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법, 꼼수. 그리고 잔머리 (4)
* * * * *
한편, 루카스가 있는 봉인지역으로부터 10km 이상 떨어진 호숫가에 자리잡은 복면인은 자신의 금관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아주 정확하게는 그가 선계와의 소통을 돕는 기물인 '영인고(靈認箍)'를 활용하고 있음이었다.
"이보쇼, 천신 양반."
<'아드퍼드로스(Adfordros)'다. 이제 슬슬 익숙해져라, 이 능구렁이 필멸자 녀석아!>
"그러는 천신 양반도 내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기 힘들어서 반 년째 필멸자라고만 부르시잖소."
<...그렇지 않다.>
"그럼 어디 한 번 불러보시구랴."
<주우소어거...>
"참내... '주소걸(周蘇燦)'이오, 주소걸! 나 또한 혀 꼬는 발음이 익숙찮아 그런 거니, 피차 시간이 해결해줄 가벼운 문제는 대충 퉁치십시다."
<커흠흠...>
표층의식에 접근하여 의사만 전달하는 기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어림짐작 되는 선계 천신의 부끄러움이 상당했다.
"아무튼 퇴각의 원인은 뭐였소이까?"
이는 한 때 무림맹주로 추앙받던 본인이 왜 모양 빠지게 철수해야만 했는지를 주소걸이 우회적으로 따져 물은 것이나, 그에 대한 답변은 영 시원찮기만 했다.
<아직 확인중이다.>
"응? 아직도 말이오?"
<나도 편법쓴 거 딱 걸렸는가 싶어 조심중이라 그래. 내가 느낀 차원간섭은 분명 천상의 것이었어. 안 그래도 한동안 너와 연락 끊어야 하는 건 아닌가하고 고심중이다.>
"그 정도요?"
<공론화되면 나도 중징계를 피할 수 없거든. 저기 한쪽에 쫄쫄쫄 모여들고 있는 멍청한 친구놈들처럼 말이지.>
아드퍼드로스가 아리사엘의 시선을 인지하자마자 뜨악했던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실 그가 규정 이상의 강력한 화신체를 허가 없이 만든 일쯤이야 상급신의 꾸중선에서 마무리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영역의 영혼을 쥐도 새도 모르게 낼름 바꿔친 죄와, 또 그것을 자신의 화신체 속에 집어넣고서 현세에 풀어놓은 범죄는, 그 처벌과 형량의 궤를 달리하는 중차대한 문제였다.
더욱이 그 범행의 동기가 본인이 싸움엔 젬병이어서 대타를 구한 거였으므로, 절대로 좋은 꼴을 못볼 사안이었다.
때문에 필멸자들의 '식은땀을 흘린다'는 표현이 어떤 의미인지를, 지금도 실시간으로 체감중인 아드퍼드로스라 하겠다.
<어따... 솔직히 쫄린다.>
"으허허허헛!"
그러나 그가 이런 깊은 속사정을 구구절절하게 말하지 않은 탓에, 이 심각성을 전혀 모르는 주소걸은 그저 천하태평이었다.
"거 나로선 참 달가운 일이오! 이참에 장기휴가 좀 주시시구려! 이왕 새로 태어난 김에 새장가도 좀 가봅시다!"
<휴가? 새장가? 미친, 얼어죽을! 흥, 염려마라! 내가 연락 끊을 땐 끊더라도 배반자의 위치와 처우는 알려주고 끊을 테니까!>
"쩝... 거 너무 박하게 부려먹기만 하는 거 아니오?"
<흥. 모일 친구놈들은 거진 다 모였고,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는 '마야키니(Mayakini)'만 도착하면 바로 회의 시작할 거니까 금방 확정될 꺼다!>
"에이구, 모처럼의 휴식은 글렀구려. 어째 다시 태어난 뒤로 하루도 안 쉰 거 같으오만?"
<어허~! 니 멋대로 탱자탱자 놀라고 정성 드린 내 화신체에 네 영혼을 주입한 줄 알아?! 야, 너 그거 계약위반이다?>
"에잉~, 명세기 신이라면서 이리도 야박해서야... 거 선계엔 풍류란 단어도 없소이까?"
<야, 이이이... 야!!! 그래서 너 신선 안 될 꺼야?! 진정한 무극에 이르고 싶다매! 그래서 초월자가 되고 싶다매!>
이 외침에 주소걸은 아드퍼드로스와 대면했던 시기, 아주 정확하게는 그가 폐관수련 도중 주화입마에 빠져 삼도천으로 향하던 순간을 반짝 떠올리게 됐다.
"음, 이 엄청난 육체를 선물해준 건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덕분에 이 다음 경지에 대한 단서도 잡을 수 있었고 말이오. 허나, 깨달음이 부족한 걸 어찌하오이까? 깨달음이!"
