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높이 스승 (2)
"저, 저, 저! 에잉! 쯧쯧쯧..."
"으흐흐흐~, 그거 응해드리면 감형해주는 거요? 적어도 500년!! 그 이하는 귀찮아서 안 할랍니다~."
옥황천존은 자신의 표정을 읽고 이죽거리는 강도진의 면상을 보며, 즉각 봉인석 밑으로 도로 깔아뭉게 넣고픈 심정을 꾹 눌렀다.
'어이해 저런 놈을 원한단 말인가?!'
침착하게 마음을 추스른 옥황천존은 다시금 강도진을 내려다봤다.
"흠흠, 다름 아닌 천계에서 요청이 있었노라."
"천계? 오우~, 제법 중한 일인갑네. 거 무슨 일이랍니까?"
"나도 자세히 아는 바가 없다. 다만, 천계의 높은 분께서 요청하신 일인 만큼! 너는 그것에 성실히 임해야 할 것이다!"
"높으신 분...? 거기에 뭔지도 모른다?"
그저 감형될 생각에 싱글벙글했던 강도진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것은 천계의 하품천사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옥황상제가 우러러 존대할 할 요량이면, 적어도 중품천사 이상의 존재란 뜻이기 때문이었다.
"에...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그거 꼭 헤야 하는 겁니까?"
"네 놈이 제 발로 봉인석 밑으로 기어 들어가겠다면야 나야 반길 일이지!"
"에이~, 내가 꼭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아! 근데 왜 하필 납니까?"
"천계에서 너를 지목했다."
"음... 뭐지? 딱히 연줄도 없는데..."
"나도 적잖게 불만이다. 능력과 심성이 네 놈보다 뛰어난 자들이 선계에 부지기수인데! 당최 어이하여..."
강도진은 퍽 못마땅해 하는 주위의 표정을 보니, 저도 모르게 고소한 웃음이 피식 흘러나왔다. 더군다나 천계에서 자신을 콕 찍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터라, 기분 또한 굉장히 유쾌해졌다.
그는 목을 뻣뻣하게 세우며 목청을 돋웠다.
"어험, 어험! 그래서 내가 이 일 맡으면! 몇 년 까줄꺼요? 다시 말하지만 최소 500년 이상 안 해주면, 난 안 할라오~. 으흐흐흐!"
"감히 나와 흥정을 논하는 게냐?! 서방의 여신을 희롱한 죄는 물론이고, 그 배필인 신을 죽인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 모르더냐?! 까딱 서방의 신들과 척을 질 뻔한 중죄임에도 불구하고, 그간의 공로를 인정해 영멸시키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복해야 마땅하거늘!"
옥황천존의 노기가 잠자코 있던 천둥마저 깨울 정도였다. 그러나 강도진이라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거참, 나도 억울합니다! 그 신이란 녀석이 내 말을 전혀 듣지 않은 채 죽자 사자 달려드는데! 난들 어쩌겠습니까?! 게다가 임자 있는 줄 알았으면, 내가 건드렸겠습니까?! 이래봬도 나 역시 최소한의 도리와 예의는 아는 놈입니다! 아니 글쎄, 먼저 그 년이 꼬리치니까 나는 당연히...!"
- 팟!
결국 하극상을 보다 못한 백마장군의 신영이 흔들렸다. 천둥번개처럼 번쩍이듯 나타난 그의 방패 끝이, 피할 방도가 없는 강도진의 뒤통수를 그대로 찍어 내렸다.
- 빠각! 쿠웅-!!!
강도진을 맨바닥에 거꾸러트린 백마장군은 크게 호통 치며 쌓였던 노기를 분출했다.
"닥치거라, 이 놈! 보자보자하니까 천존께 범하는 무례가 밑도 끝도 없구나!"
"으그그...... 아오, 거 더럽게 아프네."
강도진은 국소적으로 균열이 심한 바닥에서 몸을 비비적 일으키며 툴툴거렸다.
"어이, 장군 나리. 내 생각에도 좀 지나쳤던 거 같아서 한 번은 참아주겠는데 다음은 어림없을 꺼요."
"뭣이?! 이 근본 없는 놈이 아직도 정신 못 차린 모양인 게로구나!"
