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희생을 모른다. (4)
* * * * *
"호호호, 오늘은 꽤나 유난스러웠구나."
"......"
잘게 썬 음식을 꾹꾹 곱씹는 루카스의 표정이 심각하게 썩어 들어가는 이유는, 뭉텅 썰어 입에 쑤셔 넣은 고기조각이 기대보다 훨씬 더 곤혹스러운 맛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제 성년의식을 치룰 마음은 조금 생겼느냐? 내가 타샤를 폄하하는 건 아니다만, 네가 성년의식만 치른다면..."
"...아니요, 그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합니다."
"오늘도 여실히 체감했겠지만, 성년의식 여부의 차이는 극명하단다."
루카스가 하루 속히 힘을 개화시켜 진정한 마족이자 직계자로 거듭나길 원하는 제니티아였으나, 고집과 반항이 삶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그녀의 아들은 오늘도 그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있었다.
"저는 여전히 준비가 덜 됐습니다."
"그럼 언제쯤 준비가 될 것 같은데?"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너 알고 있겠지만 이미 다른 상위 마족들에 비해서도 10년은 늦은 편이란다."
"...죄송합니다."
"얘야, 개인차이가 있는 것이니 그렇게 죄송할 필요는 없다."
아들의 기운 축 처진 대답을 들은 제니티아는 찻잔만 들고 슬그머니 일어나더니, 긴 식탁에서 멀리 마주 앉은 아들 가까이로 자리를 옮겨와 앉았다.
루카스가 50번째 생일을 코앞에 둔 상황이었으므로, 이번만큼은 성년의식에 대해 확실히 짚고 넘어가고자하는 그녀의 결의가 엿보였다.
"그래도 네가 망설이는 이유가 뭔지 이 엄마에게 속 시원히 말해주려무나."
"별 거 아닙니다. 일전에도 몇 번이나 말씀드렸다시피, 단지 충분한 준비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루카스."
"네."
"네가 조금 오해하고 있구나. 난 지금 부탁하고 있는 게 아니란다."
"......"
제니티아의 나지막한 음성과 눈빛에서 무언의 압박감이 그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루카스는 지금까지 제니티아가 이렇게 딱 잘라 강요할 적마다, 단 한 번도 버텨낸 역사가 없었다.
"...사실... 두렵습니다."
"뭐가 말이냐?"
"제 자아를 잃을까봐 두렵습니다."
"선뜻 이해가 안 되는구나. 날 위해 조금만 더 자세히 말해주련?"
연이은 그녀의 물음에 루카스는 사뭇 진지한 표정이 됐다.
"성인의식 중에 정체성을 잃고 폭주해버린 사례가 있음을 알고 계시는지요?"
성년의식은 내재된 모든 힘을 폭발시키듯 대량 방출시켜 본질적인 영적 형태를 구체화하고, 또한 성체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고정시키는 과정이었다.
쉽게 비유하자면, 꼬물꼬물한 유충이 몇 차례의 탈피를 통해,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성충으로 거듭나는 꼴인 셈이다.
현재 루카스가 걱정하고 있는 문제는 곤충들이 이따금씩 변태과정 중에 기형이 되는 것처럼, 마계 생명체들의 성년의식 결과 또한 항상 멋진 결과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는 점에 있었다.
"훗, 과거 실패한 선례들을 훑어본 모양이구나. 그래,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내용을 천천히 잘 살펴보지 그랬니? 그 대부분은 불안정한 정신상태가 원인이었단다. 당연히 너와는 거리가 먼..."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루카스는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속내를 다 털어낼 생각이 들었는지, 손에 든 포크와 나이프마저 '탁'하고 내려놓기까지 했다.
"저는 정신이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라고 여기고 있고,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어째서 그렇지?"
여태까지 딴청 피우듯 회피해왔던 그의 눈동자가 제니티아에게로 뚜렷히 고정됐다.
"그 이유는..."
"이유는?"
곧바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어물거리는 그의 모습은, 마치 범죄자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직전과 비슷해 보였다.
"... 그 이유는 제니티아, 바로 당신 때문입니다."
"?!"
"아니, 알베른과 타샤 또한 포함시켜야겠군요."
아들의 황당한 대꾸를 들은 제니티아는, 자신을 이름으로 부른 아들의 무례를 꾸짖는 것마저 깜박했다. 이렇듯 그녀가 ‘당최 무슨 소리냐’라는 표정을 짓는 사이, 루카스는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당신들은 정말로 마족입니까?"
"뭐? 아니 그게 무슨 말..."
"이기적이고, 사악하고,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그런 악마의 진짜 추종자들이 맞느냔 말입니다!"
점점 고조되는 감정을 따라 서서히 높아지는 그의 언성은, 마침내 어수선한 분위기를 감지한 알베른과 타샤가 서둘러 안으로 들어서게끔 만들었다.
