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은 성공, 실패는 반란의 역사 (5)
- 드륵, 드륵, 드르르르르....
그리고 이렇게 수직 낙하한 근 900kg의 무게추는, 단단하게 고정된 도르래들을 통해 지렛대를 엄청난 힘으로 밀어붙이는 원동력으로써 작용했다.
- 부우~웅~!
동쪽 성벽에서 300m 떨어진 숲 속에 설치된 트레뷰셋은, 밧줄이 둘둘 감긴 바위 약 150kg, 그 위에 자리 잡은 루카스 약 150kg. 도합 300kg의 투사체를 미친 듯이 하늘 높이 쏘아 올렸다.
- 슈웅-! 휘익-, 휘이이이이이...
성벽이 아닌 성 위의 허공으로 향해 쏘아진 루카스의 귓가에 공기저항이 재잘거렸다.
하지만 날카로운 그의 눈동자가 사무청 앞마당에 임시로 설치된 처형장을 찾아낸 순간, 그 바람의 속삭임은 어느 관리의 선포를 시작으로 철저히 파묻혀버렸다.
"모든 영지민들은 들으시오! 우리의 위대하신 국왕 데이미언 멀린스 3세께서 크리스 레벨티오의 반역행위에 대해 최종판결을 내리셨소! 이제 흉악한 죄에 대한...(하략)..."
수많은 인파 사이에 숨어있는 프레드릭과 테리나의 마음속에 온갖 갈등이 교차했다.
"아아..."
"참아라. 아직은 참을 때다, 테리나."
"그치만..."
동생의 돌발행동을 만류하던 프레드릭이라고 하여 속이 까맣게 타 들어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는 당장에라도 사무청 2층으로 뛰어올라, 몇 겹의 마나 장막을 믿고 히죽히죽 구경중인 휠러 백작의 머리를 손수 따버리고도 싶었고, 제대로 설 기운도 없어서 질질 끌려 나오는 몰골의 아버지를 병사들에게서 구해내고도 싶었다.
그러나 순간의 충동을 못 이기고 어설프게 나섰다간, 이 처형장 곳곳에 어렵사리 숨어든 동료들과 수하들까지 발각시킬 위험까지 감내해야 하므로 필사적으로 화를 삼켜야 했다.
"루카스 님께서 시작을 알리시기 전까지 어떻게든 참아라. 기회는 반드시 올 거야."
"...알았어."
이 남매의 심장 떨림을 아는지 모르는지, 언뜻 보기에도 무딜 대로 무딘 사형집행자의 도끼날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현재 잘 벼려진 프레드릭 남매의 결의와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죄수를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임으로써, 개인적인 화풀이와 더불어 다른 영주들에게 명확한 경고의사를 전달하겠다는 휠러 백작의 뻔한 수작질 반영된 것임에 틀림없었다.
상관으로부터 추가명령을 하달 받은 병사들이 크리스 자작의 머리를 거칠게 잡아당기며 그의 목을 고정시켰다.
- 스윽.
이윽고 훨러 백작이 2층 창문을 활짝 열어 군중을 향해 오른팔을 쭉 뻗으며 그의 엄지를 땅바닥을 향해 떨궜다. 그러자 좀 전까지 왕의 교지를 낭독했던 수하가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외쳤다.
"사형을! 집행하라!"
삶의 마지막 풍경을 눈에 담고자 했던 크리스 자작의 흐린 초점이 공교롭게도 테리나의 눈동자에 닿았다.
"테... 테리... 나..."
"...아...아빠... 아, 안 돼!!!"
살기등등한 사형집행인의 도끼가 원만한 궤도를 그리려 할 때였다.
- 땡! 땡! 땡! 땡! 땡! 땡!
동쪽에서 울려퍼진 경종소리가 집행자의 다음 행동을 멈춰 세웠다.
"저, 저, 저! 저기!"
"왜, 왜? 무슨 난리야?"
