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률을 읽는 소녀 (6)
* * * * *
개러스의 영과 육이 여인들에게 탈탈 털리는 시각. 다른 건물 내에선 러셀과 루카스의 대화가 마법통신기기를 매개체로 하여 두런두런 오가고 있었다.
<...(중략)... 걱정마십시오. 루카스 님이 이넨카에 도착하신 후에 아무 불편함이 없도록 조치해두겠습니다. 아, 거기 지점 관리자도 스스럼 없이 부리십시오. 그 한지에서 편히 놀고 먹기만 하는 녀석이었는데, 때마침 잘 됐습니다, 허허허!>
"고맙다, 릭."
<하하, 이게 바로 친구 좋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여기 사정이 여의치 않아 제가 직접 갈 수가 없어 참으로 아쉽습니다.>
"도움에 감사한다. 그리고 나 역시 약속한다. 그대가 곤란할 때 나도 적극적으로 힘을 보탤 것이다."
<아하하하, 아니요.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하고 있습니다. 루카스 님이 아니셨더라면 제가 어떻게 타미아르의 대마법사님과의 끈끈한 연줄을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 그 분께서 절 좋아하던 싫어하던, 서로 꼬박꼬박 정기적으로 연락 나누는 사이가 될 줄은... 으허허허!>
"그렇지 않다. 그것은 나를 위한 제안이었다."
<하하하, 그럼 아무쪼록 다시 뵙는 날까지 평안하시길 빕니다, 루카스 님!>
"안녕히, 릭."
정겨운 분위기로 마무리 되는 통신. 하지만 이것을 방음 결계 뒤편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던 지점관리자는 그 농도에 비례하여 끙끙 앓았다.
'대체 이게 뭔 날벼락이래?!'
그는 루카스가 온전히 결계 내에서만 통신을 했기 때문에 상세 내용은 전혀 듣질 못했다. 그러나 지난 3년 하고도 5개월을 한량처럼 띵까띵가 보내온 변두리 관리자에겐 루카스가 영 껄끄럽기 짝이 없었다.
조직의 보스가 접은 허리 펼줄 모르고 응대하는 손님이란, 그에게 호환마마보다도 무서운 존재와 다름없었던 것이다.
'아니, 내륙의 어엿한 지부도 아니고 왜 하필 여긴데?! 여긴 기반도 이제서야 간신히 다진 코딱지만한 지점이라고! 대체 이 허접한 곳에서 뭘 주워먹겠다고 기어들어온 거야?! 당장 먹고 뒤질 돈도 없는 판인데!'
솔직히 고되고 힘든 육체적인 부분은 밑의 수하들을 이리저리 굴려서 모조리 해결해온 그가 내뱉을만한 푸념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에게 맹렬한 손가락질을 가해선 안 됐다.
'아오! 라구루 끄나풀들의 감시를 피해 갖은 로비를 한다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 그렇다고 잘 나가는 내륙 지부처럼 자금사정이 빵빵한 것도 아니고!’
관할 실세들에게 정기적으로 뇌물을 바치고 남은 예산은 찌꺼기에 불과했다. 그 쥐꼬리만한 예산으로 지점살림을 꾸리는 가운데 덩달아 잃어버린 그의 머리숱 절반은 슬픈 동정을 받아 마땅했다.
’에휴~, 관리총관이랑 경비대장에게 이번 달 갖다 바칠 뒷돈만 해도 빠뜻해서 환장한다, 환장해! 젠장, 그러고보니 불쌍한 우리 조직원들 배불리 먹여본 때가 언제였었는지도 가물가물하네! 하... 제발 이 인간이 계집질만 적당히 하다가 그대로 꺼져줬으면 소원이 없겠다!'
루카스는 남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고뇌중인 지점관리자를 얼마간 그대로 지켜봐줬다. 그러나 시간관계상 더는 기다릴 수가 없기에 먼저 말을 걸었다.
"흠, 저기."
"망할, 돈 없ㅇ..."
"?"
"컥!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말이 헛나왔습니다! 죽을 죄를 졌습니다! 이번 딱 한 번만 용서해주십쇼!"
"...당신은 일단 일어나십시오."
"감사합니다아-!"
루카스는 돌바닥에 자진하여 원산폭격 중인 상대를 일으켜 약간의 정황설명과 요구사항을 밝혔다.
"...(중략)... 그렇게 된 겁니다. 당신은 이해했습니까, '쿠마르(Kumar)' 씨?"
“예, 대략적으로 ‘이해’는 했습니다.”
그는 다만 ‘납득’하진 못했을 따름이었다. 좀 전의 루카스의 이야기를 한 줄로 짧게 축약하면, '이왕 라구루 연합과 척을 진 김에 그냥 전면으로 들이박겠다.'는 의미라서였다.
"실례지만 미ㅊ... 아니, 아니! 잠시 생각 좀 하겠습니다!"
쿠마르는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실례지만 미친 놈이십니까?'란 외침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나마 이 놀라운 인내심은, 러셀의 보좌관인 하자르로부터 사전에 귀띔받은 내용이 떠올랐기에 가능했다고 봐야 했다.
