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떨결에 강림 (2)
'하여간, 내세울 거라곤 허세뿐인 놈들의 생각은 어쩌면 이렇게 다 고만고만한지 원...'
그렇지만 애제자 가르디엔의 간청에 못 이겨 참전한 데다가 국왕의 특명까지 받고 온 만큼, 여기서 기분 아니꼽다고 무책임하게 뒤로 빠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이내 껄끄러운 마음을 추스르며 간략한 설명을 덧붙여줬다.
"솔직히 단순하게 저기 시체들뿐이라면, 저 혼자서도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습니다."
"저, 정말이십니까?"
"그리고 객관적으로도 근위대원 한 명 한 명이 뛰어난 정예이기 때문에, 막대한 희생을 불사한다고 치면 굳이 제가 관여하지 않아도 승산은 제법 있을 겁니다."
"아니 그러니까 제가 디마우스 님과의 연계를 제안하는 것 아닙니까?"
말런 대장의 칭얼거림이 쉬이 끝날 것 같지가 않자, 디마우스의 눈매에도 자연스레 힘이 실렸다.
"하지만 그 다음은요? 그 다음은 고려해보셨습니까, 말런 대장?"
"다음...이요?"
"저 시체들을 일으켜 세운 카이므! 그러니까 기진맥진한 병력으로 개개인의 전투력이 엄청난 비스마우어 일족들을 감당하실 수 있겠냐는 말입니다."
"그야......"
만반의 준비를 끝낸 상태인 고위 마도사와, 체력 바닥난 5~7급 내외인 기사단원의 싸움. 이는 지나가던 무지렁이조차 '그건 당연히 기사의 자살행위요, 내가 바보인 줄 아시오?'라고 성내며 되물을 우문이었다. 당연히 둘 다 인간이며 팔다리 상태가 온전하단 가정이 전제되는 질문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그건 아무래도 좀..."
"자칫 집 전체가 불에 삼켜지려는 참인데, 발등에 작은 불똥 좀 튀겼다고 난리 쳐선 잘 될 일도 망칩니다! 더 크게 보십시오, 말런 장군!"
"......죄송합니다. 디마우스 님."
속내야 어떻든 비굴하게 고개 숙이는 부대장을 지켜보던 디마우스는, 전투를 앞둔 상황에서 쓸데없이 대립각을 세운 것 같은 잡념이 들어 몇 마디 말을 더 이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현 위치에서 강행군으로 지친 병사들을 잠시 쉬게 하는 겁니다. 가르가 요정족 지원군과 함께 당도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현재로선 최선이에요."
"휴식 중에 선제공격을 당할 위험도 있는데......"
"그건 250m 안팎의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저것들이 우리에게 달려들지 않는 걸 보면 안전을 장담할 수 있습니다. 흑마법사들은 소환을 완성하기까지 시간을 버는 게 목적인 겁니다. 그러니 우리 쪽에서 자극하지 않는 이상 그들이 먼저 소모전을 시작하지 않을 거라 봅니다."
"흠......"
"가르를 믿고 기다리십시오. 지금껏 그 녀석은 단 한 번도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습니다. 솔직히 무슨 방법을 썼는진 저도 모르겠는데, 이 상황을 타계할 수준의 원군을 데려오고 있는 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솔직히 그토록 폐쇄적인 요정족을 설득했다는 소식도 믿기 어렵습니다만... 예, 알겠습니다. 일단 디마우스 님의 고견을 따르겠습니다. 어이!"
그렇게 은근슬쩍 디마우스에게 책임을 전가시킨 말런 장군은, 그의 부관에게 손짓하여 병사들에게 휴식을 명령했다.
- 우르르.... 우르르... 쿠르르르릉...
그 뒤로 30분이나 흘렀을까? 이번 토벌대의 목표지역인 탄광을 중심으로 먹구름이 나선형으로 잔뜩 모여들었다. 이와 더불어 구름들이 점점 소용돌이처럼 회전하며 가속화되는 꼴은 마치 거대한 폭풍으로 진화할 것만 같았으며, 테두리 바깥부분에선 이미 자잘한 번개를 머금는 중이었다.
"말도 안돼! 아무리 못해도 이틀은 족히 여유가 있었을 터! 이, 이건... 빨라도 너무 빨라!"
이 뜻밖의 표징을 분석한 디마우스가 경악했다. 그래도 그대로 충격에 머물러 있기보단 서둘러 경고하는 모범적인 면모를 보였다.
"말런 장군! 병사들을 어서 철수시켜야 합니다!"
"아, 알겠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눈으로 보고 있었던 지라, 말런 장군은 그 어떤 대꾸도 하지 않고 즉각 수긍했다.
"저, 전 병력! 후, 후퇴하..."
- 번쩍! 번쩍! 콰과과과과쾅!!!
그러나 말런 대장의 명령을 끝까지 들은 이가 없었다. 비할 데 없이 크고 웅장한 천둥소리가, 모든 이의 고막을 신랄하게 강타했기 때문이었다.
- 쿠아아아-!!!
