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문과 닫힌 문 (2)
* * * * *
처음은 2대 정령왕의 겁박에 못 이긴 탓이었지만, 그 다음은 안이하고 섣부른 자신들의 결정 때문이었다.
겨우 2번. 그러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드레이크 일당에겐 최고의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 덕분에 몇 달은 더 정찰하고 분석하고 난 이후에 실행하려던 기습을 크게 앞당길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드레이크 측의 작전 중 피해가 적었단 뜻은 아니었다. 그가 임무목표를 당초 눈독 들여왔던 워프게이트가 아닌 웜홀생성기로 급히 변경한 탓에 피해가 더 커졌다고 하겠다.
그가 나름 시설의 내부구조를 훤히 꿰뚫고 있다는 강점을 십분 활용하여 결과적으로 성공은 했으되, 이 과정에서 투입인원 중 과반수를 잃었으므로 승리를 거뒀다고는 할 수 없었다.
‘미안하다. 너희들의 희생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 드레이크는 쓰러져간 동족의 피를 헛되이 만들지 않기 위해 점령한 시설건물의 중심부로 이동했다.
- 지이이잉...
동력이 충만해진 웜홀생성기가 기계마찰음을 내기 시작했다.
“출력 정상! 충전완료! 준비됐습니다, 드레이크 님!”
사전작업을 숨가쁘게 마친 어느 수하의 외침에 드레이크가 좌표를 능숙하게 입력했다. 현재는 오드노아 특임대들이 언제 들이닥쳐도 이상치 않은 상황이었던 터라, 조작장치 위에서 정신 없이 돌아다니는 그의 손놀림마저 몹시 다급해 보였다.
“이제 됐다!”
- 치직, 치지직!
기계장치가 토해낸 마력장이 흐린 하늘에 먹구름 끼듯이 한 가운데로 똘똘 뭉쳤다. 그리곤 그것을 중심으로 구멍을 조성하더니만 이내 점점 더 크게 부풀었다.
- 슈아아아아...
그렇게 완성된 웜홀은 출발지와 종착지를 잇는 거대한 통로로서 거듭났다.
- 척. 척. 척. 척. 척.
드레이크는 지금 막 잔여 병력과 함께 웜홀생성기를 통과한 아르카니토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어서 오십시오, 주군!”
“허어...”
단순히 드레프타에 설치된 워프게이트 수준을 상상했었던 아르카니토는, 7층 건물 크기의 웜홀생성기를 올려다보며 크게 감탄했다.
“웜홀생성기라고? ...이건 좀 놀랍군! 상상 이상의 성과로구나!”
“제 부하들과 주군의 전사들이 많은 피를 흘려낸 덕분입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본인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무리한 저의 계획에 충실히 따라줬습니다. 그래서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크흠, 그렇군. 하지만 아주 훌륭하다! 이런 용맹한 행동으로써 너희의 충성심을 증명했으니, 1등 공신은 바로 너희 일족이나 진배 없다! 위대한 지도자이신 라호나바스 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터인즉, 매우 후한 보상을 기대해도 좋다!”
“감사합니다, 주군!”
“그럼 바로 시작하지. 본성의 좌표를 유도하는 일은 내가 직접 맡도록 하겠다. 훈련된 기술자들은 모두 날 보좌토록!”
“”“네!”””
아르카니토는 후순위 계승자들을 제거하는 가운데 포섭한 기술자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뒤로하며 말을 이었다.
”비가아르!”
“예, 하명하십시오!”
”너는 나머지 인원을 데리고 오드노아들의 저항을 철저히 막아내라! 다만, 적의 어떠한 도발에도 응하지 말고 방어에만 치중해야 한다! 나는 이 이상으로 충신들을 잃고 싶지 않구나!”
“옙! 아르카니토!”
“그래, 조금만 애써라.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트로돈을 위하여.”
”트로돈을 위하여!”
이후 모종의 작업을 거쳐 웜홀생성기의 통제권한을 드레이크로부터 이양 받은 아르카니토가 빙긋 웃었다.
“이제 신물 나는 왕위 쟁탈전에 종지부를 찍으리라!”
드레프타에서의 패배로 물 건너간 줄 알았던 왕관이 다시 그의 눈앞에서 아른거려서일까? 그의 차가운 심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 * * * *
드레이크가 괜히 엄청난 희생을 각오하고서 인원을 대대적으로 분쇄시킨 게 아니었다. 오드노아 최후의 탈출수단인 웜홀생성기가 탑재된 건물은, 애당초부터 독립방공호처럼 견고하게 설계된 요새와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뚫어라! 반드시 돌파해야만 한다!”
“저항이 너무 거셉니다! 트로돈 전사들이 전부 웅크린 채 오로지 방어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어떤 자연재해에도 끄떡 없을 만큼 견고한 구조와 몇 개 안 되는 진입로가 유독 골치였다. 트로돈 전사들이 그 점을 이용하여 정문 입구를 틀어막고 그 외의 모든 통로를 무너트린 순간부터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가 따로 없었다.
