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의외로 치명적인 (1)
※ 번외편은 읽지 않고 넘기셔도 되는 내용입니다.
* * * * *
당대 정령왕의 과오. 상위차원의 최강자 루카스를 상대로 힘의 우위를 과시하려 했던 무지함은 전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만을 열매 맺진 않았다.
오히려 루카스 일행 한정으로는 대단히 긍정적이었다. 오드노아가 전군을 신속하게 이동 및 배치하고자 중심영역에 활성화된 방어대책 전부를 해제시켰던 탓에, 이동일정이 그만큼 대폭 단축됐던 것이다.
방어결계와 교란술식이 재가동되기 전, 수뇌부와 함께 오드노아의 중심지인 메디오스페라로 공간이동 해온 루카스 일행은 각각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가령 루카스와 야스민과 에이샤는 나디아를 오드노아 시노토 계파의 의료진들에게 맡기며 잔뜩 부풀어오른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고,
“끝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다.”
“다 잘 될 거야! 이 언니가 계속 기도하고 있을께!”
“힘내요, 작은 주인! 꼴랑 하룻밤이면 끝난다잖아요!”
“녜! 져 힘내께효! 다녀호게슘다!”
아카반과 디마우스 또한 현시대 인간문명에 비해 우월하기 짝이 없는 오느노아의 마법문물에 취해 잔뜩 들떠있었다.
“오호라~, 이런 식으로 정규화시켜서 일부 변수만 따로 통제하는... 캬햐~, 스승님! 기가 막힌 이 규격화 좀 보십쇼!”
“그래, 내 눈으로 봐도 무척 체계적이구나! 오랜 세월에 걸쳐 정제되고 정제된 술식이 아닐 수 없... 오오오오! 이건 아주 혁명이야! 당장 우리 연맹의 2성 이하의 마법식들에 응용해도 큰 문제가 없을 거 같다!”
“아하하하, 스승님! 근데 이거 저희가 너무 애들처럼 흥분한 것 같지 않습니까?”
“에이~, 디마우스야. 주위시선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즐기자꾸나. 어차피 요정족들이 보기엔 우린 100년도 못산 어린애들이 아니더냐?”
“엌, 듣고 보니 그것도 그러네요! 파하하하!‘
다만 앉은 자리가 불편해진 인물도 있었는데, 그 불운에 당첨된 자는 다름 아닌 베스퍼였다.
“저라고 딱히 해드릴 이야기는 없는데...”
본래라면 그녀도 아카반과 디마우스 편에 섞여 이 흔치 않은 방문기회를 만끽해야 했건만, 메토가 갑자기 객실로 찾아와 사정사정하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아이고~, ‘형수님’이 아니시면 누가 이 일에 관련해서 진중하게 상담해줄 수 있겠습니까?”
“...형수님...이요?”
“아휴~, 저희 루카스 형님께서 각별히 애정하고 아끼시는 분이시오니, 당연히 제게 있어선 누님이자 형수님 아니겠습니까?”
“어머머머...”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메토의 유들유들한 능청은 베스퍼의 불편한 감성도 야들야들하게 조율해냈다.
”오호호호~, 총장님이랑 디마우스 선배가 메토 씨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는 이유가 있었네요. 큼큼, 저도 그 싹싹함이 마음에 들었어요.”
“으헤헤헤! 과찬이십니다, 형수님!”
“좋아요, 저도 사실 조금은 궁금하기도 했고요. 어서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옙! ‘다들’ 들어오십쇼!”
“다들...?”
- 달깍, 끼~익~.
메토가 열어젖힌 방문을 통해 입장한 오드노아 무리의 구성은 총 여섯으로, 메토의 연인인 베라를 제외하면 총 다섯 명이 베스퍼에게 볼 일이 있는 셈이었다.
“......한두 분이... 아니셨네요.”
개중엔 베스퍼와 안면이 있는 인물들도 있었고 생판 초면인 여성들도 있었는데, 당연히 루카스를 흠모하는 여성진을 바라보는 베스퍼의 기분이 달가울 수가 없었다.
