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다시 전쟁 (1)
* * * * *
엿새 후, 성새(城塞)도시 드레프타.
영주성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발달한 도시에 정식으로 등록된 인구만 17만. 단순 규모만 따졌을 경우에도 타미아르 국에서 3번째로 손꼽히는 대도시였다.
더불어 이곳의 치안 또한 굉장히 높은 수준을 자랑하기도 하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이 지역의 주인인 '벤 크리브드(Ben Cribed)' 후작이 보유한 2만에 육박하는 병력에 근거했으며, 이는 외곽에서 들끓는 산적들이 도시부근엔 얼씬거리지 않는 원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도시를 달빛도 피해가는 언덕의 그늘 밑에서 유심히 노려보는 자가 있었다.
"크르르르......"
2m 30cm가 넘는 신장. 그리고 악어와 유사하지만 길이가 무척 짧은 입과 턱. 거기에 두꺼운 비늘가죽으로 뒤덮인 피부는 그가 인간종족이 아님을 뜻하고 있었다.
"소집이 끝났습니다, 아르카니토(Archa-nitho)."
그와 비슷한 그림자가 따라붙어 아뢰자, 아르카니토라 불린 자가 되물었다.
"소집률은 어떤가?"
"기뻐하십시오! 무작위 공간도약에 성공한 전사들과 툼베르 모두 9할이 넘었습니다!"
"좋아, 아주 만족스럽다."
아르카니토는 여기까지 말한 뒤 저 멀리의 도시 야경을 등진 채 자신의 군세를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아르카니토."
"아르카니토시여."
"나의 아르카니토."
그가 한참을 걷고 걸어 축축한 늪지대에 이르렀을 때, 족히 500명이 넘는 악어인간들이 그의 이름을 경외하듯 부르며 양 갈래로 널찍이 길을 터줬다. 그리고는 어느 부하로부터 팔 길이보다 짧은 황금 지팡이를 건네 받으며 작은 둔덕 위로 올랐다.
"용맹한 나의 전사들이여! 내 그대들을 진심으로 환영하노라!"
아르카니토의 외침에 모든 이가 숨을 죽였다.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최초의 '무작위 공간도약'을 꿋꿋이 이겨낸 역전(歷戰)의 용사들이여! 나 아르카니토는 자랑스러운 그대들을 이제부터 형제라 부르겠노라!"
이에 모든 악어인들은 주먹으로 본인 갑옷의 가슴부위를 세차게 두드리며 벅찬 감격과 공경을 표출했다.
- 쾅. 쾅. 쾅.
"""크로! 크로! 크로!"""
그런 충성스런 모습에 덩달아 고양된 아르카니토 역시 양팔을 들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나는 트로돈의 지배자 '라호나바스(Rahonavas)'의 첫 번째로 깨어난 자식으로써! 차기 왕위계승의 당위성을 몸소 증명코자 하노라! 그대들도 나의 싸움에 함께 하겠는가!"
"""아르카니토! 아르카니토! 아르카니토!"""
"좋다! 드디어 때가 무르익었노라, 형제들이여! 무기를 들고 미래의 왕을 따를지어다! 트로돈을 위하여!"
타행성 최상위 포식자들의 포효가 달빛에 녹아 전율했다.
"""트로돈을 위하여!"""
* * * * *
같은 시각 드레프타의 어느 변두리. 공간이동시설 건설현장. 야심한 시각으로 넘어가는 때였으나, 현장 주위의 밝기는 대낮처럼 밝았다.
그것은 오드노아 본토와 타미아르 국을 연결하는, 아니, 역사적으로 인간과 요정족의 본격적인 교류의 첫 장을 열어줄 통칭 '워프게이트'의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현재 열기 후끈한 야전막사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야간작업에 열중하는 인력은 총 3명의 핵심기술자들이 있었다.
"리~사~."
이들 중 금빛 긴 머리 질끈 묶어 올린 한 명이 도형과 숫자가 빼곡하게 적힌 두루마리를 가득 품은 채 걸어나오며 목청을 높였다.
"여기~ 계절변수랑 환경변수들의 검증 종료!"
그러자 리사라 불린 연갈색 단발의 요정족이 갖가지 마법술식을 아치형 구축물에 음각하던 손을 잠깐 멈추며 대답했다.
"조금만 기다려, 미라이! 나도 거의 다 끝나가!"
"오케이~? 그럼 네 쪽은 좀 어때, 베라?"
그렇지만 파견된 3명의 코어 기술자 중 한 명만은 다른 데에 정신이 쏠려 있는 모양이었다.
"베라? 야! 베라아아!!!"
"으, 응? 아! 미안! 미안!"
"또, 또, 또! 그새 또 딴 생각했지?"
