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물단지 (4)
* * * * *
예정에 없던 야영이 이뤄졌다. 밤과 새벽 사이의 한기와 맹수들을 쫓아내기 위한 모닥불이 인적 드문 숲 한가운데에서 타닥타닥 피어올랐다.
“어이, 그거 잠깐만 이리 줘봐라.”
“안 돼요! 이건 에이샤 꺼에요!”
그리고 그 따뜻한 열기 속에서 루카스와 에이샤의 실랑이도 티격태격 타올랐다.
“구경만 조금 할 꺼다, 구경만.”
”싫어요, 일부러 망가트리실 꺼잖아요!”
“......”
”그 정도는 에이샤도 알아요!”
“쯧.”
에이샤는 적당한 얼버무림 정도론 넘어오질 않았다. 기본 상식과 사회화가 덜 됐다뿐이지, 그녀의 지능이 결코 뒤떨어지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평균 이상으로 영특하기 짝이 없었고, 특히 눈치 수준만 놓고보면 전문 노름꾼 저리가라였다.
“주인님은 약속을 무조건 지키는 사람이랬어요! 이걸 제게 주신 분이 그러셨어요!”
“뜬금없이 뭔 소리지?”
”그러니까 저를 절대 버리지 않겠다고, 저를 종으로 인정한다고, 주인님의 이름을 걸고 약속부터 해주세요! 그럼 이거 드릴 께요!”
“아니, 이 썩을 천신이...”
- 뿌드득.
루카스는 자신에게 으뜸엿을 선사한 마야키니의 이름을 까먹지 않으려 몇 번씩이나 속으로 곱씹었고, 이 과정에서 그녀의 간택자인 칼리드에 대한 감정마저 부정적으로 검게 물들었다.
‘이런 골치덩어리를 내게 대뜸 떠넘겨? 그 어떤 사전예고도 없이? 오냐, 이 일은 두고두고 잊지 않으마!’
어쨌든 에이샤의 영혼까지 갈아버리지 않고선 그녀를 떨칠 수 없음을 인정한 그는, 지금껏 후순위로 미뤄뒀던 질문들을 하나씩 던졌다.
“에이샤, 네겐 이무기의 기운이 있다. 정확한 이유가 뭐지? 장기를 이식하기라도 했나?”
“네! 첫번째 주인님이 토룡의 골수랑 피부라는 걸 제게 이식해주셨답니당~!”
알쿤다 자매는 물론 폴라와 페이 또한 관심이 지대했는지, 모두들 귀를 쫑긋 세운 채로 루카스와 에이샤 사이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경청했다.
“흠... 혹시 신체가 이식한 후로 뭔가가 많이 바뀌었나?”
“우와~,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네, 맞아요! 에이샤는 오래오래 침대에서만 누워서 살아왔어요! 언젠가부터 머리 밑으론 감각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그게 10년도 넘어요!”
“그러면 첫번째 주인 또한 너와 똑같이 이식하거나, 접목을 시도했나?”
“네! 제가 갑자기 튼튼해진 것을 보시곤, 저랑 똑같이 하려고 하셨어요! 아쉽게도... 수술을 끝마치진 못 하셨지만요.”
누군가의 피실험체로 살아온 그녀 에이샤. 조금 자세히 알아보면 뭔가 깊은 사연이 튀어나오겠지만은, 그걸 구태여 캐내고픈 의욕이 솜털만큼도 없었던 루카스는 대략 이쯤에서 멈춰섰다.
“...그래, 알겠다.”
“더 물어보세요! 다 알려드릴께요!”
”아니다. 충분하다. 그림은 대충 다 그려졌다.”
“힝...”
그녀의 과거를 더 캐물어봤자 공연히 기분만 더러워질 게 뻔했고, 무엇보다 추억의 공유과정에서 행여 정이라도 들어버리면 큰일이기에 이를 극구 거부한 것이라 하겠다.
“그래도 대단하세요! 과연 이 에이샤의 주인님이세요!”
“아니, 그건 아니고.”
“왜요! 주인님은 이제 에이샤의 주인님이시라고요!”
“맞고 싶나?”
“앗! 감사합니다! 오늘도 예뻐해주세요!”
“아나... 진짜...”
- 쿵. 쿵.