'가만가만... 하자르 님이 이 양반은 측정이 불가한 특급 중의 특급 전투사라고 했었어. 좀 뻥인 것도 같지만.. 그래도 에반스 자작의 친위대 따윈 간식처럼 호로록 후려먹는... 응? 어?! ...와씨, 잠깐만!'
그의 머릿속 주판에 새빨간 불똥이 팍팍 튀기 시작했다.
'일단 구라가 아닌 진짜라고 치자?! 크흐~, 어쩌면 힘센 양아치 군단에 불과한 라구루 따윈 진짜 별 게 아닐 수도 있겠는데? 솔직히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 새끼들은 함선이랑 화포, 그리고 바퀴벌레 같은 머릿수만 빼면 별 것도 아니잖아?'
딴에는 뭔가 그럴듯한 느낌이 들자, 쿠마르는 루카스를 살짝 떠보며 그의 목표부터 확인했다.
"저어... 외람되나... 루카스 님의 세부 계획을 조금이나마 말씀해주실 있을까요?"
"별 거 아닙니다. 대단히 간단합니다. 나는 이 섬의 비리를 제후에게 고발할 생각입니다."
"오오, 과연!"
그동안 자신들의 여력이 모자라 상상만 해왔던 방법이 루카스의 입에서 언급된 순간, 쿠마르는 입맛을 싸악 다셨다.
'어이쿠, 이 양반이 생각보다 맥을 잘 짚고 있었는데? 알푸샤리카 제후는 이곳따윈 언제든 밀어버릴 순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자식들이 섬과 함께 새카맣게 자폭할까봐 실익을 적당히 챙기는 선에서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까 말이야!’
그가 머릿속에 가정에 가정이 더해질수록 군침이 강물처럼 샘솟을 지경이었다.
’후후후, 하지만 실제로 라구루가 빼돌려 먹는 액수가 다달이 챙겨먹는 돈의 8배가 넘는다면? 그리고 이 사실이 제후의 귀에 들어간다면? 더욱이 단순한 심증이 아니라 확실한 증거까지 알푸샤리카의 손에 쥐어진다면?'
이런 쿠마르의 긍정적인 저울질은 그 스스로의 행복회로마저 풀가동시켰다.
'아니지, 아니야! 실패해도 우리 지점으로썬 완전 개이득이 아닌가? 애초에 이 특급 전투사 양반이 라구루 본진에 들이박고서 그 놈들 전력만 깎아먹어줘도 감사한 일이지! 그 와중에 내가 관리총관과 라구르 사이를 이간질 시킬 수만 있으면 진짜 금상첨화고! 오, ㅆ바알-! 이건 성공여부를 떠나서 겁나 달달한 호기였잖아?!'
이윽고 열정과 도전정신에 파란불이 켜진 그가 루카스를 향해 정중히 물었다.
"루카스 님, 저희가 최우선적으로 뭘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무엇보다 나는 비리의 증거를 원합니다. 그것이 첫째 목표입니다."
"에고고, 제후에게 갖다 바칠 수준의 확실한 증거 수준이면, 관리총관이나 라구루 수장이 보유하고 있을 이중장부나 인장이 찍힌 서류 같은 걸 말씀하시는 거겠지요?"
"그렇습니다."
루카스의 확답은 쿠마르로부터 앓는 소리를 자동으로 뽑아냈다.
"아이고오~, 밝히기 부끄럽지만 이 섬에 대한 저희 조직의 영향력은 굉장히 하찮습니다. 정보망도 간신히 구색만 갖춰진 상태입죠. 솔직히 그러한 문서의 위치는 커녕 그게 실존하는지도 불분명합니다. 지난 번에 이 섬 관리총관이 머물고 있는 영주성의 설계도면을 구하는 일조차 아주 고역이었으니... 더 이상 설명 안 드려도 짐작하시겠지요?"
"흐음? 설계도면? 오, 난 그거라도 원합니다."
"?!"
쿠마르는 왠지 이대로 도면을 루카스에게 넘기면, 이튿날 해가 뜨기도 전에 영주성이 발칵 뒤집혀질 것 같은 상상이 들어 재빨리 혀를 놀렸다.
"하핫, 루카스 님! 외람되오나 관리총관은 차선책으로 놔두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칫 제후가 파견한 관리를 건드렸단 죄목으로 수배가 된다면, 그 다음 일정에 차질이 있지 않겠습니까?"
"음... 당신의 주장도 일리가 있습니다."
역시 기분탓이 아니었었다.
'맙소사! 이 양반이 진짜로 영주성 쳐들어갈 작정이었어?! 뭐 이리 물불 안 가리고 저돌적이야? ...아니야, 차라리 겁 없는 걸 장점으로 생각해야 한다. 자! 솟아라, 내 마음 속 긍정의 힘!'
그렇게 등짝에 찔끔 흘러내린 식은땀을 차갑게 식혀낸 쿠마르는, 루카스를 살살 구슬리며 공격의 조준방향을 살짝 비틀었다.