호기심에 종소리를 쫓아 하늘을 바라본 사람들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던 큼직한 투사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 휘이이이이이...
더불어 엄한 지점으로 추락하는 바위를 박차고 사형장을 향해 이중 도약하는 루카스 또한 목격할 수 있었다.
- 쾅-!
0.1톤이 넘어가는 돌덩이가 어느 불운한 창고와 부딪치며 발생한 파괴음이 매서웠다.
"꺄아악~."
그 때문에 군중 일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바짝 움츠렸는데, 안타깝게도 이렇게 담력이 허약한 이들은 이후에 벌어진 좋은 구경거리를 보질 못했다.
- 스악~! 피리릭!
루카스는 착지와 동시에 정글도를 휘둘러 사형집행인의 목을 날렸다. 또한 그와 동시에 휠러 백작을 향해 단검을 투척했다.
- 따앙-!
정말로 찰나의 속도였다. 표면이 누렇게 보일 정도로 겹겹이 펼쳐진 보호막이었지만, 억센 힘을 품은 단검에게 있어선 특별한 장애가 되질 못했다.
- 콰곽!
그러고도 여력이 어찌나 널널하게 남았었던지, 휠러 백작의 목을 통과하여 뒤편 벽마저 깊숙히 파고 들어갔다.
"크엌!"
바람구멍이 뻥뚫린 마법장벽이 흐물흐물 흩어졌다. 그렇게 마법이 걷히자 본인의 목을 부여잡고 괴로워 떠는 휠러 백작의 그림자가 매우 선명해졌다.
"...어거거거거거!"
손등 타고 꿀렁꿀렁 넘치는 피가 이미 폐까지 스며들었는지, 휠러 백작은 버둥버둥 대며 막혀버린 숨통에 꺽꺽 댔다.
"으으으으... 으으욱!!!"
결국 벽에 기대려다 발을 헛딪은 휠러 백작은, 그만 중심을 까딱 잃고서 창문 밑으로 추락했다.
- 쿠웅-!
머리부터 떨어졌기에 목이 기괴하게 틀어진 채로 즉사했다.
"""........."""
좌중은 먹먹한 침묵에 잠겼다. 이 모든 게 눈꺼풀을 몇 번 끔벅끔벅할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이라 그런지, 여인들조차 비명 지를 정신머리가 없었던 것이었다.
- 툭, 툭.
이 사이 루카스가 옷의 먼지를 털고 천천히 자세를 올곧게 고쳐 잡았다. 그리곤 주먹을 높이 치켜들고 우렁찬 함성을 질렀다.
"로벨리아!!!"
그제야 비로소 정적이 깨졌다.
"저 암살자를 잡아라!"
"생사는 관계없다!"
"포위망을 펼쳐라! 어서!!!"
호위에 실패한 경호원들과 기사단장이 크게 식겁하여 휘하 병력들을 닦달했다. 만일 이대로 휠러 백작을 죽인 살해범을 놓친다면, 이후에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건 바로 자신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간과한 점이 두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루카스가 도망갈 생각이 없었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가 이렇게 백작의 모든 병사들이 사형장을 원형으로 빙 둘러가며 빽빽히 에워싸게끔 가만히 놔둔 일 또한 의도됐다는 것이다.
- 와아아아아-!!!
수로를 통해 사전 침투해 있었던 레벨티오의 잔존병력들이 갖가지 무기를 찾아 들며 일제히 몰려왔다. 졸지에 휠러 백작의 병력이 둘러싸인 형국으로 돌변했다.
"투항해라! 지금 투항하는 자의 목숨은 살려주겠다!"
최선두에서 칼을 빼들고 이들을 지휘하는 캐서린의 기세와 위풍당당함은 저항군 중에 단연 으뜸이었다.
"뭐, 뭐, 뭐, 뭐야?! 저것들이 어디 숨었다가 튀어나온 게야?!"
