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순례자 (2)
* * * * *
'훗, 좋군. 진작에 이럴 것을!'
검문을 피해 도시 안으로 진입한 루카스가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아주 만족스럽진 않았다. 성벽을 오를 적에 자신의 몸을 훑어오던 세 가닥의 마나를 감지했던 까닭이었다.
'경비병들이 조용한 걸로 봐선 별 거 아닐 수 있지만... 자꾸 신경 쓰이는군. 그나저나 기운을 모두 숨겼는데 무슨 수로 알아챘지? 더욱이 가브리엘 님께 받았던 목걸이까지 착용했는데 말이지.'
대천사의 신물을 만지작거리던 루카스는 이내 잡념을 깨끗이 털어냈다.
'쩝... 아니 됐다. 모름지기 고민해서 해결될 일만 고민하는 게 옳다. 우선은... 헤트만 지도부터 구해봐야겠군.'
현재 그의 수중엔 타미아르 국의 정밀 지도만 있었을 뿐인지라,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손짓발짓을 동원하여 묻고 묻기 시작했다.
이윽고 시장의 어느 잡화점을 어렵사리 찾아 들어서자, 경쾌한 방울소리가 먼저 그를 반겼다.
- 딸랑, 딸랑~.
이런 식으로 작은 방울이나 종을 달아놓는 방식은 국내외 크고 작은 상점들 사이에선 거의 통용되고 있는 듯 했다.
"어서오시구랴. 무얼 찾으시우?"
60세는 족히 될 법한 초로의 노인이 반겨오자, 루카스는 크고 또박또박 발음에 신경 써서 대답했다.
"헤트만 지도. 여기 있습니까?"
"지도요?"
"그렇습니다."
"음... 있긴 있는데... 그걸 어따 쓰시려는 게우? 혹시 학자시오?"
위아래로 루카스의 행색을 훑어본 노인의 놀란 표정은, '근육덩어리인 니가 학자?'란 자신의 어림짐작이 사실이었을 경우를 대비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학자 아닙니다. 나는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중입니다."
"아하~, 순례자이신 모양이구만! 그럼 그렇지. 근데 왜 ‘도로 안내서’가 아닌 지도를 찾으시는지 모르겠네?"
"도로 안내서?"
"뭐 일단 손님이 원하시니 찾아드리긴 하겠수. 가만... 내가 어따 뒀더라..."
낡디 낡은 책장서랍을 한참 뒤적뒤적하던 노인은, 이윽고 둘둘 말린 두루마리 하나를 탁상에 올려놨다.
"어?"
약 1m 길이의 지도 묶음을 풀고 활짝 펼쳐본 루카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지도를 원합니다. 이런 이상한 그림종이는 지도가 아닙니다."
"이게 헤트만 지도가 맞소만?"
"?"
루카스는 그의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그 동안 갖고 다녔던 타미아르 지도를, 해괴한 상상동물이 바탕면에 빡빡하게 그려진 두루마리들 옆에 펼쳐놓았다.
"나는 이것과 비슷한 물건을 원합니다."
"아니, 이리 귀한 걸... 오옷, 나침반?! 잠깐! 혹시 그! 그것 좀 이 늙은 이에게 구경시켜 주시구랴!"
지도를 꺼낸 가방 속의 나침반을 언뜻 발견한 노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마치 신기한 장난감을 코앞에 둔 아이마저도 이 정도는 아닐 것 같았다.
때문에 루카스는 그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물건을 순순히 내줬다.
"허허허... 고것 참 유려하고 튼실하기까지 하지! 이런 건 직책 좀 있는 장교들이나 사용하는 건데..."
"나는 군인 아닙니다."
"엇, 그래요? 아이고~, 이거 귀족이셨군요. 실례했습니다. 늙은 이가 보는 눈이 없어서...... 그래도 어째 순례 자체는 초행이신가 봅니다? 어허허허!"
그를 대하는 노인의 어투가 급격히 공손해지는 것으로 보아, 루카스를 어느 나라 귀족출신쯤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루카스는 이 오해를 풀만한 어휘력이 되지 않음을 스스로 잘 알기에 해명시도를 빠르게 포기했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아직 세상물정에 어둑하신 거 같으니, 이 시골 늙은이가 귀뜸 좀 해드리겠습니다."
"예, 부탁합니다."
"손님께오서 가져오신 이 지도는 제작된 지 2년도 채 안 된 물건입니다. 어느 날 바다 건너 '미도프(Midop)' 제국의 국가정비사업을 훑어보신 국왕폐하의 명으로 만들어졌다는데, 열심히 찍어내도 공급량이 워낙 부족해서 아직까진 각 지역 영주와 그 휘하 장교들에게 밖에 소유하지 못하고 있습지요."
"아, 그렇습니까?"
"반면 여기 보시는 이것들이 바로 시장바닥에서 으레 사고파는 지도입니다. 이 따위 것들은 방구석에서 처박혀서 연구만 하는 학자들이 주로 사용합지요. 손님께서도 보셔서 이제 아셨겠지만, 이런 건 여행지표로선 써먹을만한 게 영~ 못 됩니다."