“후우... 최후의 저항을 고려한 전략설계였건만, 적들이 이것을 역으로 써먹는 사태가 발생될 줄이야.”
샌더스가 한숨을 뿜는 사이, 정복을 갖춰 입은 장군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와 크게 외쳤다.
“총통 각하! 원로회에서 시설물 폭파에 동의했습니다!”
“이미 늦었네. ‘데시무크(Deshmukh)’ 사령관.”
“...예?”
“내가 이미 실각을 각오하고 실행해봤다네.”
“......”
”하지만 보시다시피 자폭명령이 먹히지 않았지. 비스마우어 일족이 이미 거기까지 조치를 취한 모양이야.”
“크윽! 이 배신자들이...”
“우리를 속속들이 아는 놈들이라서 그런지 확실히 치명적이군.”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각하! 서둘러 원로회 장로들에게 요청하시어...”
“그건 불허하겠네.”
대뜸 데시무크의 말을 끊어버린 샌더스는, 사령관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잘 알았다. 농담조로 ‘8성 마법사들의 친목회’라고도 불리는 원로회가 작정하고 융단폭격을 퍼부으면, 해당 시설의 완파도 허튼 꿈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샌더스가 단호한 입장을 취하는 이유는, 웜홀생성기 시설이 파괴되기에 앞서 수도 전체가 파괴마법의 여파에 휩쓸려 콩가루가 되기 때문이었다.
“아직 대피 못한 동족이 태반일세. 그런데도 자네는 나보고 그들을 버리란 소린가?”
“각하,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차라리 그것이 멸족보다야 낫습니다! 이대로 트로돈의 주력본대가 들이닥치면 모든 게 끝입니다! 최후의 탈출수단도 잃은 채 패배해버리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게 되지 않습니까?!”
“끄응...”
총통의 미간에 생긴 주름을 확인한 데시무크가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쾅 때리며 말했다.
“만약 그 대응책이 망설여지신다면 제게 직할부대의 운용권을 넘기십시오! 이 데시무크가! 무슨 수를 써서든 최악의 사태만은 저지하겠습니다!”
“!”
샌더스는 데시무크가 자신을 몰아세운 진짜 목적을 알아챘다.
“자네... 설마...”
“침입자들에게 시간을 더 허락해선 안 됩니다! 저쪽에 비스마우어 일족이 가담한 이상, 웜홀이 적들의 행성과 연결되는 일은 그야말로 초읽기가 아닙니까?”
“크흠...”
샌더스는 종족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화약통을 등에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들겠단 데시무크의 의지 피력 앞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확실히 웜홀생성기만 동작불가로 만들면 트로돈의 침공을 지연시킬 순 있다. 허나...’
뛰어난 용장과 정예 중에 정예부대를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잃고 싶지 않았고, 앞으로의 전투를 생각해서라도 그래선 안 될 노릇이었다.
“부디 용단을 내려주십시오, 각하!”
“끄으응...”
점점 그의 선택장애가 중증으로 심해지는 그때, 누군가 호위대 사이를 헤집으며 등장했다.
“샌더스 총통 각하!”
“레이첼?”
루카스의 지인들을 통솔하여 수도 밖으로 대피하고 있어야 할 그녀의 갑작스런 등장이었기에, 샌더스의 표정이 오묘해질 수 밖에 없었다.
“야, 니가 여기 왜 있어?”
크게 당황한 샌더스의 말투가 다분히 사적이었으므로, 레이첼 또한 사무적인 말투를 거두고서 편하게 이야기했다.
“삼촌,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뭔지 모르겠다만 나중에 하자꾸나. 넌 어서 돌아가서 대피하거라. 지금 대장로께서 자리를 비우셨기 망정이지, 네가 여기 있는 걸 보셨다면 기염을 토하셨을 거다.”
“안 돼요, 진짜 중요한 용무에요!”
“?”
”일단 무조건 들으세요! 이건 신탁이라고요, 신탁!”
“...뭐?”
머릿속으로 나디아와 야스민을 떠올린 샌더스는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 * * * *
같은 시각. 반트리슨 왕성 내의 어느 접객실에선 루카스가 축 쳐진 자세로 앉아있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통신기구를 10초가 멀다 하고 주시하기를 반복했다.
“......”
오만상을 찌푸린 그의 곁에 베스퍼가 조심히 다가섰다. 맏언니 로비샤가 선뜻 양보해준 덕분이었다. 그녀는 고소한 향을 풍기는 찻잔을 루카스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거라도 좀 드시면서 마음 가라앉히세요.”
“고맙습니다, 베스퍼.”
“네? ‘고맙습니다’라고요?”
베스퍼로부터 무언의 압박을 받은 루카스는 서둘러 존대를 거뒀다. 며칠 전 둘째 부인으로 거듭난 그녀의 작은 바람이 루카스의 하대였기 때문이었다.
