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셔야 하는 독주 (3)
* * * * *
타미아르 왕성의 너른한 오후.
메토가 별궁 2층 식당과 연결된 발코니에 홀로 떨어져 있는 루카스에게로 다가섰다.
“형님, 예서 혼자 뭐하십니까?”
“점심 먹고서 계속 청승 떤다, 하하하.”
“어린 신탁자님들은 안 챙기시고요?”
“괜찮다. 여기서도 잘 보인다.”
확실히 루카스가 대각선으로 서 있는 발코니의 한쪽 가장자리는 식당 안팎을 살피기 용이한 명당이었다.
“흐흐, 왕비께오서 형님을 어려워하시니 일부러 자리를 양보해주신 거로군요.”
“부정 않겠다. 그녀가 나디아랑 야스민을 많이 예뻐해 줘서 나도 배려해 준 거다.”
“캬~, 훗날 형님한테 친딸이 생기면 진짜 볼만 하겠습니다. 애기 신발에 흙먼지 한 톨 안 묻겠는데요?”
“글쎄다. 아마도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을 거다.”
영적 생명체인 마족이라고 하여 번식 자체가 불가능하진 않았지만, 루카스가 고위마족을 양성하는 것과 다름 없는 자식농사에 심혈을 기울일 리가 없었다.
“혀, 형님... 혹시... 그... 설마... 아니시죠?”
“...이참에 분명히 말해둔다, 메토. 나 고자 아니다.”
“으흐흐흐.”
살짝 엇나간 오해를 정정해준 루카스가 메토를 슬쩍 내려다보며 물었다.
“근데 무슨 말이 하고픈 거냐?”
“아휴~, 제가 뭐, 꼭 용무가 있어야 형님을 뵈러 오겠습니까?”
“여느 때처럼 나가서 술 먹자는 표정이 아니다. 그래서 질문했다.”
“크~, 과연 예리하십니다~. 못 당하겠네요.”
너스레를 한차례 떨고 난 메토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저기, 형님. 다름이 아니라... 사실은 엘로디 아가씨 때문에...”
“...누구?”
“어제 형님을 찾아와서 대뜸 청혼했던 그 아가씨 말입니다. 기억은 하시지요?”
“아, 그래. 근데 무슨 문제 있나?”
“그게... 어제 그때 이후로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 누웠답니다.”
“......”
철벽을 단단히 쳤을 뿐인 루카스로선 조금은 억울한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메토야. 솔직히 나는 그 사람이 그렇게 상처 받은 이유를 모르겠다.”
“흐흐, 형님은 모르시겠지만, 엘로디 아가씨는 예~전~ 흐나파스에서부터 형님께 홀딱 빠져있었습니다.”
“음... 글쎄... 나는 한 대 때려준 기억 외엔 없다만? 아!”
저 멀리 나디아 곁에 찰싹 붙어 있는 에이샤를 보고서 무언가를 문득 떠올린 그가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이 세상도 참 말세다. 맞으면서 희열을 느끼는 변ㅌ... 흠흠, 그런 독특한 취향을 지진 인간이 또 있다니 말이다.”
“에이~, 엘로디 아가씨가 심하게 독특하긴 합니다만 그쪽은 진짜 아닙니다.”
“그럼?”
”아가씨는 형님이 맨몸으로 마수들과 뒤엉켜 싸우는 모습에 홀딱 반했더랬습니다. 딱 자기 이상형이라고 했었던 걸 저도 곁에서 확실히 들었거든요.”
“...응?”
메토는 루카스의 표정에 드리운 ‘그게 말이 되나?’란 기색을 읽고서 본인 역시 공감은 했지만, 그래도 사람 한 명 살린다손 치고 그녀를 옹호하고자 최대한 애썼다.
“아무튼 그때 이후로 아가씨가 형님을 다시 만나려고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모릅니다. 어려서부터 귀하게 자라서 그런지, 의외로 순수하더라니까요? 한 번 꽂히면 아무 것도 안 보이나 봅니다.”
“......”
