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껏해야 100년, 영원같은 100년 (6)
* * * * *
그것은 우연이었다.
"부탁이에요, 서방님! 저도 데려가주세요!"
어김없이 돌아오는 새벽녘, 뜬 눈으로 밤을 지샌 그녀가 알쿤다 자매와 함께 도망치듯 떠나는 그를 발견한 일은 정말로 우연의 일치였다.
"싫어요! 제게 약속하셨잖아요!"
그녀가 매달려본 일 또한 생전 처음이었다. 일찌기 불치병 판정을 받은 이래로 '애정'이 아닌 '동정'을 받으며 자라온 그녀에겐 그럴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애달픈 생애가 진정으로 그러했다.
화사한 꽃의 매력에 너도나도 날아들었던 벌과 나비들은 많았었다. 그러나 꽃이 심하게 병들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자마자 언제 그랬냐듯이 오던 발걸음을 돌이키거나, 혹은 단맛만 취하고 내빼려 하곤 했다.
"나쁜 사람... 이미 다 가져가놓고..."
그녀에게 루카스는 참으로 못된 남자였다.
문제를 해결해줬으니 자신에게 그녀의 남은 삶을 바치라고 요구하던 패기로운 남자.
깊이 병든 꽃이라며 몇 번을 알렸음에도 그 정도는 기꺼이 보듬을 수 있다며 호언장담하던 당돌한 남자.
그렇게 그녀 자신조차 포기하고 굳게 걸어잠근 마음의 문을 난데없이 제멋대로 부수고 차지해버린 저돌적인 남자.
그랬던 그 사람이 이젠 그녀를 위한 답시고 기어이 이별을 고하며 뉘엿뉘엿 떠나가는 중이었다. 그녀가 눈으로 쫓는 그의 그림자가 멀어질수록 애타는 그리움은 더욱 짙게 스미었다.
"...미련한 사람."
그녀는 자히드 영주성 정문을 슬그머니 통과하는 낡은 짐마차가 무척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말들을 재촉하는 임에게까진 그러지 못했다.
루카스의 진심 어린 고백들은 여운처럼 그녀의 귀에 맴돌았다.
‘본래 나는 이 세상의 일엔 미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 가지가 생긴 것 같습니다. 그것은 로비샤, 바로 당신입니다.’
‘하하, 나는 무척 신기합니다. 당신에겐 도무지 말을 편히 놓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후훗, 어쩌면 이건 내가 그대를 언제까지나 존중하고 싶은 나의 무의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장 사랑하는 임의 귀에 닿도록 성내고 싶었다.
그렇게 나쁜 말들을 무수히 쏟아내며 진상을 부리더라도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한계까지 치달은 그녀의 감정선은 끝내 루카스를 원망하지 못했다.
"바보 같은 사람... 내가 괜찮다는데..."
어느덧 손가락보다 작아진 낭군의 모습이 너무나 야속했다. 특히 그가 남긴 마지막 부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미리 사과합니다. 앞으로 딱 백 년동안만 당신을 내 마음에 품겠습니다. 훗날 당신이 귀천한 후에도 그 사실에 분노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도무지 와닿지 않는 100년이었다. 그것은 올해로 스물 둘, 앞으로 3년 안에 삶의 여정이 마무리될 것이라 선고 받은 그녀에겐 영원과도 같은 세월이기 때문이리라.
"서방님이 알려주신... 그런 믿기도 어려운 다른 세상의 이야기. 그런 것따윈 제게 중요치 않아요."
덩그러니 남겨진 꽃은, 벌써 아득해진 임의 흔적을 두고 광광 울었다. 마치 구름 뒤로 숨은 태양을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지진 오래인 그의 발자취를 하염없이 그리워했다.
"서방님께서 이렇게 제 곁을 떠나셔도, 그리고 설령 저를 영영 잊으신다 할 지라도, 저는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저는 영원히 당신의... 당신의 것이니까요..."
그렇게 지친 하루 해가 시들었다.
* * * * *
일주일 후, 헤트만 1황자의 집무실.
"뭐, 뭣?! 토룡이 이미 잡혀?"
<예, 왕자님.>
"그럴 리가!!!"
수정구를 통해 긴급보고를 들으며 결재서류에 서명을 휘갈기던 칼리드가, 그만 실수로 잉크를 왕창 쏟았다.
"앗, 이런. 제가 곧 치우겠습니다."
루브나가 재빨리 움직여 책상을 닦으며 수습했지만, 정작 칼리드의 시선은 의복이 까만 잉크로 얼룩지던 말던 수정구 속 보고자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뭔가 착오가 있었을 거야. 그곳에서 알아낸 정보 전부 말해봐. 일단 토룡의 생김새부터 시작해."
