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새로운 시도 (2) + 시험과 거래와 마왕 (1)
- 우우우웅...
허공에 떠오른 각각의 환영 속에선, 여러 RPG게임 플레이영상들이 다각적으로 재생됐다.
“이것들은 인간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만든 일종의 놀이체계라네. 흥미가 생겨 자세히 살펴봤었는데, 이를 잘만 활용한다면 적합자들을 추려내고 체계적으로 육성하는데 큰 효과를 발휘하리라는 확신이 들었지.”
“흠... 난 그다지 썩 내키지는 않는군. 자네들의 감상은 어떤가?”
인간들이 유흥거리로 만든 RPG게임을 관찰한 미카엘의 솔직한 심정이 그랬다. 그러나 천사장으로써 내려야하는 결정과 개인감정은 냉정히 분리시켜야 했으므로, 일단 겉치레 삼아 다른 대천사들의 의견을 물었다.
“저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
하지만 미카엘의 희망과는 반대로 달갑지 않은 관점들이 튀어나오며 의견들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보상과 수치가 있으니, 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긍정적이군요. 찬성합니다.”
“...흐음, 참신하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러나 자칫 필멸자들 사이에 심각한 불평등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전 반대합니다.”
"아니오, 저는 오히려 공정한 기회를 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설명해보겠나, 즈루피엘?"
이름 불린 천사가 한 발 나서서 의견을 피력했다.
"네. 기존 신탁은 재능이나 잠재력이 우월한 일부 중에서 판관을 선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가브리엘 님께서 제안하신 신탁. 그러니까 판관후보자들의 단계별 성장절차와 제약, 연산보조장치 등이 포괄된 방식이라면 대상범위를 크게 확대시킬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판관선별의 최우선 기준을 잠재력이 아닌 심성으로 삼을 수 있다고 봅니다."
"흐음..."
"그리고 저는 무엇보다 판관을 지속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체계가 구축된다는 점이 무척 마음에 듭니다. 시도해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여겨집니다. 때문에 저는 찬성입니다."
"검증이라... 그런 면에서 접근하면 새삼 다르게 보이기도 하는군."
평소 껄끄럽게 생각해온 지구에 특혜를 허락하고 싶지 않았던 미카엘은, 긍정적인 변화를 보이는 회장 내의 의견들을 보곤 서둘러 종결짓고자 했다.
"......크흠... 의견이 분분하군. 아무래도 이 안건은 차후에 다시 논의하는 편이......"
"잠깐만, 형제여. 도중에 말을 끊어서 미안하네만, 내 의견을 말해도 괜찮겠는가?"
"....괜찮네, 라파엘."
그는 돌연 나서서 발언권을 요구하는 라파엘을 보며,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했다.
“선택받은 판관들이 그들 사회에서 우위를 점하고, 스스로 교만해져 타락한 사건은 이전에도 으레 발생해오곤 했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응수단에 한계를 맞이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신탁을 내렸네. 어쨌든 그 방법이 최선이고, 효과적이란 결론에 도달했으니까."
"...그렇지."
"나 역시 가브리엘 형제의 제안에 찬성이네. 아무리 고르고 골라도 힘에 취해 본성을 잃어버리는 필멸자들은 나오기 마련이야. 어차피 부작용이 예상된다고 한다면, 나는 체계적 관리가 용이하고 효율성 높은 이 방법을 시도해보고 싶군. 시험삼아 지구 한정으로 적용해보고 추후 결과를 가지고 논해보는 것이 어떨까 싶어.”
그의 의견에 몇몇 대천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듣고 보니 국소적으로 시범운용 해보는 것도 괜찮겠군요."
"오오,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저도 찬성입니다."
이렇듯 라파엘의 설득 아닌 설득에 회장 내의 의견이 거짓 합치되자, 미카엘이 가브리엘을 바라보며 탐탁찮은 어투로 말했다.
