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희생을 모른다. (6)
* * * * *
데거렝젤의 방어선이 무너지고 대규모 공세가 발발한 뒤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 우르르르르... 드드드둥...
모디얼 수하들의 염탐이 있을 적마다 항상 숨어 지냈던 지하밀실 안쪽에서 루카스가 의식을 회복했다.
"으으으으......"
뒷머리의 알싸한 통증을 느끼며 일어난 그는, 희미하게 울리는 공진에 정신을 퍼뜩 차리며 밀실의 한쪽 벽을 응시했다.
- 위잉... 위잉...
야외 가로등의 허리를 반절 자른 것 같은 구조물, 그 끝에 달린 보석으로부터 시작된 여러 갈래의 빛은 벽면에다 각각의 경관을 흩뿌리고 있었다.
마치 삼각형이 5개씩 뭉쳐진 듯한 20면체의 수정체가 뿜는 광채가 아주 영롱하고 신비로웠으나, 지금의 루카스에게선 일말의 관심조차 얻지 못했다.
"아, 안 돼. 안 돼!!!"
벽면 여기저기를 메운 각각의 영상 속에선, 그의 소중한 세 존재가 얽히고 섥힌 혈전과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최초의 마룡 알베른.
요르문간드의 후예 타샤.
마계 타락천사단의 전(前) 군주 제니티아.
마계 금제의 반발력을 각오하고 본연의 모습으로까지 현현한 그들이었던 지라, 놀랍게도 엄청난 적들의 군세를 상대함에 있어서 전혀 밀리지 않고 있었다.
- 뿌드득!
그러나 이 광경을 보고 있는 루카스는 절규했다. 그것은 밀리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가, 무사귀환을 뜻하진 않음을 익히 아는 까닭이었다.
그는 굳게 잠긴 방문짝을 기어이 뜯어내고 뛰쳐나와 봉인된 석실 출입구를 마구 두들겼다.
- 텅! 텅! 텅!
"열려! 열리라고!!!"
그의 절실한 마음처럼 봉인결계가 '짜잔'하고 풀렸으면 좋았으련만, 그가 처한 현실은 차디찬 얼음장 같았다.
"빌어먹을! 마귀 따위가 뭔 놈의 희생이야!!!"
아무리 욕에 욕을 퍼부은들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제 풀에 지친 루카스는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그가 혼절하기 직전의 여러 상황을 떠올렸다.
모른 척 해주던 유리아나만을 믿고 안도했던 스스로를 자책하는 제니티아의 모습.
거대마수가 착용한 결계분쇄용 마갑의 위력 앞에 예상보다 빠르게 붕괴되는 방위결계를 주시하며 흔들리던 타샤의 눈빛.
적들의 광범위 마력교란 때문에 최후의 탈출수단인 전이마법마저 무력화되자 급속도로 창백해졌던 알베른의 얼굴.
마지막으로 루치펠이 남겨준 목걸이의 이적을 발동시켜 도움을 요청했으나, 어떤 응답이나 반응도 없어서 망연자실하던 모두의 표정.
'하... 제기랄...'
한숨 허탈하게 내뱉은 그는 허공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약하다는 게 이렇게 서글픈 거였나? 만일, 만일 내게 충분한 힘이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비참하진 않았을... 아?!'
뭔가 방도가 떠오른 루카스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뚫고 나왔던 방안으로 온 몸을 던졌다.
그렇게 미친 듯이 들어선 그는, 안에 비치된 모든 가구와 물품들을 재빠르게 구석자리로 밀어치웠다.
- 와장창!
'후우, 후우! 지금 해야 한다. 지금 해야만 한다!'
루카스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전투영상을 슬쩍 바라봤다. 그리곤 가까운 수정체 하나를 대차게 집어던지며 산산이 깨트렸다.
'망설임 따윈... 사치다!'
재차 각오를 다진 그는 가장 길고 날카로워 보이는 수정 조각을 거머쥐곤 마력을 담아 다른 손바닥을 주륵 베었다.