<네. 길이 172미터, 몸통 둘레는... (하략)...>
그렇게 한참을 집중하던 칼리드는 루브나가 책상 위를 말끔히 정리했을 무렵 보고자의 말을 끊었다.
"...마법사라고? 설마 그 마법사란 놈이 가르디엔 고든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바리온이라는 인물이라 합니다.>
"바리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이름에 칼리드가 재차 물었다.
"행여 가르디엔 그 작자가 가명으로 활동한 건 아니고?"
<처음엔 저도 그런 의심은 했었습니다만, 인상착의는 물론이고 전투방식도 달랐습니다. 단원들과 함께 에베슘 마을의 현장과 괴수 사체를 분석한 결과, 전혀 다른 인물로 결론내렸습니다.>
"......도대체 또 누가 승천에 실패한 토룡과 맞상대할 수 있는 힘을..."
<현재 저희가 보유한 장비로는 조사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왕자님께서 허가 해주시면 전투현장의 토룡의 사체를 회수하여 복귀토록 하겠습니다. 다만 머릿부분은 자히드 영주가 보유하고 있는 터라, 진상을 받는 형태로 한다해도 명목상 어느 정도의 금전적 보상이 불가피해 보입니다.>
"...알았다. 금액은 얼마가 되던 상관 없으니까 ‘코넌(Conan)’ 단장이 적당히 협상해. 그보다 그 바리온인가 뭔가하는 인물의 조사나 더 진행해봐."
<아, 그 부분은 이미 제가 임의조치했습니다. '키아라(Chiara)'와 '마이트(Mait)'가 소문의 진위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알푸샤리카 제후령로 이동중입니다.>
"좋아. 잘 했군. 그쪽 내용은 수집되는 족족 지체없이 보고해줘."
<예!>
통신을 종료한 칼리드는 폴폴 열나는 이마를 짚으며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앉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안 그래도 트로돈 침공의 전조가 확실시 되는 터라 골치 아픈데, 애초에 없었던 사건들까지 발생되고 있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엄지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뭐? 흐나파스 부근에 있던 1대 정령왕의 봉인이 풀려? 본래라면 대전쟁 후반에나 등장했던 정령왕이 느닷없이? 게다가 초월을 앞둔 토룡을 때려잡는 초인이 뜬금없이 나타나? 심지어 내가 듣도 보도 못한 인물이? 왜?! 어째서?!'
왕자가 가정과 대응책을 거듭 고민했지만, 현재 그가 활용할 수 있는 권한 내에선 불가능한 일들 투성이었다.
'아오... 뭘 해도 종국엔 마찬가지다. 지금처럼 정적들의 제약이 딸린 대리청정 수준으론 대응불가야.'
이렇게 생각이 많아질 적마다 외적으로 나타나는 왕자의 행동습관을 잘 아는 루브나가 다소 걱정스런 눈초리로 물었다.
"왕자님, 머리가 맑아지는 차를 새로 들여왔는데 한 잔 올릴까요?"
"...어, 그래~. 좋지! 한 잔 부탁해~."
그녀가 찻물을 끓이고 잘 말린 울프베리(wolfberry, 구기자)를 향긋하게 우려낼 때까지 침묵을 유지하던 칼리드가 무심한 어투로 말했다.
"저기, 루브나."
"네, 왕자님."
"나 아무래도 빠른 시일 내에 왕좌를 손에 넣어야 할 거 같아."
"?!"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루브나의 손이 미끄러졌다.
- 쨍그랑!
"앗뜨뜨뜨뜨!"
"헉, 루브나! 괜찮아?!"
루브나의 신음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난 칼리드가 뜨거운 찻물에 1도 화상을 입은 그녀의 손을 살피며 밖으로 크게 소리쳤다.
"여봐라! 즉시 신관을 들라하라!"
"아니, 왕자님! 지금 이깟 게 대수..."
"시끄럽다! 나는 그깟 거보다 네가 더 소중하단 말이다!"
"......"
칼리드에게 손을 붙들린 루브나의 이성은 이미 혓바닥 위에서 드센 딴지를 거는 중이었다.
'가만 있어도 몇 년 안에 왕위를 계승하실 텐데! 왜 느닷없이 제후들에게 선전포고를 하시려 하옵니까?!'
그러나 왕자의 진심 어린 눈빛을 마주한 그녀의 수줍은 입술은 좀처럼 떼어지지가 않았다.
* * * * *
루브나가 허겁지겁 달려온 신관에 의해 치료를 받던 그 시각. 숲속에서 야영중인 루카스는 야스민의 특별한 요청을 듣고 있었다.
"...싸우는 법?"
"네."
"일단 묻겠다. 왜지?"
"남들의 보호에만 의존하는, 이 무능력한 삶은 넌더리가 납니다. 힘을 길러서 나디아와 제 몸 정도는 스스로 지켜내고 싶어요. 계속 누군가의 짐덩어리로 사는 건 싫습니다."
