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해한 정신세계 (3)
뱀의 것을 열 배쯤 확대시킨 듯한 송곳니 한 쌍, 유리용기 속 보존액에 담겨 있는 주먹만 한 눈알, 그리고 파충류의 일종으로 보이는 외피 조각.
다소 길게 나열된 물건을 유심히 살피는 그녀의 눈가와 손끝은 때때로 파르르 떨리곤 했다.
'...틀림 없어. 이건 툼베르, 그리고 이건 트로돈의 표피가 분명해. 드레프타 사건의 생존병? 아니면 2차 선발대일까? 그래도 아직은 행성좌표 확정 단계까진 아닐꺼야. 만약 전력손실 없이 공간도약을 시키는 단계였다면 이 도시가 이렇게 멀쩡할 리 없으니...'
"더불어 이것들도 살펴봐 주십시오, 레이첼 양."
"어머."
레플로는 가뜩이나 온갖 추론과 가정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운 그녀 앞에 또 다른 사체 조각들을 즐비하게 늘어놓았다.
"...오염된 마나에 노출된 변이 동물들이군요. 음... 단순히 마나의 잔여농도와 변이수준으로만 판단했을 적엔... 결코 우연으로 치부할 순 없겠네요."
"네, 그렇습니다."
"며칠이나 지난 건가요?"
"정확히는 28일. 이곳 영주님을 먼저 거쳤다가 보름 전부턴 제 쪽에서 관리해오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제대로 된 보존이 이뤄진 건 15일 전부터란 뜻이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자연 발생은 아니군요. 변이의 방향성도 그렇고, 이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들낸 결과물로 봐야 합니다."
"과연 정확하십니다."
"시험은 통과했나보네요."
"하하, 언짢으시겠지만 그 부분은 다시금 사과드립니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레플로는 입으론 레이첼에 대한 칭찬과 사과을 잊지 않으면서, 자신의 책상 옆에 붙어 있는 작은 금고를 열어 모종의 내용물을 꺼내왔다.
- 딸깍.
"이게 바로 제가 무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
그가 가져온 두 뼘만한 목합 안에는 잘게 조각난 남색 수정파편이 한 가득 들어있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흑마법이네요. 틀림 없어요. 영혼을 강제로 밀어넣고서 제물로 삼은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네요."
"그렇다면 제가 특별히 초청드린 이유도 대략 짐작하시겠습니까?"
"네."
"설마... 그 카이므...입니까?"
"아니요. 카이므, 그러니까 비스마우어 일족의 혈마법은 아닙니다. 그들 마법에 물든 수정은 이런 짙은 남색을 띄지 않아요. 더욱이 이렇게 조각이 남지도 않죠. 일반적으로 그것들은 용도를 다하면 모래처럼 완전히 붉은 가루로 풍화됩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이와 같진 않습니다."
"으휴~, 그렇군요. 저는 카이므의 잔당들이 타미아르에서 이 지역으로 넘어와 활동을 재개하려는 건 아닐까하고 조마조마 했었습니다. 확인 감사드립니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레플로는 안도의 한숨에 이어 걱정스런 호흡을 번갈아 내쉬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뭔가 다행이면서도 다행스럽지 않군요. 카이므가 아니란 즉슨, 정체가 불분명한 흑마법 소환수들 간의 알력다툼이 발생했다는 이야기인 지라..."
"헉! 관련 사건이 벌써 몇 차례나 있었단 말씀인가요?!"
"에...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릴 내용은 정말 중차대한 기밀사항입니다만..."
레이첼이 레플로의 흐려진 말끝을 눈치껏 받았다.
"제가 어디 가서 불필요하게 떠벌리진 않을 겁니다. 필수불가결한 경우가 아니라면요."
"좋습니다. 그리 약속해주신다면야 지부장의 권한으로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이상현상이 처음 감지된 건 정확히 42일 전이었습니다."
레플로의 검지가 지도와 앞서 꺼냈던 물건들을 차례차례 가리켰다.
"이곳 영주성 기준 서남쪽 산등성이 부근에서 다발적인 파괴마법이 최초 목격됐습니다.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벽 경계 중이던 초병 대다수가 유관으로 직접 확인했을 정도였지요. 이후 날이 밝자마자 도시 경비대와 저희 지부가 합동으로 수색대를 파견한 결과가... 바로 이것과 이것들입니다."
"으음..."
입술을 굳게 닫은 레이첼의 진중한 표정은 레플로의 이야기에 집중했다라기보단, 일자를 계산하여 이것저것을 따지느라 여념이 없던 데에 있었다.
