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애와 편증 (5)
의심은 곧 확신으로 물들어갔다. 넓다란 마을광장 중심에 앉아 있는 페테르 공작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들을 에워싼 기사들의 숫자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입구에 있던 병력까지 전부 이쪽으로 달라붙고 있다. 이건 백 번 양보해도 단순한 과시가 아니야. 음? 킁, 킁... 피 냄새?’
막 부패하기 시작한 시신의 썩은내는 그의 신경을 자극했고, 그렇게 예민해진 감각은 마을 곳곳의 혈흔을 발견해냈다.
‘설마 이 공작 새끼가 눈치채고 개수작을?’
아비라단이 수신호로써 부하들에게 경고하는 와중에, 약 8m 거리에 있는 페테르 공작이 말문을 열었다.
“훌륭하다. 여러모로 고생이 많았군.”
“아닙니다, 공작님.”
주변 일대가 워낙 비정상적으로 고요하다 보니 둘 사이의 대화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내 아우와 맞교환할 인질이 바로 그 아이인가?”
“예.”
“음, 얼굴을 보여다오. 아아, 차라리 내게 가까이 데려오라. 내 눈이 침침하여 이 거리에선 잘 안 보이는구나.”
“......”
아비라단은 그 말이 거짓임을 간파했다.
‘그가 큰 관심을 보였던 키메라에 대해선 아예 묻지도 않는다라... 딴 마음을 품은 게 틀림 없군.’
페테르 공작의 얼굴은 여전히 냉정했으나, 의심이란 색안경을 끼고 집중해보면 그의 음성 속에 녹아 있는 감정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님을 알아챌 수 있었다.
“뭣 하느냐, 어서 그 아이를 이리 데려오지 않고?”
“...그러겠습니다.”
수하에게서 나디아를 인계받은 그는 페테르 공작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그렇게 대략 10걸음 정도 남았을 무렵 공작의 호위기사 한 명이 나서서 그를 제제했다.
“거기까지. 아이를 내게 넘겨라.”
“......”
“어서.”
“여기 있소.”
아비라단은 무심한 표정으로 나디아를 툭 던짐과 동시에, 품속에 잘 숨겨놨던 단검 하나를 꺼냈다.
- 치잉~!
반사적으로 허리 굽혔던 기사가 다급히 물러나려 했으나, 투구를 옆으로 꺾으며 그 틈새로 칼을 힘껏 욱여넣어 비틀어대는 아비라단을 떨쳐내진 못했다.
- 푹! 꾸드득...
“끄아아아악!!!”
거기서 만족하지 않은 아비라단은 자지러진 기사의 장검을 뽑아 공작에게로 달려들었다.
- 타타탓.
그의 몸놀림은 매끄럽고 재빨랐지만, 무려 공작의 호위로 정식 발탁된 기사들도 허수아비는 아니었다.
- 채재재챙!
짧은 사이에 몇 번의 검격이 살벌하게 오갔으나, 결국 아비라단은 페테르 공작을 인질로 잡지 못한 채 몸을 빼내야 했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페테르 공작은 호위대 틈바구니 속에서 치를 떠는 반면, 아비라단은 단단하게 뭉친 수하들 편에서 비아냥댔다.
“그러는 댁이야말로 무슨 개수작이신지?”
“가, 감히!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여봐라!”
- 처저저적!
칼과 창 끝이 자신들에게로 향하는 순간, 아비라단은 나디아를 잽싸게 낚아채어 인질로 삼았다.
“멈춰! 움직이지 마!”
“흐, 흥! 그, 그깟 여, 여아가 무, 무슨 대수라고...”
“그런 것치곤 목소리가 너무나 다급하시군! 공작답지 않게 많이 긴장하셨는데?”
“크읏...”
빈틈없는 포위망이 구성됐으나, 주도권은 더 이상 페테르에게 있지 않았다.
“허, 허튼 짓 말게!”
