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여지책 (3) + 첫인상 (1)
가르디엔은 그녀의 조심스런 가설을 짐짓 이해한다듯이 고개를 주억였다.
"아주 과한 억측은 아냐. 하긴, 너의 의심도 당연하겠네. 여긴 동원령이 떨어졌던 지역이기도 했으니까."
"그치?"
"그런데 전적으로 동의하긴 어려워. 내 견해는 약간 다르거든."
"?"
이 지역의 과거사를 기억해낸 가르디엔은 반론을 펼쳤다.
"이곳에 남작의 입김이 닿지 않았다기보다, 애초에 여긴 무시된 거로 보여져. 아까 썩어 들어가던 남작의 표정을 되짚어 생각하면 거의 확실해."
"무시?"
"어, 무시.맥스웰 남작은 예전 영주의 자식들을 꽤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응?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타미아르의 정황을 알 리 없는 그녀에게 그가 몇 마디 말을 더 보탰다.
"아, 레이첼은 모르겠구나. 채드웍 캐플랑이라고, 한때 이 지역의 꽤 유명한 자작이 있었어. 누가 뭐래도 본국의 공훈귀족 중 단연 최고였지. 이곳 비리디아를 포함한 서북부 전역이 대부분 캐플랑 가문의 소유였었으니까."
"네가 그렇게 설명해주니까 예전에 언젠가 한 번 들어본 것 같기도...?"
"딱히 신경쓰지 마. 지금은 허울 뿐인 귀족 가문이거든. 영지도 다 쪼개져서 여기저기로 편입됐고 말이야."
"어? 왜? 작위는 직계존속에게 승계되는 게 인간들의 보편적인 관습 아니었어?"
"음, 결론부터 말하면 나라마다 조금씩 달라. 우리 타미아르국의 경우엔 공훈귀족의 작위계승은 여성에게 허용되지 않지. 에... 캐플랑 가문의 경우엔 특히 안타까웠다고 해야 하나? 뱃속에 있던 그의 아들이 세상에 태어났을 무렵엔, 이미 폐하의 칙령으로 영지 재배분이 끝난 상태였거든. 그때 이후론 형식적인 작위 껍데기만 남았다고 이해하면 돼."
"아후~, 난잡하기도 해라! 하여간 인간 종족들이란..."
"흐흐흐, 아무리 복잡해도 요정족 지파간의 차이에 비할까?"
"풉, 그것도 그러네! 좋아, 그 부분은 나도 인정!"
가르디엔과 레이첼의 수다가 무르익어갈 무렵, 갑자기 빼쭉 열린 2층 창문틈 너머로 바네사와 굵직한 남자의 언성이 새어 나왔다.
"제발요, 아저씨~. 네?!"
이 오래된 건축물은 방음과도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그 바로 밑에 있던 무리들은 두 사람의 오가는 대화를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안 된다! 절대 허락할 수 없어! 게다가 바네사야. 누가 네 마음대로 거래해도 좋다 했느냐?"
"이건 아저씨께서 제 생일선물로 주신 거였잖아요!"
"내가 너 연금술 연습하라고 최선을 다해서 만든 거였다! 네가 목숨 걸고 제멋대로 도박이나 하길 바라면서 그리 공들였던 게 아니란 말이다!"
남성의 목소리가 굉장히 엄했지만, 사춘기 특유의 반항이 발동된 듯한 소녀에겐 어림도 없었다.
"흥! 이미 늦었어요! 고든 백작님의 자제분께서 밑에 와 계세요!"
"아아... 바네사야..."
"아저씨이~, 한 번만요오~! 최소한 왕립사관학교의 입학비 정도는 마련할 수 있을 거라니까요? 소문 자자한 고든 백작님의 명성과 인품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거라 믿어요! 게다가..."
