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인상 (2)
- 꼴꼴꼴꼴... 꿀꺽.
그리곤 그녀를 다짜고짜 들쳐업고서 실성한 사람이 그를 보며 동경할 정도로 뛰고 또 뛰었다.
"후웁! 으쿠쿠...! 우리...! 아기 병아리가...! 그새...! 많이도...! 컸구나...! 후우훕!"
"......"
힘에 부쳐 얼마간 낑낑거렸던 그였으나, 약효가 혈관을 타고 퍼진 순간부턴 산비탈을 마치 평지처럼 주파하기 시작했다.
- 두다다다다다....
가히 맹수도 떨쳐낼 법한 놀라운 속도. 그는 높은 고지대로 튀어 올라 마법을 난사 중이던 레이첼이 본인의 눈을 의심했을 만큼 굉장한 질주를 선보였다.
"훅! 후욱, 훅! 훅! 헤엑, 헥, 켁!"
그렇게 약 2시간 가량 지나자 포리스트의 육체적 한계가 약빨과 함께 바닥을 쳤다. 그래도 그는 전투와 관련된 희미한 메아리조차 들려오지 않을 만큼 먼 거리가 된 것에 만족해 했다.
"헉, 헉, 헉, 헉.... 이, 이제 때려... 헉, 헉... 죽인다 해도... 헤엑, 헥... 못 뛰겠어... 후우~, 후우우..."
가까스로 바네사를 얌전히 땅에 내려놓은 포리스트는, 낙엽 깔린 흙바닥 위에 그대로 널브러졌다.
"으구구그그그그그, 진짜로 죽겠다으어으으으.........."
"아저씨! 포리스트 아저씨!"
식겁한 바네사가 대자로 뻗은 그의 몸상태를 살폈다. 포리스트는 후폭풍처럼 밀려온 탈력감에 못 이겨 혼절한 것일 뿐, 덜컥 겁먹은 그녀의 우려처럼 이승을 등지진 않았다.
"아저씨... 빨리 일어나세요... 다신 고집 안 부릴게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녀가 그의 옷자락 끝을 꾹 붙잡고 눈물을 찔찔 흘리는 가운데 숲 속의 분위기는 더욱 스산해져만 갔다.
그렇게 30분이나 됐을까? 포리스트가 문득 엄청난 갈증을 호소하며 정신을 회복했다.
"무... 물..."
"아저씨, 여기 물이요!"
- 벌컥, 벌컥.
"푸하~, 고맙다. 호, 혹시 먹을 것도 있을까?"
"여, 여기요!"
포리스트는 바네사가 건넨 염장고기 두 덩이를 거의 씹지도 않고 삼키며 주변을 두루 살폈다.
'이거 영... 느낌이 쎄한데...?'
몹시 지나치게 고요하다란 점이 그의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아무 말이라도 내뱉으며 눈앞에 있는 바네사를 진정시키는 일이 최우선이라 판단했다.
"그나저나 이 음식은 어디서 구했... 아... 너 배낭을 계속 메고 있었니? 어이고~, 어쩐지 더럽게 무겁더라니... 그래,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네."
"으~후~, 다행이다. 다리는 좀 어때? 스스로 걸을 수 있겠니?"
"네, 치유물약을 조금 썼어요. 이젠 제대로 걸을 수 있어요."
"그럼 됐다. 서둘러 피할 곳을 찾아보자꾸나."
"힝... 아저씨이이~!"
"에구구구... 다 큰 아가씨가..."
순간 바네사가 그의 목덜미를 와락 끌어안고 울먹였다. 포리스트가 '그러게 내가 뭐랬냐.'란 타박 한 마디 없이 자신의 안위부터 염려해주는 그의 따뜻한 면모에 눈물샘이 톡하고 터진 것이다.
"죄송해요! 아저씨께서 그렇게 만류하셨었는데... 정말 죄송하고 또 죄송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오냐, 오냐. 괜찮다. 네가 나쁜 마음에서 그랬던 게 아니었잖니? 나도 네게 큰소리쳐서 미안했다."
"절 걱정해서 그러신 거잖아요. 전 이미 잊었어요."
"자자, 너도 나도 이렇게 무탈하니 그만 됐다. 오구오구~, 우리 바네사~, 착하지? 울음 뚝, 뚝!"