“헤헤, 아마 형님 본인조차 전혀 모르고 계실 겁니다. 저한텐 로비샤 형수님과 베스퍼 형수님에 대해서만 언급하셨거든요. 저도 제 애인이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끝끝내 몰랐을 겁니다.”
“후... 그 말인즉 제가 루카스 씨한테 찾아가서 투정부릴 수도 없단 소리겠군요.”
메토는 베스퍼의 기분을 풀어주고자 루카스를 일부러 흠잡았다. 사람의 꿍한 감정을 털어내는 데엔 어설픈 옹호보단 적극적인 공감이 효과적인 경우도 있기 때문이었다.
“흐흐, 형님한테 한 마디 씨게 하셔도 됩니다. 순진한 여자들을 이만큼이나 홀리셨다면, 형님의 처신이 잘못된 게 맞으니까요!”
”에휴, 그보다 저분들은... 루카스 씨의 진면목을 알고 계신 건가요?”
“예, 형수님. 제가 미리 귀띔해줬습니다. 이 나라의 높으신 요정족 양반들이 대외비라며 뭐라뭐라 으름장을 놨다 한들, 알 필요가 있는 사람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님께서도 까다로운 조건의 서약만 완료하면, 자신의 비밀을 말해줘도 상관없다 하셨고요.”
최근의 루카스는 정보보안 쪽에 다소 느슨해져 있었다. 오드노아 수뇌부와 맺은 밀약으로 귀환의 단서를 완성시켰다는 안도감이 가장 큰 원인이라 하겠다.
“그렇군요. 그런데도 다섯 분이나..."
"에... 제 예상과 달리 낙오자가 없었습니다. 다들 질겁하고선 손절하리라 예상했었는데 말이죠. 사실 마족이랑 인연을 맺으려는 게 어디 보통 용기입니까?"
메토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답했고, 베스퍼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입에 담을 소린 아니지만, 취향이 다들 무척 독특하시네요. 심지도 대단히 굵으시고요.”
“하하핫, 공감합니다! 남들의 평가보단 본인들이 직접 보고 느낀 것을 믿는다고들 하셨거든요!”
그러던 그때, 폴라 옆을 지키고 서있던 페이가 대뜸 대열에서 성큼성큼 이탈하며 외쳤다.
“아! 아뇨! 전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
“전 쟤를 억지로 끌고 오느라 함께 있었던 겁니다. 자기는 절대로 아니라며 박박 우기는 꼴이 어찌나 웃기고 안쓰럽던지 원...”
“아...”
루카스를 향한 폴라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쯤이야 베스퍼도 익히 알고 있던 사항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전 계속 이대로 참관할게요. 그 정도는 괜찮죠?”
“?”
페이는 낯뜨거워하는 폴라와 다른 셋의 어수룩한 표정을, 마치 희극을 감평하듯 즐기며 자기 할 말을 계속했다.
”솔직히 이 재미있는 걸 놓칠 순 없잖아요? 저 진짜 쥐 죽은 것처럼 얌전히 있을게요.”
“......페이 씨 뜻대로 하세요. 여러분의 나라에 방문중인 외부인은 바로 저니까요.”
“히힛, 감사합니다~.”
“어? 그나저나 식사 안 하셨나요? 웬 음료랑 과자를 잔뜩...”
그녀가 다 같이 먹자는 식으로 식탁 위에 늘어놨다면, 베스퍼가 이렇게 묻지도 않았을 것이다.
“후후, 구경꾼의 옳게 된 준비자세쯤으로 여겨주세요.”
“......”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 베스퍼는, 그래도 예의상 인사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았기에 불편한 정적을 깨고서 말문을 텄다.
“어렵게 서 있지들 마시고 그만 앉으세요. 아, 이쪽 두 분은 제가 초면이라서... 두 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네! 저는 ‘미라이 글라스콧(Mirai Glascott)’라고 합니다!”
“저, 전 ‘리사 마나핸(Risa Manahan)’이에요. 잘 부탁 드려요.”
“베스퍼 재커릭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그런데...”
그녀는 가장 왼쪽에 위치한 레이첼을 향해 ‘넌 여기 왜 있냐?’란 눈빛을 보냈다.