"참나! 이 구속구 풀고 제대로 한 번 뜹시다! 내가 어째서 무선(武仙)이 될 수 있었는지! 또 어떻게 멸신(滅仙)시켰는지! 장군의 몸뚱이에 확실하게 각인시켜 줄라니까! 왜?! 정정당당히 맞붙으면 망신 당할까봐 쫄리시오? 그럼 어쩔 수 없고!"
"이 버러지 같은 놈이!!!"
눈동자에서 불꽃이 팍팍 튀는 백마장군이 재차 강도진에게 본때를 보여주려고 했으나, 일을 더 크게 만들고 싶지 않은 옥황상제가 먼저 나서서 이를 제제했다.
"그만 하시게. 장군."
"하오나, 천존!!!"
"저렇게 잔망스런 놈과 계속 다투면, 이기든 지든 되레 백마장군의 체면만 깎일 뿐이야. 자네도 잘 알잖는가? 그럴 가치가 하등 없는 놈이니, 이쯤에서 그만 물러나시게."
"...명 받들겠습니다."
작게 한숨 쉬는 건 제자리로 돌아가는 백마장군 뿐만이 아니라, 불만 가득 입술 씰룩이는 강도진에게 시선을 주는 옥황상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에휴휴휴~, 좋다. 네가 협력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돌아온다면 특별히 500년을 감형해주마."
"싫소, 천 년."
"아니, 이 놈이...!"
"방금 백마장군에게 쳐 맞은 게 억울해서라도 천 년은 탕감 받아야겠소!"
"......"
"어흠~! 그게 정~ 어려우시다면야~ 전 봉인석으로 다시 들어가 볼랍니다! 아이고~, 뒤통수가 얼얼한 게 영~ 에고고~, 어지러워라! 거 무지하게 어지럽고만~."
옥황상제는 바닥에 드러눕는 강도진을 보며 심사가 베베 뒤틀려짐을 느꼈다.
만일 마계의 움직임이 수상쩍으니 침공에 대비를 해야 한다는 첩보가 없었다던가, 아니면 무극에 이르러 신선이 된 강도진의 전력이 백마장군에 필적할 수준이 아니었더라면 당장의 홧김에라도 염라대왕에게 넘겨 영원한 죽음을 선사했을 터였다.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후우... 여기서 분노에 휘둘리면 내가 지는 것이야.'
약간의 숙고와 함께 마음의 평정을 되찾은 옥황상제는, 이윽고 팔걸이를 '퉁'하고 때렸다.
"오냐, 네가 제대로만 한다면 내 직권으로 3천 년을 탕감해주겠다! 허나! 반대로 네가 천계의 일을 조금이라도 그르쳤다는 평이 내 귀에 들린다면, 네놈은 돌아오는 즉시 5만 년 동안 형살이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어떠냐? 이를 받아들이겠느냐?!"
뜻밖의 제안에 장내가 잠시 술렁였다. 빼곡하게 도열한 대신들 중 아무도 선뜻 나지 않음은 상벌의 무게가 매우 뚜렷하여 쉽게 저울질하기 모호한 탓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심드렁하게 누워있던 강도진 또한 가만히 일어나 앉아 고심하게 만들었을 정도였다.
"캬하~, 잘하면 3천 년, 그르치면 5만 년이라... 이건 좀 쎈데?"
하지만 그의 결정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에잉, 까짓것! 내 더 잃을 것도 없지! 알겠습니다! 제가 하지요!"
"좋다. 저 놈을 풀어줘라."
"예!"
그를 속박했던 구속의 사슬이 모두 끌러졌을 무렵, 선계에서 천상으로 이어진 차원문이 열렸다.
* * * * *
"저어... 제가..."
강도진의 손가락이 그와 엇비슷한 체구의 루카스를, 반면에 어리둥절한 그의 눈초리는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가브리엘을 향해 있었다.
"이 마족을...요?"
"그렇다. 문제될 게 있는가?"
"......"
가브리엘의 무덤덤한 대답을 들은 강도진이 문득 무언가 깨달은 듯한 얼굴이 되어 폭소를 터트렸다.
"와하하하! 천계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높으신 분께서 진짜 이렇게나 유쾌하고 사려 깊으신 줄 몰랐습니다! 아무리 제가 바짝 긴장했다손 쳐도 이런 농담을 다 던져주시다니요!"
"......"
"이~야~, 이거 선계의 신선한테 마족에게 가르침을 베풀라니! 하도 엄청 진지하셔서 정말로 깜빡 속을 뻔 했지 뭡니까?! 파하하하!"
