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공정 계약 (2)
* * * * *
2대 정령왕의 급발진 사유는 당연히 유리아나와 메티갈로사였다. 정령들의 터전인 이면세계로 숨어든 두 명의 마족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행성의 의지여! 드디어 불청객들의 위치를 찾아냈습니다!}
그러나 행성의 의지는 전투의지를 불태우는 2대 정령왕과 생각이 달랐다. 마족들이 현재 말썽부리지 않고 꼼짝 않는 건 어디까지나 아리사엘이 두려워서임을 잘 아는 까닭이었다.
「 아이야, 때를 기다려라. 」
정말로 경험과 지혜에 근거한 명령이었지만, 인간에 비유하자면 질풍노도의 시기에 접어든 2대 정령왕은 그것에 불순명했다.
{저들을 이대로 방치하실 작정입니까?!}
「지금은 참아야 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이니라.」
{적지만 승산은 있습니다! 여기는 당신의 심상이 투영된 세계, 전장이 이곳이라면 이길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리고 설령 지는 싸움이라 하더라도 끝까지 맞서야 합니다! 마족들이 발산하는 기운이 당신의 정신을 오염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
「이 정도는 충분히 견딜 수 있단다. 아이야, 내 말을 들어라.」
{도무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저는 당신의 수호자입니다! 잠복기 중인 세균 덩어리와 같은 저들을 가만 놔둘 수가 없습니다!}
「얘야, 부탁이다. 치기 어린 행동은 화만 불러일으킬 뿐이란다. 나를 슬프게 하지 말아다오.」
{불복하겠습니다! 저는 맞서 싸울 것입니다!}
「안 된다, 아이야! 나의 아이야!」
2대 정령왕은 행성의 의지에 반하여 독자적으로 마족과의 전쟁준비에 돌입했다. 그렇다고 그가 마족의 힘을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루카스 덕에 개안도 했거니와, 심지어 싸울 마족이 1명도 아닌 무려 2명이기 때문이었다.
‘나와 소왕들이 마족 한 놈을 상대하는 동안, 정령들이 나머지 한 놈에게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젠장, 차라리 내가 둘이었으ㅁ... 앗! 그래! 그거야!’
우연히 번뜩인 발상은 자기 스스로를 감탄케 했다.
’1대 정령왕! 그라면 분명히 이 싸움에 기꺼이 동참할 것이다!’
조각을 3개나 쥐고 있는 루카스 덕에 1대 정령왕의 완전한 부활은 불가능했지만, 2대 정령왕의 입장에선 오히려 그 점이 마음에 쏙 들었다. 70%도 안 되는 1대 정령왕의 힘 정도는 자신이 능히 감당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신속히 이 기똥찬 계획을 행동으로 옮겼다. 오드노아들이 재작업한 결계를 찢고 1대 정령왕의 일곱 봉인들을 차례차례 해제했으며, 몸소 설득에 임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조각 8개의 힘이 자신을 뛰어넘는다는 예상 밖의 불안요소를 깨달았으나, 돌이키기엔 너무 늦은 상황인지라 그것을 애써 무시해버렸다.
‘든든한 아군이 생긴 셈 치자. 어차피 마족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우리 모두가 넝마가 될 것이 뻔하니까. 일단 목적을 달성한 이후에 기습을 단행하던지 해서 재봉인해버리면 해결될 일이다.’
그렇게 불우한 상황을 긍정의 힘을 빌어 가까스로 떨쳐버린 그는, 1대 정령왕을 선배님이라 높여 부르며 비위 맞추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싸움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선배님, 준비 되셨으면 마계 마족을 내쫓아내러 가시죠.}
{아직, 아직이다. 8개만으론 턱 없이 부족하다. 완전한 부활은 무리더라도 일전에 어느 고위마족이 뜯어버렸다던 나머지 한 조각마저 전부 회수해야 할 것 같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돕도록 하지요.}
하지만 이것이 2대 정령왕의 최대 악수가 되었다. 1대 정령왕이 루카스에 의해 잘게 해체됐던 조각을 회수하는 가운데, 그것에 녹아있던 흐나파스에서의 쓰린 패배와 공포의 기억까지도 흡수됐기 때문이었다.