“전부 무기 버려!”
“당장 아이를 이리 내놓지 못할까!”
”썅! 너나 닥치고 부하들에게 명령해!”
“......”
”아이의 목이 썰려져 나가는 걸 실시간으로 구경하고 싶나?! 앙?!”
나디아의 목에 칼날이 닿자마자 페테르 공작이 꼬리를 내렸다.
“...버, 버려라! 다들 무기 버려라, 지금 당장!”
- 땅강. 철그덕, 깡, 깡~.
기사들은 공작의 명을 받들어 무기를 버렸고, 아비라단의 부하들은 재빨리 적당한 것들을 챙겨들며 전열을 재정비했다.
“자자, 공작 나리. 이젠 우리가 무사히 지나갈 수 있게끔 길을 터주셔야지?”
“......길을 열어라.”
아비라단은 포위망이 서서히 열리는 모습으 보며 나디아를 가까운 어느 부하에게로 넘겼다.
“네가 앞장 서라. 내가 뒤를 맡겠다.”
“옛!”
그런데 나디아를 받아든 사내가 여섯 걸음 정도 발을 뗐을 때였다.
‘...어?’
여기 모인 이들 가운데 실력이 가장 뛰어난 아비라단이 뭔가 이상하고 느낀 찰나, 방금 전 수하의 육체가 산산이 폭사했다.
- 푸확-!
“???”
어리둥절해진 시선들이 인근을 샅샅이 훑다가 멈춘 곳은, 다 부서져 잔해만 남은 마을회관 부근이었다.
“...헉!”
그곳에서 루카스를 발견한 젤코의 동공이 터질 듯 했다.
“그, 그 특급입니다! 여길 어떻게 알고?!”
“이런 미친! 페테르 공작, 네 놈이 우릴 팔았구나!”
아비라단이 즉시 노려봤으나, 페테르는 루카스를 향해 무릎 꿇고 싹싹비는 중이었다.
“사, 살려주시오!”
하지만 루카스의 관심은 공작에게도, 그렇다고 술렁이는 장내에도 있지 않았다. 그는 찰나지간에 빼돌린 나디아를, 러셀의 그림자나 다름 없는 하자르에게 맡기는 중이었다.
“나는 아직 할 일이 남았습니다. 나디아를 잘 부탁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이 신탁자님은 제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대로 크리스에게 데려가면 됩니다.”
“네! 맡겨주십쇼!”
씩씩하게 대답 마친 하자르는 나디아를 신주단지처럼 안아들더니만 눈 깜짝할 새에 어둑한 숲속으로 종적을 감춰버렸다.
- 파팟!
그런 하자르의 날랜 움직임은 루카스에겐 만족감을, 그 외의 나머지들에겐 쓰디쓴 낭패를 선사했다.
‘젠장! 예언자까지 잃었다! 이 상황을 어찌해야...’
아비라단은 머리 굴리는 반면, 페테르 공작은 더욱 더 큰 외침으로 목숨을 구걸했다.
“살려주시오! 우린 약속을 했잖소! 결과적으론 아이가 무탈하지 않았소이ㄲ...”
상당한 거리였음에도 마력이 담긴 루카스의 건조한 음성은 모든 이들의 귓가에 선명히 꽂혔다.
{넌 실패 했다.}
“하, 한 번만 더...”
{나는 적에게 두 번의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이어서 루카스는 페테르가 아닌 병력 전체를 두고 말했다.
{너흰 페테르 때문에 죽긴 싫겠지. 그렇기에 나는 너희에게 살 기회를 한 번 주겠다.}
“””?”””
{페테르의 목을 잘라내고, 저 범죄자들을 내 앞에 무릎 꿇려라. 그러면 너희의 목숨은 살려주겠다.}
“””!!!”””
여타의 기사와 병사들이 식겁했다. 다른 건 몰라도 페테르를 죽이란 루카스의 선언은 기아니크의 반역자가 되란 소리와 동일했기 때문이었다.