<막히는 부분이 있을 때마다 내가 해결해준다니깐?!>
"됐소. 남의 도움으로 이룬 것은 진정 내 것이라 할 수 없는 법이오. 그런 꼼수는 뿌듯함은 커녕 티끌 같은 성취감조차 얻을 수 없단 말이외다. 내가 무슨 초심자도 아니고 원."
<아이고~, 뉘에~, 뉘에~. 그러십니꽈?>
천신의 비꼼에는 비슷한 강도의 비꼼으로 응수하는 주소걸이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무릇 깨달음이란 억지로 쥐어짠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부대끼는 삶 속에 자연히 생겨나는 거 아니겠소? 아~, 우리 천신께오선 태생 때부터 신이라서 와닿지 않으시려나?"
<참나, 말은 번지르르 잘해요! 이래서 약아빠진 필멸자들하곤 상종을 말아야 해!>
"헛헛헛! 이왕 이리된 거 그냥 즐기심이 어떠시오?"
<어휴~, 됐다. 말을 말자. 이러다 나만 홧병 생기겠다.>
본인 스스로 뱉은 말에 급격히 울적해진 선계의 신이 친구들 들으란 식으로 돌연 신세한탄을 뿜었다.
<에고고고고~, 내가 꽝을 뽑았네, 꽝을 뽑았어~! 허튼 짓하지 말고 그냥 순리대로 흐르게 놔둘 걸!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저 머저리들의 제안에 솔깃해서 현세에 개입했을꼬! 이래가지고서야 라호나바스를 상대하기는 커녕...>
"하하하, 거 좋게좋게 생각하십시다. 그래도 친우분들처럼 똥을 뽑으시진 않았잖소?"
<으으, 말을 말자! 말을 말어! 어이고오~, 주신이시여! 이 못난 하급신을 용서하시옵소서!>
"헛헛헛! 신들도 궁색해지면 더 높은 하늘을 찾으시는구려! 내 오늘 새로운 걸 배웠소이다!"
<아오 썅, 나 방금 육두문자가 방언처럼 터져 나올 뻔 했어!>
"허허허!"
<웃지마! 설령 내가 미쳐돌아 날뛰다가 마계로 처박히면! 내 표식이 영혼에 각인된 너도 또한 끝장이란 의미거든?!>
"어이쿠, 그건 좀 봐주시구려! 헛헛헛!"
<...와씨, 하다하다 이젠 열 받아서 눈물까지 고이네!>
아드퍼드로스는 필멸자들의 편두통이란 게 어떤 증상을 일컫는지도 새삼 깨달았다.
"껄껄껄!"
<아, 쳐 웃지 말라고!!!>
* * * * *
약속된 협력 횟수를 달성한 루카스 일행은 다시 요정족들의 본향으로 이동할 채비를 마쳤다.
아니, 채비를 마쳤었었다. 무려 재봉인 완료된 4일 전부터 말이다.
처음 이틀이야 페이와 폴라가 봉인지역의 은폐작업을 도와야 했기에 그랬다지만, 그 다음 나머지 이틀은 의외의 돌발사태로 인해 체류해야만 했다.
"이번에도 병력을 물리고 싸움을 회피하는군요."
"확실히 부자연스럽다."
정찰 나온 폴라가 무한정 대치 중인 두 세력을 보며 내린 평가에, 그녀를 뒤따라왔던 루카스 또한 공감을 표했다. 그가 보기에도 고작 50명도 안 되는 병력이 무서워 3천 이상의 대군이 전열을 이동시키는 모양새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상하네요. 소수 병력의 개별 전투력이 상대적으로 굉장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저 정도의 전력차를 뒤짚을 수준은 아닌데..."
"그렇다. 양측의 실제 분위기는 지금 당장 맞붙어도 이상치 않다."
"병력 손실을 줄이기 위해 피 말리는 소모전을 펼치는 걸 수도 있겠네요. 저들이 탈주하려는 낌새만 보여도 바로 별동대를 투입해 압박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방어선을 형성하는 노력이 없다. 나는 후속 병력을 기다리는 거라고 본다."
"추가 병력이라..."
루카스의 의견을 듣고서 돌아가는 분위기를 더욱 유심히 관찰한 폴라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가능성이 더 높겠네요. 역시 기사단장 출신이시라 그런지 전술에 능통하시군요."
"......"
"앗, 그거 비밀이었었나요? 나디아 양이 하도 자랑하기에 저는 그냥 별 게 아닌 줄..."
"...알았다."
나디아에게 약간의 주의를 줄 필요성을 느낀 루카스가 이어말했다.
"아무튼 이만 돌아가자. 지금쯤이면 너희 단장이 뭔가 알아냈을지 모른다."
