈안이 되어 그간 인식 못했던 ‘웅장한’ 약효는, 그저 비루하기만 했던 포리스트의 실패작을 하루아침에 신통한 묘약으로 탈바꿈시켰다.
- 고개 숙인 가장들의 위엄을 다시금 ‘곧추’ 세운 기적!
그 위대한 업적은 체험자들의 열렬한 고백과 간증을 통해 유부남들 사이로 빠르게 전파되었고, 이 은총이 시급한 자들이 너도나도 몰려와 그에게 매달려 애원하다시피 했다.
악성재고였던 900병은 겨우 나흘 만에 게 눈 감추듯 슥싹 사라졌고, 하루 종일 출입구에 진을 치고 애원하는 유부남들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새로이 만든 2,700병은 그 날로 동이 났다.
“하하하, 돈방석에 앉으셨겠습니다?”
“아뇨, 아뇨. 다~ 공짜로 나눠줬습니다. 또 미리 손질해뒀던 재료까지 다 소진한 뒤로는 바로 접었지요. 그 뒤로 ‘자기가 상당히 높으신 양반입네’하는 사람이 찾아와 부탁한다 한들 단칼에 거절해버렸고 말입니다.”
“음? 왜 그랬습니까? 재료야 또 사면 되잖습니까?”
“아휴, 근력강화제 연구하라고 받은 지원금을 실패작 제조하는데 계속 쓸 수야 없잖습니까? 게다가 저랑 바네사가 하루 온종일 그것에만 매달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제 양심상 횡령이나 다름 없는 짓은 절대로 못하겠기에 입장을 단호히 취했던 겁니다. 그래서 꼬투리 잡힐까 봐 돈도 안 받았던 게죠.”
“아하.”
”아~, 그랬더니... 그... 뭐라 했더라? 식품의약안전처? 암튼 그쪽 소속 몇몇이 경비대랑 같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더니만 압수수색 영장이랑 수사협조문을 제게 내밀더군요.”
“압수수사?”
”예, 제가 환각제 종류의 마약을 제조한 거라면 큰 중죄라면서 샘플까지 요구했습니다. 분명 저한테 거절 당하고서 기분 상했던 누군가가 꼰지른 결과였겠죠.”
“흐음...”
”아무튼 저야 애초에 허가받은 약초들로만 제조한 거라 딱히 꿀릴 것도 없는 고로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줬습니다. 헌데 그 일이 지금과 같은 사태를 불러오게 될 줄은...”
“?”
권위 있는 기관의 까다로운 검증을 통과한 것도 모자라, 꼼꼼한 수사과정에서 그 효능까지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 비약은, 자동 특허출원과 함께 사회공공사업으로써 오드노아 정부조직 내에 전담부서까지 발족시키고야 말았다.
“음? 공공사업?”
“하하, 그건 사실 저도 여전히 의아한 부분입니다. 낮은 출산률 때문이라 하던데, 제가 보기엔 적당히 둘러대는 눈치였거든요. 수명이 긴 종족이라 남성들의 생식욕구가 인간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가설도 세워봤습니다만, 진짜로 그런 건지 어쩐 건지는 저도 잘...”
실상은 수뇌부가 훗날 행성이주에 따른 성비 불균형 문제를 빠르게 완화시킬 수단으로 채택한 바람에 그리 된 것이었으나, 일반 대중에게도 공개하지 않은 진짜 사유를 포리스트라고 알 리가 없었다.
“뭐, 저야 특허권이랑 조제법을 제공하는 대신 수수료를 짭짤하게 받아먹게 됐으니까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 덩달아 연구지원금도 대폭 증액됐고요.”
“푸하하하!”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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