- 뚝, 뚝... 후두둑.
벌어진 상처를 쥐어짜듯 꽉 움켜쥔 그의 주먹 틈새로 새어나온 검은 피가 찻잔을 금세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이렇게 준비를 마친 루카스는 이 핏물을 물감 삼아, 또 손가락을 붓 삼아 바닥에 기이한 도형들을 정신 나간 사람처럼 그리기 시작했다.
- 스윽, 스윽.
그것은 그동안 그가 질리도록 연습하여 손에 익힌, 성년의식을 위한 마법진이었다.
* * * * *
모성애는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사람이나 짐승, 하물며 미물할 것 없이 그 숭고함 앞에선 으레 숙연해지고 마는 것이다.
산야에 서식하는 사마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작은 나뭇가지에 거품을 풀어 그속에 알을 낳곤, 결국 기력이 다해 땅에 떨어져 생을 마감한다.
강가의 늪에서 주로 서식하는 염낭거미의 경우는 이보다 더 짠하다. 갈대잎을 말아 외부의 위협을 차단한 암컷은, 8~10마리의 부화한 새끼들에게 자신의 몸을 산채로 파먹게 내어주면서 삶을 마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존 밖에 모르는 마계 마물이라고 유별날까? 어둠 속으로 떨어진 추악한 마귀들이라고 하여 과연 다를까?
늘 그렇듯 약간의 예외가 존재할 순 있겠으나, 제 새끼를 향한 모성애 자체는 아마도 생명체 모두 대동소이할 것이다.
- 촤아아악-!
"끼에에에에에엑!!!"
그리고 방금 칠흑빛 아지랑이 같은 날개를 이용해서 마지막 거대마수를 양분시킨 제니티아가 보여주는 모성애 역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아... 하아..."
마수의 단말마조차 그녀의 거칠어진 숨소리를 다 감추진 못했다.
"제니티아여!"
붉은 모래폭풍 위로 근육질 거인의 상체가 붙어있는 듯한 마족이, 두 손에 마력을 서서히 응축시키는 제니티아 앞을 가로막으며 이죽거렸다.
"우리가 꼭 이렇게까지 힘을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의문이 든다!"
"흥! 남의 집 담장을 넘어온 침입자 주제에 웃기는구나, 크라바샨!"
이때 크라바샨을 바짝 뒤따라온 다른 2명의 마족은, 호통치는 그녀의 몹시 지친 기색에서 모종의 자신감을 얻었는지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저런~, 딱하기도 해라! 마계의 왕좌를 놓고 우리 크발딘(Cvaldeen)님과 다투던 절대군주로서의 그 위엄은 어디로 사라지셨을까나~?"
"크크크, 그것도 그렇고 말야. 자식이야 또 낳으면 되는 거 아냐? 왜 네 목숨을 포기하려는 거지?"
앞선 마족은 팔이 8개인 상체에 사자의 하체를 지녔으며 표피가 악어가죽 같은 형상의 마족이었고, 뒤이어 입을 연 다른 마족은 산발한 백발에 독수리 부리같이 뾰족한 입, 그리고 등 부위의 커다란 맹금류 날개와 허리춤에 작게 돋은 박쥐의 날개가 인상적이었다.
"오호라~, 이게 누구신가? 니제벨, 데하스피. 쌍으로 얌체 같은 건 지금도 여전하구나!"
발끈한 제니티아가 똑같이 도발했지만, 전장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그녀들은 여유롭게 비웃을 뿐이었다.
"호호호, 빌어도 시원찮을 판국에 우릴 도발해서 어쩌자는 거지?"
"얘, 그냥 냅둬~. 이따가 자식놈의 머리가 잘려나가는 걸 피눈물 흘리며 지켜봐야할 불쌍한 어머니잖니~."
"푸훕! 그것도 그렇네?!"
"그치?"
"닥쳐!!!"
