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해한 정신세계 (1)
* * * * *
레이첼은 루카스를 뒤쫓는 일에 문자 그대로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안 그래도 체력이 동족 중 평균 이하인 그녀로선 감당키 어려운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여기서 더 화가 나는 건 그녀가 아무리 힘들어 죽는 시늉을 해도 루카스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에이씨! 배려심은 엿 바꿔 먹은 거야 뭐야?’
불만이 부글부글 들끓는 레이첼는 결코 인정하지 않겠지만, 현재 루카스는 상당히 유하게 처신하고 있는 편이었다.
1) 레이첼이 베라의 친한 지인일 가능성.
2) 차후 애드와 샤비가 불이익을 받게 될 가능성.
위 2가지의 가정이 그의 발목을 걸고 넘어지지 않았더라면, 루카스는 그녀의 숨통을 쥐고 흔드는 취조부터 행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녀가 먼저 정체와 접근목적을 명확히 밝히거나, 아니면 제 풀에 지쳐 떨어져나가길 바라는 루카스의 빠른 걸음걸이는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으구구, 배고파! 다리 아파! 그리고 무엇보다 졸려! 뜨거운 물에 몸을 퐁당! 아니면 푹신한 침대만이라도 제발! 아오, 진짜! 이 인간은 어째서 밤낮 없이 한 번도 안 쉬고 걷는 건데에-!!!'
레이첼의 분노는 나름 정당했다. 루카스가 그녀와 거리를 두고 말도 섞지 않는 통에 이 고행이 도대체 언제 끝날 지조차 가늠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래도 꼬라지가 다음 대도시까지 이러겠네. 히잉... 그냥 이쯤에서 관둘까?'
난도질 당한 그녀의 자존심도 자존심이지만, 무엇보다 지난 7일 간 겹겹이 누적된 육체피로가 장난 아니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흑흑, 까짓거 아빠한테 더 혼나고 말지...’
그녀가 종종 한계에 부딪쳤을 적마다 마나석까지 적극 활용하여 비행마법으로 버티기도 했으나, 이젠 마지막 마나석마저도 고갈된 암울한 상황인지라 그녀의 근심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왜 이런 생고생을 해야 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흑흑...'
그러다 분노에서 갑자기 우울증 단계로 껑충 건너뛴 그녀의 감정상태는 어느 순간 오기로써 탈바꿈했다. 갑자기 격정적으로 끓어오른 감정선은, 북받친 설움마저도 사뿐히 압도해 버렸다.
'...아냐! 싫어! 지금까지 해온 게 억울해서라도 절대 포기 못 해! 나도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 이거야! 진짜 악착같이 따라 붙고 말겠어!'
그렇게 정신을 단단히 재무장한 그녀는 여행꾸러미 속 금속재질의 수통들을 매만졌다.
'끙... 이제 사용할만한 건 치유수뿐이네? 이 귀한 걸 이깟 일에 쓰자니... 아웅, 마나석이나 더 챙길 껄!'
그녀는 본인의 손바닥만한 치유수 한 병을 꺼내든 뒤에도 한참이나 망설였다.
'아까운데! 진짜 아까운데!'
정령의 축복이 찰랑거리다 못해 철철 넘치는 치유수. 그것은 속된 말로 '정령사를 알차게 갈아넣었습니다.'란 선전문구와 '여벌의 목숨'이란 별칭이 항시 동반되는 아주 값비싼 물건이었다.
비록 그녀에 손에 들린 치유수의 효능은, 별다른 후유증 없이 절단된 신체마저 재생시켜주는 최상등품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사실 이 정도만 돼도 각 나라 왕실에서 전략군수물자로 분류시켜 직접 통제할 만큼 상당히 희귀한 구급용품에 속했다.
[임무완수 전에 집으로 돌아올 생각은 꿈도 꾸지 말거라!]
전에 없이 단호했던 아버지의 명령이 그녀의 귓가에서 살랑거리자, 레이첼은 이내 눈을 딱 감고 수통을 개봉했다.
- 뽕~!
'아, 몰라! 이건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료하기 위해서야! 그러니까 딱 1병정돈 사용해도 양심에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는 거라고!'
수통의 내용물을 작게 한 모금 홀짝 삼키자마자 청량감이 그녀의 온몸에 두루 퍼졌다.
‘아흐응~, 좋타아!’
약간의 희열과 함께 불쑥 차오른 마나를 느낀 레이첼은 곧 비행마법보다 마나소모가 훨씬 적은 주문을 운용했다.
'코르푸-두리타(Corpu-Durita, 신체 강화)!'
물론 이래봤자 루카스의 꽁무니를 서너 시간 뒤따르다 보면 자연스럽게 고갈될 미봉책에 불과했으나, 본인의 근육통과 맞바꿔 피 같은 자원을 최대한 아끼려는 그녀의 궁여지책이기도 했다.
'헤흑, 켁! 허윽~, 아이고, 나 죽는다아! 정령왕 님! 천신 님! 나 죽을 거 같아요! 흐앙~, 아무나 좋으니까 누가 나 좀 살려요~!'