더군다나 소리만 요란뻑적지근한 게 아니었다. 하늘에 꼬여 있는 구름의 한 가운데에서 발발한 크나큰 벼락은, 탄광 중심부까지 거침 없이 뚫어버렸다.
"흐읍!"
"어이쿠, 주인 나리!!!"
잠시 후 낙뢰의 충격파로 인한 먼지 바람이 토벌대를 향해 맹렬히 덮쳐오자, 메토가 뛰어들어 디마우스를 감쌌다.
실로 건장한 남성조차 몇 발자국 뒤로 휘청하게 만들 만큼 거센 후폭풍이 병력을 훑으며 퍼져나갔다.
"...자, 잠깐... 이건?!"
강풍이 잦아들고 세상이 잠잠해진 얼마 동안, 디마우스는 누구보다도 먼저 이변을 감지했다.
과연 마흔이란 젊은 나이에, 국왕에게서 대마법사의 칭호를 부여 받은 인물다웠다.
"이... 이... 얼마나 끔찍하고 거대한 마력 집합체인가?! 정말로 그들이 상위차원의 마족, 아니 마왕을 현세로 강림시켰단 말인가?!!!"
"주, 주인 어른! 그 성공이라 하심은......"
"우리가... 한 발 늦었다, 메토."
"......"
의미심장한 디마우스의 대답과 고갯짓은 곧이어 청각으로 재확인되었다.
- 파파팍!
조금 전 벼락이 직격한 산기슭에서 탁한 빛이 강렬하게 번뜩였다. 그리고 기괴한 소음이 퍼져 나와 산맥일대를 휘저었다.
- 끼에에에에에에에에에--!!!
"크읔!"
"아아악!"
천둥소리 앞에 살짝 움찔하기만 했던 일부 병사들마저도, 내면의 공포를 끄집어내는 이 괴음에는 버티지 못했다.
인근의 모든 사람이 너나 할 것 없이 웅크려 귀를 틀어막으며 이를 악 물었다.
"뭔가... 잘못 됐어."
재차 정신을 가다듬은 디마우스는 소환된 마력 중 일부가 유실된 것을 알아채고 이상함을 느꼈다.
곧바로 그의 머릿속에 온갖 추론이 몰아쳤으나 곰곰이 따져볼 겨를이 없었다.
이제껏 하릴 없이 멍하니 서 있기만 했던 마물들에게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 킁, 킁킁! 으어어어어....
- 꾸어... 꾸어어어어...
무엇보다 그들의 움직임에서 통일성이 사라진 것이 큰일이었다.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와 같았다.
물론 여전히 대다수의 무리는 제 자리를 우두커니 고수했지만, 열에 한두 마리 가량은 남은 감각으로 신선한 먹이를 탐색하며 본능과 공격성을 되찾아가는 중이었다.
"말런 장군! 뭔가 단단히 틀어졌습니다! 저들의 통제가 일부분 풀렸어요!"
"그, 그럼 바로 후퇴를..."
"아니요! 보시다시피 상황이 완전히 뒤집어졌습니다. 우린 지금 바로 돌격해서 싸워야 합니다!"
방금 마왕이란 소리를 들은 직후 두려움에 몸서리치던 말런 장군은 '이게 미쳤나'란 표정으로 디마우스를 쳐다봤다.
"...예?!"
그러나 디마우스는 똑같은 눈빛을 그에게 되돌려주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현 상황에서 마물의 통제력이 사라졌다는 건, 이를 담당하던 마도사들의 죽음 또는 빈사상태를 의미합니다. 때를 놓쳐선 안 됩니다! 후퇴 전에 서둘러 저 군세를 최대한 괴멸시켜야 해요! 제가 전폭적으로 지원할 것이니 병사들에게 진격을 명령하십쇼!"
"아니, 차라리... 당초 계획대로 요정족의 원군과 합류해서 치는 편이 더..."
"방금 전 일로 카이므 내부에 예기치 않은 혼란이 발생한 게 틀림없습니다. 정신 없는 이때를 공략해야 합니다. 기습입니다, 기습!"
"끄응..."
"말런 장군! 본능대로 미쳐 날뛰는 언데드와, 훈련용 허수아비와 다를 바 없는 언데드! 이중에 뭘 상대하고 싶은 겝니까?!"
"으으..."
디마우스는 결정장애와 함께 전전긍긍하는 말런을 응시하며 크게 탄식했다.
'아니, 장군이란 자가 시시각각 뒤바뀌는 전황조차 똑바로 읽지 못 한다고? 정녕 우리 군세의 한 축을 꿰차고 있단 말인가?! 이 꼴이니 다른 국가들이 우리의 국경을 넘실넘실 넘보는 것 아닌가! 하, 정말 통탄스럽구나!'
한심하기 짝이 없는 속마음을 가래침과 함께 탁 뱉어낸 디마우스는, 이쪽으로 몸을 비튼 좀비무리들을 향해 자신의 철제지팡이를 쭉 뻗었다.
지금 상황은 이성과 이성이 맞부딪치는 날카로운 전략과 전술로 승리를 도모하는 그런 전쟁이 아니었다.