'드레프타와의 거리와 시간을 고려하면, 그때 당시 트로돈의 잔여 병력은 아닌 게 확실해. 그나저나... 도대체 어떤 세력이 트로돈과 툼베르를 맞상대한 거지? 툼베르는 그렇다 치더라도 트로돈 전사들은 우리측 정예에게도 버거운 상대인데... 아, 그래서 흑마법을 사용했다는 건가? 그렇다면... 대체 누가? 왜?'
그녀의 궁금증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가운데, 레플로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영주님께선 며칠 간의 수색작업에도 별다른 성과가 없자, 한때의 가벼운 소란 정도로 일단락 지으려고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요즘 같은 대목에 기괴한 소문이 돌아 상인들의 발길이 끊어지면 곤란해지니까요. 그런데..."
"그런데요?"
"최외각 경계에 있던 몇몇 촌락과 마을이 난데 없는 습격으로 초토화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것도 일주일이 넘도록 순찰대의 정기보고가 끊긴 이유를 알아보던 정찰대에 의해 확인된 사안이었지요. 그때 정찰대가 급히 복귀하면서 생존자와 흑마법에 사용된 이 수정파편들을 수거해왔습니다."
"...듣기만 했는데도 매우 심각하네요."
레이첼의 공감에 그의 안색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이미 심각한 정도를 넘어섰습니다. 저희 지부 사무국장을 포함한 조직 내의 최고 실력자 37명과 영주님의 정예 기사단 64명이 암암리에 투입됐습니다만... 어젯밤 이후로 소식이 두절된 상황입니다."
"......"
"영주님은 영주님대로, 저는 저대로 상부에 즉각적인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허나 외부지원이 당도할 며칠 사이에 영지에 불운이 닥칠까 우려하는 중입니다."
"그때 마침 이 도시를 방문한 오드노아 종족에 대한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되셨던 거고요."
"그렇습니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했던 저에겐 기적이나 다름 없었지요."
암울한 속내를 다 털어낸 그의 눈빛이 간절하게 레이첼을 향했다.
"그으...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언급하면 오히려 스톤 양께서 비웃으실 수도 있는데... 저는 사실 온건파입니다."
레플로의 이야기가 뜬금없이 샛길로 빠진 것 같았으나, 당사자인 레이첼은 그 의미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네, 그건 저희에게 면담을 요청하셨을 때부터 예상했었습니다. 지부장님께서 강경파이셨으면 저를 배척하기 바빠겠지요."
"그렇습니다. 자체적으로 해결하고자 폐쇄적으로 움직였겠지요."
근래 헤트만 마법사 연합 내부엔 2개로 갈라진 알력이 존재했다. 요정족과는 별개의 독자적인 노선과 마법체계를 고수해야 한다는 강경파와, 어차피 대부분의 마법은 요정족 마법을 표절한 아류에 불과하니 정식 교류를 통해 발전을 도모해야 옳다는 온건파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저희에게 힘을 보태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무래도 핵심전력이 전부 빠진 상황이라 돌발사태가 일어나면 적절한 대응이 어려운 처지입니다. 이 일이 잘 마무리 되기만 하면 저희 온건파의 입지도 더불어 한층 두터워질테니, 속는 셈치고 저흴 도와주실 순 없을는지요?"
"죄송하지만 그에 대한 결정권이 제겐..."
"정히 난감하시면 제 친우가 당도할 때까지만이라도 부탁드립니다. 비록 국경 너머 사는 친구이긴 하지만, 사건 초기에 바로 불러들였었으니 분명히 며칠 안으로 당도할 겁니다."
"저어... 몹시 곤란하신 지부장님의 입장도 잘 인지했고, 제 마음 같아서도 꼭 도와드리고 싶은데..."
레이첼의 은근한 시선이 달달한 홍차를 홀짝홀짝 음미하고 있던 루카스를 향했다. 그녀 딴에는 의사결정권이 그에게 있음을 살짝 돌려서 표현한 것이었다.
"음? 왜? 뭐? 나한테 할 말 있나?"
"히이~."
레이첼의 고른 치아가 새하얗게 드러났다. 조금 전까지 대단히 사무적이고 도도했던 그녀라곤 믿기지 않는 산뜻한 미소였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루카스 님?"
헌데 남은 홍차를 마저 쭈욱 들이킨 루카스는 찻잔을 쨀깍 내려놓았을 따름이었다.
"그래, 고생해라."
'뭐야?! 이 인간! 내 매력에 어느 정도는 빠져 있던 거 아니었어?! 설마 내가 착각했던 거?'