”그간 헤트만 국경을 몇 번이나 넘었는지 셀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심한 상사병은 저도 세상 처음 봤어요.”
“......”
메토의 변호내용을 가만히 듣던 루카스가 본인의 턱 끝을 살살 긁으며 물었다.
“...그러니까 결국. 너는 나보고 가서 그녀를 살살 달래줘라. 그런 이야기냐?”
“흐흐, 단도직입적으로다가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형님이 자세히 설명해주시면 그래도 기운은 차리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죠.”
“이실직고해라, 메토. 누군가 네게 압력을 가했나?”
메토는 돌연 정색한 루카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머리를 휘휘 저었다.
“아이구, 아닙니다! 물론 엘로디 아가씨가 폐하와 사촌지간이긴 합니다만, 딱히 사주 받진 않았습니다.”
“그냥 네 개인적인 부탁이라고?”
“예, 형님. 솔직히 그렇게 친하다곤 말 못하겠는데, 그래도 좀 많이 안 쓰럽더라고요. 하녀들이 절 찾아와서 하소연하는 걸 듣고 나니 ‘아~, 하는 수 없이 오지랖 좀 부려야겠구나~’ 싶어졌습니다.”
“...그래, 알았다. 그 사람이 저녁도 거른다면 이야기해라. 그땐 내가 가보겠다.”
“감사합니다, 형님!”
“아참, 만약을 위해서 그 사람에 대해 네가 아는 이야기들을 모두 말해줘라. 특히 과거사와 가족관계.”
“?”
“효과적인 거절을 위해 필요한 정보다. 난 지금의 여자관계도 골치 아프다.”
“흐흐, 예예~. 그 정도야 어렵지 않습... 어? 잠깐만요, 형님! ‘지금의 여자관계도’라니요?”
“...험험, 일단 그 아가씨의 정보부터 공유해줘라.”
그 날 저녁. 루카스가 막연히 예견했던 바와 같이, 엘로디가 석식도 걸렀다는 소식이 메토를 통해 전해졌다.
* * * * *
2박 3일의 짧은 방문일정 중 마지막 저녁이자, 경비대들의 야간조 근무가 한창 시작되려는 그 시각. 분위기가 유독 침울하기 짝이 없는 어느 귀빈실이 있었다.
“얘야, 일단 뭐라도 요기하자꾸나, 응? 듣자니 어제부터 아무 것도 안 먹었다며.”
“흑흑... 루카스 님...”
“으이그, 진짜...”
친동생 그레이엄 국왕의 연통을 받자마자 차녀 베레니스와 함께 득달같이 날아온 이자벨. 그녀는 동생에게 말로만 전해 들었던 것보다 심각한 장녀의 몰골 때문에 가슴이 미어졌다.
‘어휴, 차라리 여느 때처럼 천방지축으로 길길이 날뛰었으면 머리끄덩이를 붙잡아 다그치기라도 하련만...’
열렬한 구애가 1초만에 튕겨나간 이래로 방안에 처박혀 식사도 거른 채 울고 있다는, 그녀의 어머니와 동생조차 반신반의했던 사연은 아무래도 가감 없는 진실인 것 같았다.
”얘, 너 정말 내 딸 엘로디 맞니? 니가 침대에 엎어진 채 하루 종일 울기만 한다고? 겨우 한 번 퇴짜 맞은 걸 가지고? 너라면 될 때까지 들이대야 정상 아니니?”
”그래, 언니! 정신 좀 차려! 태어나서 한 번도 안 하던 짓을 갑자기 하고 이래? 지금 완전 낯선 거 알아?”
“루카스 님이... 흐흑... 나한테 좁쌀만한 흥미도... 없다시잖아... 끄윽.. 끄윽... 다시 만나고 싶어서... 내가... 얼마나, 얼마나 노력했는데... 흐어어엉...”
“”......””
병세가 중증을 너머 손도 쓰기 힘든 말기였다. 그것도 그녀의 어머니와 동생을 단숨에 벙어리로 만들 만큼 증세가 극심했다.