"알겠네. 신탁업무를 총괄하는 라파엘 자네까지 그렇게 말한다면, 나로서도 이 이상 반대하지 않겠네."
"귀담아 들어줘서 고맙네, 형제여."
라파엘의 감사를 들은 미카엘은 회의장으로써 의견제안자를 보며 결론지었다.
“흠흠. 가브리엘, 모든 권한을 자네에게 일임하겠네. 새로운 신탁방식에 대해서 석연찮은 나는... 아무래도 이 일에 관여하지 않는 편이 여러모로 이로울 것 같아. 행여 결정 곤란한 일이 있거든 라파엘과 함께 의논하여 처리해주게.”
“그러지. 아무쪼록 빠른 시일 내에 차세대 신탁체계를 구현토록 해보겠네.”
"흠... 또... 당연한 말이지만, 자네가 그걸 완성하기 전에 해당 차원에서 일이 터진다면 즉시 보류하고 기존 방식으로 신탁을 내릴 것이야. 동의하는가?"
"물론. 그것에 전혀 이견 없네."
“그럼 이것으로 회의를 마치도록 하지. 해산.”
- 땅. 땅. 땅.
미카엘의 창끝에서 묵직한 소리가 세 차례 울려 퍼졌다. 종회를 알리는 신호에 각 대천사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희미하게 변하더니 연기처럼 금세 사라졌다.
* * * * *
끝이 불만족스러웠던 천사장 미카엘은 그래도 평소와 다름 없이 회의장을 마지막까지 지켰다. 그런데 인상이 일그러진 채 아직 떠나지 않고 있는 어느 대천사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즈루피엘, 무슨 일이 생겼는가?”
“천사장님! 방금 아즈라엘(Azrael)로부터 보고가 있었습니다! 루치펠이... 그 반역자가... 천계에 오르려던 영혼을... 갈취했다고... 합니다.”
즈루피엘이라 불린 천사는 목소리만큼이나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쯧쯧, 아즈라엘 그 녀석이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있겠군.”
“예, 그 담당이었던 아리사엘 또한 이를 갈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분에 못 이긴 상태인 즈루피엘의 길고긴 날개를 포함한 온몸 전체가 샛노란 불꽃에 휘감겨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흠, 담당 수호천사와 아즈라엘은 그렇다 쳐도 자네까지 이렇게... 매우 대단한 영혼이었나 보군.”
평소 냉철한 사람이 역정을 낸다면 없던 호기심도 으레 샘솟기 마련이다. 즈루피엘의 분노에 흥미 돋아난 미카엘 또한 이와 같았다.
“예, 매우 굳건하고 강직하기 이를 데 없어서 라파엘 님과 함께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그나저나 그게 어떻게 가능했지? 천계에 소속됐다면 아무런 권한이 없을 텐데...?"
"거기까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흠... 주제도 모르는 루치펠 녀석이... 창조주께 또 내기를 청한 건가...?”
“이 반역자! 마주치기만 하면 반드시! 갈기갈기 찢어 소멸시킬 겁니다!!!”
예상 외로 격한 반응에, 미카엘은 심심한 위로를 건네며 다독였다.
“그래, 기회가 오면 반드시 그렇게 하도록 하게나.”
"생각 같아선 지금 당장 쫓아가서 단죄하고픈 심정입니다!"
"그럼, 그럼. 당연히 그렇겠지. 그 심정 충분히 이해가 되는군. 하지만 대악마 중 유일하게 지옥이란 족쇄를 끊고 저 깊은 무저갱 속에서 숨어 다닐 만큼 대단한 놈이야. 우리로써도 찾아내기 어렵다는 걸 잘 알지 않는가."
"하아... 정말 보기 드문... 강하고 굳건한 영혼을 코앞에서 빼앗겼단 말입니다!"
"음... 그래, 그래. 조금만 인내해보게. 행여나 창조주께서 허락하신 일이라면, 반드시 깊은 뜻이 있을 테니까."