"히잉... 아저씨..."
"일단 더 늦기 전에 숨을 곳을 찾아보자꾸나. 으구구구..."
옷자락으로 바네사의 눈매를 싹싹 닦아낸 포리스트는 일어서는 것만으로도 무척 괴로워 보였다. 그는 바네사가 품에 안겨왔을 때도 여실히 느꼈지만, 아무래도 약물로 폭주시킨 근육의 부하량이 계산했던 것보다 심한 모양이었다.
'어쩌지? 지도는커녕 나침반마저 어디갔는질 모르겠군. 의지할 거라곤 미완성 근력강화제 3개가 전부인데...'
포리스트는 천천히 움직이며 현 상태를 점검해봤지만, 딱히 상황이 긍정적이지 않았다. 그런 그의 초조함이 곁에서 부축하던 바네사에게도 전달됐는지, 그녀는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다른 주제를 언급하며 입술을 뗐다.
"다른 분들이 걱정이에요. 키메라들은 다 잡혔겠죠?"
"음... 분명히 잘 마무리됐을 거다. 무려 7성 대마법사의 수제자에다가 뛰어난 요정족 전사들도 몇몇 있었으니까... 어떻게든 이기지 않았겠니?"
"그, 그렇겠죠? 다들 무사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래, 나도 그러길 바란다. 하하, 만약 그렇지 않으면..."
- 바스락.
포리스트는 차마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다음 먹잇감이 될 테니까'란 농담을 끝마칠 수 없었다. 실제로 그와 바네사가 걷는 방향의 수풀 속에서 끔찍한 흉물이 모습을 드러낸 까닭이었다.
- 그르르르르릉.....
아까 가르디엔 일행과 부딪쳤던 대형 키메라와는 종이 완전히 달랐다. 포리스트와 바네사를 신명나게 도망치게 만들었던 키메라들이 이름 모를 기괴한 파충류들의 합성이라면, 지금 눈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놈은 갈색 늑대를 기반 삼은 포유류종이었다.
'맙소사! 아까 그것들과는 또 다른 키메라라고? 온 나라의 흑마법사들이 이 지역에 모여 동창회라도 한 거야 뭐야?!'
더군다나 한 마리도 아니었다. 포리스트가 곁눈질로 스르륵 살펴보니,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며 포위망을 야금야금 좁혀오는 무리만 해도 열댓 마리가 족히 넘어갔다.
'도대체가... 선택의 여지를 안 주는구만.'
반쯤 체념한 포리스트는 천천히 손을 움직이며 근육강화제 1개를 비장하게 집었다.
"쩝... 아쉬움이 많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괜찮은 인생이었다."
"안 돼요, 아저씨!"
하지만 그 다음 행동을 눈치챈 바네사가 그의 두 손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지금 또 마시면 심장에 무리가 가서 진짜 죽을지 모른다고요!"
"허허, 모처럼 용기내볼 기회 아니냐? 으레 연금술사라면 한 번쯤은 과감히 실험할 줄도 알아야 해."
"농담하실 때가 아니에욧!"
행여 자기 몸집의 3배만한 키메라들을 자극할까봐 큰 소리를 내지 못한 바네사였지만, 포리스트의 행동을 저지하려는 몸부림만큼은 굉장히 필사적이었다.
"어허~, 이거 놓거라. 어서. 우리 둘 다 죽을 순 없잖니?"
"시이이러어어요오옷!"
"너라도 살아서 동생들을 잘 챙기거라, 응? 착하지? 우리 바네사."
"아아안 되에에요오오!"
- 짝. 짝. 짝. 짝. 짝.
뜬금없는 박수소리였다. 그러나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늑대 키메라들이 그 소리에 반응하여 전진을 멈추곤, 더 나아가 포위망의 한쪽 귀퉁이까지 열었다는 점에 있었다.
"...누, 누구요?!"
"하하하, 이거 꽤나 눈물나는 광경이야.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군."
"꺄악-! 흐, 흡혈귀!"
바네사는 돌연 나타난 인물의 창백한 피부색과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반짝거리는 송곳니에 질겁했다. 한편, 인생경험이 풍부하다 못해 질척인다고 할 수 있는 포리스트는 이 인물의 정체를 명확히 꿰고 있었다.
"비, 비스마우어 일족?!"