한 번의 판단이 쫓는 사냥꾼이 되느냐, 쫓기는 사냥감이 되느냐를 결정하는 단순한 생존싸움에 불과했다.
'모름지기 막싸움은 선수필승이라 했었지.'
그렇기에 디마우스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마력을 매개체로써 이면세계의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정령들이여, 그대들의 언약을 떠올려 이 계약자의 간곡한 부탁을 귀담아 들어주오!"
그의 짧은 영창 이후, 반딧불 크기의 오색 빛덩이가 지팡이를 중심으로 아롱아롱 모여 맺히기 시작했다.
'이번 기회에 최대한의 피해를 내야만 한다. 마력을 아낄 때가 아니야. 다소 무책임하더라도 나머지 뒷일은 가르에게 맡길 수밖에......'
이렇게 단단히 마음 먹은 그의 다른 손이 상의 속에 감춰진 목걸이를 꺼내어 움켜잡았다.
- 이이잉~.
그러자 목걸이장식의 핵심이라 볼 수 있는 주먹크기만한 사파이어가 푸른빛을 환하게 머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땅이 웅장하게 진동했다.
- 드두두두두두...
거친 땅울림 직후. 통나무 두께의 바위들이 촘촘한 간격으로 지면 밑에서 치솟았다. 높이만 30m인 이 돌덩이들은 마물들을 가두는 튼튼한 울타리가 돼줬다.
- 쩌저저저적... 쿠우우우웅...
이 다음엔 4m 골렘을 연상케 하는 정령, 통칭 '바위 수호자'가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대지 정령들이 다른 정령들보다 빠르게 디마우스의 부름에 응답한 모양이었다.
"아직이야! 겨우 이 정도론 키메라까지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해!"
어느덧 이면세계에서 듬직한 아군을 100여 기 이상 불러낸 디마우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마나를 정령소환에 필요한 에너지로 치환시켰다.
물론 이 급박한 시전을 이어가는 와중에도 여전히 어안이벙벙한 부대장에게 호통치는 일은 까먹지 않았다.
"말런!!!"
"예, 옛?!"
"당장 진군하지 않으면!!! 내 가문에 맹세코 지엄하신 국왕폐하의 분노와 직면토록 만들겠다!"
"헛! 아, 아닙니다! 즉시 대마법사님의 명을 따겠습니다!"
허술하게만 평가해왔던 디마우스로부터 불 같은 협박이 대뜸 튀어나오자, 말런은 그만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댔다.
"지, 진격! 진격하라! 저 마물들을 다 쓸어버려!"
여러 모로 목숨이 경각에 달린 말런 대장이 급하게 목청을 높였지만, 그의 김빠진 명령에 움직인 병사는 없었다.
- 작가의말
@ 전투사(무인) 등급
(1) 요약
: 프라나 보유량에 따른 등급체계. 오드노아 종족이 오랜 세월 누적해온 실측 데이터를 토대로 규격화시킨 분류이다.
(2) 분류기준
: 프라나 보유량과 무인 경지의 상관관계, 즉 전사의 깨달음을 뒷받침해주는 최소 보유량.
(3) 분류표 및 구간별 직급 평균(직급은 인간문명 기준)
- 특급 ::: 논외, 기반 데이터 부족.
- 1급 ::: 24.0P 이상 ::: 범주화 불가
- 2급 ::: 18.0P 이상 ::: 범주화 불가
- 3급 ::: 12.0P 이상 ::: 범주화 불가
- 4급 ::: 7.2P 이상 ::: 군단장, 왕실 근위대장
- 5급 ::: 5.4P 이상 ::: 백부장, 고위층 호위기사
- 6급 ::: 3.0P 이상 ::: 십부장
- 7급 ::: 2.4P 이상 ::: 오인장 or 상급 병사
- 8급 ::: 0.6P 이상 ::: 일반 병사
- 9급 ::: 0.6P 미만 ::: 훈련병, 수련생
(4) 부연설명
- ‘프라나(Prana)’는 동양대륙에서 흔히 사용되는 ‘내공’과 유사한 개념. (0.1P = 내공 1년)
- 오차의 가능성으로 인해, 등급의 최종확정은 실전검증을 거쳐 이뤄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 대체적으로 상급은 1~3급, 중급은 4~6급, 하급은 7~9급을 의미한다.
(초급, 중급, 고급으로 표기하는 나라도 존재함.)
(5) 전파 역사
- 권력층들이 자신들의 전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오드노아의 전투사 등급체계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 그 기원.
- 기존에는 동방대륙에서 흘러들어온 경지의 개념으로 실력을 구분지었었으나, 보다 공정한 지표로써 활용가능한 전투사 등급이 차츰 대중화 되었음.
- 평균 수명이 1천 년인 오드노아 종족의 기준이 인간에게 그대로 적용됨에 따라, 인간들 중 4급 이상의 전투사가 많이 희귀한 편.
* 엔진배기량에 따른 자동차 분류에서 영감을 얻은 소설 내 설정.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