"으... 천계에 이르는 즉시 능품천사(Principalities)로서 격상시킬 전사를 감히...”
"그래그래. 당연히... 음?! 자네 지금... 능품천사라 했나?"
분노에 치를 떠는 즈루피엘에게 적당한 공감과 격려를 표하던 미카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사실 천계의 하품천사의 위계가 승격되는 일도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 그 하품천사보다 존재력이 까마득한, 심지어 초월체도 아닌 최하위 차원의 필멸자가 그 대상이라 함은, 아주 드물다 못해 과거사를 통틀어 손에 꼽을 일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도대체 뭘 하려는 것이냐, 루치펠.'
미카엘은 오래 전에 타락을 선택했던 그의 형제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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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험과 거래와 마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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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하게 붉은 먼지 자욱한 광야. 얼핏보면 마치 타오르는 화염의 바다와 같았다.
이런 곳에선 그저 가만히 멀뚱멀뚱 눈을 뜨고 있는 것만으로도 불쾌한 고역 그 자체일 것이다. 거기에 퀴퀴한 유황 섞인 악취가 코끝부터 폐부 깊숙이까지 신랄하게 파고들다시피 하며 괴롭혔다.
이와 같은 환경이란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들은 왜 늘상 불쾌함과 짜증을 기본적으로 달고 사는가가 충분히 납득될 지경이었다.
그래서일까? 서열이 높고 오래된, 거기에 맞수를 찾기 힘든 강력한 존재일수록 그들의 신경질적인 화풀이는 유난히 지독하고도 잔학하기만 했다.
"으아아아아아!!!"
"제, 제발... 이제 멈춰주세... 으윽...! 꺄아아!!!"
"그만! 그마아아아안! 아아아악!!!"
지옥으로 떨어진 영혼들의 찢어진 비명소리가 피부를 스치는 칼바람보다도 날카로웠다.
이 애처롭게 영역 구석구석 어딜 봐도 꺼림칙하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그래도 농도의 차이는 존재하는 까닭인지 태산처럼 높은 성 내부에 가까워질수록 그 정도가 심해졌다.
"끄으윽..... 으으으으아아아악!!!"
최상층의 어느 비밀스러운 장소. 얼핏 보면 고문기구들을 모아둔 전시관이 아닐까하는 착각이 드는 건축물 내에서 사내가 고통에 부르르 떨고 있었다.
적어도 1500개가 넘는 쇠못이 촘촘히 박혀진 의자 위에 앉혀져 치를 떨고 있는 사내는, 다름 아닌 루치펠에 의해 지옥으로 끌려 내려온 바리온이었다.
- 치이이이이이...
"으으으으!!! 아아아아악!!!"
그에겐 빨갛게 달궈진 못들이 점차 살을 후벼 파고드는 것도 엄청난 고통일진데, 같이 있는 마귀가 그의 눈두덩이 위로 시뻘건 쇳물을 똑똑 떨어뜨려가며 그의 목구멍에서 괴성을 강제로 뽑아냈다.
"끌끌끌끌, 그냥 한 마디만 하면 된다니까? 딱 한 마디만, 딱 한 마디만 말해라. 그럼 이런 꼴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주마."
질병에 걸린 들개와 비슷한 얼굴에 숫염소의 큰 뿔, 고슴도치가 몸에 두른 가시 같은 머리카락을 지닌 악마가 연신 실실 거리며 비웃어댔다.
"자, 어서! 어서! 고결한 전사 양반! 이제 충분히 알아먹을 때도 됐잖아? 응?! 흐흐흐, 이래봤자 너만 손해라고~."
"...나... 나...는..."
부어진 쇳물에 양쪽 눈과 한쪽 귀를 잃은 바리온이 입술을 힘겹게 뻐끔거렸지만, 도통 알아듣지 못한 마귀는 바리온의 코앞에 얼굴을 가져다댔다.