노인의 말 따라 통상적으로 유통되는 지도는 이정표로 삼기엔 많이 부족했다. 높은 문맹률의 영향을 받은 작은 그림들의 집합체였을뿐더러, 화가들이 여러 여행일지를 읽고 상상을 더해 그렸기 때문에 오히려 더 난잡했다.
한 마디로 말만 지도인 셈이었고, 때문에 많은 여행자나 순례자들은 오히려 지도를 외면하는 실정이었다.
"더욱이 손님의 물건과 비슷하기라도 한 헤트만 지도는 죄다 군수용품인지라, 저희 같은 일반 백성들은 구할 수도 없습니다. 까딱하면 첩자로 찍혀서 쥐도 새도 모르게 헤트만으로 끌려갈 겝니다."
"...이해했습니다. 이야기 감사합니다."
루카스는 언행에 조심을 기하는 노인에게 동화 3닢을 정보료로 건넸다. 그러자 노인이 뜻밖의 횡재에 더욱 신이 나서 떠들었다.
"추가로 보충하자면, 대개의 여행자나 순례자들은 도로 안내서를 사용한답니다. 각 나라의 지형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목적지까지 거쳐야 할 주요도시와 길목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지요."
"흠... 하지만 나는 공용어 읽기 서툽니다."
"에고고~, 혹시 특별히 정해 놓은 목적지라도 있으십니까?"
"나는 아비세르툼의 에플키도로 갑니다."
"허허, 거긴 꽤나 황량한 지역이라 정보도 많지 않을 텐데... 그럼 헤트만과 교역중인 상인을 알아보심은 어떨는지요? 길바닥 닳도록 왕래가 잦은 그들이라면 헤트만의 지리에 빠삭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아니면 헤트만으로 돌아가는 그 나라 상인 편에 도움을 받아도 될 테고요."
"좋은 의견입니다."
"부디 안전한 여행길이 되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기. 도움 많이 받았습니다."
"아이구~, 이렇게나... 허허허, 아무쪼록 살펴가십시오~."
잡화점 노인은 동화 3닢을 추가로 올려놓고 떠나는 루카스의 등판을 향해 있는 힘껏 허리를 꾸벅 숙였다. 이렇듯 겨우 몇 마디의 말로 2일치 식대를 벌었으니, 역시 호의는 베풀고 볼 일이었다.
- 딸랑~, 딸랑~.
'그럼 이제 어디 가서 헤트만 상인을 찾고, 어떻게 구슬려야...... 음... 뭐지?'
잡화점에서 되돌아 나온 루카스는 후방 15m 남짓한 거리에서 뜨거운 시선들이 느껴졌다.
'휠러 백작을 공개 처형한 일 때문에? 하긴 목격자가 많긴 했지. 흐음... 그건 또 아닌가...?'
그는 여전히 미행을 전혀 못 본 척 걷고는 있었지만 썩 내키진 않았다.
살기도 아닌, 그렇다고 호감도 아닌 애매모호한 눈빛. 그것은 만만한 표적을 물색하는 사기꾼에 비견할 수 있었다.
'마나의 특징이 베라 씨와 매우 흡사하군. 그렇다는 건... 요정족?'
루카스가 자신들이 폴폴 내뿜는 마나의 특색을 읽어냈다는 사실을 미처 인지하지 못한 3인방은, 여전히 후드망토를 깊이 눌러 쓴 채로 일정거리를 꾸준히 유지하는 중이었다.
'아, 드레프타의 사건 때문이군. 근데 여태 포기 안 했던 건가? 허참 대단하다, 대단해! ...그나저나 이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도 잘도 뒤쫓아 오는 걸?'
루카스가 2m가 넘는 덩치꾼임은 누구도 부정 못하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3m의 무지막지한 바리온 시절처럼 유일무이한 존재감을 자랑하는 것은 또 아니었다. 막상 두 나라 간의 교역이 활발한 이 장터만 보더라도 루카스의 체구 못지않은 짐꾼이나 용병들이 심심찮게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분명 아무 기운도 못 느낄 텐데, 도대체 어떻게... 아하!'
그제야 루카스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유관으로는 똑똑히 보이나, 그 내부로부턴 그 무엇도 감지되지 않는 자. 그게 현재 자신의 모습이었다.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아서... 그래, 그래서 오히려 수월했겠군.'
그렇게 실책의 원인을 깨달은 루카스는 가브리엘의 목걸이를 장착 해제하여 제니티아의 영역에 보관했다. 그리곤 지금까지 꽁꽁 감춰온 기운을, 때마침 스쳐 지나가는 용병들 수준에 맞춰 술술 풀어냈다.
"앗!"
"헉!"
"이런!"
과연 예상대로 뒤편에서 들려온 추격자들의 혼란스런 신음소리가 빵 터졌다. 이와 더불어 황급한 발자국 소리까지 그의 귓가에 진동하기 시작했다.
'발각 됐으니 목표를 놓치기 전에 따라붙겠다 이건가? 훗, 간만에 하는 술래잡기도 꽤 재밌겠군.'