"아, 글쎄! 안된다면 안 돼! 그러다 만약 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애드(Ed)’랑 ‘샤비(Shavi)’가 참으로 좋아라 하겠구나! 무엇보다 난 네 어머니와 약속했다! 너희를 잘 보살피겠노라고! 든든한 후원자가 되주겠노라고 말이다! 그러니 결단코! 무조건 안 돼!"
"아우으응~, 포리스트~ 아저씨이이잉~!"
"그렇게 어리광 부려도 소용없어! 절대 꿈도 꾸지 마라!!!"
잠시 한숨으로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라앉힌 사내가 말을 계속했다.
"후우... 바네사야. 애드의 학비는 내가 어떻게든 해결할 테니까, 넌 그만 신경 쓰도록 해라. 어차피 애드가 입학하려면 4년이나 남았잖니, 응?"
"싫어요!"
"바네사!"
일찍 철들면서 속에 쌓였던 앙금이 진득해서일까? 소리 소문 없이 지나갈 것만 같던 사춘기 소녀의 저항이 화산처럼 폭발했다.
"아저씨! 저도 염치란 게 있다구요! 저와 제 동생들이 언제까지 거머리처럼 아저씨한테 빌붙어 있어야 하는데요?! 매일밤 가게 정산하실 적마다 몰래 한숨 쉬시는 걸 제가 다 봤다고요!"
"얘, 애야..."
"몰라요! 아저씨가 허락 안 해주신다해도 전 갈 거예요! 이렇게 기회가 왔는데 놓칠 순 없어요!"
"바, 바네사! 바네사-!"
- 쾅! 쿵. 쿵. 쿵. 쿵... 벌컥! 짤랑, 짤랑~.
심술궂은 문소리와 계단 소리. 그리고 문고리에 달린 방울 소리가 흥분한 황소처럼 사나웠다. 잠시후 1층 밖으로 나타난 바네사의 표정은 억지 미소로 얼룩져 있었고, 이는 레이첼의 추론을 폐기시키기에 충분했다.
"죄, 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리셨죠? 이게 마지막 포대입니다. 그나저나 확인은 잘 끝나셨는지요? 틀림없죠? 에헤헤..."
바네사의 젖은 눈가를 마주하며 괜시리 자기가 다 민망해진 레이첼은 슬며시 가르디엔을 향해 텔레파시를 보냈다.
[가르! 나 지금 막 다시 드는 생각인데 말이야. 만약 진짜로 이 아이가 비스마우어 일족의 협력자이고 또 그들만큼 교활했다면, 이렇게 대놓고 의심 받을 형태로 접근하진 않았을 거 같아.]
[훗... 그래, 나도 동감이야.]
[칫, 거들먹거리긴!]
가르디엔은 연민의 마음이 전보다 더 크게 동했다. 아마도 그건 현재 백작작위 계승 3순위이자, 몰락한 귀족의 삶이 어떠한 지를 이따금씩 봐왔던 그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도 몰랐다.
"흠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구나, 바네사. 잠시 내 동료들이랑 마법으로 비밀대화를 좀 하고 있었단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보다 물건은 마음에 드셨을까요?"
"물론! 과연 네 말 그대로였다. 여기 이 요정족 친구들이 기뻐할 정도로 대단히 상등품이었다. 네 덕분에 한시름 놓게 되었단다."
"그, 그럼..."
"금전적인 도움이 조금 필요한 것 같더구나."
"!"
이 말에 2층 창문 상태를 슬쩍 올려다본 바네사의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드, 들으셨군요?"
"하하, 미안. 일부러 엿들었던 건 아니었다."
"...네에... 괘, 괜찮...습니다."
"아무튼 여기 일이 끝나고 수도로 돌아가는 즉시, 내가 사람을 보내서 값을 치르마. 아니, 아니지! 우리 백작 가문의 인장을 찍은 지급 보증서를 네 앞으로 보내주겠다. 차라리 그 편이 더 안전할 테니까."