이런 레이첼의 간절함이 하늘에 닿았던 것일까? 그로부터 정확히 3일 뒤, 대도시의 흐릿한 윤곽이 그녀의 눈동자 위에 드리웠을 무렵 루카스가 행군을 멈췄다.
- 탁. 탁.
“엇? 이런... 나침반이 망가졌군. 좀 전까지 멀쩡했는데, 왜지?”
그것은 현재로선 아리사엘만이 아는 비밀일 것이다.
* * * * *
헤트만 내에서 인구 밀도가 비교적 높은 편에 속하는 대도시이자, 타미아르 간의 전쟁 전략을 논할 적마다 항상 빠지지 않고 손꼽히는 요충지 '흐나파스(Honapas)'.
특히나 상인들이 환절기에 맞춰 지역간 이동을 서두르는 시기라서 그런지, 인구 이동량이 통상의 2배를 훌쩍 넘어 도시가 과포화 상태에 다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 여파는 각 성문의 검문소 병력들과 같이 관리해야 하는 자들에겐 악몽으로 작용했으며, 반대로 관리 당해야 했던 자들에겐 뜻하지 않은 행운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행운의 혜택을 누린 자의 무리엔 루카스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검문 간소화라···'
그는 검문대를 역대 최단시간을 기록하며 유유히 통과하는 가운데, 공용어로 [지정기간 검문절차 간소화, 대신 벌금 및 형량은 3배 추가 부과]라 쓰인 경고문과 현수막을 읽으며 흐나파스 관료들의 아름다운 고육책을 높이 평가했다.
"후후, 좋군."
"그러게요. 저도 인간들이 도시가 이렇게 반갑긴 또 처음인 거 같아요."
"······"
루카스는 치유수 몇 방울을 입속으로 탈탈 털어내며 끼어드는 레이첼을 지긋이 내려다봤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의 표정엔 호의 따윈 완전히 결핍된 상태였다.
'...흐음, 나침반이고 나발이고, 그냥 아주 떨궈낼 껄 그랬었나?'
"히이~, 왜요?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반대로 전신을 지배중인 독기를 꾹 억누르고 있는 레이첼은, 피고용인의 야무진 미소로 그런 루카스의 못마땅한 눈초리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히힛, 어때? 차마 웃는 얼굴에 침 못 뱉겠지? 그치?! 내가 그 비싼 치유수를 1병이나 써가며 개고생을 했어! 누가 순순히 떨어져나갈 줄 알아?!'
이들의 불편한 동행은 만석인 여관 다섯 군데를 거쳐 고급 여관을 향하는 중에도 끈끈하게 이어졌다.
- 딸랑~, 딸랑~.
"어서~, 어서~오십셔셔셔~! 이 도시 최고의... 어우야~!"
레이첼의 탐스런 붉은 머릿결과 그것을 돋보이게 하는 차가운 눈매와 입술은, 평소 버릇대로 허리 숙여 응대하던 점원의 우렁찬 외침을 끊고 탄성마저 자아냈다.
'그래!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암, 그렇고 말고!'
분명 객관적으로도 초췌하기 짝이 없는 기색이었건만, 이내 후드가 벗겨지며 훤히 드러난 그녀의 우월한 본판이 그 몰골마저도 가련함으로써 탈바꿈시켰다.
"맙소사! 요정족이라니! 그동안 말만 들어봤지 세상 처음 봅니다! 혹시 뒤에 계신 남자 손님께서도 같은 일행 되십니까?"
"네!"
"아닙니다."
"?"
그녀의 발랄한 긍정과 루카스의 단호한 부정이 교차했다. 이 때문에 질문 던졌던 종원업이 잠시 멈칫했지만, 상황이 어이없는 건 루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뭔가 수작질을 걸어와야 족칠 텐데... 거참, 되게 애매하단 말이지.'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은 약자의 목숨을 위협하는 일은 그의 원칙상 어긋나는 건 논외로 치더라도, 만에 하나 그녀가 베라의 지인일 경우 야기될 문제가 골치였다.
또한 머잖아 요정족 본토로 유학을 하게 될 에드와 샤비가 염려되기도 했다. 자칫 예뻐라 했던 아이들에게 불이익이 발생할 수도 있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흐음... 일단 이 여자가 본색을 드러낼 때까진 좋을대로 하게 냅둬야 하나...'
빤히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호기를 탐하는 맹수처럼 변해가자, 레이첼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능청스런 콧소리로 응수해왔다.
"느흐흥~!"
"...당신은 어디가 아픕니까?"
"아잉~, 우리 일행 맞잖아요오~. 무려 열흘 씩이나 같이 다녔으면서어~."
그녀의 애교 몇 마디에 이쪽을 힐끔힐끔 바라보던 남정네들의 정신방벽이 그만 사르르 무너져내렸다. 아무 말 없었을 땐 얼음장 같았던 미모에 생글생글한 웃음기가 감돌자, 맨정신의 사내라면 버티기 힘든 반전 매력이 카운터처럼 그들의 심장을 순간적으로 후벼 팠던 것이다.
"......"
다만 의심으로 가득찬 루카스에겐 별 효용이 없어보였다는 점이 참으로 애석할 따름이었다.
