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벌이 (3)
* * * * *
아군의 시야에 적군이 들어왔다면, 적들 또한 거진 마찬가지라고 봐야 했다.
"저 자가 바로 루치펠의 직계자?"
전해 듣던 것보다 훨씬 막강한 루카스의 존재력을 피부로 체감한 엔마노의 심장이 쫄깃해졌다.
"아무리 기습이었다 해도 3명의 직계자가 당했다는 보고가 도통 믿기지 않았었는데... 저 자를 직접 보니 확실히 이해되는군. 과연 크발딘 님의 판단이 옳으셨다."
고속이동 중인 그는 수신호를 통해 마룡부대의 진격속도를 더욱 높였다. 그리곤 상관의 지시로 중간에 챙겨온 의장의 지팡이, 즉 아지프-케이온을 챙겨 들었다.
"...어?"
그런데 전력으로 맞부딪칠 준비를 하던 적군에게서 의아한 움직임이 포착됐다. 예비대로 추정되는 타락천사군단 무리가 루카스만을 홀로 남겨둔 채, 우사래아 성채를 향해 미친듯이 돌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뭐지? 제 정신인가?"
단신으로 싸울 준비를 하고 있는 루카스. 그것을 바라보는 엔마노에게서 어이없는 헛웃음이 새어 나오는 건 마계의 상식으로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 군세를 홀로 막을 수 있다고 판단을 했다?"
아레스급의 마룡 한 마리가 작정하고 날뛰면, 아무리 타락천사라 할지라도 한둘 정도 무조건 발목 붙잡히기 마련.
그런데 무려 그런 2천여 마리의 고룡을, 또한 기수로 올라탄 그만큼의 고위마족을, 거기에 직계자 중에서도 특별히 손꼽히는 자신의 존재를, 루치펠의 직계자란 녀석은 이 모든 것을 깡그리 무시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엔마노의 관점에서 바라본 루카스는, 본인의 힘에 취해 눈이 멀어버린 어리석은 마족에 불과했다.
"참나, 오만의 대명사인 루치펠의 직계자답다고 해야 하나? 실로 가소롭기 짝이 없구나! 잠시 과대평가했던 내 자신이 다 부끄럽군!"
빈정이 팍팍 상한 엔마노는 아지프-케이온을 앞으로 뻗으며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래, 차라리 잘 됐다! 루치펠의 직계자와 그 군단을 마계에서 지워버리면, 분명 슈펜트 님께서도 대단히 기뻐하실... 헛?!"
- 츠츠츠츠...
그런데 그의 주문이 채 완성되기도 전, 루카스의 신형이 거짓말처럼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커다란 위기를 직감한 엔마노가 당초 공격용으로 끌어 모았던 마력 대부분을 그 즉시 방어로 전환시켰다. 또한 본능적으로 환영마법을 일으켜 분신을 만들곤 마수의 등에 넙죽 엎드렸다.
과연 직계자다운 육감대로 그의 처신은 틀리지 않았다.
- 쐐애애애애액-!
대기를 찢는 듯한 절단음. 먹이 삼은 공간 자체를 찢어발기는 듯한 그 굉음은, 루카스의 잔상이 엔마노의 분신을 스쳐간 한참 후에야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 키에에에에엨!!!
"끄아아아!"
이 일격으로 대량 생성된 토막들은 마룡과 기수의 구분이 따로 없었다. 애초에 루카스의 의도가 엔마노의 몸뚱이를 단번에 양분시키는 것에 있었던 터라, 그 외의 나머지 여파 따윈 아무래도 좋았던 영향 때문이었다.
'...어, 어디냐?!!!'
단번에 30여 기의 고룡 전력을 상실한 엔마노가, 황급히 주위를 살피며 루카스를 찾았다.
- 써걱!
그가 갈팡질팡하는 아비규환 속에서 참상의 원흉을 다시 찾았을 무렵엔, 이미 병력의 90여 기 이상이 더 루카스에게 유린당한 상태였다.
"꺼어엌!"
"미친 놈아! 조준 제대로 안 해?!!!"