"배,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후훗. 감사하긴 내가 더 고맙지. 어이쿠~, 벌써 시간이? 하하하, 이만 가봐야겠구나. 이 수레는 잠깐 빌리고 돌려주마."
"저기... 저어..."
"?"
바네사가 한껏 너스레 떨며 뒤돌아서던 가르디엔 곁으로 붙으며 물었다.
"아까 약속하셨던 안내역은..."
"아아, 그건 이제 괜찮아졌다. 네 덕분에 소규모 인원만 운용해도 너끈히 감당할 수 있을 상황이거든. 길잡이를 느긋하게 구해도 될 만큼 별 걱정 없게 됐다."
"그, 그것도! 제, 제가 하겠습니다! 부디 저게 안내역을 맡겨주세요! 제가 주로 약초채집으로 먹고 살기 때문에 이 도시 누구보다 잘 할 수 있습니다!"
"흠......"
그가 그냥 무시하기엔, 바네사의 눈빛이 너무나 애절했다.
"굳이 네가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단다. 게다가 내가 이미 학비도 약속을 해줬는데, 더는 아쉬울 것도 없잖느냐?"
"제가 협력해서 고, 공을 세우면... 추, 추천장을 받을 수 있을까 싶어서... 아니 꼭 받고 싶습니다!"
"추천장?"
"...배, 백작님의 추천장이 있으면... 제 남동생이 왕립사관학교에 쉽게 입학할 수 있을 거 같아서...요."
"뭐? ...푸하하하하!"
가르디엔은 당초 바네사가 그토록 역병퇴치에 기여하려는 목적이, 동생의 학비가 아닌 입학추천서에 무게가 실려 있었음을 깨닫곤 도무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아하하하! 그래! 그렇겠군! 언뜻 봐도 널 몹시 불편해하는 그 맥스웰 남작에게서 추천서를 받아내기란 만만찮겠지! 충분히 납득했다."
왕립사관학교에는 아무나 생도로 들이지 않는다. 나라의 고위 장교와 양질의 기사단원 육성이 주목적이므로, 간첩을 배제하고자 신원이 확실한 자들만 선별하여 입학을 허용한다.
그리고 이 신원확인 절차는 오래 전부터 대부분 작위가 있는 귀족의 보증으로 갈음하여 약식처리하고 있으며, 한정적인 인원과 시간을 핑계로 담당자들의 방문실사는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귀족이나 각 도시의 손꼽히는 거상의 자제 외에는 사실상 입학이 불가능한 폐해가 발생했지만, 현실적으로 별다른 대체방법이 없는 까닭에 지금까지도 그 관례가 공공연하게 유지되어 오고 있는 것이었다.
"훗. 바네사, 내가 널 잘못 봤구나. 마음이 마냥 여린 아이인 줄만 알았는데, 판단이 재빠르고 배짱이 아주 두둑해! 좋다, 네가 널 고용하겠다!"
"가, 감사합니다! 진짜 열심히 할게요!"
"가르디엔!"
레이첼은 바네사를 길잡이로 삼겠다는 그의 선언을 듣고서 눈썹을 바싹 치켜세웠다.
"이 아이가 아무리 기특해도 그렇지! 그새 매우 위험한 일이란 걸 잊은 거야?!"
"알아. 하지만 추천서는 나도 별 수 없어서 그래."
"뭐?"
"대장로 '파렐 스톤(Parell Stone)' 님을 아버지로 둔 네겐 우습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타미아르국 백작의 보증이란 건 의미가 꽤 무겁다고."
"추천서 같은 건 가르 네가..."
이에 가르디엔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아휴~, 레이첼. 날 그렇게 좋게 봐줘서 고맙다. 근데 말이지, 내겐 아직 정식 작위가 없다는 걸 기억해줘. 그리고 친한 다른 귀족에게 부탁하려고 해도 뚜렷한 명분이 없으면 무척 어렵다는 사실도 같이 알아줬음 좋겠고."
