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문과 닫힌 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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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2개월은 반트리슨 국경 바깥에서도 급변의 시기였다. 트로돈의 후순위 계승자들까지 왕위쟁탈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 또 전투원 모집하네? 지난주에 서른아홉 번째 별동대가 출발하지 않았었나?”
“라호나바스 님께서 이번에 격분하셨다 하더라고. 서열이고 출발순서고, 그것 관계 없이 먼저 증명을 마친 자에게 통치권을 부여하시겠다는 엄명을 내리셨다고 하나 봐.”
“와, 뭐지? 보통은 열다섯 번 내외로 해결 보잖아? 근데 이번 행성은 저항이 보통이 아닌가 보네?”
“장군들끼리 푸념하는 걸 들었는데, 그쪽 천신들이 돕고 나섰다나 봐. 가장 막강한 정예들을 동원했던 아르카니토 님조차 아예 재기가 불능한 피해를 입었다는 거 같더라고.”
“아하! 그래서 서열 100위권 밖인 계승자들까지 저렇게 난리 치는 거였구만? 웬일로 임시동맹까지 맺고 말이야.”
“참 웃기는 일이지. 서로 합쳐봤자 꼴랑 50명도 안 되는 전투원으로 뭘 어쩌겠다는 건지 원...”
“높으신 왕족들께서 어련히 하실라고. 우리 같은 말단장교들이야 성공한 쪽에 충성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
“쩝... 하긴... 우리가 귀한 혈통들을 걱정해줄 처지는 아니지.”
과열된 트로돈의 침공과 여기서 비롯된 인명피해는 지역세도가들의 은폐공작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영주님! 토벌에 실패했습니다!”
“또?”
“...면목 없습니다.”
”그게 말이 되냐? 애지중지 하는 기사단도 이번에 싹 투입시켰잖아?! 그런데도 졌다고?”
“이족보행 괴물들의 전투력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흑마법사의 키메라 따위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합니다!”
”이런 제길... 야, 근데 기사단장은 어디 가고 니가 와서 보고하는... 설마?”
“크흡... 기사단장님도 얼마 버티시지 못하고 그만... 저와 생존자들은 갑작스레 일어난 적들의 내분을 틈타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아이구야...”
숨이 붙어있어야 권세도 누리는 법. 영지간섭과 정치공작의 빌미를 제공하기 싫어서 조용히 자체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권력자들도 끝내는 백기를 들었다.
“왕님아, 큰일났어요! 도움!”
“엥? 너도?”
“호에엥~, 파충류 괴물들이 너모나 쎈 거시에요~.”
“일단 기다리셈. 딴 데부터 해결하고 애들 보내드림.”
“안 돼! 빨리! 나 죽어!”
물론 형편은 나라마다 천차만별이었는데, 반트리슨 내전에 숟가락 얻고자 조잡하게나마 병력을 강제 소집시켰던 국가들의 경우엔 처지가 비교적 좋은 축에 속했다.
“휴~, 유지비용 몇 푼 아끼겠다고 귀국하자마자 소집해제 했으면 바로 ㅈ됐을 뻔 했네~. 핑계 김에 연회를 베풀길 잘 했어! 크하하하핫!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교적’ 좋았던 것일 뿐, 급물살 타는 물가상승을 비롯하여 온갖 불안요소들이 여기저기에서 툭툭 튀어나왔다.
특히 마법사와 용병들의 몸값은 ‘폭등’이란 단어로도 표현이 부족할 만큼 어마무시했다. 단가가 하루가 다르게 뛰는 게 아니라 아침저녁으로 달랐다.
오죽하면 계약담당자의 최대 관심사가 ‘재계약을 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위약금 물고 당장 나간다고 하면 어쩌나?’일 정도였다.
가장 큰 골치는 용병들의 집단이탈에 있었다. 마법사들이야 원체 고급인력으로써 매사 귀하게 대접해온 터라 인정에 호소라도 가능했지만, 반대로 찬밥신세였던 용병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 용병 중 대다수는 5인 이상 무리지면 영지민들에게 강도떼 취급받던 그간의 수모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아, 다시 한 번만 재고해주게!”
“일 없수다. 우리 찾는 데가 있을 때 갈라요.”
“그간 섭섭했던 일들에 모두 사과하겠네! 보수도 2배로 올려줄 테니...”
“치, 겨우 2배? 저 짝은 지금 받는 돈에 5배를 부릅디다. 게다가 계약서를 보여주니 우리가 뱉어야 할 위약금을 꼼꼼히 계산해서 이렇게 선금으로까지 얹어줬수. 자, 여기 받으쇼.”