‘단단히 미쳤네! 얘가 뭘 단단히 잘못 먹었나?’
‘헐? 이건 저주야! 저주가 틀림 없어! 우리 언니가 흑마법사들의 저주에 걸려버린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리가 없잖아!’
그녀들이 이런 엘로디의 생소한 면을 두고 어찌하면 좋을지를 전혀 갈피 못 잡는 가운데, 불현듯 귀빈실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인기척이 있었다.
- 똑. 똑. 똑.
문을 살짝 열어 방문자의 정체를 확인하던 하녀가 기겁했다.
“누구십... 헉, 어맛?!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녀는 곧장 엘로디의 침상으로 쪼르르 달려와 아뢨다.
“아가씨! 루카스 님께서 문밖에 와계세요!”
“!”
여태껏 물에 젖은 솜베개나 다름 없었던 엘로디의 몸뚱이가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진짜? 당장 안으로 모셔... 앗, 잠깐만!”
루카스는 그녀의 옷매무새가 아주 흉한 꼴만 면한 다음에서야 방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흠흠, 나는 당신이 식사를 전혀 안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냥... 입맛이... 없어서요.”
“우선... 대화 나눔은 잠깐 미루겠습니다. 이거부터 드십시오.”
그는 약간의 스프와 부드러운 빵이 담긴 쟁반을 하녀를 통해 전달하는 가운데 마저 말했다.
“당신을 위해 일부러 가져온 겁니다. 나는 당신이 이것을 다 먹을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겠습니다.”
“...네에.”
이자벨과 베레니스는 한 마리의 순한 양과 같은 엘로디의 태도를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어멈머머! 저 기집애! 얌전 떠는 것 좀 봐!’
‘꺅! 세상에! 우리 언니가 저럴 수도 있다고? 맙소사, 이거 뭐야?! 오늘 왜 이래! 저런 거 난생 처음 봐! 무서워!’
귀족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려면 이쯤에서 그녀들이 자리를 비켜줘야 옳았겠으나, 실제 당사자들은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언니, 미안! 막장 소설보다 흥미진진한 이 상황을 두고 차마 못나가겠어! 너무 기대 돼!’
‘흠흠, 야심한 시간에 남녀 둘만 남겨둘 순 없지! 난 어머니로써 딸이 괜한 추문에 휘말리지 않게끔 막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암암. 그렇고 말고.’
방안의 하녀들도 비슷한 심경이었던 지라, 침대에서 최대한 떨어진 곳에 이자벨과 베레니스의 관람석을 조용히 마련해주고서 은근슬쩍 그 좌우편을 지켰다.
- 잘그락.
이윽고 요기를 간단히 끝낸 엘로디의 수저 내려놓는 소리를 기점으로 둘 사이의 대화가 시작됐다.
“엘로디 양.”
“네, 루카스 님.”
“내 단호한 거절이 당신에게 큰 상처가 됐다고 들었습니다.”
“...솔직히... 조금 그랬...어요.”
“그래서 사과하러 왔습니다. 그 점은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또한 거절의 이유를 자세히 밝히고 싶습니다, 당신이 허락해준다면.”
“......네.”
엘로디의 긍정을 확인한 루카스가 진중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날 사랑해주는 여자도 이미 한 명 있습니다. 그것이 첫번째 이유입니다.”
“전 첩이라도 상관 없어요!”
‘아니! 이 기집애가!!!’
그녀의 폭탄발언은 이자벨의 고혈압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한편 베레니스는 잔뜩 흥분하여 상체를 반쯤 일으킨 어머니를 뒤에서 와락 끌어안아야 했다.
‘뭐가 어쩌고 어째?! 처업? 처어어업?!’
‘엄마!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이런 동생의 필사의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로디가 추가타를 날렸고, 루카스는 나름의 숙고 끝에 완성한 다소 억지스런 논리로 대응했다.
“부디 곁에만 있게 해주세요!”
“그럴 수 없습니다. 당신의 그 눈빛. 그것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네?”