악마형상의 루카스가 나타났다가 사라질 적마다, 살덩이들이 찢겨져 여기저기 튀겼다. 당연히 엔마노 측 전사들도 저항하여 맞섰으나, 엄청난 속도로 치고 빠지는 그의 몸놀림에 아군피해가 속출했다.
- 크롸롸롸롸!
- 쿠웅-!
땅으로 처박힌 희생양의 대부분은 마룡들이었다. 물론 약 250m의 거대한 몸뚱이가 원인인 탓도 있었지만, 기수들이 적극적으로 마룡을 방패로 삼아 회피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크게 작용했다.
"망할! 여기서 시간을 더 주면 결국 우사레아를 빼앗기고 말 것이다!"
육탄전에 특화된 마족들도 제각각 악마형상을 취하며 우르르 달려들었으나 결과적으론 모두 허사였다. 차라리 횃불에 뛰어든 나방들이 그들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을 터였다.
"미치겠군!"
그렇다고 용을 대표하는 강력한 브레스와 마법을 난사할 수도 없었다. 루카스가 저렇게 전열 한복판에서 병력들과 뒤엉켜 날뛰고 있으니, 성질머리대로 행동했다간 되레 아군의 피해만 가중될 게 뻔했다.
이는 루카스가 마룡들의 꼬리와 물어뜯기 공격마저 역이용하는 모습만 봐도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저놈이 혼자 상대하겠다고 나섰던 건 오만이 아니었다. 능히 이런 난전을 유도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어!'
엔마노의 눈에 비친 루카스는 사지로 뛰어든 어리석은 먹잇감이 아니라, 개미둥지를 끌어안고 맛을 탐닉하는 개미핥기 그 자체였다.
그렇게 모든 역량을 발휘하지 못한 엔마노의 병력들이 속수무책으로 절반가량 상실됐을 때쯤, 우사래아의 성채 결계가 전원을 올린 형광등처럼 깜박이기 시작했다.
- 파팟, 팟, 팟, 타탁! 위이이이이잉~!
"이런 젠장!"
앞뒤 정황상 우사래아의 심장부가 기어이 뚫린 게 틀림 없었다. 거기에 성채 결계표면 광채에 변화까지 일어나는 것으로 볼 적에, 그들이 장악한 성채의 마력핵을 이용하여 영역통제권까지 먹어 치우고 있음이 확실했다.
'정말이지, 딱히 시험하고 싶지 않았던 최후의 수단마저 꺼내게 만드는군.'
설상가상으로 이번 전투에서 어떤 이득도 취하지 못한 엔마노는, 손에 들린 지팡이를 내려다보며 어금니를 빠드득 갈았다.
아지프-케이온.
한처음 선계의 최고신들이 마계라는 감옥영역을 조성할 목적으로 만들어낸 6개의 신물 중 하나인 이 지팡이의 주용도는 '속박'과 '추방'에 있었다.
그 본래의 강력한 속박의 힘은 선계의 어떤 신들도 벗어날 수 없었으며, 또한 그렇게 묶인 존재는 자유로이 동일 또는 하위차원으로 내던질 수 있었다고 한다.
비록 제우스의 번개로 손상된 이후의 속박력은 굉장히 비루하기 짝이 없음은 물론, 추방의 힘마저 통제불능인지라 오늘날엔 단순한 마력증폭 도구 정도로 취급 받는 실정이었다.
- 우웅-!
그런 신물이 새로운 방법을 강구해낸 엔마노의 손에 들려 푸른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좋아, 허접한 속박을 보조하는 건 13개의 마법진만으로도 충분하다. 반면 추방은··· 예상보다 불안정하기 짝이 없군! 그래도 내 마도구로 인위적인 방향성을 몇 갈래 부여한다면... 그래, 그 정도면 충분히 해 볼 만하겠지!'
엔마노는 다른 한 손으로 청동재질 느낌이 강한 남포등을 소환하더니 그 물건에도 마력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
전장 끝머리에서 기이한 마력을 감지한 루카스는 멈칫하여 시선을 돌렸다.