루카스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본인 가슴을 두들겼다. 예상 외로 배알이 더 베베 꼬인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아마도 폴라와 페이의 흥미진진한 표정 때문일 것이다.
‘풉,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시네?!’
‘힛~, 이거이거~ 휴가때마다 읽는 막장 소설보다 훨씬 재미지잖아!’
하기사 그녀들은 이 정도로 당혹해하는 루카스의 모습을 일찍이 경험한 적 없었을 테니, 눈앞의 신선한 자극을 시시각각으로 즐기는 그녀들의 기분을 영영 이해못할 건 아니었다.
“후우... 잘 들어라, 에이샤.”
지금부터 빈곤한 어휘력으로 상대를 설득시켜야 하는 루카스의 언어영역이 모처럼 풀가동했다.
“나는 네 첫번째 주인과 같지 않다. 생김새, 말투, 성격, 취향, 지식과 상식. 그 모든 것이 다르다.”
“근데요?”
“그 의미는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도 다르다는 뜻이다.”
“어떻게요?”
“일단 나는 좋아하는 사람을 때리지 않는다.”
“왜요?”
“그게 내 상식이고, 사는 방식이다.”
”그건 다른 게 아니라 틀려요! 사랑하니까 아프게 하는 거랬어요! 고통의 크기는 사랑의 크기라고 말씀하셨단 말이에요!”
“누가?”
“첫번째 주인님이요!”
“그래, 그랬겠지.”
보나마나 생고문이나 다름 없는 생체실험을 납득시키려는 세뇌였으리라.
”하지만 나는 아니다.”
“어째서요!”
“나는 네 첫번째 주인과 다르니까.”
“하, 하지만 그건 틀린 거라고요!”
“내 입장에선 네가 틀렸다.”
“아니에요! 에이샤는 틀리지 않았어요!”
“시끄럽다.”
원만한 설득 따윈 씨알도 먹히지 않으니, 태세를 고압적으로 바꿔 찍어누를 차례였다.
“긴 말 않겠다. 가서 다른 주인을 찾아가라. 너와 나는 서로 성향이 다르다.”
“흐흑... 시러, 싫어요! 이제야 찾았는데! 에이샤를 아프게 해줄 주인님을 이제야 찾았는데에!!!”
“내 곁에 있겠다면 내 명령을 따라야 할 거다. 그리고 나는 불순종을 매우 싫어한다. 그런 종복 따윈 필요 없다.”
”이이~이잉~, 그러지 말고 에이샤를 예뻐해주세요! 제발요!”
“싫다. 떼 써도 소용 없다.”
“흐아아아아앙~!”
“정신 사납게 울어도 안 바뀐다! 계속 징징댈 꺼면 지금 당장 꺼져라!”
“...흐끕... 흑흑... 끄윽... 끅...”
마지못해 억지로 억누른 에이샤의 흐느낌은 밤새도록 그치질 않았고, 날이 밝은 이후부턴 새초롬한 표정으로 루카스에게 말도 걸지 않은채 일정 간격만을 유지했다.
“아삐, 저 어니가 개속 쪼차와효.”
“무시해라, 나디아. 저러다 지치면 알아서 떠날거다.”
“근뎨 조그음 부썅해요. 마니 외로운 거 가타요. 그래도 나눈... 어니가 이써서 괘차났눈데...”
나디아의 목소리가 측은한 꼴이 에이샤의 애정결핍에 이미 공감해버린 것만 같았다. 그러나 루카스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단호하게 가르칠 따름이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정주면 안 된다. 어떤 동정에는 많은 책임도 뒤따른다.”
“...녜, 쟤성해요.”
“이건 죄송할 게 아니다. 그냥 나디아의 마음이 따뜻한 거다. 그리고 나는 그게 싫지 않다. 오히려 좋다.”
“져도 아삐가 죠하요!”
“으구으구~, 우리 나디아 이쁘다~.”
“...히히힛, 아삐이-!”
에이샤는 루카스가 나디아를 푸근하게 어루만질 적마다, 도둑 고양이 같은 눈빛으로 그의 손길을 뚫어져라 응시하곤 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루카스의 일거수일투족을 닷새 가량 더 주의깊게 관찰하던 그녀는, 어느 순간 풀 죽은 표정을 머금은 채로 일행들에게서 모습을 영영 감췄다.
“어라? 없네? 혹시 갔나? 진짜로?”