"내가 무슨 목적으로 마계에서 다시 태어난 건지나 압니까? 당신들이 왕이라 떠받드는 악마 루치펠과 내가 어떤 거래를 했는지는 알기나 하세요?!
"그 이야기가 갑자기 왜..."
"마계 마족과 마물들을 모조리 영멸시킨다!"
"......"
"그게 내 모든 것과 맞바꾼 대가이자 계약조건입니다!"
세 사람이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충격을 금치 못하는 사이, 이미 터질대로 터진 루카스의 짜증은 극으로 치다달았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죠?! 그래서 나한테 일부러 헌신적인 면모를 보인 거 아닙니까?! 이 모든 걸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신도! 타샤도! 알베른도! 날 살살 꼬드겨 회유시킬 계략을 세워 잘 해준 거 아니냔 말입니다!!!"
정말 오래간만에 접해보는 아들의 역성에, 제니티아는 그저 당혹스러웠다.
"우리는... 몰랐다."
"제발 그렇다고 말해!!!"
- 쾅. 쩌적... 우지끈!
루카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식탁을 내려쳤다. 그 덕분에 밥상을 비롯한 식기가 문자 그대로 요절이 나며, 그 위의 이런저런 모든 것들이 중심을 잃고 바닥에 와르르 쏟아졌다.
한편, 아들의 고백을 들은 제니티아는 침착하게 루카스의 격앙된 어깨를 살포시 매만지며 이야기했다.
"아들아. 지고하신 루치펠 제왕께로부터 하사받은 나의 이름 제니티아를 걸고 맹세컨데, 우리는 정녕 아무 것도 몰랐단다."
"으으... 네! 압니다!!! 나도 잘 안다고요!!!"
루카스는 대찬 고성을 뱉은 직후,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래서 제가 미칠 지경이라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힘을 얻는다한들... 내가... 내 손으로... 당신들을 어떻게......"
루카스는 더 이상 서 있지 못하고 무너지듯 다시 의자에 털썩 내려앉았다.
"내가 미안하다. 어미가 되서 네 속을 헤아리지 못했구나."
침울한 루카스의 고백을 듣던 제니티아는 이 말을 끝으로 자신의 아들을 가만가만 안아주었다.
"오냐, 오냐. 내 아들, 내 아가."
어느덧 로기온 기사단장 바리온의 생만큼 마족의 삶을 보내온 루카스였다. 으레 다 자란 몸뚱이와 그 나이에 붙은 숫자는 인간 기준으로 아저씨를 너머 할아버지라 불려야 마땅했다.
".......크흐흐흑... 흐윽..."
그러나 제니티아의 품에 얼굴을 묻은 현재의 루카스는 애처로운 아들에 불과했다.
"...흑흑, 어머니!"
"그래, 그래. 앞으로의 일은 우리 함께 고민해보자꾸나.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게야."
만약 지난날 그의 의지를 끝끝내 꺾지 못했던, 지옥제일 고문관을 자청했던 네스모데가 이 광경을 봤더라면, 과연 무슨 말을 했을지 짐작조차 되질 않는 순간이었다.
* * * * *
한편. 타락천사 세력의 중심 영역, 디르세마니(Dirsemani).
이 영역 가운데서도 바위산맥을 깎아 만든 듯한 거대한 성채를 보고 있노라면, 난공불락의 진정한 의미가 대략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휘이이잉-.
검은 날개로 상공을 도도하게 가르던 타락천사가, 울긋불긋하게 꾸며진 안뜰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허리까지 오는 긴 흑발이 인상적인 그녀는 착지와 동시에 날개로 눈을 가리며, 길게 도열해 있는 친위대 끝에 자리한 상급자에게 예의를 갖췄다.
그녀는 평소보다 몇 배 많은 병력이 다소 신경 쓰였지만, 부랴부랴 찾아온 나름의 이유가 있으므로 관심을 접었다.
"군주를 뵈옵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인사를 받은 군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의자에 걸터앉은 채로 다마스쿠스와 흡사하게 생긴 무기손질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군주님."
"......"
"모디얼 님, 저의 군주시여!"
"......"
그녀의 상관은 여전히 무릎 꿇고 있는 부하가 무안해질 만큼의 충분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칼집에 무기를 갈무리하며 일어섰다.
"유리아나, 내가 널 불러들였던가?"
마지못해 입에서 흘러나온 모디얼의 음성이 매우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끈질기게 기다렸던 유리아나는 이 또한 인내했다.
"아닙니다. 뒤늦게 임시휴전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날아왔습니다. 군주님."
"어째서지?"
"재고해주시길 청합니다. 그런 중차대한 사안을 동맹군주들과의 사전협의 없이 단독결정 내리시는 건..."
"크하하핫! 웃기는군!"
모디얼의 무시무시한 살의를 느낀 그녀는 아차싶어 곧바로 바닥에 엎드렸다.
"유리아나, 내가 언제부터 너에게 일일이 보고하고, 허락을 받은 후에 결정을 내렸어야 했지?"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예전부터 종종 느끼곤 했었지만, 네 태도는 종종 같잖단 말이지."