“아니! 말단 병사들까지 다 죽어나간 이때에 자네들이 이러는 건 사람 도리가 아니잖은가?!”
“뭐, 언제는 사람대접이나 제대로 해주셨수? 칵~, 퉤잇~! 그동안 날강도 대접 자알~ 받다가 갑니다~. 얘들아, 가자!”
“앗! 이보게! 잠깐만, 이보게들!”
치안이 위태로운 시기에 맞물려 터진 인력난은 용병의 입지를 180도 뒤집어놨다. 숙련된 전사는 웃돈 얹으면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닌 까닭에, 실력자 품귀현상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마지못해 화포 쪽으로 눈을 돌리자는 주장과 시도가 일기도 했다. 그러나 기획단계에서 번번히 무산되기 일쑤였다.
신형 대포의 위력은 아주 후하게 평가해줘야 3위계 파괴마법 수준일뿐더러, 그 시설구축비용과 소요시간이 예상 외로 어마어마했으며, 무엇보다 뛰어난 화포관련 기술자들은 마법사들만큼이나 희귀했던 것이다.
"비주류라고 언제나 천대 받던 우리에게도 기회가 왔다!"
"드디어! 떡상 가즈아-!"
"얼쑤~!"
차라리 통상임금의 5배 이상을 감수해서라도 남의 인재를 가로채는 방식이 훨씬 경제적으로 이득인 상황. 때문에 많은 위정자들과 세력가들은 기아니크와 같이 정세가 불안한 나라를 상대로 뒷공작을 벌이기 시작했다.
"아이고~,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나라에서 제대로 된 처우를 못 받고 계시다죠?"
"뉘십니까?"
"하하하, 그게 뭐 중요하겠습니까? 저희가 귀하께 제시하려는 액수가 더 중요하지요."
"...엇?"
이 흐름에 따라 병사나 장교, 심지어 왕실정규군 할 것 없이 마음 맞는 전우들끼리 먹고 살 길을 찾아 용병으로 전향해버렸다. 그리고 봉급조차 제대로 지급 못하던 국왕은 그 대세를 막을 길이 없었다.
여기서 한 가지 우스우면서도 다행이었던 점은 ‘인재 빼돌리기’가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 국왕과 척을 진 귀족 측에서도 마찬가지로 전력을 대거 상실한 바람에 쇠락한 왕권을 집어삼킬 엄두를 못 냈고, 그 덕분에 일반백성들은 이 시국에 난민신세로 전락되지 않았다 하겠다.
이렇듯 서방대륙 전체는 미지의 공포로 인해 벌벌 떨었고, 하루하루가 살얼음길을 걷는 듯 했다. 이 분위기에 진정 신바람 난 자들은 오직 타행성 침략자들뿐이었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가장 으뜸은, 이 땅에서 아주 오랫동안 칼을 갈아온 아르카니토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아, 뒷정리 좀 하느라 연결이 늦었다. 요즘 들어 나를 이빨 빠진 도마뱀으로 취급하는 용감무쌍한 아우들이 잔뜩 늘어나서 말이지.”
<아닙니다, 주군. 당신께서 무탈하셔서 천만다행입니다.>
“너야말로 고생이 많구나, 드레이크.”
<괜찮습니다. 이깟 더러움 정도는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습니다.>
현재 통신구를 통해 보고중인 드레이크는 임무에 함께 파견된 병력들과 같이 메디오스페라의 하수도 밑에 숨어사는 중이었다. 2대 정령왕의 치기로 수도의 방어장치들이 잠시 해제된, 의외의 행운을 틈타 침투했던 것이었다.
“그나저나 때가 무르익은 모양이군. 네가 발각 위험을 감수하면서 통신을 걸어오다니 말이다.”
<예, 아르카니토. 모든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결행시각은 내일 새벽입니다.>
통신구 너머의 드레이크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오드노아 지도부가 트로돈의 추가 선발대를 제거하기 위해 보유병력 중 상당수를 외부로 돌렸다는 사실을 파악한 까닭이었다.
<방어전력이 최소로 줄어든 것을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게다가 수도의 방어장치가 순차적으로 해제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그게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래도 이보다 좋은 기회는 다시 없다고 봅니다.>
“알겠다. 그렇다면 나도 최근에 노획한 신물을 통해 라호나바스께 보고를 드린 다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겠다.”
<맡겨주십시오, 주군. 반드시 유의미한 성과를 바치겠나이다!>
“그대들만 믿겠다. 어차피 내게 있어 유일한 희망은 너희뿐이니라.”
<저와 제 수하들의 목숨을 갈아넣는 한이 있더라도 시설물을 완벽히 탈취해 보이겠습니다.>
“좋다, 그리해준다면 나 또한 약속을 어김없이 지킬 것이다.”
