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법, 꼼수. 그리고 잔머리 (5)
* * * * *
헤트만 제1왕자 칼리드 구르파샨은, 주소걸이 불과 300미터 거리도 안 되는 수풀더미 속에서 자신을 비호 중인 사실도 모른 채, 부하들과 더불어 속을 까맣게 태우고 있었다.
'내가 제후들을 너무 우습게 여겼다!'
현재 상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왕실 정규군의 창칼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정보만으로도 최소 둘 이상의 제후들이 작당했음을 추론할 수 있었다.
'당연히 흉계를 꾸밀 거란 짐작은 했지만... 이토록 빠르게 반란을 일으킬 줄이야. 부디 손잡은 제후가 셋 이상만 아니면 좋겠는데 말이지. 아, 제발 그건 좀...'
살짝 부렸던 만용이 이렇게나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킬 줄은 전혀 예상 못한 그였다.
'으으, 근데 내가 어느 부분을 놓쳤던 거지? 정령왕의 봉인지들에 문제가 생겼다는 첩보에 너무 흥분해서 분위기를 제대로 못 읽었던 걸까?'
굳이 따지자면 주변의 모든 것을 안다고 맹신했던 그의 실책이었다. 그의 간섭을 통해 타미아르에 견줄 정도로 부강해진 헤트만의 경제력은, 오늘날 제후들의 역량과 간댕이마저 칼리드의 상정범위를 크게 벗어난 수준으로 부풀려 놓았던 것이다.
'지난 번에 진짜 예언자만 취했더라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을 텐데...'
그는 나디아를 자기 휘하로 들이지 못한 아쉬움을 꿀꺽 삼키며 군마에게 채찍질 했다.
- 두두두두두...
"저하, 왕실군 별동대가 움직입니다!"
칼리드는 친위대 대장 '사티바라그(Satybarag)'의 외침에 주먹을 하늘 위로 번쩍 올렸다.
"돌격 중지!"
"정지! 정지!"
- 이히히히히힝~.
왕자의 명령에 마흔 다섯 명의 부대원들을 멈춰세운 사티바라그는 안장 위에서 풀쩍 뛰어내려와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더는 안 되겠습니다! 이대론 말들이 오래 버티질 못합니다! 차라리 소신이 전력으로 활로를 뚫겠나이다!"
"안 돼, 기각."
"칼리드 저하!"
분통 터지는 건 매한가지였으나, 그래도 칼리드는 머리를 차게 식히며 선을 명확히 그었다.
"죽음을 불사하고 방어선을 뚫겠다는 용기는 높이 사마. 3급 전투사인 그대의 무위라면 실제로 도 어떻게든 가능은 하겠지. 그러나 '바워(Bauer)' 장군이 그 꼴을 손 놓고 보고만 있을 거 같나?"
"......"
"냉정하게 다시 잘 살펴봐. 바워 장군이 어느 땐가부터 부대지휘권마저 참모들에게 넘기고 본인이 직접 별동대를 이끌고 있다. 보나마나 자네를 경계해서야."
"크윽..."
사티바라그는 뜻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승패를 쉽게 가릴 수 없는 실력자를 상대하는 와중에 칼리드의 안위까지 책임질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분하지만 아직은 인내할 때다."
"하오나..."
"마음에 들진 않아도 일단은 저들 장난에 맞춰야 해. 리브나가 분명 잘 조치했을 거야. 저들의 꿍꿍이가 뭔진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대로 계속 시간을 끄는 편이 상책이다. 내 비장의 결사단이 도착하기만 하면 저들쯤이야 우습거든."
"...알겠습니다. 저흰 칼리드 저하만 믿고 따르겠습니다."
"훗, 바람직한 자세다. 잔뜩 기대해도 좋아! 내 결사단의 단장은 무려 현재 2급, 머잖은 미래엔 1급이 될 실력자이거든!"
"!"
"참고로 예전에 망한 '여리보(Yeoribo)' 공국 출신이야. 진짜진짜 힘들게 포섭한 인물이지."
“설마... 그 코넌인 겁니까?!”
“후후후, 어때? 갑자기 막 든든하지?”
왕자가 자기 목숨을 두고 허언은 할 리가 없기에, 사티바라그는 다시 칼리드의 명을 받들어 적군이 보기에 우왕좌왕 활로를 뚫는 시늉을 이어나갔다.
- 두두두두두...
그런데 군마들의 체력이 고갈됐을 무렵, '짜쟌~'하고 등장한 이들은 칼리드의 특전대가 아닌, 제후들이 추가로 투입한 후발대였다.
"에잉, 썩을 운빨 진짜... 시부ㄹ..."
칼리드의 욕 섞인 웅얼거림은 좀 전보다 더욱 불리해진 전황을 가리킨 게 아니었다.
"하아... 이건 또 이딴 식으로 반복되나?"
"예?"
"아, 신경쓰지 마. 그냥 혼잣말이니까."
"...예, 저하."