{크흐으으음.......}
{어? 왜 그러십니까, 선배님?}
{...아, 아무것도 아니다. 잘게 흩어진 힘의 복원이 생각보다 쉽지 않군. 조금만 더 기다려다오.}
{......예.}
그렇게 거짓으로 막간을 챙긴 1대 정령왕은 꼬마 악령들을 불러내어 루카스에 대한 온갖 정보들을 추가로 수집했다. 그리고 그것을 얼마간 세심히 분석하면서 숙고의 시간을 차분히 가졌다.
{내가 굳이 마족과... 꼭 싸워야 할 필요가... 있나?}
유리아나와 메티갈로사의 목적을 파악한 그의 생각이, 2대 정령왕과 함께 결의를 불사르던 이전과 달라졌다.
* * * * *
“그래서 어떻게 됐지?”
{죽었대요.}
“......”
루카스는 타조알과 대화를 나눌수록 마치 에이샤를 상대하는 것만 같았다. 아마도 둘의 정신연령이 엇비슷한 탓에 일어난 기시감임에 분명했다.
‘에이샤가 이 녀석이랑 쿵짝이 잘 맞겠군.’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은 그가 다시 타조알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면 1대 정령왕이 2대를 제거한 건가?”
{네! 방심한 틈을 노려서 콱 제압해버리고 힘까지 쪽쪽 빼앗았대요!}
아무리 1대 정령왕이 악에 물들었다지만, 기본적인 근원이 동일했던 만큼 특별한 거부반응 없이 흡수를 마쳤으리라 생각됐다.
그러나 루카스가 현재 궁금한 부분은 그쪽이 아니었다.
“1대가 왜 그랬는지 아나?”
{글쎄요. 행성의 의지께선 1대 정령왕이 나중에 천신의 사도랑 싸울 생각으로 그랬다고는 알려주셨는데, 솔직히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헷!}
뭔가 뒤죽박죽인 이야기였으나, 1대 정령왕의 원대한 목표까지 풀어놓고 가만히 궁리해보니 꽤 그럴듯한 가설 하나가 툭 튀어 나왔다.
‘날 마계로 돌려보낸 뒤, 이 땅의 필멸자들을 멸종시킬 속셈이로군. 못다한 과업을 마저 이루겠다는 건가?’
그의 추론은 다음 질문을 통해 사실로 굳힐 수 있었다.
“혹시 1대 정령왕은 지금 마족들을 찾고 있나? 내 위치를 넘기려고?”
{어? 어떻게 아셨어요? 네, 맞아요! 행성의 의지께서 열심히 방해하고는 계시지만, 겨우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하셨어요!}
“역시 그랬군.”
가까운 곳에서 오가는 대화를 경청 중이던 주소걸도 1대 정령왕의 의중을 꿰뚫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허이~, 위협은 우회하고, 확실히 이길 수 있는 싸움만 하겠다라... 그 놈도 제법 영민한 친구였구려!”
인근의 구경꾼들도 하나 둘씩 고개를 주억일 무렵, 루카스가 다시 물었다.
“마지막으로 네게 한 가지 묻겠다. 내가 너의 제안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지?”
{앗, 제 어머니의 요청을 거절하시려고요?}
“아니다. 그냥 궁금해서 한 번 물어보는 거다.”
{아하~.}
순진한 타조알이 사람의 머리처럼 까딱까딱 거리며 말을 이었다.
{행성의 의지께선 마계군주님이 싫다고 하시면 다른 마족분들에게 서둘러 찾아가라고 말씀하셨어요.}
“...그건 왜지?”
{당연히 저희가 1대 정령왕보다 먼저 거래하려고요. 마계군주님의 위치를 알려주는 조건으로 1대 정령왕을 멸망? 음, 아니지, 영멸이었었나? 아무튼 그렇게 해달라고요.}
“......”
짧게 요약하면, 어차피 1대 정령왕이 공짜로 제공할 예정인 정보로 선거래를 트겠다는 소리였다. 당하는 입장에서야 무료 사은품을 돈 주고 사는 어리석은 꼴이 될 것이나, 그것이 거래와 계약의 냉혹함이었다.
