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희생을 모른다. (1)
* * * * *
악마가 화병(火病)으로 앓아눕는 일이 있을까? 구체화된 영체가 상처 입는 경우가 왕왕 있을진 몰라도, 이해 못할 신의 뜻마저 목숨처럼 떠받드는 천사들과 같이 속으로 끙끙 앓고 사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들은 역사적으로도 불만을 참지 못해 창조주에게 대놓고 앙심을 품었다가 지옥으로 추락하게 된 존재들이었으니, 마음 속 응어리를 평생 달고 사는 일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마찬가지로 현재 마계를 장악중인 지배자들 또한 그랬다. 철저한 약육강식인 영역에서 먹이사슬 꼭대기에 위치한 강자들의 행동력은 언제나 거침없었다. 물론 자신이 주인으로 떠받드는 악마와 관계된 일만은 제외하고 말이다.
하지만 예외상황은 기어코 생겨나고야 마는 것일까? 한때 마계 최강자의 자리를 두고 베엘베불의 추종자 우두머리와 경쟁하던 제니티아가 난데없는 속병으로 고생 중이었다.
"내가 너를 낳은 어미다. 이전처럼 엄마라 부르거라."
"......"
"어서!"
"...그렇게는... 못하겠소."
"뭐, 뭐? 뭣이?!!!! 그, 그렇게는 모, 못, 못하겠소오오?!"
오늘도 징글맞게 반복되는 실랑이에, 제니티아는 목구멍 끝까지 부아가 치밀어 손을 번쩍 추켜올렸다.
- 부들부들.
그러나 차마 애지중지하는 아들에게 손찌검을 할 순 없었던 터라 한동안 온몸이 굳은 채로 파르르 떨었다.
"루카스, 내 아들아!"
"나는 루카스가 아니오. 바리온 딘 그레고리. 그게 내 진짜 이름이라고 거듭 이야기드렸습니다."
- 으득.
이와 같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속 썩은 지도 벌써 열흘이나 지났다. 그녀는 혹여 아들이 환영 같은 것에 시달렸나 싶은 염려에서, 며칠 좋을 대로 방치해뒀던 일마저 이제는 크게 후회될 지경에 이르렀다.
부단히 어르기도 해보았고 찬찬히 달래기도 해봤다. 어떤 때는 정말 이러면 안 되겠단 판단에서 육아 이후 처음으로 아들에게 윽박질러 성도 내봤다.
그러나 그녀의 아들은 눈꺼풀 한번 깜박하지 않았다. 되레 자신은 루카스가 아님을 강조하며 설득하려는 아들의 꿋꿋한 태도에 그녀는 할 말을 종종 잃기도 했다.
"루카스! 그런 몹쓸 헛소리를 고집한다면, 이번엔 정말로 크게 화낼 것이야!"
"나는 오직 진실만을 말했습니다."
"그만해라. 너는 진정한 제왕의 첫 번째......"
오고가던 대화 중에 루치펠이 언급되자, 그녀의 아들이 즉각 반발하며 언성을 높였다.
"여인이야 말로 이제 좀 그만하시오! 흥, 그래! 내가 확실히 그 악마와의 거래에 응하긴 했습니다! 허나 맹세코! 타락한 마귀천사 따윌 어미로 삼겠다고 말한 적은...!"
"이... 이이익...!!!"
- 짜악-!
이번엔 끝끝내 참지 못한 제니타아의 손바닥이 아들의 뺨을 매섭게 후렸다.
"네... 네가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내게... 흐흑......"
"......"
분명 아프게 맞은 이는 아들이었으나, 객관적으론 볼이 새빨갛게 부어오른 아들보단 그의 옷자락을 붙잡은 채 주저앉아 흐느끼는 어미가 더 애처로워 보였다.
"...흐흑......"
"......"
"내 아들을... 돌려줘..."
"......"
"부탁이야... 내가 이렇게 무릎 꿇고 빌 테니까...... 제발... 돌려줘..."