<예!>
역추적을 염려한 통신은 빠르게 종료됐다.
* * * * *
무슨 일이든지 적기, 일의 효율을 최고로 뽑아낼 수 있는 적절한 때가 존재한다.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우스갯소리가 괜히 명언처럼 자주 언급되는 게 아닌 것이다.
“하여 트로돈의 침략을 공식화하고, 그들 관련 정보를 최대한 동맹국가들에 공개할까 합니다.”
“샌더스 총통! 아니 되오, 아직 너무 이르오! 우리 공동체의 큰 혼란을 완충시킬만한 제도적 장치조차 여전히 불충분한 상태란 말입니다!”
“아닙니다, 대장로님. 제가 보기엔 지금이야말로 가장 적기입니다. 종족의 생존을 위해선 오히려 우리 공동체 너머선 시각에서 판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방대륙의 문명들은 불과 5년도 안 된 사이에 마왕의 위협을 2차례나 겪었고, 거기에 1대 정령왕의 재림이라는 큼직한 사건 또한 경험했다.
“이 땅의 지성체들은 절대 손 놓고 구경할 수 없는, 세계의 존망이 걸린 위기를 3번이나 가까스로 넘겼습니다. 비록 그 중 한 번은 천신들에 의해 다소 조작된 사건이라 할 지라도 말이죠. 게다가 잦은 전투로 인해 적에 대한 윤곽도 잡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흐음...”
“각 국 통치자들의 심장이 아직 두근거리는 이때, 바로 이때에 터트려야 합니다. 자의든 타의든 그들의 병력이 불어난 지금을 노려야 한다고 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안이해진 마음으로 군대를 해산하기 전에, 저희 쪽에서 선수를 쳐서 긴장의 끈을 바짝 조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무슨 의도인지 알아들었소. 샌더스 총통은 이 기회를 빌어 인간들의 결속을 도모하겠다는 의중이시구려.”
“그렇습니다. 대장로님.”
“총통께선 기어이 트로돈과의 전면전을 펼치실 작정이오이까?”
샌더스는 파렐 스톤의 불안한 안색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크흠...”
“천신들께서 사도와 화신까지 동원하시어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상황입니다. 대장로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희가 이렇게 막강한 아군을 보유한 역사가 있었습니까?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이 기회를 활용하지 않으면, 우리 종족은 탈주와 이민을 영원토록 반복해야 할 지 모릅니다. 이번만큼은 패배의식을 떨치고 과감히 트로돈에 맞서 싸울 때입니다.”
“...총통의 결단이 옳소. 내 생각이 몹시 편협했구려. 되레 내가 이러한 직언을 올렸어야 하는데 말이오.”
“아닙니다. 저희 종족을 대표하는 기둥께오서 경청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허허허.”
소탈하게 웃어넘긴 파렐 스톤이 물었다.
“발표예정일은 언제로 염두하고 계시오?”
“차주 내로 공표하려 합니다. 마음 같아선 원로회의 동의를 얻은 즉시 바로 일을 저지르고 싶습니다만, 오늘 오후에 방문예정인 로비샤 님을 당황케 해드려서야 되겠습니까?”
“흠, 나도 공감하오. 귀빈 중의 귀빈을 군중의 혼란 속에서 맞이할 수는 없지.”
”미리 전후 사정을 알리며 언질 드리려 합니다.”
“총통의 의견이 백 번 옳소. 암, 그렇고 말고! 아참, 내가 이럴 게 아니라 생각난 김에 전이마법진의 상태를 한 번 더 점검ㅎ...”
이프리티아의 내방을 두고 잔뜩 흥분한 파렐 스톤의 설레발은 아름답게 끝맺질 못했다.
- 쿵. 쿵. 쿵. 쿵. 벌컥!
“초, 총통 각하!”
십여 명의 친위대원들이 완전 무장한 모습만으로도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비상사태입니다! 즉각 대피하셔야 합니다!”
“대체 무슨 일인가?”
“타, 탈취 당했습니다! 그러니 지금 바로...”
“무엇을 탈취 당했다는 말인가? 앞뒤 자르지 말고 똑바로 보고하게!”
“그, 그것이...”
현재 상황에서 가장 듣기 싫은 단어가 얼굴이 파랗게 질린 장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트로돈 전사들과 비스마우어 일족이 수도에서 날뛰고 있습니다. 그들이 웜홀게이트가 내재된 시설물을 장악하고 농성전에 돌입했습니다.”
“뭐, 뭣?! 그들이 대체 어느 틈에... 아뿔싸!”
앞뒤 정황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낸 샌더스와 파렐 스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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