"부디... 용서하십시오."
"용서? 후후, 용서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모디얼의 말투가 딱딱해졌다. 뿐만 아니라 그가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입꼬리가 자주 비틀려 말아져 올라가며, 섬뜩하게 새하얀 치아를 자주 드러냈다.
"네가 진정 용서를 청해야 할 부분은 그게 아닐 텐데?"
"무슨 말씀이시온지 도통......"
"네게 실망이 크구나."
그녀는 회백색 머리카락 쓸어 올리며 노려보는 모디얼의 말뜻을 금방 알아듣지 못했다.
- 처처적!
그렇지만 모디얼의 손짓에 친위대들의 창끝이 일제히 자신의 목을 향하는 광경에서, 유리아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확실히 인지할 수 있었다.
"헉!"
"안 그래도 널 부르려 했었는데, 때마침 이리 찾아와주다니 덕분에 그 수고를 덜었구나."
"구, 군주님! 도대체 왜...!"
다급해진 유리아나가 애원하듯 외쳤지만, 모디얼의 묵뚝뚝한 말투는 변화가 없었다. 그는 그저 친위대원들이 꿈틀대는 그녀를 결박하는 모습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조금 전 데거렝젤에 다녀온 수하들에게서 아주 재미있는 소식을 보고 받았다."
"?!"
"제니티아의 힘이 어느덧 예전만큼으로 되돌아왔다지?"
비로소 상황파악이 된 그녀가 악을 쓰듯 스스로를 변호했다.
"어, 억울합니다! 군주님!"
"뭐? 억울해? 하긴 네가 모르게 다녀왔으니, 억울하긴 하겠군. 크아하하하!"
"미, 미심쩍은 부분이 있긴 했지만, 아직 단언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확신이 섰다면 즉각 보고 드렸을 겁니다! 정말입니다!"
"아아~, 그래~. 그래. 그러신가? 큭큭큭!"
"누, 누가! 대체 누가! 그런 거짓을 아뢨습니까?! 저와 대면 시켜주십시오!"
"후후후... 재밌군, 재밌어! 계속 읆어봐."
"......"
유리아나는 저 의심 많기로 유명한 군주가 눈썹 하나 꿈쩍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타락천사들 중에 마력판별과 감식 분야에서 그녀보다 뛰어난 자가 없다고 자부해왔으므로, 최대한 위기를 넘기기 위해 자신감 넘치는 눈빛을 유지하려 애썼다.
"아무 근거 없는 말임에 틀림없습니다! 이건 모함입니다! 제발 믿어주십시오!"
"근거? 근거라... 나도 그걸 차암~ 좋아하는데 말이지. 파하하하!"
"......"
순간 그녀가 오싹해져 말문이 막혔을 만큼, 모디얼의 분노에 찬 눈빛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식으로 이글거렸다.
"내가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려주랴?"
한껏 웃던 그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리키며 까딱까닥 신호하자, 근처에 있던 친위대원 한 명이 작은 함짝을 가져와 그 곁에 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명확하게 말해두겠는데, 이번 임시 휴전 건은 절대 급하게 결정된 게 아니야. 베엘제불 측의 사절단이 이와 관련해 접촉해온 건 상당히 오래 전부터였지. 단지 네가 그것을 몰랐을 뿐이고."
"......?"
함에서 몇 장의 서찰을 꺼낸 모디얼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1장씩 그녀 발치에 틱틱 던졌다.
"에... 확실히 이 마계엔 너보다 뛰어난 놈은 없으나, 잘 찾아보면 너에게 버금가는 놈이 있기는 있더구나. 역시나 베엘제불 추종자들은 결코 얕볼 수 없다니까?! 크크크!"
"!"
방금 외부자원을 동원했다는 사실을 들은 유리아나는 섣불리 대꾸할 수 없었다. 그녀가 마계에서 유일무이한 권위자라고 자부하기엔, 마계차원은 너무나 광활했고 그만큼 굉장한 자들이 넘쳐나기 때문이었다.
"흠... 이번엔 네가 말한 근거에 대해서 말해볼까? 제니티아 저택의 물품구매목록 변동내역, 데거렝젤의 국지적 마력 왜곡 현상, 그리고 이건... 아아! 이렇게 시시한 내용들은 너는 어차피 다 알고 있어서 별 의미 없으려나?"
"......"
"크흐흐흐, 오! 그래! 이건 네 년도 보고 싶어 할 것 같군."
히죽히죽 대던 모디얼이 이번엔 두루마리 한 장을 팔락 펼쳤다.
"자, 이건 베엘제불 측에서 사절을 통해 아주 정중히 보내온 거란다. 조금 전에 내가 표식을 각인함으로써 이미 계약완료된 상태지."
"매, 맹약의 서...?"
고개를 들어 두루마리의 실체를 확인한 유리아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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