"미, 미안해. 리사. 금방 오차수정 마무리할게!"
"으이그~! 안 되겠다, 어이~, 미라이! 우린 좀 쉬자!"
"좋~지~!"
한숨을 픽 내쉰 리사는 두루마리를 가까운 탁자 한쪽에 쌓아놓곤 찻잔 3개에 향긋한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라이 또한 어느새 길다란 A형 사다리에서 내려와 리사가 쓰윽하고 내민 찻잔을 냉큼 받았다.
"오우야~, 이런 센스쟁이!"
"후훗, 별 말씀을~."
그렇게 서로 눈이 마주친 그녀들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음흉하게 실실 쪼개기 시작했다.
"으히히히!"
"히힛!"
리사와 미라이는 게이트 코어 곁에서 열심히 수식을 계산하고 있는 베라 옆으로 자리를 옮겨왔다.
"아이그~, 베라 양~. 그르케~ 좋으세요?"
"으, 응?"
베라가 깜짝 움찔하여 당황하는 건, 그녀의 친구들이 그녀의 옆구리를 예고도 없이 쿡쿡 찔러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왜, 왜 이래들..."
"아웅~, 이 절친들은 우리 베라 양에 대한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랍니당~."
"야아... 그, 그만해."
"야아앙~ 그맨~해에~."
작업장 내의 어둠을 훌훌 몰아내는 마법등불 앞에서 베라의 붉어진 뺨을 감출 방법은 따로 없었다.
"어머, 어머! 리사야! 베라 얼굴 좀 봐봐! 완전 새빨개졌어!"
"우와~, 세상에~! 세상에!!!”
크게 호들갑 떨던 리사의 말투가 조금 따끔해졌다.
”야, 베라야, 근데 왜 하필이면 미개한 인간종족이니? 거친 야성미가 그리 좋디?"
"피이~, 야야, 그게 야성미냐? 그냥 야수지?"
친구들의 놀림에도 베라는 딱히 반박 못했다.
"모, 몰라... 나도 모르게 자꾸......"
"파하하하! 야, 미라이? 방금 들었니?"
"크큭... 야, 당연하지! '모올랑~ 나아도 모루게에~'. 흥! 칫! 뿡이다! 모르긴 뭘 몰라, 이것아!"
"어머머머~, 어쩜 이리도 가증스러울까?!"
모락모락 피던 찻잔의 김은 벌써 연하게 사그라들었으나, 모처럼 작심한 그녀들의 장난은 그치질 않았다. 물론 이 덕분에 베라의 얼굴이 홍당무보다 빨갛게 달아오른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야, 베라! 15,678줄 분기점 계산이 틀렸잖아! 그 부분은 연속형 변수를 범주형 변수로 치환을 한 이후에 진행하는 거라고! 네가 초보니?!"
"앗! 그, 그러네! 미안! 깜박했어!"
"아오~, 씁! 이거 도저히 못 쓰겠네! 야, 넌 이만 가라!"
"아, 아니야. 바로 고칠게. 한 번만 봐줘."
"쓰흡! 됐거덩? 넌 방해만 돼! 그치요~, 우리 똑똑이 리사 양?"
"고럼고럼~, 우리 재간둥이 미라이 양~. 그러니까 무쓸모인 베라! 넌 어여 '알포이네' 술집으로 꺼져버리렴!"
"?"
갑자기 어느 술집이름이 생뚱맞게 언급되자, 베라는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새침한 그녀의 친우들은, 사이좋게 양쪽에서 베라가 입은 작업용 앞치마를 틱틱 벗겨내며 말을 계속했다.
"내일이 마지막이잖아! 가서 인사 정도는 찐하게 해야 할 거 아냐! 나중에 연락할 방법도 좀 나누고 그래야지!"
"그럼, 그럼! 우리가 특별히 챙겨줄 때 어서 가라, 이것아!"
"얘, 얘들아..."
그녀들의 배려가 베라의 눈망울에 닿아 촉촉해졌다.
"이제 남은 작업 정도는 별 거 아냐! 이깟 꺼쯤은 애인 없는 처량한 우리들이 잘 마무리할 수 있거든?!”
"그래! 퍼뜩 꺼지기나 해! 인간의 시간은 우리보다 엄청 빠르게 흐른다는 건 너도 알잖아! 아까 지나가는 경비병한테 물어보니까 그 술집으로 우르르 몰려갔다더라."
"맞아, 맞아! 베라는 이거나 받아 들고, 우리들 눈앞에서 사라지려무나~!"
리사는 짧은 나뭇가지처럼 생긴 도구를 베라의 손에 쥐어줬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전격계열 마법진이 알차게 각인된, 일종의 휴대용 살상무기였다.