'적장이 살아있었다고?! 그것도 멀쩡히?!'
엔마노가 무슨 짓을 벌이는진 몰라도 그의 손에 들린 황소머리 크기의 등불이 발하는 핏빛은 범상찮았다.
만약 그가 더욱 자세히 살펴봤다면 그 유리 속의 불꽃은 수만 개의 필멸자 영혼들이 소멸하면서 드러난 절규의 몸짓임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창 도륙 중이던 루카스가 행동을 멈추고 엔마노의 부대와 거리를 멀찍이 벌린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정신 차려라! 루카스!'
그는 칼을 들지 않은 왼 주먹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격했다.
- 빡!
하지만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했는지, 그는 대검을 왼쪽 겨드랑이 밑에 대더니 그대로 밀어 올리며 단번에 잘라버렸다.
- 촤악! 파스스스...
그렇게 어이없이 떨어져 나간 부위는 지면에 닿기도 전에 그대로 산화하여 사라졌다.
"뭐, 뭐야! 왜 저런 미친 짓을..."
"물러서라!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기껏 호기가 엔마노의 부하들에게 뜬금없이 주어졌지만, 이런 루카스의 자해행위를 이해 못한 그들의 경계심이 그것을 놓치게 했다.
"끄흐으음!!!"
한편, 그 사이 루카스는 상처의 통증과 새로운 팔이 재생되는 순간의 고통을 이용해 마음을 추슬렀다
.
'내가 강한 힘은 얻었을지 몰라도 정신은 오히려 도태됐군. 우쭐하지 마라, 루카스! 결코 오만이 날 집어삼켜선 안 된다! 교만의 결과는 고작 팔 하나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보다 날카롭게 정신을 바짝 갈아낸 그는, 양손으로 대검을 꾹 거머쥐었다. 그리곤 맨 처음 죽였다고 오판했던 엔마노를 다시 최우선 표적으로 삼았다.
"읔, 쉽게 당할까 보냐!"
루카스의 시선이 자신에게 고정됐음을 느낀 엔마노 또한 잔뜩 긴장했다.
분명히 악마형상을 취한 루카스의 얼굴은 밑밑한 금속과도 같았을 뿐인지라 표정이라곤 찾으려야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마노는 루카스가 자신의 영멸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품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다-마샬트(Ida-masalt)!"
엔마노는 아직 남아 있는 병력들을 향해 지체 없이 대규모 전이를 시전했다.
- 파파파파팟!
그로 인해 층층이 재집결된 병력은 엔마노와 루카스의 사이를 가르는 두터운 성벽이 되었다. 결과적으론 막대한 마력을 추가로 소모해야 했지만, 엔마노는 지금 당장 그런 걸 일일이 따질 때가 아니었다.
"막아라! 막아야 한다! 내 마법이 완성될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날 지켜라! 그래야 네놈들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이야!!!"
불행히도 이 외침은 루카스의 귀에도 온전히 전해져 들어갔다.
"과연 비장의 한 수가 남았었군! 허튼 술수를 부리기 전에 꿰뚫어주마!"
이후 루카스의 칼끝에 힘이 응축되어 고이기 시작했다. 이에 질 세라 엔마노의 병력들 또한 이것을 막기 위해 서로의 힘을 모았다.
- 치지지지직···
갑자기 전장의 흐름이 창과 방패 같은 형세로 돌변했다.
"어떻게든 막아!!!"
- 콰아아아아!
1천여 마리의 마룡이 한 지점을 향해 발산하는 숨결의 위용이 어마어마했다. 실제로도 이전에 디르세마니 성채감옥 정문을 아작냈던 루카스의 맹렬한 돌진을 아슬아슬하게 저지해냈다.
방패를 뚫지 못한 루카스의 육감이 엔마노에게 더 이상의 시간을 허락해선 안 된다는 경고를 보냈다.
"아니... 이것들이!!!"
그는 즉각 방금 전 2배 이상의 마력을 끌어 모아 또 한 번의 일격을 감행했다.