휠러 백작 측 수뇌부가 당황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어느 샌가 루카스의 손에 들린 사형집행자의 무딘 도끼가 병력을 통솔하려는 자들의 두개골을 터트리고 다녔던 것이다.
"아, 안 돼!"
- 콰직!
힘의 과시로 병력수의 열세를 메꿔 낸 루카스는, 레벨티오 반란군의 독기를 한층 끌어올리고자 다시 한 번 선창했다.
"로벨리아!!!"
이미 감정이 고양될 대로 고양된 군사들이 그의 외침에 열렬히 호응해왔다.
"로벨리아, 씨슬(Thistle)!"
"로벨리아, 씨슬!"
"로벨리아, 씨슬!"
씨슬(Thistle, 엉겅퀴)의 꽃말은 '독립'.
원망이란 뜻의 로벨리아와 독립이라는 꽃말을 엮어 만든 저항군의 구호가 이곳 저곳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독립을 위하여! 자유를 위하여!!!"
"우리에게 독립과 자유를!!!"
용기가 분천(噴泉)한 소수의 병력이 지휘부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대군을 거침없이 몰아붙인 역사가, 바로 이 레벨티오 영지에서도 똑같이 쓰여져 내려갔다.
"잘 참았다, 테리나. 우리도 가자!!!"
"응!!!"
그리고 그 역사의 중심엔 루카스와 레벨티오 일족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로벨리아!!!"""
"""씨슬!!!"""
* * * * *
휠러 백작의 병력을 패퇴시키고난 이틀 뒤 아침. 크리스 자직이 드디어 깨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루카스가 그의 방을 찾았다.
"조금 더 안정하셔야 해요."
"난 괜찮소, 캐서린."
때마침 하녀가 방문을 활짝 열고 피 묻은 헝겊뭉치를 가득 들고 떠나간 덕에, 루카스는 본의 아니게 자작과 그 부인의 대화를 보다 더 선명히 들을 수 있었다.
"할 일이 산적해 있소. 서둘러 영지의 독립을 공식화해야 하고, 사절단을 적절히 뽑아 주변국으로 파견도 해야 하지. 그리고 무엇보다 데이미언이 정규군을 움직이기 전에 참여의사를 추가로 밝혀온 영주들과의 방어선 연계를..."
"아휴! 그만, 그만요! 당신은 회복에만 집중해요! 업무는 일단 우리 아이들에게 맡겨둬요. 각기 제 몫을 충분히 해낼 수 있다니까요? 지금도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요."
"...후훗, 그 고물고물한 녀석들이 어느새 다 컸구려."
- 똑. 똑.
"어머, 오셨습니까?"
캐서린은 예의상 방문을 두드리고 있던 루카스를 발견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자, 이쪽에 앉으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당신은 이제 건강합니까?"
가까스로 벽에 기대어 앉은 크리스 자작이 싱긋 웃으며 이 물음에 농담조로 대답했다.
"의사의 이야기론 후각은 잃었고, 손가락 몇 개는 마비됐으며, 앞으론 걷을 때마다 지팡이에 의지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 외엔 별다른 지장은 없다고 들었습니다."
"......"
"하하하! 죄송합니다. 표정을 보니 제 장난이 과했군요! 은인께서 다 죽다 살게 된 제게 건강하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충분히 건강한 것 같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으하하하!"
"고문 잘 견디셨습니다. 대단합니다, 당신의 의지."
"부탁 드리건대, 제가 은인께 감히 악수를 청해도 되겠습니까? 보시다시피 제 몸이 이 모양이라서... 하하하."
"물론입니다."
크리스 자작은 선뜻 다가와 내민 루카스의 손을 양손으로 꾹 맞잡았다. 비록 뻣뻣하게 굳어 마음처럼 접혀지지 않는 손가락이 절반이었으나, 그 나머지 절반에서 느껴지는 뜨거움은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목숨을 비롯해서 아주 많은 것을 빚졌습니다. 거듭 감사 드립니다, 루카스 님."