”...고맙다.”
“호호~, 별 거 아니에요, 자기.”
비로소 만족한 그녀는 그의 어깨에 기대 앉았다. 그리곤 찻잔을 입에 대지도 않고 계속 만지작거리는 루카스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이내 몇 마디 건넸다.
본래는 어설픈 위로 대신 얌전히 곁에 머물러줄 계획이었으나, 왠지 모를 위화감이 엄습해왔던 것이다.
“저기... 너무 걱정 마세요. 아카반 총장님과 디마우스 선배도 함께 계시잖아요. 그 분들께서 계시는 이상 신탁자님들의 안전은 확보된 거나 마찬가지랍니다.”
“그야 그렇겠지. 그들이 최선을 다해주리라 믿는다.”
“좋아요, 바로 그 마음가짐이에요! 이대로 꾹 참고 신탁을 따르세요. 자기가 그곳에 있으면 안 된다고 하잖아요.”
“그래, 자칫 안배가 틀어질 수 있다며 거듭 강조했었지.”
루카스는 어느새 찻잔 대신 은색의 십자가 목걸이를 매만지고 있었는데, 왠지 그 기색은 알쿤다 자매를 향한 염려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래서일까? 베스퍼는 이유 모를 불안을 떨치기 위해 화제를 바꿨다.
“피이~, 너무 가라앉은 분위기가 별로네요. 우리 조금 다른 고민을 해봐요!”
“그것도 괜찮겠군.”
”우리 어느 나라에 정착해서 살까요? 아, 그건 마지막에 정하고, 우리 자기는 도시랑 시골 중에 어디가 좋으세요?”
일반 귀족의 평균수명 62세. 영유아를 제외한 통계수치에 기반하여 설계된 그녀의 미래는 나름 소박한 축에 속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루카스의 푸근한 호응을 이끌어내진 못했다.
한 마디로 의도는 좋았으되, 결과는 전혀 그렇지 못한 경우라 하겠다.
“어... 음...”
”전 혜택 많은 도시를 선호하지만, 한적한 시골에서 옹기종기 모여 사는 것도 나름 재미있을 것 같아요.”
“......”
”이왕이면 산맥이 가까운 마을이 좋겠네요. 이래봬도 연금술에 약간은 조예가 있어서 간단한 의약품을 만들어 팔면 생활비에 많은 보탬이......”
그녀의 직감은 루카스가 뭔가 말을 하려다가 관두는 모습을 계속 무시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침울하다 못해 측은해지는 그의 눈빛을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왜, 왜 그래요, 자기? 사람 불안하게시리...”
“...베스퍼.”
심정고백을 결심한 루카스의 입이 에둘러 열렸다.
“당신은 짐작하고 있을까? 내가 왜 당신을 계속 밀어내려 했는지를?”
“음... 우리 자기가 마족이라서?”
“맞다. 그것이 가장 중대한 사유이긴 하다. 그러나 말 못했던 다른 이유도 있었다.”
“혹시... 언제 마계로 돌아갈지 몰라서?”
- 끄덕.
“휴으~, 난 또 뭐라고! 저 진짜 심장 떨렸잖아요! 에잇! 너무해!”
베스퍼가 안도의 한숨을 돌리며 반론을 펼쳤다.
“저희 연구가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긴 해요. 하지만 지금까지의 성과로 짐작하건대 최소 5년은 지나야 그 실마리를 잡을까 말까이고, 그 이후에 제대로 된 실험에 돌입하려면... 어, 엇...?”
신나게 떠들던 그녀는 특정단어를 문득 떠올리곤 말끝을 흐렸다.
“서, 설마! 천상의 안배라는 게... 아니... 아니죠?”
“실망시켜 미안하다. 어쩌면 내가 마계로 돌아갈 날이 임박했는지도 모른다.”
“아...!”
“물론 아직 확실하진 않다. 이건 나디아를 직접 만나봐야 분명해지는 내용이다. 그러나 나와 천상의 관계를 생각하면, 나의 복귀와 깊이 연관됐을 거라고 짐작된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우친 그녀가 루카스의 목에 매달렸다.
“이, 이럴 순 없어요! 이제야, 이제서야... 당신의 마음을 한 조각 얻었는데...”
“미안하다, 베스퍼. 이 일이 당신이란 사람을 알기 전에, 그렇게 아주 조금만 더 일찍 일어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안 돼요! 자기랑 헤어질 수 없어요! 싫어요! 이건 너무하잖아요!”
“모두 내 잘못이다.”
어느 때부턴가 위로 받을 사람과 위로 해주러 온 사람의 처지가 뒤바뀌어버렸다.
- 작가의말
어른이 여러분~,
내일도 이 시간에 또 만나요~
모두모두~ 좋은 하루 보내요~.
그럼 이마안~, 안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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