“정말 의외네요. 마지막으로 뵀을 적만 해도 특별한 감정은 없으셨는데... 그쪽은 루카스 씨를 그저 애물단지 정도로만 여기시지 않았었나요?”
“그, 그렇게 됐어요. 저도 모르게...”
흐려진 뒷말을 요약정리하자면 매우 천천히 가열되는 냄비 속 개구리처럼 알게 모르게 당해버렸다는 뜻이리라.
“에효...”
물음 던진 베스퍼 또한 리사나 미라이처럼 ‘뿅~’하고 사랑에 빠진 사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는 짐짓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은 이해가 가네요.”
“그게... 매일매일 마주할 땐 몰랐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떨어져서 계속 못 보게 되니까... 자꾸만 얼굴이 아른 거리고...”
“으휴...”
저도 모르게 한숨을 뿜뿜 흘리게 된 베스퍼가 경쟁자 넷을 향해 넋두리하듯 말했다.
“여러분 모두 무슨 상담을 바라고 저를 찾아오셨는진 모르겠는데, 우선 번지수를 잘못 찾으셨다는 이야기부터 드리고 싶네요.”
“”“?”””
“따지고 보면 저도 여러분의 입장랑 별반 다르지 않답니다.”
그녀는 '거참, 가진 자가 너무하시네'라는 식의 불편한 기색을 내비친 청중들에게 자신의 추억을 꺼내놓았다.
“후... 예전에 제가 처음 고백했을 때 루카스 씨가 그랬죠. 자기 마음은 하나라서 한 사람만 담을 수 있다고요. 실제로도 저는 지금 그 사람의 애정을 억지로 갈구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답니다.”
“그러니까... 루카스 님의 마음은 그 로비샤란 인간여자 분께서 다 차지하고 계시단 의미인 거죠?”
“네, 참고로 루카스 씨는 그녀가 인간이 아니고 여신이라고 말해줬어요.”
“오엥?! 여신? ...프흡, 프으하하하하하핫!”
이 말에 쥐 죽은듯이 얌전히 있겠다던 페이가 갑자기 배꼽을 붙잡고서 자지러졌다.
“아이구~, 배야~! 그 양반도 보기와 다르게 참 어지간하시네! 애인한테 여신이란 거창한 수식어까지 달아주고 말이야! 키킥, 낄낄낄!”
“오해하셨네요, 페이 씨.”
“...?”
베스퍼는 웃음 실실 새는 페이가 음료를 쭉 들이키는 동안에도 차분한 눈길을 유지했다.
“이건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었어요.”
“?”
”이프리티아. 우리들에겐 ‘생명의 어머니’나 ‘구원의 어머니’란 지칭이 더욱 친숙한 천신이십니다.”
“푸-컵-!”
선계의 여신 이프리티아에 대한 3천 년 이전의 기록은 오드노아 종족치고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1대 정령왕에게 멸종 당할 위기에 처한 인류에게 불법적으로 마법과 무공을 전파했다가 신격을 상실하게 된 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방금 드린 이야기는 누구 골리려고 막 던진 농담이 아닙니다. 루카스 씨가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는 그 로비샤란 분께서 바로 신격과 기억을 전부 잃으신 여신 ‘이프리티아’라고 하네요.”
“콜록, 콜록!”
그녀는 사레 들려 심하게 기침하는 페이에게 손수건을 친절히 건넨 뒤, 다른 사람들에게로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안 믿기시죠? 솔직히 고백하면 저도 처음엔 믿지 않았습니다. 여기 페이 씨의 반응과 똑같았었죠. 사실 그 허황된 소리를 어느 누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겠어요?”
“저기...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네, 레이첼 씨. 이건 딱히 비밀이 아니라고 하셨으니까 얼마든지 가능해요.”
그렇게 베스퍼의 입에서 재구성된 '루카스와 로비샤의 이룰 수 없는 사랑’ 이야기는 금세 좌중을 사로잡았다.
- 작가의말
번외편이므로 3연참을 진행합니다.
5분 간격으로 예약설정을 해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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