"흠흠, 이용요금은 얼마죠?"
그의 요지부동에 부쩍 머쓱해진 그녀의 물음은, 이 둘을 응대하던 점원의 정신을 퍼뜩 되찾아줬다.
"마침 깨끗한 2인 특실이 있습니다. 1박에 소은화 40닢, 아침식사 포함으론 45닢입니다. 그리고 저희 가게 방침상 처음 1박은 선불로 주셔야 하고요."
"1인실 2개는 힘든가요?"
"헤헤, 아무래도 1인실 2개가 조금 더 비싸기도 합니다만, 시기가 시기인지라 너그러이 양해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거상들은 보통 절기에 맞춰 상단을 운용함으써 지역간 차익을 노리곤 했다. 그리고 이런 상행에 편승하여 용병고용의 비용을 절감하는 소규모 상단이나 봇짐장수들도 있는 탓에, 이 시기의 특수를 노리는 숙소들의 이런 빈 방 관리는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앞서 수차례 퇴짜 맞아온 루카스와 레이첼에겐 이곳이 최후의 보루이기도 했다.
"네, 어쩔 수 없죠. 요기 이틀치 선금이요~."
"......에구구, 이건 타미아르 화폐로군요?"
루카스를 깜박 놓칠 세라 환전할 겨를도 없었던 그녀는, 이 상황을 얼렁뚱땅 모면하고자 순진한 척 되물었다.
"어머, 그걸론 안 되나요?"
"죄송합니다만... 무거운 환전 수수료 때문에.. 저희 가게는 헤트만 화폐만 계산을 받습니다."
"아궁~, 이를 어떡하죠? 환전하기엔 많이 늦은 시각인데 어떻게 안 될까요?"
"으으, 그게... 저도 편의를 봐드리고픈 마음이 간절합니다만... 아하하하..."
정말이지 현실의 비정함이었다. 일주일을 벌어 그 다음 일주일을 근근히 버텨야 하는 해당 점원에겐 엄두가 안 나는 금액이었던 터라, 그는 아름다운 요정족 여인의 호감을 살 기회를 코앞에 두고도 쓴 웃음만 지어야 했다.
"자, 여기."
이를 본 루카스가 서둘러 개당 소은화 10닢과 같은 대은화 5닢을 지불했다. 물론 이 행동엔 여기저기서 엉덩이를 들썩들썩하기 시작한 주변인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워진 이유가 가장 크다고 하겠다.
"옙! 곧 거슬러..."
"아니 됐습니다. 잔돈은 당신의 봉사료입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지금 곧장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우울한 궁지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굉장한 부수입을 챙기게 된 점원은 환희로 가득 찼다. 그는 본인이 할 수 있는 한계치로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며 4층 복도 끝에 위치한 특실로 그와 그녀를 인도했다. 그리곤 좋은 시간 보내라며 꾸벅 인사하곤 므흣한 웃음과 함께 1층으로 되돌아갔다.
"흠흠, 스톤 양."
널찍한 침대를 양보해주겠다는 듯이 탁자쪽에 짐을 내려놓은 루카스의 음성이 몹시 무거웠다. 그의 표정마저 뭔가 결심한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루카스 님~, 제가 거듭 말씀드리지만요~. 편하게~ 레이첼이라 불러주시면 된 답니다~."
"...그래요, 레이첼 양."
"네~."
"나는 간결한 직진을 좋아합니다. 그렇기에 정직하게 묻겠습니다."
"넹~!"
"당신은 나를 왜 계속 뒤쫓습니까?"
"......"
가감 없이 훅 치고 들어온 직설적인 표현에 그녀가 멈칫했다.
"뒤, 뒤쫓다니요~! 우, 우연히 목적지가 같으니까 함께 움직이는 편이 안전하기도 하거니와, 또... 그게 여러모로 훨씬 효율적이라고 판단..."
"변명이 틀렸습니다. 나는 그 이전부터를 지적하는 겁니다."
확신을 가지고 추궁 해오는 그의 강렬한 눈빛을 읽은 탓일까? 레이첼은 본능적으로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알고 계셨나요?"
"나 공용어 서툽니다. 하지만 바보는 아닙니다. 당신이 지닌 마나의 특색은 나 쫓아온 3개 중 하나입니다."
"헤헷, 다소 오해가 있는 거 같아요! 사실 그... 뭐냐... 따라다니긴 했는데..."
"왜입니까?"
엄습해온 압박감에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던 그녀의 입술이 일단 떠오르는대로 아무 말이나 더듬거렸다.
"그, 그게... 루카스 님이... 마음에... 들어서...?"
"......"
"하긴... 나 같아도 안 믿겠다."
"쯧."
혀를 거칠게 찬 루카스는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탁상 위에 올렸다.
- 스릉~, 탁.
"······"
일순간 레이첼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날이 시퍼런 단검도 위협적이기도 했지만,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에 비할 게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의 루카스는 그녀가 지난 열흘 동안 유심히 겪어온 무심함과는 사뭇 동떨어진, 정말이지 섬뜩하기 짝이 없는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나는 당신에게 줄 것이다, 마지막 기회를."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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