“이 행성의 의지도 참 필사적이군.”
{그거 칭찬이시죠?}
“그래.”
동원 가능한 수단이 변변찮은 상황에서 돌파구를 이만큼이나 뚫어냈으면 당연히 칭찬받아 마땅했다.
{히히, 다행이에요. 저 진심으로 화낼 뻔 했어요. 행여라도 저희 행성을 흉보시면 안 됩니다?}
“알았다.”
{히히힛.}
흡족감에 부르르 떤 타조알은, 바로 이어서 루카스에게 답변을 요구했다.
{마계군주님, 저는 물어보시는 질문들에 전부 다 답변 드렸어요.}
“그래, 열심히 잘 해줬다.”
{그럼 결정하셨을까요?}
그의 결론은 타조알이 선계약을 운운했을 때부터 정해진 상태였다.
“의뢰를 수락하겠다.”
{오우예~! 됐당! 지금 당장 이면세계로 초대해드릴게요!}
* * * * *
행성은 하나의 생명체. 그리고 자아를 가진 존재가 으레 다 그러하듯이 각 개체의 성향 또한 가지각색이었다.
얼굴에 그 사람 심보가 녹아있다는 어느 격언처럼, 그들 각각의 성향은 행성 겉표면에 그대로 투영되곤 했다. 이를테면 작은 생명들이 살아가기에 쾌적한 환경을 지닌 행성은 ‘마음씨가 굉장히 따스하며 아기자기하다.’고 단정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면이 제각각 제멋대로인 것은 또 아니었다. 그 나름의 공통분모들도 몇 가지 존재했는데, 특히 행성의 의지를 받드는 정령왕은 행성의 일생에 걸쳐 평균 1개체란 점이 가장 대표적이지 않을까 싶다.
탄생 직후의 행성이 자신의 표층을 수월히 관리하고자 최초로 만들어내는 창조물이 바로 '정령'이었고, 그들의 총괄격인 정령왕은 대단한 정성이 요구됐기 때문에 여간해선 대체불가의 인선이었다.
물론 불순명 등의 사유로 정령왕이 교체되는 예외적 상황이 이따금씩 발생되기도 하나, 이는 만 단위 소수점 이하로써, 필멸자들의 이혼율과 비교하려는 상상조차 수치스럽게 여겨야 할 만큼 대단히 낮았다.
그렇기에 벌써 3번째 정령왕이 창조된 ‘아스테라(Astera)’ 행성은, 몹시 희귀하다 못해 거의 유일무이한 경우일지도 몰랐다.
- 초대 : 네타-볼크투스(Neta-Volktus, 발현된 의지)
- 2대 : 네타-라카나르(Neta-Racanar, 새로운 의지)
- 3대 : 네타-인타투스(Neta-Intatus, 순수한 의지)
아스테라가 정령왕에게 부여한 진명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조금 안타까웠다. 간절한 소망을 담아 아기의 이름을 짓곤 하는 어머니들의 경우와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1대가 2대를 산 채로 잡아먹는 거나 마찬가지인 최근의 사건까지 고려하면, 아스테라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아이야, 나의 아이야! 제발 이쯤에서 멈춰다오! 더 이상 내게 상처를 주지 말아다오!」
형상 없는 그녀의 외침은, 마치 산자락에 울리는 메아리처럼 네타-볼크투스에게 닿았다. 하지만 1대 정령왕은 그녀의 통사정을 들으며 오히려 발끈했다.
{그만하십시오! 끔찍한 존재들을 당신에게서 멀찍이 치워놓겠다는데, 제게 고마워하진 못할 망정 왜 이토록 방해하십니까?!}
「아이야, 너의 그 다음 생각을 내가 모르겠느냐?」
절대로 이길 수 없는 루카스와 마족들이 마계로 순순히 돌아가기만 하면 그 이후부터는 네타-볼크투스의 세상. 그는 오래전 미수로 그쳤었던 정화작업에 재도전할 속셈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 행성을 노리는 라호나바스란 존재와 천신의 사도들이 눈에 거슬리는 장애물이긴 했다.