"나는 의뢰를 받고 움직였습니다. 그 뿐입니다."
"음... 저희가 아무리 붙잡아도 떠나시겠지요?"
"그렇습니다."
캐서린 뿐만 아니라 크리스 자작 역시 루카스가 지금 이별을 고하러 왔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필요하신 경우가 생기면 언제고 저를 찾아주십시오."
"나는 당신에게 미리 고마움을 표현합니다."
크게 아쉬워하는 크리스 자작을 향해, 이번엔 루카스가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떠나기 전에 문득 궁금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과 의문입니다. 나는 가볍게 묻고 싶어서 여기에 왔습니다."
"뭐든 물어보십시오."
"얼마나 성공할 것 같습니까, 기존과 다른 체계를 이 땅에 정착시키는 것?"
"?"
크리스 자작이 보기에 루카스는 말뜻도 이해 못해서 물어보는 눈치가 아니었다.
하루 아침에 급변한 지배구조와 체계로 인해 민중의 삶이 어수선해지는 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수순.
때문에 자작은 루카스가 진정 우려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지레 읽고서 호쾌한 웃음부터 터트렸다.
"하하하, 대강 이해했습니다. 먼저 답을 드리면, 새로운 체계도 종국엔 실패하게 될 겁니다."
"......"
"시간이 많이 흐르면, 이 체계 또한 어떤 식으로든 썩어 들어가겠죠. 오늘날의 카타티니처럼 말입니다."
가만 듣고 있던 루카스의 고개가 갸웃했다.
"그럼 왜 합니까? 그냥 당신이 왕하면 안 됩니까? 그러면 혼란은 없습니다."
"음... 혼란이 아니라 변화입니다. 제대로 자리만 잡히면 당장은, 그리고 다음과 그 다음 세대까진 사람들이 덜 굶주리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 이후는 생각 안 하는 겁니까?"
"하하, 이런 이런. 루카스 님께선 저를 굉장히 과대평가하시고 계셨군요! 제 목표는 천년 대계가 아니라 딱 거기까지 입니다. 그 이후엔 그 시대의 사람들이 스스로 알아서 궁리할 일이지요."
"...그렇군요."
"물론 미래 후손들도 알아서 잘 해내리라 굳게 믿습니다."
"?"
"사람은 한번 맛본 달콤함을 쉽게 잊지 못합니다. 자유를 만끽한 대중 또한 마찬가지겠지요. 어디까지나 제 목표는 밭에 거름을 먹이고 씨앗을 뿌리는 데까지입니다."
이 대답에 인간 시절의 기억을 가만히 더듬어본 루카스는 그제야 무언가 깨닫고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이제 조금 알아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당신 덕분에 나는 새로운 관점을 배웠습니다."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그리고 이해도 충분하게 가졌습니다, 여제 같은 캐서린 부인이 당신의 어떤 면에 빠졌는가를 말입니다."
크리스가 루카스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아내 캐서린은 뜬금 없는 칭찬이 몹시 부끄러운지 얼굴을 잔뜩 붉히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아하하하핫!"
"크리스 자작, 처음 내 계획은 이대로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하룻밤 더 당신과 차를 나누고 싶습니다."
"아이쿠,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서둘러 부탁하오, 캐서린. 루카스 님께서 앉으실 의자와 요기거리 좀 준비해주시겠소?"
"예, 기꺼이."
그들의 대화는 시간의 흐름도 잊고 저녁 늦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루카스의 방을 찾은 하녀는 가지런히 정돈된 침상 위에 쪽지를 발견하고 주인에게 전했다.
【 친애하는 크리스 자작. 나는 당신에게서 많이 배웠습니다. 당신의 남다른 관점과 희생정신에 나는 박수를 보냅니다. 감사합니다. 당신의 친구, 루카스로부터. 】
비록 초보자의 삐뚤빼뚤한 글씨였으나, 그래도 진심 어린 의미를 전달하는 데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 작가의말
.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