그의 표정은 키메라 무리를 마주했을 때보다도 훨씬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어, 어째서 이런 곳에...?!"
"호오? 그냥 무지렁이 인간이 아니었군. 오히려 이야기가 빠르겠는데?"
"부, 부디 이 아이만은 살려주십쇼! 이 어린 아이에게 피가 있어봤자 얼마나 있겠습니까?!"
포리스트는 타 생물의 피에 담긴 체온과 생명력으로 목숨을 유지하는 그들의 생태를 즉각 떠올리곤 간절히 애원했지만, 양 볼이 움푹 패인 몰골의 상대방은 어깨를 으쓱이며 심심한 유감을 표할 뿐이었다.
"아, 이거 미안하게 됐어. 다른 때라면 모르겠는데, 지금은 나도 누구 사정봐줄 때가 아니라서 말이야. 싫어도 난 너희 둘 다 데려가야만 해."
"크흑...."
"저항하지 않고 얌전히 따라오면, 새로운 우리 수장님께 잘 말씀 드려서 고통은 느끼지 않도록 배려해주겠다."
"......망할..."
젊은 시절의 쓰린 경험이 포리스트를 더욱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거기에 현재 수중에 있는 근력강화제 효력수준으론 비스마우어 일족의 신체능력과 혈마법에 조금도 대적할 수 없음을 익히 아는 터라 허망하기까지 했다.
'아냐, 포기는 이르다! 분명 미처 발견하지 못한 활로가 있을 거야!'
무슨 짓을 해서든 바네사만이라도 살려보겠다는 꿋꿋한 결의가, 그의 시들었던 눈빛을 번쩍 일깨우며 온 사방을 주의 깊게 관찰하게끔 했다.
"크크크, 이거 눈알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걸?"
"허걱! 저, 저기 나뭇가지 위에! 불곰이!"
순간 포리스트의 손가락이 허공을 가리켰으나, 비스마우어 일족은 좁쌀만한 관심도 주지 않고 코웃음 쳤다.
"큭, 웃기지도 않는군! 기껏 쥐어짜낸 수작이라는 게 고작 그런 말 같지도 않... 크헙!!!"
그가 머리 부근의 풍압을 느꼈을 땐, 이미 그의 정수리부터 마구잡이로 짓이겨지는 대참사가 이뤄지고 있었다.
- 뚜-엉-!
'마, 말도 안돼...'
잘 벼린 칼로도 상처 입히기 쉽지 않다는 비스마우어 일족의 신체였다. 심지어 동료 여럿을 그들에게 잃어본 경험을 가진 포리스트였기에, 그 괴물 같은 몸뚱아리가 단박에 피떡으로 화한 현실이 전혀 실감되지 않았다.
- 탓. 파팟!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이게 시작점이라는 데에 있었다. 처음 불곰으로 오해했던 거대한 사람 그림자는, 지면에 안착함과 동시에 가장 가까운 키메라에게로 달려들었던 것이다.
- 크와와와왕! ...컹?! 케켕!
그렇게 우악스런 손에 붙잡힌 키메라는 정신구속에서 벗어났다는 자유를 만끽할 틈도 없이 사지가 뜯겨 나갔고, 나머지들의 운명도 유사한 형태로 끝을 맺었다.
물론 재빠른 녀석들은 거구의 사내를 물어뜯으며 저항하기도 했으나, 그 용기는 되레 머리와 턱이 쭈욱 분해되는 더 고통스런 죽음만 불러 일으켰을 따름이었다.
'내, 내가 아직 기절한 채로 꿈을 꾸는 건가? 아니면 혹시 환각...? 하지만 여태껏 근육강화제 후유증 중에 환각증세는 발생되지 않았었는데...'
포리스트는 온몸으로 바네사의 얼굴을 감싸며 정신건강에 해로운 끔찍한 광경으로부터 그녀를 지켜낸 반면, 정작 자기자신은 혼란스러움에서 구해내질 못했다.
- 끼잉! 켕!
어둠 캄캄하기만 했던 비상사태는 불과 수십 초만에 마지막 키메라의 단말마를 끝으로 종결되었다.
"가, 감사합니다!"
포리스트는 이 사건해결의 주체가 천천히 돌아서서 자신을 응시하는 것을 보곤 머리를 꾸벅 조아렸다.