“ㅆ발! 난 억지로 끌려왔을 뿐이라고!“
“주, 죽고 싶지 않아!”
“내가 왜, 왜 여기서...”
겁 많은 페테프 공작이 원정길에 국경지대 마을들을 훑으며 강제동원한 기사들일수록 억울함이 극에 달했고, 이내 무리의 끝자락에서부터 도망자들이 중구난방으로 뻗어나갔다.
- 스각-!
그러나 그런 이탈자 중에서 성공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루카스의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린다 싶은 순간, 도망자 수십 명의 육체가 앞선 시체 파편과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 푸화악-!
그렇게 단말마도 없이 잘게 분쇄된 시체들의 흔적은 그들의 경계선으로 거듭났다.
{그 밖으로 나가는 놈. 그 도망자는 죽이겠다. 누구도 예외는 없다.}
“””?!!!”””
그들의 도주의지가 말끔히 지워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던 아비라단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이들의 군중심리가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왜 단체로 저항을 안 하지? 페테르와 호위대를 빼고도 족히 2천 명은 되잖아? 이기는 건 몰라도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는 건 가능하지 않나?’
고개를 모로 꼬는 그와 달리, 어젯밤 루카스의 손에 고인이 된 숫자가 현재 총합보다도 많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병력들은 강요된 선택지와 거기서 파생된 중압감에 시달렸다.
‘어제도 못 도망쳤는데, 오늘이라고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악마야, 저건 악마라고!’
‘씨ㅂ! 씨ㅂ! 씨ㅂ! 도대체 어쩌다가! 씨ㅂ! 씨바아아아알-!’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들은 결국 죽음보다 구차한 삶을 선택했다. 굳이 똘똘 뭉쳐서 시도를 해야 한다면, 가능성이 넉넉한 쪽으로 들이박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었다.
- 처저저적!
마음을 다잡은 무기들이 조금씩 방향성을 달리했다.
“...이, 이 고얀 것들! 감히 주인에게 이빨을 드러내?!!!”
“공작님, 위험합니다. 저희 뒤편에 서십시오!”
이윽고 2천여 개의 무기 전부가 결의를 다졌을 무렵엔, 공작의 호위대 스무 명과 아비라단의 무리 역시 합의를 이뤘다.
“이보쇼, 응어리진 건 우선 여기서 살고 나서 계산합시다.”
“...좋다.”
이처럼 양분된 패거리 중 혈투를 개시한 쪽은 당연히 숫자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무리였다.
“””죽여!!!”””
“””으아아아아아!!!”””
* * * * *
결과적으로 전투는 머릿수 많은 쪽이 이겼다. 그러나 이겼으되 대승을 이루진 못했다.
전투사 등급, 곧 힘의 척도는 그만큼 객관적이었고 또한 명확했다. 6급 이하의 2천여 병력집단이 최소 5급으로만 구성된 36명에게서 승리를 쟁취하는 과정은 여러모로 처절했던 것이다.
실제로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3백 명 중에 팔다리가 멀쩡한 사람은 절반 이하였으니, 이 시대의 권력자들이 고급인력의 육성과 영입에 열과 성을 다해야 하는 이유가 다시금 객관적으로 입증된 셈이었다.
그래도 생존자들은 루카스가 약속을 지켰다는 것에 안도하고, 어떻게든 살아남았음에 만족하며 류드라 마을을 서둘러 빠져나갔다.
생존자들이 줄행랑치고 마을에 남겨진 것은 핏물 찰박이는 전장과 폐혀, 그리고 온기 잃은 시체들. 또한 마지막으론 아비라단과 젤코를 포함한 5명이 전부였다.
거칠게 잘린 페테르 공작의 머리를 오른발로 사뿐히 즈려 밟고 있는 루카스. 그런 그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잔당들은 그 유형화된 살기에 숨이 턱턱 막혔다.