귀찮게 엮이고 싶지 않은 루카스는 즉시 바로 앞 골목 모퉁이를 확 꺾어 들어가며 추격자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 휘잉~.
그런데 아직 안심하기엔 골목 안이 썰렁했다.
'아, 이런. 운도 없군. 하필 이렇게 한적한 골목이라니... 어쩔 수 없나?'
비루한 자신의 뽑기운을 탓하며 혀를 찬 그는, 문이 살짝 열린 허름한 창고를 발견하곤 신속히 종종걸음 했다. 비록 그 안의 인기척이 몇 개 느껴지긴 했지만, 해당 모퉁이 쪽으로 빠르게 접근 중인 추격자들을 고려하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끼이이.... 달깍.
루카스는 건물 안으로 쑤욱 들어가자마자 모든 기운을 감추는 동시에 문짝을 최대한 소리 죽여 닫았다.
"핫! 분명 이쪽이었는데?!"
"젠장!"
"일단 이 골목으로 계속 들어가보죠!"
그렇게 정체불명의 추격자들이 우왕좌왕 갈피를 못 잡다가 어딘가로 사라지는 꼴이 꽤나 고소했다. 이제 한숨 돌린 루카스가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이미 안에 자리잡고 있던 인물들에게 정중히 사과하는 것. 남의 영역을 불법으로 침범한 사람으로선 당연하고도 당연한 예의범절이었다.
"너, 넌 뭐야?!"
"아아, 실례했습니다. 대단히 미안합니다. 나는 금방 나가겠......"
그런데 창고 안의 공기가 참으로 알싸했다. 아주 피떡이 되어 반송장 상태인 부상자와, 이와 유사한 모양새로 폭행 당하고 있는 중년의 남자. 그리고 무엇보다 갑작스런 루카스의 등장으로 당황스러워하는 5명의 무장 괴한들이 인상적이었다.
"아니, 넌 뭐하는 놈이냐고?!"
루카스는 당사자들의 긴한 사정까진 모르더라도, 현재 돌아가는 분위기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
그의 머리는 이대로 후다닥 사라지지 않으면 골치 아파진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러나 막상 걸음은 좀처럼 떼어지질 않았다.
"ㅆ발, 그러니까 니는 뭐하는 새끼냐니까?! 내가 묻잖아?! 귓구멍에 ㅈ박았냐? 어?!!!"
"......"
짜증난 괴한 우두머리의 욕지거리가 루카스의 신경을 박박 긁으며, 그에게 참견하고픈 사유를 넌지시 만들어줬다.
"나는..."
이윽고 자기합리화를 마친 루카스의 행동방향이 최종적으로 결정됐다.
"...순례자다."
"뭐?"
그렇게 딱히 원치도 않았던 또 다른 운명의 수레바퀴가 거칠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 빡!
"커헉..!"
두목에게 한 방 먹인 루카스는 기습에 당황한 다른 괴한들에게도 부리나케 달려들었다.
- 퍼버벅!
모든 대련에는 규칙과 절차가 있다. 어떻게 보면 나름의 낭만인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든 적를 죽이고 살아남아야 하는 진흙탕 개싸움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상대에게 빈틈이 보이면 일단 후려치고 보는 것이다.
- 뚜드득!
그리고 괴한들에게는 불행한 이야기지만, 인간시절 생애의 대부분을 이교도와의 처절한 사투 속에서 보내온 루카스에게선 대련은 커녕 그 어떤 낭만의 씨앗조차 찾기 힘들었다.
"으아악!"
루카스의 손발이 닿는 족족 괴한들의 팔다리 뼈나 관절에 심각한 부상이 생겨났고, 고통이 뇌를 짜릿하게 자극한 덕에 픽픽 나가 떨어지며 기절해버렸다. 다행히 루카스가 가벼운 마음으로 생명을 꺼트리지 않겠다란 결의를 하고 있었던 터라 죽음은 면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 꽝!
"어읔!"
중간에 정신 차린 두목까지 차디찬 바닥으로 메다꽂으며 상황정리를 재차 깔끔하게 마친 루카스는, 피해자 두 명 중 아직 의식이 남은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당신은 자력으로 걸을 수 있겠습니까?"
"......"
그가 서둘러 결박을 풀어주며 물었지만, 이상하게도 되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인은 오히려 의심에 찬 눈빛으로 루카스를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우린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 빠르고 신속하게."
"...됐소."
"?"
"끄으으음......"
근 50세는 되보이는 흰 피부의 중년인은 루카스의 손길을 마다하고 몸을 추스르며 벽에 기대 앉았다.
"안 가도 됩니까? 지금 당신의 목숨은 상당히 위태롭지 않았습니까?"
"프흡, 크흐흐흐... 으허허허허!!!"
떠듬떠듬한 루카스의 말을 듣던 중년인은 정말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호쾌하게 터트렸다. 그의 몸 상태가 온전했더라면, 여기에 과장된 박수까지 동원했을 모양새였다.
"오우~, 세상에! 연기가 아주 제법이시오! 크하하하핫!"
- 작가의말
아레나가 벌써 절반이 진행됐고, 또 그만큼 남았군요.
내일부터는 정상적인 1일 1연재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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