칼리드의 뜨거운 시선은, 어느덧 새까맣게 뭉친 왕실군을 물살 가르듯 헤치며 앞으로 나서는 동생, 샤하브를 향해 있었다.
"사티바라그, 잘 지키고 있어. 난 잠시 아우 좀 만나고 오마."
"위, 위험합니다, 저하!"
"괜찮아. 저 봐라, 샤하브도 홀로 나오잖냐. 심지어 활을 쏘면 맞을 거리인데 군마도 안 탔어. 아주 용감하게 말이지. 그래도 내가 명세기 저놈 형인데, 아우보다 쫄보처럼 보여서야 되겠냐?"
이내 손바닥을 들어보이며 사티바라그의 추가 발언을 저지한 칼리드는, 아우 샤하브가 멈춰선 중앙으로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여어~, 아우야. 네가 나 때문에 고생 좀 한다."
"칼리드 형님!"
샤하브는 몇 걸음 앞의 칼리드를 향해 다짜고짜 무릎을 꿇고 뜨겁게 호소했다.
"형님!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주십쇼!"
"일어나, 임마. 초장부터 부담스럽잖냐."
"그래야 사실 수 있습니다, 형님!"
"이야~, 살고 싶으면 얌전히 투항하란 협박을 너도 참 신박하게 하는구나. 파하하하!"
상황이 상황이었던 지라, 샤하브는 그의 형이 던지는 몇 마디 농담을 맞받아칠 여력이 없었다.
"형님! 제발!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아우야, 그 전에 하나만 묻자. 이번 일에 제후 몇 놈이 가담한 거냐?"
"...다섯입니다."
"쩝... 넷도 아닌 무려 다섯이라..."
현재 그가 숨겨온 모든 것들을 꺼낸다 쳐도 승산이 애매한 싸움이었다. 물론 진흙탕 개싸움을 각오하고, 그가 가진 미래 지식을 적극 활용해 장기전을 도모한다면 결과가 다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종국에는 상처뿐인 승리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대신 나라는 초토화되고, 백성들의 삶은 누더기가 되겠지.'
게다가 25년 이상 빨라진 트로돈의 침공조짐이라던가, 본래는 33년 이후에나 발생해야 했던 1대 정령왕의 재림까지 벌써 터진 걸 고려한다면, 내전으로 인한 병력의 손실은 최대한 피하는 게 현명했다.
그의 소망은 어디까지나 헤트만의 안녕,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트로돈의 침공저지였기 때문이었다.
"후우~, 이러면 완전 나가린데..."
"지금 투항하셔야 합니다! 그리하셔야 제가 어떻게든 형님을 살릴 수 있습니다!"
"...하하...하하핫!"
"웃으실 때가 아닙니다! 과반 이상의 제후들이 작정하고 궐기한 사태란 말입니다!"
객관적으로 심히 기분 더러운 상황이었지만, 칼리드의 마음은 의외로 썩 나쁘지 않았다. 회귀 전에 왕위에서 끌려내려오던 때의 풍경과 너무 비교된 탓이었다.
[ 칼리드 형님! 더는 형님의 망나니짓을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자, 선택하십쇼! 이 자리에서 제 손에 죽을지, 아니면 별궁에 갇힌 채로 남은 여생을 보낼지! ]
원 역사에선 그의 목에 매몰차게 칼을 겨눴던 아우가, 바뀐 현재의 역사에선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조아리고 있으니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에고고, 이번 삶도 실패인가? 아니지, 이번엔 왕좌에 앉아보지도 못하고 8년이나 빨리 감금생활하는 거잖아? 캬~, 제대로 똥망한 거네? 으크크크!'
칼리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실없는 웃음을 얼마간 더 피웠다.
'여신님! 잘 보고 계시죠? 이건 계약위반 아닙니다? 결과가 이 ㅈ랄나서 그렇지, 그래도 제가 진짜 최선은 다 했다고요! 흐흐, 아시죠? 그러니 부디 용서하십쇼, 하하하하!'
그는 또 한편으로 자애의 여신 마야키니와 계약을 맺고 시간을 돌이켜 아득바득 노력한다한들, 결국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엔 저항할 순 없나보다 하는 회의감에 젖기도 했다.
이윽고 칼리드의 시선이 그의 대답을 묵묵히 기다려준 샤하브에게로 향했다.
"...그래. 네 뜻에 따르겠다. 어떤 저항도 안 할테니, 아무쪼록 폐위과정에서 내 사람들이 죽지 않게만 배려해다오. 좌천이나 귀양살이 등등, 네가 왕이 되어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수단은 아주 많잖냐. 응?"
그동안 본인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쏟아부었다고 생각한 칼리드였기에, 이내 모든 욕심을 의외로 쉽게 내려놓을 수 있었다고 하겠다.
"감사합니다, 형님!"
"그리고 또..."
"예?"
"크흠, 이왕이면 리브나가 앞으로 계속해서 내 시중을 들도록 신경써줬으면 정말로 좋겠구나."