그런데 정작 그녀의 아들은 제니티아의 절절한 목소리가 불편한지 그녀에게서 고개를 최대한 돌리며 외면했다.
"음... 내가 당신에게 뜻하지 않게 큰 상처를 줬구려. 하지만 루카스로 불리던 아이는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건 굉장히 유감스럽게..."
"제발!!! 내가 무엇이든 할 테니... 그러니까... 제발..."
"......미안합니다."
한편 루카스, 아니 봉인됐던 기억과 함께 자아가 깨어난 바리온은, 그 나름대로 환장할 지경이었다. 보다 정확하게는 혼란스럽다고 표현하는 편이 옳았다.
'마귀 따위가 어떻게......'
자기희생. 교회는 오래 전부터 신을 사칭하는 악마를 확실하게 가려낼 수 있는 분별법을 신자들에게 가르쳐왔다.
이기적이고 오만 덩어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악마들은 결코 순수한 이타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므로, 이 방법은 언제나 정확하고 믿음직한 척도였다.
심지어 이것은 창조주의 모든 것을 똑같이 흉내 낼 수 있다는 대악마조차도 예외가 아니었기에, 언제나 최고의 판별법으로 손꼽히는 것이다.
때문에 지금 자신의 손등 위로 뚝뚝 떨어져 흐르는 제니티아의 눈물로 인해 적잖게 당황한 바리오의 충격도 이해가 됐다.
'마족은 악마와 조금 다른 존재인가? 아니면 이 여인의 태생이 천사라서? 비록 타락했을지라도 마음 어느 한 구석에 선함이 앙금처럼 남아있는 건가?'
그는 지옥에서 당했던 갖가지 생고문들을 떠올리며 냉정코자 했다.
'아니, 아니다! 절대 속아선 안 된다! 이건 필시 루치펠의 간계다!'
그렇지만 따뜻하다 못해 뜨겁기까지한 제니티아의 눈물에 녹아있는 진심은, 그의 마음을 계속해서 마구 쥐고 흔들어댔다.
'그래도 그 시간들이... 환영으로 조작된 거짓은... 결코 아니었었지.'
루카스로 지냈던 이전의 기억은 깡그리 증발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들은 바리온의 머릿속에 생생한 꿈처럼 남겨져 있었다.
어설픈 옹알거림으로 엄마라고 처음 불렀을 때 더없이 기뻐하던 제니티아의 미소.
손 뻗으면 닿을 발치에서 아장아장 걸음마 응원하던 그녀의 애틋한 몸짓.
큼직한 그림 빼곡한 이야기책을 매일 자장가처럼 읽어주던 그녀의 부드러운 음성.
정말 이상하다싶을 정도로 세세하고 명확하게 떠오르는 터라, 바리온은 정말 미치도록 곤혹스러웠다. 만약 그가 할 수만 있었다면 그것들을 칼로 뭉텅 베어내고픈 심정이었다.
'이런 젠장! 내가 루치펠에게 된통 당했다! 그토록 경멸하는 마귀의 젖을 맨 정신으로 얻어먹을 수 있겠느냐던 그 악마 놈의 꼬임에! 내가 혹하고 넘어갔던 게 크나큰 실책이었다!'
그는 과거 본인의 그릇된 결정을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그것은 어린 그를 붙잡고 울며불며 통사정하던 제니티아가 지쳐 쓰러지고 나서도 얼마간 계속 됐다.
* * * * *
과연 사랑하는 자식을 향한 부모의 관대함이 측정될 수 있을까?
그날 이후 사흘 동안이나 두문불출했던 제니티아 그녀는, 돌연 연무장으로 개조된 헛간으로 모습을 드리웠다.
"오, 오셨습니까?"
"그래, 내 아들아."
그녀가 안으로 들어섬과 동시에 체력훈련을 멈춘 바리온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간단한 인삿말조차 버벅대며 고개만 꾸벅 숙이는 꼴이 굉장히 머쓱해보였다.