- 파아아아아-!
엔마노측 마룡들도 서둘러 브레스를 다시금 발포하여 대응했지만, 이번엔 루카스의 돌파력을 끝내 견뎌내지 못했다.
- 쩌저저저적!
설상가상으로 첩첩산중과 같이 방비해놨던 마족들의 보호막마저 시원한 바람구멍과 함께 순차적으로 박살 나버렸다.
- 쩌엉-! 투확!
"커어어어어어엉!"
"으아아아악!"
그렇게 온갖 것들을 죄다 뚫어내던 루카스의 대검은, 기어이 엔마노의 목전으로 향했다.
'이제 끝이다!'
하지만 이 기세 등등한 루카스의 쾌재는 목적달성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
고작 한 치 남은 상황에서 루카스는 그 이상을 나아가질 못했다. 심지어 눈꺼풀조차 깜박일 수가 없었다. 마치 그와 그 주변의 공간자체가 완전히 마비된 것만 같았다.
"으휴휴~, 아슬아슬했군. 하하핫!"
마력이 고갈되어 양볼마저 폭 파인 엔마노는, 품속에서 손수건을 여유로이 꺼내어 땀이 송글송글 맺힌 이마를 스윽 닦아냈다.
"대단합니다! 정말이지 현재 시점에선 저희가 당신을 이길 재간이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정해야겠군요! 저희 크발딘 님께오서 추방에 대해 왜 그토록 거듭 강조하셨는지를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
"거 참 아쉽네요. 당신이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는 이때 영멸시켜줘야 딱인데... 지금 제 수준으론 이 공간에 간섭할 수가 없으니... 이거야 원... 쩝..."
"......"
"다소 불편하겠지만 조금만 더 그대로 기다리십시오. 제가 작업 쳤던 대상 차원들 중 하나와 서로 곧 연결될 겁니다. 그렇게 이 불편한 추방은 완료가 되는 거죠. 하하하!"
엔마노는 이때 비아냥거림을 멈췄어야 했다. 그가 만약 흥에 도취해 등을 보이지만 않았더라면, 루카스의 눈동자가 그의 뒤통수를 향해 스윽 돌아간 것을 알아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당신이 방법을 찾아 마계로 되돌아올 때쯤이면, 각자 대악마님께 추가 권능을 부여 받은 직계자들 몇몇이 기다리고 있겠군요! 에... 혹시나 당신이 마법에 무지하다면? ...푸훕, 어쩌면 마계가 크발딘 님 발 아래 이미 통일된 이후일 수도? 크하하하하!"
"......"
"여하튼 그땐 저도 이렇게 뒤로 숨지 않고, 기꺼이 상대해드리겠습니다."
엔마노가 동상처럼 굳어버린 루카스의 면전 앞에서 알짱거리며 한껏 떠들고 있을 때, 루카스의 발 밑 부분에서 작고 검은 웜홀이 생겨났다.
"오! 이제 끝났군요! 아무쪼록 부디 즐거운 여흥이 되시길! 으하하하핫!!!"
"...누구... 마음...대로..."
"어?"
분명 작은 목소리였으나, 그의 지척에서 조롱 중이던 엔마노는 그것을 정확하게 들을 수 있었다.
"뭐야?! 어, 어떻게?!!!"
그가 루카스의 전신이 떨리는 것을 목격했을 땐, 이미 도망치기에 너무 늦은 상태였다. 힘으로 속박을 깨트린 루카스의 왼손이 엔마노의 머리카락을 거세게 움켜잡았다.
- 콱!
"다, 당신은... 설마 ㄱ...!!! 흐읔!"
엔마노가 갑자기 떠오른 무언가를 말하려 했으나, 이미 웜홀에 하반신이 절반가량 삼켜진 루카스에겐 그의 나머지 뒷말까지 다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 스걱! 슈아아아아아아-!
시커먼 웜홀이 생성됐다가 반짝 사라진 자리엔, 머리를 잃은 엔마노의 몸뚱이만 털썩 무너지고 있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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