"흠, 일단 마음은 알겠다. 그런데 그건 좀 어렵다."
"...역시나 어려운 부탁이었을까요?"
야스민의 조심스러움은 당연했다. 고도의 전투기술은 마법사들의 고유 마법과 같이 폐쇄적으로 전승된다는 사실을 그녀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무룩해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하는 루카스의 초점과는 거리가 있었다.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쪽 문제다. 나는 지키는 법 잘 모른다. 오로지 잘 부수고 잘 죽이는 법만 안다."
"......"
"게다가 나는 보통 사람을 가르쳐 본 적도 없다. 나랑 비슷하게 생긴 놈들만 취급해봤고, 또한 내 훈련은 적당히를 모른다."
"저 열심히 잘 할 수 있어요!"
"가볍게 생각하지 마라. 그러다 죽는다. 실제로도 해마다 몇 명씩은 훈련 중에 죽었다."
"상관없어요! 평생 짐짝으로 사느니, 차라리 열심히 발버둥치다가 죽겠어요!"
그녀의 결의는 루카스의 마음을 동요시킬 정도로 단단했다.
"...알았다. 우선 체력훈련부터 시키겠다. 나도 최대한 고민해보겠다."
"감사해요, 여보님!"
"그건 그렇고......"
"네?"
그의 손가락이 돌연 짐마차를 가리켰다.
"쟤는 왜 저러는 거지? 가만뒀더니 벌써 일주일째다. 이젠 너무 궁금해서 내가 못 버티겠다."
"아..."
루카스가 마치 없는 사람처럼 온종일 짐칸 구석에서만 짱박힌 나디아에 대해 묻자, 그녀는 나디아의 울적한 본심을 자세히 풀어 설명해줬다.
"나디아가... 자기 탓이라고 생각한다?"
"...네에."
"왜지? 나는 이해되지 않는다."
"자기가 쪽지를 전달해드려서 여보님이 로비샤 님과 헤어지셔야 했던 거라 여기고 있어요."
"그것도 이상하다. 내용도 모를텐데?"
"하지만 자기가 끝까지 안 드렸으면 여보님께서 슬퍼하지 않으셨을 거라고 자책하는 거에요."
"......"
"아실진 모르겠지만... 제 동생은 여보님께 미움 받고 버려지는 걸 굉장히 무서워 하고 있답니다."
"그래서... 그래서 내 눈에 띄지 않으려고 계속 저러는 건가? 미움 받기 싫어서 밥도 나 안 보이는 곳에서 먹고, 잠도 숨어서 자는 건가?"
"...네, 맞아요. 애정에 굶주린 어린 아이니까요. 나디아는 여보님을 친아빠보다 더 아빠로 여기고 있답니다."
"후우~, 알았다."
그는 한숨과 동시에 벌떡 일어나 짐칸으로 올라섰다. 그리곤 마차 모퉁이에 바짝 붙어누워 있던 나디아를 부르며 정좌했다.
"나디아."
"......"
"지금 안 자는 거 다 안다."
"......"
"차라리 정령을 속여라, 일어나라."
루카스의 강한 어조에 나디아가 마지못해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그러나 여전히 눈을 마주할 용기는 없었는지 등까지 돌리진 않았다.
"이리와라, 가까이."
"......"
루카스는 그런 그녀를 향해 자신의 오른 무릎을 탁탁치며 또 한 번 명령했다.
"어서."
나디아가 머뭇머뭇한 뒷걸음질로 다가오는데까진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루카스는 끈기 있게 기다려줬다. 흡사 하룻강아지 훈련시키는 조련사를 구경하는 느낌이 강했다.
"앉아라."
"......"
이번에 루카스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는 고사리 같은 나디아의 팔을 끌어당겨 무릎에 척 앉히곤 양팔로 그녀를 포근히 감싸줬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조금 힘들다. 마음이 찢어질듯 몹시 아프다."
"......"
"그러니까 나디아가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다."
"...아삐이..."
"나는 나디아가 웃는 얼굴을 보고 싶다. 그러면 많이 괜찮아질 거 같다. 나디아가 나를 도와줄 수 있을까?"
"아삐! 아삐이!"
겁 많은 소녀의 울음보가 팡 터지며 루카스의 가슴부근을 푹 적셨다.
"으앙-! 째성해여! 째성해여!"
"아니다. 너는 잘못한 거 없다, 그 아무 것도. 분명히 말하지만 모든 것은 내 탓이었다."
"흐아아아앙!"
한바탕 곡소리가 휘몰아친 뒤, 한동안 눈물샘이 마르지 않았던 울보의 마음에 활기가 되살아났다.
- 작가의말
- 다음 에피소드를 서둘러 진행하고픈 마음에 연참해봤습니다.그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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