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유발자 (2)
* * * * *
- 우릉... 우르르르...
첨탑 내부에 불규칙한 진동과 소음이 끊이지 않았다. 탄성과 강도가 나무랄데 없는 두꺼운 외벽이 외부 충격을 대부분 흡수할 터인데도 불구하고, 듣는 이의 신경 자극하는 굉음은 점점 더 커졌다.
"이 무능한 것들!"
어느 피폐한 몰골의 마족에게서 권능을 추출 중이던 모디얼이 결국 행위를 중단했다. 그는 2인 침대 크기의 작은 돌제단에서 내려오며 인근 친위대에게 짜증을 터트렸다.
"이게 얼마나 섬세한 작업인지 모르나?! 능력의 손실 없이 뽑아내는 데엔 상당한 집중이 필요하단 말이다!"
"죄, 죄송합니다. 군주님."
"죄송해? 그렇게 죄송하면 그 망할 침입자의 목을 잘라와!!!"
"예!"
군주의 신경 거슬려서 이로울 게 없음을 잘 아는 친위대원들이 크게 대답하며 서둘러 물러가려 할 때였다.
"구, 군주님!"
오른 팔과 날개가 절반 이상 잘려나간 타락천사 하나가 모디얼의 작업장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는 발이 꼬여 넘어질 뻔 했으나, 주위의 도움을 받아 휘청였던 중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보, 보고 드립니다!"
"이제야 침입자를 제압한 건가? 대체 그 놈 정체가 뭐였기에 이 소란이 일어났느냐?"
"그, 그게 아직... 그보다 자리를 피하셔야 합니다. 군주님."
"......뭣이?! 그 무슨 헛소리냐?!"
"이곳 첨탑 인근의 경비대가 모두 당했습니다."
"......"
"잔여 병력이 현재 입구에서 간신히 저지하곤 있습니다만 그것도 시간문제입니다. 침입자가 당도하기 전에 어서......"
"뭐가 어쩌고 어째?!!!"
심각한 발작처럼 흥분해버린 모디얼이 손을 뻗자, 지금껏 고통을 억누르며 또박또박 아뢰던 근위병의 머리가 일순간 우둘투둘 부풀어 올랐다.
"크으으으! 아아악!!!"
병사가 몸서리치며 절규했지만 모디얼은 끝내 압력을 견디지 못한 풍선과 같은 그의 머리를 인정사정 없이 터트려버렸다.
- 푸-확-!
그렇게 흩뿌려진 잔재와 허탈하게 남겨진 그의 몸뚱이는 천천히 부스러지며 재로 화했다.
비록 육신의 생명활동이 정지됐을지라도 영혼만 어떻게든 건사했다면 먼 훗날 언젠가는 부활할 수 있었을 테지만, 이후 아무런 조짐이 발생하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성난 모디얼의 술수는 이 병사의 영혼까지 괴사시킨 게 틀림없었다.
'차라리 잘 됐어. 이참에 아랫것들에게 위대한 군주의 위엄을 다시 각인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는 왜곡된 욕망을 따라 사납게 웃으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표정엔 최근까지도 틈만 나면 강탈해왔던 권능을 겸사겸사 시험해보려는 그의 의중마저 담겨 있었다.
"이 쓸모 없는 것들! 내가 직접 처리할 것이다!"
입에서 불호령을 토해낸 모디얼의 신체가 곧바로 기이하게 변형되기 시작했다.
* * * * *
- 쾅-! 덜컹! 덜컹!
금방이라도 뜯겨져 나갈 것만 같았던 첨탑 입구가 또 다시 스스륵 말끔하게 복원되었다. 아마도 고위마족을 주 대상으로 하여 설계 건축된 감옥이니 만큼,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것 같았다.
{어쭈? 상당한데? 적당히 해선 뚫을 수 없다 이건가? 구조도 모르니 샛길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좋아, 그럼 이번엔 제대로 한 방 날려야겠다!}
이런 루카스의 투덜거림과는 달리, 맞은편에서 버티는 입장에선 아주 죽을 맛이었다. 힘으로 혹은 마법을 덕지덕지 남발하면서 간신히 틀어막고 있는 병력들의 피로도는 이미 한계치에 다다른 상태였다.
- 고오오오오......
'...맙소사!'
어느새 진득하게 높아진 마력이 루카스의 대검을 중심으로 요동쳐댔다.
'이, 이건 빗맞아도 죽는다!'
응축된 양만 어림짐작해도 좀 전의 2배. 특히 마력흐름에 눈이 밝은 자들은 이미 사색이 된 상태였다.
- 쿠웅. 쿵. 쿵.
"...군주...님?"