이런 그녀의 칼날같은 외침에, 앞선 마족 셋을 포함한 근방의 병력들이 모두 움찔하여 재빨리 뒤로 빠졌다. 이제 제니티아와 가장 가까이 있는 마족이라고 해봤자, 무너진 저택경계 밖에 있을 정도였다.
'뭔가... 이상해.'
직계자들의 의문과도 같이 제니티아의 성난 마법공격은 이상할치만큼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중심으로 어마어마한 마력이 가속에 가속을 더하여 소용돌이처럼 요동치는 광경이 의아스러울 뿐이었다.
"누구도! 내 아들을 해치지 못해!"
그녀가 자신의 가슴께로 모은 손가락을 시작으로, 투명한 수정이 차츰차츰 결정화되어 온 몸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저, 저건...!"
이 사태를 제일 먼저 파악한 것은 마법술식에 있어서만큼은 이들 중 가장 능통한 니제벨이었다.
"음? 왜 그러냐, 니제벨?"
"이런, 미친! 저 년은 사투를 벌이고자 다중결계를 해제했던 게 아니었어!!!"
그녀는 좀 전까지 그토록 살벌하게 날뛰던 제니티아가 마지막 결계무력화용 무구들이 전부 파괴되자마자, 어째서 갑자기 전투를 중단했는지도 깨달았다.
"안 돼에에!!! 어서 막아!!!!"
초위마법. 제니티아는 그 아득한 옛날 선계의 최고신들이 힘을 모아 차원의 일부를 분리·단절시켜 마계를 만들었을 당시에 사용한 그것을 흉내내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지친 그녀의 마력과 힘이 턱없이 모자라 소규모 범위에 그칠 터이나, 그녀 자신을 매개체로 희생한다면 적어도 저택 인근은 포괄 가능할 것으라 계산됐다.
"발동 못하게 막아! 막으라고!!!"
니제벨의 다급한 외침에 베엘제불측 마족들이 서둘러 마법투사체들이 무수히 쏘아댔다. 그것들이 어찌나 많은지 인간들의 공성전에서 오르내리는 화살비를 방불케 했다.
"어딜!"
하지만 방해공작을 어렵사리 뚫어낸 타샤가 제니티아의 방패를 자처했다.
- 콰과과과과과광!
먼저 그녀의 마법에서 비롯된 얼음기둥들이 요새처럼 장벽을 이루어 그 대부분을 차단했다. 거기에 미처 저지하지 못한 나머지 발사체들 역시 일신의 본체를 이용해 제니티아를 감싸듯 똬리를 틀어 모조리 막아냈다.
"으으윽!!!"
"타... 타아...샤...!"
"...헤헤, 제가 반드시 지킬께요. 제니티아 님."
제니티아는 마법 전개에 집중하느라 입술 떼는 것조차 힘든 상태였으나, 그래도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고마움을 표현했다.
"...고...맙...구...나..."
- 파팡!
그러나 어느새 타샤의 얼음장벽을 간단히 뚫어내며 접근한 니제벨은 그런 잔잔한 감동을 얌전히 허락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이, 이, 이! 하찮은 뱀 따위가!!!"
시간에 쫓기는 그녀는 제니티아를 죽기 살기로 보호하는 타샤의 살점을 우악스럽게 뜯어냈다.
"크하악!!! 아악!"
이 잔인한 광경을 목격한 알베른은 베엘제불 측 마룡 100여 마리를 가까스로 떨쳐내며 즉시 강하했다.
"이, 이런!!! 제니티아 님! 타샤!"
이어서 그가 발출한 시커먼 마력의 숨결이 해일처럼 니제벨을 덮쳤다. 그러나 니제벨 역시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행동을 멈추진 않았다.
- 쿠와아아아-!
- 치이이이이이...
"?!"
그녀를 향해 쏟아지던 알베른의 숨결은, 막아선 크라바샨에 의해 거대한 태풍에 부딪친 물줄기처럼 갈가리 쪼개졌다.