"......"
"근데 이게 우리 스승님의 정식 보고서에 이름 한 줄만 '똭' 써지기만 하면, 어떻게든 가능할 거 같다는 말씀! 막말로 뭣하면 내 스승님의 추천서를 받게 해줄 수도 있는 거야."
"......"
"이 총명한 아이도 그걸 아니까 용기를 내고 있는 거 아니겠어? 참으로 기특하지 않아?"
"...알았어. 네 결정대로 해. 가급적 정찰이 끝난 지역위주로 도는 수밖에... 쯧."
설득 당한 레이첼을 향해 바네사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실망하시지 않게끔 최선을 다할 게요!"
"아냐, 이건 네가 노력으로 얻어낸 결과야. 어린 친구가 대견하네."
이후 가르디엔은 바네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분위기를 마무리 지었다.
"자, 자~ 그럼~ 너도 들어가서 준비 단단히 하고, 내일 정오까지 마을입구로 오너라. 야영에 필요한 장비와 식량은 우리 쪽에서 마련할 것이니 염려 말고 몸만 오려무나!"
"네, 절대 늦지 않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봐. 꼬마 친구."
"네!"
그렇게 레이첼이 잔뜩 부푼 바네사의 어깨를 대견하다는 듯이 톡톡톡 다독이며 돌아설 때였다.
- 덜컹! 덜컹! 벌컥-! 끼이익!
"자, 잠깐만!!!"
"""?"""
"아저씨..."
가르디엔 일행이 올려다보니, 나이 마흔 내외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창문틀에 매달리듯 상체를 밖으로 쭈욱 드러내고 있었다.
"부, 부디! 나도 데려가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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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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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후, 폐광에서 약 9km 떨어진 지역.
어느 지역이나 이른 아침 멀리서 지켜보는 숲은 대체로 평온했다. 새벽 이슬로 졸음을 깨끗이 닦아낸 나뭇가지가 산들바람이 이끄는 손에 이끌려 춤추는 자태는 그렇게 싱그러울 수 없었다.
- 탓, 탓, 탓, 탓.
그러나 시야를 조금만 가까이 옮기면, 잔잔함은 간데 없고 역동적인 생명의 힘을 한껏 느끼게 된다.
- 탁! 탁! 탁! 탁! 탁!
그리고 그런 생명의 고동은 대개 피식자들의 몸부림일 때가 많았다. 지금 눈썹 휘날리며 뜀박질하는 바네사와 포리스트가 바로 그 좋은 예시에 해당될 것이다.
"뛰어! 바네사! 계속 뛰어!"
"허억... 헉... 허억, 허억... 아, 아저씨... 더, 더 이상은... 헉, 헉..."
바네사가 급작스런 근육 경련을 이기지 못하고 철푸덕 넘어졌다.
"아얏!"
땀에 푹 절은 모자를 서둘러 고쳐 쓴 포리스트가 땅에 쓰러진 바네사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바네사, 힘들어도 일어나야 한다! 여기서 더 멀리 벗어나야 해!"
"으으... 아저씨, 너무... 아파...요."
- 펑~! 퍼펑!
{크오오오오오어어어어!}
근방에서 들려오는 폭음과 흉측한 키메라의 괴성.
비록 비탈에 가려 싸우는 광경이 보이진 않았으나, 가르디엔과 레이첼 일행이 기습적으로 몰려온 키메라 무리를 상대로 대단히 고전하고 있음은 틀림없어 보였다.
"이, 이런 어쩔 수 없군!"
포리스트는 즉시 허리춤의 작은 가죽가방 속에서 보라색 빛깔의 길쭉한 시약병을 하나 꺼냈다.
"아저씨, 그거 아직 미완성...!"
포리스트는 바네사가 무어라 만류하기도 전에 내용물을 자신의 입속으로 울컥울컥 털어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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