"아하하하. 제가 가만 생각해보니, 관리총관의 경우엔 자신이 저지른 비리를 철저히 숨겼으면 숨겼지 문서형태로 보관할 것 같진 않군요. 꽁쳐돈 서류 같은 게 있어봤자 보험삼아 남긴 윗분들과의 뒷거래 관련 일 겁니다."
"아하, 확실히 납득했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허를 찔러서 라구루 본진을 노리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
"만약 제가 크레이그라면 관리총관을 비롯한 모든 뒷거래 증거들을 보관해둘 겁니다. 확실한 약점 몇 개는 손에 단단히 쥐고 있어야 공권력을 개무시하고 날 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호?”
귀가 솔깃해진 루카스가 그의 논리에 더욱 집중했다.
”지들이 이 섬의 주인이라고 자만하는 터라, 어떤 이가 대범하게 치고 들어와서 서류 몇 장만 홀랑 빼가리란 생각은 미처 못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약간의 기만책만 가미한다면 의외로 쉽게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흠... 당신의 계획 궁금합니다. 자세한 설명이 가능합니까?"
"아휴, 설명하다 뿐이겠습니까? 제가 직접 루카스 님을 보좌하면서 물증을 빼내도록 하겠습니다. 갑자기 떠오른 계획이라 헛점이 있을 수 있거든요."
루카스의 구미를 쫙쫙 잡아 당기는데 성공한 쿠마르는, 후다닥 일어나 어느 그림 액자 뒤에 숨겨진 금고를 열었다.
"헤헤, 저희 지부가 이 섬에 들어와서 기반을 다지는 와중에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바로, 라구루 놈들에 대한 신상파악이었습니다. 자자, 이해하시기 쉽도록 상세자료를 곁들이면서 설명해 드리죠. 그들 거점의 개괄적인 설계도는 물론이고, 잔챙이 끄나풀부터 두목인 크레이그 선장에 이르기까지 정리되어 있답니다, 하하핫!"
그는 설계도 십수 장과 일련의 몽타주까지 그려져 있는 총 5권의 두터운 인명록, 그리고 간부급 조직도와 함선배치가 그려진 지도뭉치를 한 가득 늘어놨다.
- 쿵.
"흐흐, 라구루 연합에 대해 그동안 저희가 파악한 자료들입니다! 어떻습니까, 꽤나 잘 정리되어 있지 않습니까? 지난 3년간 지점 자원의 대부분이 이것을 만드는데에 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지요. 우헤헤헷! 자~, 이제 요것들을 근간으로 반짝 세운 제 잔꾀를 말씀드릴까 합니다."
“좋습니다.”
쿠마르의 자랑과 넉살을 들은 루카스는, 금화만 담긴 돈주머니를 그 위에 올려놓았다.
- 툭.
"훌륭한 자료입니다. 그런데 나는 당신 계획이 기대도 되지만 걱정도 됩니다. 이것으로 충분한 값이 되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
"?"
이게 뭐냐고 묻는 쿠마르의 눈빛과, 겨우 이정도론 택도 없냐는 루카스의 의뭉스런 시선이 서로 교차했다.
"큼큼, 미안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여비를 제외한 내가 가진 전부입니다. 혹시 부족하다면 최대한 빠르게 갚겠습니다."
"...그 무슨...?"
그때 마침 중력을 이기지 못한 돈주머니가 기우뚱 쓰러졌다.
- 촤르르르르르...
스르륵 풀려진 돈주머니 입구에선 금화들이 대거 쏟아져 나왔다. 그 금화들이 흘리는 수줍은 미소에 마음이 홀랑 빼앗긴 쿠마르는, 겸연쩍어하는 루카스가 건넸던 심심한 사과의 절반도 듣지 못했다.
"그, 금화...! 소금화와 대금화!"
그러나 꿈틀거린 감동이 해일처럼 밀어닥치는 데엔 그 나머지 절반만으로 충분한 효과를 내는 듯 보였다.
"이거면 몇 달 동안 뒷돈 갖다 바칠 거 다 하고도 우리 애들 밥값 걱정 안 해도 되는... 크어흐, 으흐흑..."
이윽고 무릎까지 꿇고 경건하게 돈주머니를 들어올리는 쿠마르의 모습은, 기사로 서임 중인 병사에 비견되고도 남았다.
"루카스 님! 저를 개처럼 부려주십쇼! 이 쿠마르, 말 잘 듣는 황소처럼 일하겠습니다! 진짜 혼신을 다하겠습니다!"
“......”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우. 오랜 시간 '갑'의 노골적인 착취가 일상다반사였던 '을'의 마음을 얻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할지도 모른다.
- 작가의말
연재주기에 따라 일요일은 쉽니다.
아참, 설연휴 기간에도 연재는 계속 되겠습니다~.
이미 다음주 토요일 분량까지 예약 걸어놨거든요~.
근데 어차피 아무도 안 읽으니까 괜한 걱정이겠네요! 와하하하!
매일 추천 눌러주는 친구야 고맙다. 복 아주 많이 받으렴. 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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