강도진의 웃음소리가 그칠 줄을 모르자, 가브리엘은 강도진의 서명이 담긴 맹약의 서를 팔랑팔랑 흔들어 보였다.
"자네, 내 이야기가 농담으로 들렸는가?"
"......잉?"
결코 이게 얄궂은 장난이 아님을 인지한 강도진의 표정과 말문이 덜컥 굳어졌다.
'뭐야? 다짜고짜 서약부터 시켰던 게 바로 이 때문이었어?! ...그렇다면 옥황천존조차 협력사항을 정확히 몰랐던 이유도 납득이 되는... 맙소사! 천계의 대천사 중의 으뜸 격인 존재가 마족과 내통을!!! 아니, 아니지! 이건 겉보기와 다르게 뭔가 큰 그림이 있는 걸로 판단해야...'
가브리엘이 강도진의 머릿속에서 온갖 추측이 점점 더해져 가는 것을 적당히 끊으며 주위를 환기시켜줬다.
"자네가 할 일은 이 친구를 잘 가르치는 것. 그뿐이다."
"어흠! 그 전에 먼저 속사정부터 듣겠습니다."
"속사정?"
"아니, 세상에! 대천사와 마족과 신선이라니요! 아무리 골 백 번 양보한다쳐도 이건 경우가 아니지 않습니까?"
"...꼭 그래야겠나? 깊이 알아서 좋을 게 없다."
비밀이란 자고로 아는 사람이 적어야 하는 법.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고픈 가브리엘이었다. 그러나 강도진의 도덕적 관념은 의외로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제가 어쩌다 득도하여 신선 나부랭이가 되긴 했습니만, 그래도 남부끄럽지 않게 최소한의 규율은 지키고 삽니다."
"자네는 그... 올림푸스 '프리오나(Priona)'와의 불륜관계 때문에..."
강도진은 말끔히 지우고픈 과거사가 가브리얼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즉시 발끈했다.
"크흠흠! 그건 진짜 남편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랬던 거니까, 따지고 보면 저도 엄연히 피해자입니다!"
"올림푸스 신전을 일부 파괴한 일은? 제우스의 동상까지 가루로 만들고, 당시 힘 겨뤘던 신마저 영멸시켰던 일은? 그 때문에 선계의 서쪽 영역이 난리도 아니었던 것으로 아는데..."
"그, 그건! 에... 정당방위, 정당방위입니다! 두고두고 저주를 퍼부을 꺼라며 신력을 담아 지껄이기 시작하는데 그걸 어떻게 그냥 놔둡니까? 아!!! 아무튼!!! 그 때문에 여태껏 무거운 형벌을 받아왔으니까 그 건에 대해선 재차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그것도 그렇군."
"게다가 저는 대천사님께 제 존재력을 걸고 이번 일에 협력하는 동안에 알게 될 모든 사실을 함구하겠다란 맹약까지 했습니다. 속사정을 알아야할 자격은 이미 충분히 갖췄다 생각되진 않으십니까?"
"흠,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겠군. 알겠다. 설명해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가브리엘은 곰곰이 생각하는 눈빛으로 루카스와 강도진을 번갈아 살피다가 이윽고 운을 띄웠다.
"자네는 이야기를 짧게 해주는 편이 좋은가? 아니면 길게 해주는 편이 좋은가?"
"제가 워낙 단순한 것을 선호하는 지라, 되도록 짤막하게 부탁드립니다."
"그러지."
가브리엘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 친구 루카스는 마족과 싸우기 위해 천상의 영광을 포기하고 스스로 마족이 된 숭고한 전사라네. 이 사실을 아는 건 세라프 중에서도 나를 포함해 셋뿐이지."
"흐음... 과연 그렇군요. 천계나 선계나 각각 지엄한 규율이 있으니..."
"그렇다네."
"?"
강도진은 추가로 뒤이어질 이야기를 기대했으나, 가브리엘은 할 말 끝났다는 식으로 그저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볼 뿐이었다.
"헛?! 설마 그게 답니까?"
"간략히 요약하면, 이게 전부이네만?"
'아차!'
한때 필멸자에서 초월자가 된 자신과, 태초부터 고위존재인 가브리엘의 사고방식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을 새삼 체감한 강도진은, 가브리엘에게 머리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아이고~, 송구합니다만 부디 조금만 더 길게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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