그러나 2대 정령왕의 힘까지 흡수한 현재라면 천신의 사도들을 충분히 꺾어낼 자신이 있었고, 상대가 힘겨울 거라 예상되는 라호나바스의 경우는, 아예 이 행성으로 넘어오지 못하게끔 아르카니토의 군세를 초토화시켜 사전 예방하면 의외로 쉽게 해결될 일이었다.
{두고 보십시오! 이번에야말로 이 땅의 모든 지성체들을 말소시키겠습니다! 하찮은 침략자들까지 남김없이, 그 전부를 말입니다!}
「얘야, 그래선 안 된다. 부디 생각을 돌이켜다오.」
오랜 세월을 함께한 사이라 할지라도, 의견이 서로 엇나가면 그들의 관계 역시 평행선을 그리는 법이었다.
{나는 오히려 당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은 당신을 위해! 오직 당신만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내 노력을 알아주시지 않는 겁니까?!}
1대 정령왕 네타-볼크투스는, 다른 행성들에 비해 유약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감성을 계속 책망했다.
{만족을 모르고 밑도 끝도 없이 당신에게 해악만 끼치는 벌레들입니다! 그런 그들을 치워버리겠다는 게 그리도 큰 잘못입니까?}
「아무리 작은 생명들일지라도 많은 신들에게 사랑을 받는 필멸자들을 함부로 다뤄선 안 된다. 오히려 더 큰 화를 불러들이게 될 거란다.」
{그럼 탐욕에 찌든 벌레들이 당신을 끊임없이 훼손되는 꼴을 멀뚱멀뚱 지켜보란 말입니까? 난 그렇게 못합니다! 내가 소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싸우며 발버둥치겠습니다!}
- 쩡-!
「아아...」
아스테라는 네타-볼크투스가 기어이 자신의 방해공작을 뚫어냈음에 탄식했다. 그리곤 이면세계에 숨어든 마족들을 본격적으로 탐색하기 시작한 네타-볼크투스를 더욱 간절히 만류했다.
「내 아이야, 네 잘못은 내 의지를 거부하고 맞선다는 데에 있단다. 이는 네 근원과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 지금의 네 모습을 보아라! 얼마나 왜곡되고 비뚤어졌는지, 태초의 그 느름했던 모습이 온데간데 없지 않느냐. 그러니 이제라도...」
{그러니까 당신께서 고집을 조금만 꺾으시면 해결될 일 아닙니까! 나를 흉칙한 악령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바로 당신인 겁니다!}
네타-볼크투스가 그녀의 마음에 대못을 박는 그때, 이 사태의 해결사가 유유히 등장했다.
“버르장머리가 없군.”
{?!}
“너 같은 녀석 때문에 호래자식이란 단어가 생긴 거다.”
{어, 어떻게!}
정령들의 생활터전인 이면세계는, 다른 표현으로 행성의 심상세계였다. 즉 행성의 의지가 허락하지 않고선 아무나 쉽게 진입할 수 없는 영역이란 의미였다.
{서, 설마!}
더욱이 지금은 강제침입의 기미조차 없었으니, 이 상황에서 네타-볼크투스가 내릴 수 있는 가정은 딱 한 가지뿐이었다.
{새로운 정령왕을? 벌써...?}
「......」
그는 또 한 번 버려졌다는 배신감에 휩싸여 부르르 떨었다.
{이렇게까지... 이렇게까지 절 밀어내시는 겁니까? 당신의 탄생부터 줄곧 함께 해온 나를, 그것도 같잖은 벌레들을 감싸기 위해서...?}
끔찍스러웠던 그의 애정은 같은 크기의 증오로 변했다. 그렇게 아스테라에 대한 마지막 신뢰마저 무너진 그의 외관이 기괴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 우드드드득...
원귀들의 생김새가 살아 생전과 매우 다른 것처럼, 기본 정체성이 분노와 미움으로 대체된 영적 생명체의 모습 또한 그렇게 변질되는 것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
행성과의 연결고리가 뚝 끊어진 네타-볼크투스가 끝끝내 지성을 상실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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