‘무, 무슨 살기가...’
프라나를 재주껏 다루는 사람들이었기에 더 예민하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기세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다! 저게 통제되지 않고 그대로 뿜어졌더라면 나, 나는...’
아비라단은 피할 수 없는 죽음, 달이 없는 밤보다 시커먼 저 살기에 닿는 순간 자신의 심장은 겨우 몇 분도 버텨내지 못하리라 확신했다.
그러던 그때, 루카스의 입술이 천천히 떼어졌다.
“음? 내 경고를 무시한 놈이 여태 살아있었군.”
“앗, 그게 저 오, 오해가... 흐흡!”
젤코의 변명은 곧 비명이 됐다.
- 뻐억! 펑-!
가슴에 격한 충격을 받고 공중에 붕 떠버렸던 젤코의 사지가 한순간 육편과 진물이 되어 흩날렸다. 그런데 그의 고통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 화륵, 화르륵!
‘마, 마법?!’
청색의 화염이 ‘쿵’하고 땅에 떨어진 젤코의 몸통을 휘감았다. 그것은 무서울 정도로 그의 절단부위만 집요하게 지져댔다.
“끄아아아아아아!!!”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었던 순간은 루카스의 손바닥이 젤코의 입을 꽉 틀어막은 이후부터였다.
- 터헙.
”...으헙?!!!”
뜨거운 화염은 젤코의 코와 입을 태우는 것도 모자라, 그의 치아와 뼈를 한데 녹여 위아래로 눌러 붙이고야 말았다.
“으으으으으읍!!!”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을 받은 젤코가 경련을 일으키며 쇼크사하려 하자, 루카스는 곧바로 값비싼 치유물약 한 병을 젤코의 몸에 뿌렸다.
- 치이이이이...
기절은 용납해도 제멋대로의 죽음은 용납하지 않겠다란 그의 의지가 강렬하게 엿보이는 행위였다.
“...끄륵... 으으읍으...”
이제 젤코는 단순히 자연회복이 불가능한 수준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고통에 허우적거려야 하는 운명을 선고 받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동안 살면서 볼 거 못볼 거 다 봤다고 생각했던 아비라단조차 젤코의 처참한 모습를 외면하며 눈마저 질끈 감아버렸다.
‘으으... 절대 본보기로 삼은 게 아니야! 저건 단순한 분풀이야!’
화가 덜 풀린 듯한 루카스의 낯빛만 봐도 아비라단는 이 추측에 전재산을 걸 수 있었다. 그저 주위 여건이 마땅찮아 루카스가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된 거란 확신이 들었다.
더불어 다른 이들도 바보가 아니었던 고로, 지금 이 순간 이후로 그들의 최대 맹점은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편히 죽을 수 있는가?’에 있음을 직시해버렸다.
그렇게 모두가 마음 속으로 절망하는 그때, 루카스가 뜬금없이 희망을 논했다.
“너희 조직 정보를 나불댈 녀석은 살려준다.”
“””!!!”””
생각치도 못한 행운에 나머지 4명 전원이 환희의 춤이라도 추며 혀를 놀리려 하는데, 그 다음으로 이어진 루카스의 이야기가 그들의 언행보다 빨랐다.
“근데 그런 놈은 한 명으로 충분할 것 같군.”
“””.........”””
그렇게 피어난 두 번째 참극은 앞선 처음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신속했고, 또한 몹시 처절하기까지 했다.
- 푸욱-!
“끄읍!”
“죄송합니다. 먼저 가십시... 어헛?!”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어 급소를 피한 아비라단이 공격자에게 앙갚음했다.
“크으윽... 니가 이럴 줄 알았다. 이 새끼야!”
“어억, 컵!”
과연 타인에게 불행과 피해를 안겨주며 사는 자들의 우애는 그렇게 깊지가 않았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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