그녀의 필살기를 보기 좋게 흘려버린 루카스는, 혼란스런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톡톡 다독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는 마법사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곳에 필요 없다. 근데 여기선 널 원한다. 어... 음... 그러니까... 에... 수고!"
'...참나! 인간들도 쌍욕해버릴 논리수준하고는!'
기막혀 하는 레이첼이 무어라 입술을 떼기 전, 루카스는 홱 돌아서서 지부장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맛있고 따뜻한 차. 나는 감사했습니다. 레플로 딘클리지."
"아... 예..."
지부장은 레이첼이 절절 매는 루카스가 여간내기가 아닐 것이라고 짐작은 했다. 그러나 이리도 단호한 태세의 루카스한테까지 질척일 심적 여력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그의 최대 관심사는 레이첼의 협력를 얻어내는 것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루카스가 의연하게 자리를 뜨려 하는데, 노크와 동시에 방문을 활짝 열리며 니펠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 똑. 똑. 똑. 덜컥.
"지부장님! 디마우스 님께서 당도하셨습니다!"
"뭐? 벌써? 무슨 수로?! 어떻게?! 전이마법 허가도 아직 안 떨어졌는데?"
최근 완공된 공간이동시설로 장거리 여정을 일축했단 사실을 모르는 레플로와 니펠의 어깨너머로, 디마우스와 그의 일행이 집무실 안으로 입장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디마우스 무리에 루카스의 탈주시도를 무마시킬 인물이 포함되어 있단 점일 것이다.
"혀, 형님!!!"
"어? 메토?"
"아니, 세상에! 여긴 웬일이십니까?!"
"그러는 너야말로..."
"저야 주인의 명에 따라 돌아다녀야 하는 종놈 아닙니까?!"
"나는 뭐 어쩌다보니..."
"여윽시! 형님과 저는 보통 인연이 아닌가 봅니다! 정말 보통이 아니에요! 으핫하하!"
"...아하하하... 하아아..."
만나면 대체로 반가울 사람도, 처한 상황에 따라선 느낌이나 정도가 상당히 달라지는 법이었다. 그것은 엉겁결에 발목이 덜컥 붙잡힌 루카스의 표정이 유쾌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어? 어째 표정이 좀 어두우십니다, 형님?"
"흠흠, 아니다. 나는 그저 놀랐다. 나도 너를 만나서 무척 기쁘다."
"그렇죠? 하긴 저도 처음엔 헛것을 본 줄 알았습니다! 으하하하!"
정말로 천상에 있는 누군가의 장난일까? 메토와 조우하게 된 루카스는 이번에도 엄한 일을 피해내질 못했다.
* * * * *
잠시후 디마우스의 오른손이 루카스에게 악수를 청했다.
"오래간만에 뵙는군요. 지난번엔 사적으로 소개 나눌 기회가 없었지요? 하하,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디마우스 오하버입니다. 루카스 님의 위용은 메토를 통해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루카스입니다. 나는 그... 용병입니다."
"아, 이쪽은 이번에 저흴 도와줄 헬퍼드 가문의 엘로디 양이고..."
디마우스는 루카스가 용맹한 명성이 자자한 헬퍼드 가문을 듣고도 별 감흥이 없자 남은 인사말을 짧게 갈마무리했다.
"나머진 서로 초면이 아니니, 급한 용무부터 논의하고나서 이따 점심식사 때에 재차 인사 나누시지요."
"나는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렇게 간단명료한 통성명 이래로 조금 전의 상황설명이 다시 한 번 더 되풀이 됐다. 이윽고 레플로에게서 그 모든 것을 잠자코 듣고난 디마우스가 곧바로 물음을 던졌다.
"유일한 생존자이자 목격자가 있다고 했는데, 실마리는 좀 얻었나?"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네. 실은 지금까지 제대로 된 기억재생은 겨우 두 번 밖에 하질 못했지. 생존자에게 부담이 커서 말이야. 나보다 실력 좋은 자네가 올 때까지 생존자를 안정시키고 충분히 쉬게 하는 일이 최선이었어."
"생존자의 나이가 좀 어렸나 보군. 하긴, 끔직한 악몽을 되풀이 하는 건 어른에게도 생고문이나 다름없지."
"맞네. 자네라면 바로 납득할 줄 알았어."
"지부장 님, 지금 데려오면 되겠습니까?"
"그래주게, 니펠."
상관의 기분을 빠르게 읽고 떠나간 그의 보좌관은, 잠시 후 유일한 생존자를 집무실로 데려왔다. 아니, 정확히는 풍채 좋은 2명의 경호원을 대동하여 반강제적으로 끌고 왔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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