솔직하게 그는 거대한 그림자, 아니 정확하게는 거적데기로 하반신의 중요부위만 겨우 가린 반 벌거숭이 사내에게서 적잖은 위화감을 느꼈다. 하지만 생명의 은인에 대한 깊은 감사와 존경은 별개였으므로 루카스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표현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귀인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 &&*^%$ #$~@ $%$#???"
"엉?"
그동안 연금술에 정진하며 나름 수많은 고서들을 많이 접해온 포리스트였으나, 이 귀인이 내뱉은 첫마디는 너무나 생소했다.
한편, 이 벌거숭이 사내도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한참 고심하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Telas tim a ste bi si enan ke? (다친 데는 없습니까?)"
'뭐지? 어째 어디선가 한두 번 들어본 말 같은데? 하~, 이쪽 분야는 제프리 녀석이 전문인데 말야. 제기랄,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니까?'
얼토당토한 상황. 포리스트는 경계심보다 의구심이 더 크게 부풀었다.
'비스마우어 일족에, 고대어를 구사하는 사람... 심지어 키메라를 잡초 제거하듯이 무력화시킨 막강한 초인이고. 이건 절대 단순한 우연이 아니야.'
왕실과 고위귀족들의 입단속과 정보제한으로 인해 '카이므의 강림의식' 사건을 알 리 없는 그로선 이런 막연한 추측이 한계일 수 밖에 없었다.
'큼... 그나저나 이제 어쩌지? 왠지 그냥 떠날 기색으론 안 보여. 돈을 달라는 건가? 어쩌지? 당장 가진 것도 없는 판인데...'
은인의 정체와 목적을 끊임없이 의심하기엔, 포리스트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오만 가지 걱정이 너무나 많았다.
'이 사람을 놔두고 돌아가자니 도리가 아니고, 함께 가자니 군인들에게 뭐라고 둘러대야 할 런지... 망할, 직접 목도한 나조차 안 믿기는 소릴 어찌 설명해?'
그러던 그때. 그가 진정하기를 멀뚱멀뚱 기다려주던 벌거숭이 사내가 작게 한숨쉬며 간결한 의사소통을 시도해왔다.
"루카스."
"?"
사내는 검지로 자신의 가슴팍을 쿡쿡 찍으며 말한 다음, 그 손가락으로 포리스트를 가리키기를 반복했다.
"아...!"
몇 회의 반복된 행위를 통해 루카스의 의도를 파악한 포리스트 또한 자신의 손가락을 이용해서 자신과 아이를 소개했다.
"포리스트, 바네사."
"폴리슥? 바넬사?"
"포~리~스~트~, 바.네.사."
"포리스트, 바네사... 흠흠, 루카스."
"하하, 반갑습니다. 루카스 씨."
"포리스트, 방가슴니다? 바, 방각승니다? 바네사?"
"네! 그렇습니다!"
이후로부터 얼마간 이들이 서로의 몸짓과 그 의미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무척 화기애애했다.
만약 그들이 거칠게 뜯겨나간 키메라 사체조각과 섬뜩하게 흩뿌려진 핏자국을 배경삼지 않았더라면, 매우 정겨운 모습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흐음......'
그렇게 잔뜩 겁에 질려 있던 바네사 역시 루카스에게 몸동작으로 의사를 표현할 정도로 안정을 되찾았을 무렵, 포리스트는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래, 까짓거 따라온다면 데려가자! 적어도 이 위험한 곳에서 안전 하나는 확실히 보장되는 셈이니까! 하... 근데 저 사람이 누구냐고 경비대가 꼬치꼬치 캐물으면 어쩌지?'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이 한껏 치솟은 최근 상황을 고려할수록 그의 고심 또한 깊어졌다. 대충 나 몰라라 하기엔 생명의 은인이란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았을뿐더러, 루카스가 선보여준 무시무시한 괴력을 떠올리면 헤코지 당할 경우까지도 감안해야 했다.
'그냥 먼 친척을 우연히 만났다고 소개를... 아오, 미친! 그건 나라도 안 믿겠다! 쯧, 일단 가자, 가! 일단 가서 정신 나간 얼굴로 대충 어버버 해대자! 그러면 지들이 알아서 오해해주겠지!'
그가 종국에 도달한 결론은 '배째라'였다.
'에라이! 될 대로 되라지!'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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