"그게 좋겠어요. 아무래도 저쪽 사태가 장기화 될 것 같으니 전이마법으로 이탈할 수 있게끔 지원요청도 할 겸요."
"공감한다. 이곳은 우리 야영지에서 의외로 가깝다. 휘말리는 건 사양이다. 저기 화신체도 계속 신경 쓰이고."
"네?"
뜬금없는 헛소리 같아도 화자가 루카스라면 일단 귀를 기울이고 봐야했다.
"지난번 그 복면인이다. 그도 저들을 관찰중인 것 같다."
"전 아무 것도 느끼지..."
"이건 당연한 거다. 신력이 대단히 강하게 깃든 화신체다. 너희의 감지능력수준으론 무리다."
태어나서 다른 종족은 물론 오드노아 내에서도 칠삭둥이 취급 당해본 적 없었던 폴라는, 순간 발끈했던 감정을 차분하게 삭혀냈다.
"...페이랑 오시지 않아 천만다행이네요."
"음?"
"아무 것도 아닙니다."
'으이휴...'
이처럼 악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루카스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그의 사실적시로 분개해봤자 결국 본인만 손해라는 결론에만 도달할 뿐이었다.
"난 이만 돌아가고 싶다. 슬슬 나디아 밥 챙겨줄 시간이다."
"...네, 어서가시죠."
한편, 우연찮게 폴라를 감지해낸 주소걸은 속으로 쌉쌀한 입맛을 다시는 중이었다.
'허허, 정녕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이로다!'
그의 탄식과 시선은 루카스가 희미하게 사라진 지점에 고정돼 있었다.
'내 기감에 걸리지도 않고, 움직임을 쫓을 수도 없는 강자라니... 직접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질 않는구나.'
그가 습관처럼 금관을 톡톡 두들겼으나, 한동안 소식 끊겠다던 엊그제 아드퍼드로스의 선언대로 되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무공에 정통한 마왕이라... 하긴, 마계로 굴러떨어진 악인 중에 무인이 없진 않을 터.'
주소걸은 루카스의 뒷모습을 되새길수록 심장이 뛰었다. 비록 찰나지간의 몸놀림 한 번이었으나, 그것에 담긴 신묘함이란 한 사람의 무인으로써 '아, 저런 것도 있었네?'하며 대충 웃어 넘길만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허허~, 특별지시고 뭐고, 당장이라도 가서 비무를 청하고픈 마음이 굴뚝 같구나!'
그와 가볍게 몇 초식만 섞어도 깨달음을 가로막은 장애물을 뻥 뚫어낼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더불어 무림맹주에 오른 이후 까맣게 잊고 살았던 투지마저 깨웠다.
'내가 도전자라... 간만에 느껴보는 고양감이로군.'
솔직히 자신이 자리비운 사이에 칼리드가 살해당하는 문제 정도야 감내할 수 있었다.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해주면 고맙고 안 해주면 살짝 삐질 거란 마야키니의 사적인 부탁이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랬다간 천신께서 노발대발하시겠지.'
정작 중요한 문제는 아드퍼드로스의 신신당부에 있었다.
<필멸자야, 고위마족이랑은 절대 얽히지 마라. 알고보니 천상에서 직접 개입여부를 두고 예의주시하는 놈이랜다. 엉겁결에 니 존재가 발각되서 공론화되면, 진짜로 피곤해지니까 무조건 피해. 절대! 절대다! 알아들었냐, 필멸자야?! 야, 임마! 제대로 알아들었냐고오오!>
"쩝..."
지난 천신의 발광을 회상한 주소걸은 숨을 깊게 고르는 가운데 달아오른 피를 추스렸다. 그리곤 잡념을 활용해 살짝 느슨해졌던 감시의 고삐를 팽팽하게 다잡았다.
'이 나이에 잠복이라니... 조만간 몰려올 거라는 놈들까지 한 방에 싹~ 소탕해버리고, 뜨신 물 속에 퍼지고 싶구나~.'
- 작가의말
지난 1월 말부터 받고 있는 치과치료가 꽤 길어질 거 같습니다.
일 때문에 주말에만 병원에 다니다 보니까 진척이 더뎌지는 면도 있고요.
돈 없다고, 돈 벌어야 한다고, 야근철야가 일상인데 시간이 없딨냐고...그렇게 10년 가까이 묵혔더니만, 결국 잇몸부터 총체적으로 사달이 났습니다.가장 급한 것들은 치료 마쳤으나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하네요. ㅠㅜ이번주 토요일의 경과에 따라어쩌면 연재주기를 조정해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변동된다면, 대략 주6회에서 주5회 연재 정도?아직 변동여부조차 미확정입니다.이 부분에 대해선 조금 더 숙고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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