“그러게. 안 보이네? 아까 점심밥 준 거는 다 먹긴 했던데... 야스민 너도 못 봤니?”
“네. 저녁식사 준비하던 때 이후론 못 봤어요.”
“쩝... 폴라야, 왠지 모르게 뒷맛이 쓰지 않냐?”
“응, 기분이 조금 그러네.”
페이와 폴라와 야스민이 쌉쌀한 감정, 얼마간 밥 챙겨주던 길고양이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듯한 기분을 공유하는 사이, 루카스 또한 마음 속으로 에이샤의 행운을 빌어줬다.
‘분명 너와 잘 맞는 인물이 있을 거다. 꼭 찾기를 바란다.’
이때까지만 해도 겨우 며칠 만에 에이샤와 다시 조우하리란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 * * * *
루카스의 일행을 태운 짐마차가 ‘류드라(Lyudra)’ 마을에 이르렀다. 참고로 류드라는 뮤티움 경계와 맞닿은 기아니크의 마지막 마을 중 하나였다.
“일반 주민은 거의 없고, 기사들만 수두룩 하군.”
“정보부서에서 전해 듣기론 성채를 따로 짓지 않고 마을 몇 개를 요새화 시키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거주민들의 절반은 이미 강제적으로 인근 마을로 옮겨졌을 꺼에요.”
“아마도 돈 때문이겠군.”
“네, 그 편이 비용면에서 훨씬 싸게 먹히니까요. 기아니크 왕실의 금고가 텅텅 비었다는 소문도 파다하게 돌고 있으니 거의 틀림 없을 겁니다.”
“그렇군.”
“...근데 뭐하세요?”
루카스는 나디아의 주먹 크기만한 루비를 2개나 챙기며 적당히 응답했다.
“미리 통행료 준비한다. 대충 봐도 누구 하나 전투의지가 없다. 그렇다면 관리자들이야 뻔하지 않겠나?”
“......”
폴라는 그 말에 딱히 반박할 수 없었다. 목책 등을 세우는 수십 명의 병사들에게선 어떤 의욕도 보이지 않았고, 일반 병사보다 몇 배는 더 많은 기사들은 훈련은 커녕 끼리끼리 뭉쳐다니며 허송세월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부반란을 경계한 멀린스 3세가 자기 눈에 거슬리는 기사들은 전부 접경지대로 몰아놨다더니만... 정말로 그런가보네.’
여하튼 마을 입구에 설치된 임시 검문소의 담당 책임자는, 루카스의 예상대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일행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통행증은 위조가 아닌 거 같은데..."
"그렇지만 멀린스 3세께오서 역적들의 나라 진입을 진짜로 승인하셨을 리가..."
"아무래도 왕성으로의 확인절차를 추가로 밟아야 할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이때 루카스가 찔러준 보석은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힘을 발휘했다. 점점 가치가 상실되고 있는 기아나크의 화폐를 가지고선 이만한 위력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 스윽.
“큼큼, 송구스럽지만... 아~, 이게 또~ 저만 봐드린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옵고...”
- 슥.
“커흠! 아무쪼록 평안히 머물다 가십쇼! 통과아-!!!”
기합 충만한 환영인사를 뒤로하고 진입한 마을의 상태는 상상 이상으로 엉망진창이었다.
몇 달 전만 해도 시끌벅쩍 했을 시장바닥은 휑하디 휑했고, 전략적인 부대운용에 방해가 된다는 명목하에 허물다가 작업을 멈춘 건물들도 보기 흉했다.
정말이지 요식행위의 흔적들이 흉물스럽게 마을 곳곳에 잔재하고 있었다. 앞뒤 정황을 모르는 사람에게 쨘하고 보여주면, ‘혹시 잔악한 산적떼에게 쓸려버린 마을입니까?’하고 물을 판이었다.
“아무래도 야영이 좋을 거 같다. 뭔가 살 것도 없고, 사고픈 마음도 안 생긴다.”
“제 생각도 그래요.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시죠. 이럇.”
그렇게 폴라에 의해 속도 높여진 짐마차가 공개 처형장으로 변질된지 오래인 마을광장을 지나치려던 때였다.
“...어?”
괜스레 싸한 느낌을 받은 루카스가 돌아본 그곳엔, 수많은 기사들에게 둘러 쌓인 에이샤가 있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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