"나는 신경 쓰지 마라."
"......"
바리온은 신경 쓰지 말라는 그녀의 말이 더욱 신경이 쓰였다. 게다가 미동도 없이 기초훈련을 처음부터 끝까지 말똥말똥 주시하고 있어서 그런지 몹시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래도 바리온은 그 어떤 언질도 하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남의 것을 빌려 쓰는 처지인데, 감히 집주인더러 방해되니까 저리가란 식의 무례를 행할 순 없는 까닭이었다.
"푸훕!"
"?"
"아, 아니다. 별 거 아니니 계속 하거라."
"......"
"풉!"
가급적 무신경하게 대처하려던 바리온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제니티아의 코웃음이 점점 빈번해지자, 그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말문을 먼저 열었다.
"그... 어떤... 하실 말씀이라도...?"
"아니, 없다."
"그렇게 바라보면 집중이 어려우니, 혹시 자리를 비켜줄 순 없으신지요?"
"싫다."
"......그럼 하다못해 웃는 이유라도 알려주면 고맙겠습니다."
이 말에 제니티아는 콧방귀를 뀌며 대답해주었다.
"흥, 그렇게 훈련해서 어느 세월에 다른 직계자를 상대할 수 있으려나~? 아니 뭐 그런 생각이 드는데, 안 웃고 베길 수가 있어야 말이지."
"......"
"호호호, 그래. 제왕께서 친히 내리신 권능이 워낙 대단하니, 그렇게 10년 가량 애쓰면 길바닥 돌멩이처럼 널리고 널린 '바둡(Batub, 역주1)'이나 '툴다모티(Tul-Damotti, 역주2)' 서너 마리정돈 한 번에 상대할 수 있긴 할게다."
"바, 바두? 툴라... 뭐요?"
"호호호, 넌 정말 마계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르는 모양이구나!"
"......"
"아흐으~, 난 이만 가봐야겠다~."
제니티아는 그의 호기심만 잔뜩 부풀려놓곤, 깍쟁이처럼 그 자리에서 홱 돌아 떠나갔다.
"......"
그 덕분에 의욕이 삽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바리온의 축 처진 어깨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는 심지어 잡일을 처리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타샤의 동정표까지 얻었을 정도였다.
"도련님, 서재에 가보시는 걸 추천드려요."
방금 전 이 모든 광경을 목격했던 타샤는 그의 곁에 스리슬쩍 다가와 조언을 해줬다.
"삽화가 많이 담긴 생물도감이 있답니다. 그리고 다른 책들도 엄청 많으니깐 아마 이런저런 참고가 되실 거에요."
"고, 고맙소! 타샤 양!"
살짝 속삭인 타샤의 귀띔에 눈이 번쩍 뜨인 바리온은 서재로 허겁지겁 직행했다. 그는 다행히도 그림책 찾아 드나들었던 루카스의 추억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서재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하하핫! 어?!"
그러나 봉인된 문짝이란 장애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 덜컥. 덜컥.
"평소 여기가 잠겨 있었던가?"
굳게도 잠겨 있는 서재문은 도무지 열리지 않았다. 온몸으로 문고리 붙잡고 아무리 용을 써봤자 소용없었다.
"아닌데? 그런 기억은 전혀 없었는데?"
괜히 마음이 조급해진 그는 루카스 시절을 찬찬히 더듬었다. 그러나 암만 되짚어 봐도 지하 밀실 딱 한 군데를 제외하면 저택 내에서 열리지 않았던 문은 없었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니?"
"?!"
잡념을 깨우는 음성에 그가 화들짝 놀라 황급히 뒤돌아보니, 팔짱을 낀 제니티아가 은근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이런...'
문제의 원인을 확실히 깨달은 바리온. 이윽고 그는 한숨을 작게 토하듯 입술을 뗐다.
"이 방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뭐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긴 한데..."