"걱정마십쇼. 그 아이 때문에 그동안 제후 가문과의 정략결혼을 기피해오셨다는 사실은 제가 다른 누구보다 가장 잘 압니다."
"...짜식, 고맙다."
"다만 앞으론 제후들의 눈에 거슬리는 일만 벌이지 마십시오. 그 외의 다른 편의는 제가 다 묵인하겠습니다."
"오냐, 알았다."
칼리드는 이왕 이렇게 된 김에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나마 세상이 평화로울 시기에 사랑하는 여인과 꽁냥거리는 것도 나름의 행복이기 때문이었다.
"내 일단 돌아가서 친위대들 무장해제 시키마. 그리고나서 제대로 투항을 하ㄱ..."
"?"
칼리드는 천천히 돌아섰다. 아니, 돌아서려 했었다. 자신과 아우를 조준하고 있는 왕실군 진영측 수십 개의 노포들과 수백 명의 궁수들을 보기 전까지는 정말로 그랬었다.
- 끼릭, 끼릭-. 끼이익...
- 처처처저저적!
궁수들의 화살촉에 희미하게 묻은 각양각색의 프라나만 살펴도 필살의 의지가 느껴졌다. 그렇다면 화살을 연거푸 쏘아낼 기세의 노포마다 관통마법이 살뜰하게 부여됐을 거란 예측 또한 틀림없으리라 여겨졌다.
"아오, 이 미친 제후 새끼들이!"
"혀, 형님? 왜 그러십... 허걱!"
칼리드는 자신의 시선을 쫓다가 사색이 되버린 샤하브를 뒤로 세웠다. 그리곤 부하들에게 주저리주저리 명령중인 바워 장군을 향해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야이, 바워 장군 ㄱ새끼야! 내 동생만이라도 살려줘!"
그러나 되돌아오는 건 바워 장군의 썩은 미소와 자유 사격을 명령하는 손짓 뿐이었다.
- 스윽.
- 퉁! 투웅! 투두두두퉁!
- 피이이이~, 쏴아아아아아!
"씨ㅂ!"
급히 장검을 뽑은 칼리드가 샤하브의 방패를 자처했다. 그러나 아직 5급 기사 수준에 불과한 그의 무력으론 고슴도치 형상으로 최후를 맞이할 게 불보듯 뻔했다.
'...아하하하... 마야키니 님, 혹시 재도전 가능합니까? 역시나 그건 좀 무리일까요?'
칼리드가 쓰게 웃으며 동생만은 살려보겠다란 의지를 다지던 순간, 그의 얼굴에 차양막처럼 드리운 그림자가 있었다.
"어잇차-!"
그 그림자에게서 흘러나온 추임새는 노인장이 굽은 허리 펴는 소리였지만, 그로부터 펼쳐진 무위는 모든 이의 이성을 마비시켰을 만큼 놀라웠다.
- 촤좌좌좌좌좌-!
눈으로 쫓을 수 없는 검로에서 발현된 풍압. 거기서 비롯된 검풍은 칼리드와 샤하브에게 집중되던 발사체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맙소사! 이건 또 뭐야?!'
그 위용이 얼마나 대단한지 안도보다 경악이 먼저 일어난 칼리드였다.
'회귀 전에 이런 인물은 없었어!'
프라나를 파괴마법처럼 맹렬히 분출시킬 수 있는 경지, 다른 표현으로 1급 전투사란 존재는 칼리드가 회귀하기 직전에도 전 세계 인간을 통틀어 10명이 전부였다.
'현재 알려진 1급 전투사는 겨우 두 명, 훗날 1급이 되는 코넌 단장을 포함해야 셋. 그 외엔 모두 알 수 없는 어딘가에 짱박혀 은거 중이야.'
참고로 인간 종족 대마법사의 경우엔 은둔자 포함 7성이 다섯, 8성이 셋이었으며,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 트로돈의 대침공에 맞서고자 세상 밖으로 뛰쳐나온 인물들에 대해서 칼리드가 모를 리 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맹점은, 마법종주국인 우리 헤트만 내엔 1급 전투사라곤 단 한 명도 없었단 거지!'
칼리드가 좀처럼 상념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도움을 준 그림자의 무위가 1급의 그것을 훨씬 상회하고 있어서였다.
'설마 특급? 아무리 봐도 이건 내가 바꾼 역사의 여파로 보긴 어려워.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칼리드 본인의 회귀가 신의 영역이었음을 떠올린다면, 정답은 하나였다.
"으허허헛! 반갑소이다, 회귀자여! 참으로 눈물 겨운 우애였소이다!"
"...?!"
샤하브가 놀란 눈으로 주소걸의 시선을 따라 칼리드를 바라봤으나, 그의 형은 피아구분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다.
"혹시 마야키니께오서 보내신 사자셨습니까?"
"그 비슷한 거외다. 어쨌거나 여신께오서 안부 좀 전해달라 하셨소, 어헛헛헛!"
주소걸의 능청스럽고 호쾌한 웃음은, 암울했던 전세가 한순간에 뒤집어지는 출발선이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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