딴소리에 가까운 이유표명과 엘로디의 짤막한 되물음. 이는 성공적인 첫단추 끼우기를 뜻했다. 부족한 설득력을 의외성으로 채우려는 루카스의 노림수가 통했단 증표였다.
“이제부터 내 말을 잘 들어주십시오. 엘로디 양은 스스로의 감정을 오해한 겁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착각이고 집착입니다. 당신은 나를 애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아니에요! 제가 얼마나...”
”나는 동경만을 느꼈다는 것이 그 반증입니다. 내게 청혼해온, 바로 당신에게서 말입니다.”
“...그, 그럴 리가...”
“진정하십시오, 엘로디 양. 나는 당신의 감정을 폄하하거나 조소하려고 이곳을 찾아오진 않았습니다.”
루카스는 뭔가 할 말이 많아 뵈는 엘로디를 빠르게 저지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메토에게서 당신의 아픈 과거를 들었습니다. 엘로디 양은 최근 후계자 자리에서 갑자기 밀려났고, 그 오랜 노력과 공로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다고 했습니다.”
“......”
”그래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커다란 상실감이 당신의 감정을 왜곡시키고 있는 겁니다.”
“그, 그렇진 않...”
“차분하고 침착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엘로디 양. 당신은 저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아니, 그보다 나의 어떤 점 때문에 설레였습니까? 혹시 그것은 스스로 이루고자 추구했던 본인만의 이상향이 아닙니까?”
“......”
엘로디는 선뜻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홀딱 빠졌던 루카스의 매력은 맹수보다 맹수다운 야성미였고,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막강한 무위였으며, 그 어떤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성정이었다.
한 마디로 그 모든 것은 하루아침에 가문의 후계구도에서 밀려난 후부터 더욱 갈증을 느끼던 그녀의 최종목표였던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당신은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단지 자신이 갈망하는 이상향을 마구잡이로 쫓는 겁니다. 그 본인 자신조차 모르게 말입니다. 직설적으로 다시 짧게 표현하면... 형언할 수 없는 좌절감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는 열망에 불과한 겁니다.”
“......”
”물론 당신은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선망과 애정은 엄연히 다릅니다. 나는 당신이 마냥 속상해하기에 앞서 그 부분을 먼저 잘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열성적으로 성토한 루카스는 이후로 잠시 침묵했다. 엘로디의 반응을 살핀다기보단, 그녀 스스로가 깊이 성찰하는 시간을 갖게끔 하여 혼란을 유도시킬 목적이었다.
‘미안합니다. 당신의 호감은 고마우나, 나는 기회가 생기면 훌쩍 떠나갈 마족입니다. 부디 좋은 사람과 인연을 맺길 바랍니다.’
놀랍게도 그의 조잡스런 논리는 제법 효과를 보였다. 아마도 오매불망 그를 우러러보던 엘로디의 마음이 그의 설득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정말로... 내 스스로 속여왔던 걸까? 구멍 뚫린 마음을 덮으려는 서툰 욕망이었을까? 아니, 그렇지 않아!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무의식 중에 진짜로 그랬었던 걸까? ...솔직히 나도, 나도 잘 모르겠어.’
이윽고 이전과 다른 종류의 슬픔이 그녀의 양볼을 타고 흘렀다.
- 똑, 토도독...
몇 발자국 거리에서 이 대화에 집중하고 있던 이자벨과 베레니스 또한 덩달아 숙연해졌다.
‘언니... 난 그것도 모르고...’
‘에휴, 딸아이의 상처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다니... 정작 못난 건 나였구나.’
그렇게 얼마간 손등을 적시던 엘로디는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재빨리 자신의 눈가를 훔치며 애써 씩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기, 루카스 님.”
“?”
“혹시... 제가 루카스 님 곁에서 머물면서 확인해봐도 될까요? 제 감정이 착각인지 아닌지를요.”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거진 다 떼어낸 혹이 다시 붙어올 조짐을 보이자, 루카스는 이왕이면 꺼내지 않으려던 세 번째 이유마저 밝혔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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