"잉? 뭐라고~? 이제 말하기도 힘들어? 낄낄낄낄! 아이고~, 그래. 힘들기야 힘들겠지! 크크크!!! 이 내가 자비를 베풀어 줌세~. 자, 어서 고개만 까딱해봐! 그럼 네가 신앙을 버리겠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테니까~."
악마는 따스한 천사의 흉내라도 내듯, 두 손으로 바리온의 턱을 살며시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가 바랐던 긍정은 없었다.
"...퉤."
바리온이 굵직하게 내뱉은 피가래가, 매우 정확하게 마귀의 콧등 한가운데에 적중됐다.
"...아니!!! 이런 썅!!!"
이에 분개한 마귀는 바리온의 목을 꺾은 후, 남은 한쪽 귓구멍 속에 쇳물을 마구 들이부었다.
"끄으으으으으아아아아아!!!"
그러고도 그는 충분히 만족하지 못했는지 집게로 혀를 거칠게 뽑아냈으며, 곧이어 줄톱처럼 생긴 도구를 이용하여 루카스의 팔다리가 손에 잡히는 대로 무자비하게 조밀조밀 썰었다.
"아아~, 이런 이런..."
마귀의 분노는 바리온의 신체가 거의 곤죽처럼 변하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됐다. 이후 마귀는 천천히 재생되고 있는 바리온을 쳐다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휴우~, 나답지 않게 너무 흥분해버렸군. 지독한 녀석."
해탈 등등을 통해 필멸자들이 벗어난 최하위 차원 너머의 세상에선, 죽음에도 종류가 두 가지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육체'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 한결 명확한 이해를 위해 이것을 게임에 빗댄다면, 영혼은 계정에, 육체는 생성한 캐릭터에 대입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계정(영혼)이 영구제명 되지 않는 이상 캐릭터(육체)가 죽음을 수천 번 맞이해도 언젠가는 다시 부활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설명하자면 천상에선 규율상 문제로, 지옥에선 유흥거리 유지문제로 영멸을 쉽게 사용하지 않았다.
어쩌면 '지옥에선 영원히 벌을 받고, 천국에선 무한한 행복을 누린다'던 이야기가 이것에 근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큼... 에잉~, 이 고문도 글렀어! 이 이상 시일이 지체되는 건 좀 위험한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저 놈 입에서 배교하겠다는 소리를 끄집어낼 수 있지?"
각설하고. 바리온의 신체가 어느 정도 복구된 것을 확인한 마귀는, 주위에 길게 늘어진 고문장치들을 점심시간 음식메뉴 고르듯 천천히 바라봤다.
"이것도 몇 번 써먹어봤고... 저것도 딱히 별로였었고... 음, 그나마 가장 효과적이었던 건 환영을 심었던 때인데... 그것도 반복될수록 약빨이 떨어지고 있고... 젠장! 그나저나 필멸자 주제에 어떻게 몇 만 년동안 정신이 붕괴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거지? 이만큼 괴롭혔으면 최소한 풍화의 조짐이라도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끙... 그래서 왕께서 친히 데려오신 거라고 봐야 하ㄴ... 헛?!!!"
생각을 곱씹던 마귀는 문득 자신보다 더 큰 존재가 강림함을 알아챘다. 때문에 그는 여타의 모든 잡생각을 멈춤과 동시에 황급히 바닥에 엎드렸다.
"위, 위대하신 와, 왕을 뵈옵습니다!"
마귀의 머리 방향 위쪽에서 시커먼 안개뭉치가 자욱하게 내려앉았다. 잠시 동안 대천사의 찬란한 그것과는 확실히 대비되는 심연의 날개 4쌍이 일렁였으나, 그 속에서 검정 파티복차림의 중년인이 나타남과 동시에 허상처럼 사라졌다.
"허허허, 잘 되고 있나?"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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