"최초의 마룡 알베른이여, 내 그대의 힘을 시험하겠노라!"
"비켜라! 크라바샨!"
조금 전의 공격실패로 인해 공중을 크게 선회한 알베른이 까마득한 높이로 치솟았다. 그리곤 작심한 듯이 산맥같은 날개까지 접고 무섭게 수직하강했다.
- 슈우우우우우....
그는 그대로 크라바샨과 충돌하여 근거리에서 브레스를 직격시킬 심산이었다.
"으하하하핫! 그래! 그것이다!"
크라바샨을 향해 돌격하는 알베른의 위용은 행성을 멸망시킬 거대 운석에 비할 수 있을 정도로 가히 굉장했다.
이 살 떨리는 공포 앞에선 누구라도 위축될 것 같았다. 허나 정작 이를 맞이하고 있는 크라바샨은 되레 전율을 만끽하고 있었다.
"최초의 마룡이여! 전력을 다해보라! 어서 나의 즐거움이 되어라!"
여기까지 이야기한 크라바샨은, 태산 같은 크기의 알베른을 삼키고도 남을 정도로 자신의 모래폭풍을 끊임없이 확장시켰다.
이 두 존재가 서로 맞닿기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여파가 상당히 강렬했다.
- 크구구구구!!! 파지지지직!!!
이윽고 알베른이 빨려들어간 크라바샨이 생성한 폭풍 속에선 엄청난 양의 천둥번개가 우르릉 번쩍였다. 그 작렬함은 땅 아래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을 얼마간 강탈할 정도였다.
"크하하하하하!"
잠시 후 폭풍이 사그라들며 만족스러운 박장대소가 퍼졌다. 그리고 모든 마족들이 예상했던 것과 같이 그것은 알베른의 음성이 아니었다.
"과연! 정말 휼륭하구나! 솔직히 기대 이상이었다!"
그렇게 용이 추락했다.
- 피이이이이이...
진이 빠져 혓바닥 길게 늘어뜨린 용의 신체는 웅장한 적란운처럼 두둥실 떠있는 크라바샨의 손에 의해 던져지며 땅으로 추락했다.
알베른은 좀 전의 마지막 공격에 모든 존재력을 바닥까지 박박 긁어 불살라 태웠던 모양인지 그의 형체는 점점 더 바스러져만 갔고,
- 퍼석.
이내 지면과 맞닿을 무렵엔 푸석푸석한 잿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흩날렸다.
"아...! 알... 베... 른...!"
"알베른 님!!!"
뱀이 구슬피 울었다.
눈이 순막으로 덮인 까닭에 바깥으로 흐르는 눈물이 직접적으로 보이진 않았으나, 달달달 떨리는 타샤의 음성은 품 속 타락천사의 흐느낌과 꼭 닮아있었다.
반면 큰 상실감을 감추지 못하는 이들과는 달리, 같은 장면을 응시하는 가운데 희희낙락하는 자들도 있었다.
"뭐야, 최초의 마룡이니 뭐니 떠들어댔지만 실상은 별 것도 아니었네? 푸하하하핫!"
"어이쿠~! 저런, 저런~. 이젠 가루도 안 남아서 묻을 것도 없겠다야."
"훗, 그러게. 아무래도 영혼까지 전소된 모양이군. 암만 결속된 종복이라도 온전한 부활은 기대하기 어렵겠어."
타사는 이렇게 저마다 시끄럽게 떠드는 마족들의 사지를 한 놈 한 놈 뜯어버리고픈 생각이 굴뚝 같았으나, 위협적인 존재가 딱 달라붙어있는 탓에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었다.
"훗, 너무 슬퍼 말거라. 금방 너 역시 같은 꼴이 될 테니까."
"이이익..."
알베른과 크라바샨의 격돌을 구경하느라 잠시 멈췄었던 니제벨의 8개의 팔들이, 다시 타샤의 겉가죽부터 샅샅히 찢어발기려는 순간이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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