"부디 부탁드립니다."
"흐응~, 글쎄~, 어떡할까? 열어줄까~, 말까?"
"......"
이에 상황이 심히 못마땅한 바리온의 눈초리가 좌우로 쫙 찢어졌다.
반면 제니티아는 그의 실시간으로 썩어 들어가는 표정을 보며 무척 만족스러워 했다.
"좋아, 일단 열어주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그녀의 검지가 문고리 위에서 춤추며 3개의 원을 겹쳐 그리자, 거짓말처럼 '딸깍' 소리와 함께 방문이 활짝 열렸다.
- 호다닥.
혹여 그녀의 마음이 바뀔 세라 부리나케 안으로 들어선 바리온. 그는 제니티아의 눈치를 흘끗 확인하곤, 굉장한 넓이의 서재를 빨빨빨 돌아다니며 참고가 될 법한 책을 이것저것 뽑아댔다.
"...어디보자... 흐음... 이거 괜찮군. 아! 이것도 참고가 될 것 같아. 저것도..."
[697번 개정한 마계 생명체 도감.]
[상대적 마계록, 도표로 보는 변천사 98판.]
[종의 진화! 공통점과 영역별 차이점 분석.]
[선계, 마계. 그리고 애매한 관리영역의 명계.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과거사.]
[최하위 차원의 이면세계, 각 행성 정령과 악귀들의 생태를 이해하다.]
[알기 쉬운 마계의 금제. 선계 최고신들이 매단 잔혹한 목줄과 족쇄에 대하여.]
... ... ...
서재 중앙 탁자 위로 차곡차곡 쌓여진 책들을 잠시 지켜보던 제니티아는, 이윽고 명당 같은 푹신한 소파를 찾아 자리 잡았다.
"제니티아님, 차 한 잔 어떠십니까?"
"호호, 알베른. 자네의 배려는 언제나 환상적이라니까? 기쁘게 마시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제니티아 님."
어느샌가 귀신같이 등장한 알베른은, 그녀 앞에 따뜻한 차와 약간의 다과를 내놓곤 유유히 사라졌다. 덕분에 제니티아는 진한 적갈색 머릿결을 매만지던 지루한 손짓을 끝낼 수 있었다.
물론 바리온은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이와중에도 열심히 책을 옮기며 탁상 위에 수북히 쌓아올렸다.
"후우~, 좋아. 이정도면 될 거 같군."
대략 5~6권씩 한 묶음으로 탁자 위에 길게 늘어선 책들. 그것들은 얼핏 보면 제니티아와 바리온의 사이를 마치 국가경계선처럼 가르고 있었다.
'후후후, 이제 느긋하게 읽어보실까?'
입맛을 다시며 정성껏 골라낸 한 권을 짚어든 바리온의 눈빛은, 마치 맛깔난 쿠키 탐하기 직전의 아이와 같았다.
- 낑... 끼이잉...
순간 바리온은 흠칫했다. 각각의 책들은 원래 하나의 벽돌이었다는 듯 겉장부터 속지까지 딱 달라붙어 펼쳐지지 않았던 것이다.
"...왜... 뭐지? 엇?! 혹시!"
순간 울컥한 그가 책들 너머로 제니티아를 곧장 노려봤다. 그러나 그녀는 내심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눈까지 감고 도도하게 차향을 음미할 따름이었다.
"정말 이러실 거요?"
- 작가의말
[1] 바둡(Batub) : 맹수형 마계 생명체. 습성은 들개와 유사하며, 대게 30마리 내외의 개체가 한 무리를 이룸. 본래 개별 특성이 강한 마수였으나, 마계 먹이사슬 하위에 속한 전투력을 보완하기 위해 점차 집단을 이루게 된 것으로 알려짐.
[2] 툴다모티(Tul-Damotti) : 곤충형 마계 생명체, 외형은 거미를 닮았으나, 개미와 같이 군집을 이루는 것이 특징. 마계 전역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개체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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