"이거 최신형이야. 어떤 엄한 자식이 치근덕대면 이걸로 콱 지져버려! 단, 출력은 알아서 조절해. 나름 동맹국 백성인데 무턱대고 죽일 순 없잖겠니?"
"고, 고마워. 리사! 미라이!"
"됐고. 생각 바뀌기 전에 빨랑 가라 가!"
"훠이~, 훠이~!"
"얘들아, 정말 고마워!"
그렇게 베라의 등을 강제로 떠밀어 내보낸 그녀들은 다시 작업장 중심부로 되돌아왔다.
"푸우~, 나는 이게 잘하는 짓인가 모르겠다."
얼마간 코어 상태를 유심히 살피던 리사가 뜬금없이 투덜댔다. 하지만 오래 알고 지낸 친구의 귀는 남달랐는지, 미라이가 그녀의 의중을 정확히 간파하고선 적절히 대꾸해줬다.
"야, 그럼 어쩌겠니? 콩깍지가 단단히 쓰였는데 뭐 별 수 있냐? 왜? 불법적으로 콱 기억이라도 지울까?"
"에휴~, 내 말뜻은 그런 야만스럽고 우악스럽게 생긴 그 인간이 어디가 그렇게 좋냐는 거지!"
"얘는! 그래도 그때 꽤 박력 있었잖아! 보통 인간남자와는 사뭇 다르던데?"
"치이...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니다! 인간의 생명주기는 우리의 10분의 1밖에 안 되잖아! 그것도 평균수명이 아닌 기대수명으로 계산했을 때라고!”
“으이그~, 그땐 그때지~. 그리고 메토 씨는 고된 노역에 평생 시달리는 인간남자가 아니라, 무려 4급 전투사잖아. 아무리 못해도 대충 50~60년은 남들보다 더 오래 살지 않을까?”
미라이의 연이은 능청과 행복회로는 리사의 심기를 발끈 건드렸다.
”이씨! 그래봤자거덩? 끽해봐야 200년도 안 되거덩? 난 벌써부터 과부로 사는 베라의 모습이 상상돼서 앞이 캄캄하다야!"
"워워~, 진정해, 이 아가씨야. 그리고 좀 긍정적으로 생각해봐.”
“긍정은 개뿔.”
”야, 솔직히 우리 세대도 아직 성비(性比)가 심하게 안 맞잖아. 그 관점에서 보면 베라처럼 자기 맘에 드는 이성랑 사귀는 것도 나름 행운 아냐?”
“참나, 아니거든요? 중류층부터는 조금씩 일부일처제로 되돌아오는 추세거든요?”
”퍽이나~. 내 주위엔 한 명도 없구만. 아~, 그나저나 나도 연애하고프당~. 어디 후~운~남 없을까?"
문득 무언가 떠올린 리사가 외로움에 사무친 미라이에게 날카로운 눈총을 날렸다.
"우이씨, 미라이! 너어~!"
"뭐, 뭐?! 왜? 갑자기 나 뭐?!"
"내가 니 절친으로써 단단히 충고하는데, 넌 행여라도 미개한 종족한테 홀랑 빠지면 안 된다?"
"응? 내가 왜?"
"왜긴 왜야?! 너도 베라랑 취향이 똑같잖어, 이것아! 근육돼지 마초남이라면 아주 환장을 해서는!"
"흥, 그렇게 따지면 망상 쩌시는 너 님 보단 우리가 한참 양호하거든? 세상에, 백마 탄 기사가 뭐냐, 기사가! 니가 꿈꾸는 소녀도 아니고!”
“호곡... 그, 그걸 어뜨케...”
“히히힛, 내가 그걸 어찌 알았냐고? 그러게 일기장 간수 좀 잘 하지 그랬냐? 나더러 봐달라는 듯이 침대 위로 펼쳐 놓을 건 뭔데?”
“이씨! 너어!"
"에헷!”
미라이는 수치심에 방방 뛰는 리사를 더욱 약 올리려 딴소리만 해댔다.
”아~, 그러고 보니 루카스란 남자가 보면 볼수록 은근히 귀엽던데...... 이미 애인 있을라나?"
"아니, 이 지지배가! 야! 감히 내 충고를 한쪽 귓구녕으로 그냥 흘려?! 진짜 한 대 쳐 맞을래?!"
"풉, 알았다. 알았어! 내가 누구 무서워서 농담도 못 하겠네, 진짜!"
"집중해서 일이나 해! 이 노예야!"
"예이~, 예이~. 알겠슴당~."
작업실에 남겨진 그녀들의 수다는 끊길 듯 하면서도 좀처럼 끊기질 않았다.
- 작가의말
분량상 끊긴 했는데 좀 그렇네요. 다음화를 빠르게 덧붙이겠습니다. 5분 후인 9시 20분으로 예약해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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