영멸을 피하기 위해 허겁지겁 손을 쓰기 바빴던 그들의 눈이 어느덧 뒤편 가까이 다가온 모디얼을 발견했다. 그런데 만반의 준비를 마친 그들 군주의 행색이 평소와 많이 달랐다.
{크흐흐흐흐...}
제니티아도 그랬듯이 마계로 떨어진 타락천사의 대부분은 날개 달린 인간모습에 가까웠다. 비록 피부와 신체 일부가 마계의 역한 저주와 환경 탓에 흉악하게 변질되긴 했어도 말이다.
그런데 오래간만에 본연의 형상을 드러낸 군주는 인간형과는 확연히 거리가 멀었다. 약 33.5m가 넘는 몸집에 고릴라처럼 팔이 비정상적으로 길었으며, 거기에 머리 위로 돋아난 2쌍의 큰 뿔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무리한 권능이식의 부작용이 원인일 것으로 추측되는 모디얼의 생김새는 한 마디로 더 이상 타락천사라 불리기 힘들었으며, 전체적으로 마족이 아닌 이족보행 마수라 일컫는 편이 더 적합해 보였다.
- 탁, 타악. 탁.
"서, 설마..."
"튀어!!!"
모디얼이 몸을 한껏 웅크려 돌진 자세를 취하자, 군주의 의도를 알아차린 경비병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양 갈래로 나뉘어 부리나케 몸을 뺐다.
- 파직! 뚜두둑... 쩌저적...! 콰광!!!
때마침 루카스에게 공격 받은 출입문이 형태를 잃고 아주 박살이 났다. 그리고 현 군주 모디얼은 그렇게 문짝 파편들이 온사방으로 퍼지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 투-앙-!
미리 자세를 단단히 잡고 있던 그는, 쏘아 놓은 마력탄환처럼 몸을 튕겨 루카스에게 직격했다.
{크흡!}
- 쾅! 콰앙! 쾅!
충돌음만 들어도 예사소리가 아니었다. 부하들에게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려는 모디얼의 강한 일격은, 루카스의 몸뚱이를 성채 외벽을 그대로 뚫고선 지금은 무력화되어 사라진 결계선 바깥으로 무참히 날려버렸다.
- 쿠콰과과과......!
{크하하하하하!}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큰 웃음 빵 터트린 모디얼이 이것으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는 것에 있었다.
{모처럼 나선 김에, 이 나의 위대한 마법도 구경시켜주도록 하지.}
- 펄~럭~.
건축물 밖으로 나온 모디얼은 체구보다 큰 까마귀 날개를 펼쳐 하늘 높이 솟았다. 그리곤 어느 수준의 고도에 이르자 그는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 팟! 우웅~, 우웅~, 우우웅~.
제각각 다른 색을 지닌 마법진 7개가 생겨났다. 이 약 15.2m의 대형 마법진들은, 책상 위에서 동전 돌리는 것처럼 팽그르르 회전하면서 그를 중심으로 천천히 둥근 원을 그리며 맴돌았다.
{크흐흐, 일단 기본적인 마력탄환부터.}
그의 의지에 따라 두둥실 앞으로 나온 흰색 마법진이 그와 같은 크기의 하얀 구체를 끝도 없이 토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루카스에겐 모디얼의 마탄들이 꾸물꾸물한 하늘을 수놓으며 모디얼이 원하는 개수만큼 불려나갈 때까지 방관하는 취미 따윈 없었다.
- 콰릉!
이내 모디얼의 선공으로 먼지 폴폴 일었던 지표면에선, 굉음과 동시에 검은 형상이 거세게 치솟았다.
{훗, 정말 단순하군. 어쩜 이토록 예상대로...! 흐흡...!}
가소롭다는 듯이 모디얼이 침착하게 대응했지만, 그가 너무 교만했던 게 탈이었다. 성채의 결계마저 뚫어버린 루카스의 힘은 모디얼의 방어막을 우습게 찢고서 그의 목을 노렸던 것이다.
- 쓰각! 퍼억!
{컥!}
모디얼의 필사적인 회피한 덕에 루카스의 일격은 고작 그의 자랑스런 뿔 하나를 자르는 것에 그쳤으나, 곧바로 회전력을 이용한 발길질을 이어감으로써 그를 대지에 처박는데 성공했다.
'이대로 끝낸다!'
루카스의 신형이 다시 한 번 하늘을 박차며 무섭게 하강했다. 그런데 좀 전의 공격으로 뜨악한 모디얼의 반격 역시 만만치 않았다.
- 투두두두두!
- 까가가가강!
없어지지 않고 산재 돼있던 흰색 마력탄부터 그를 추격했다. 루카스가 무기를 이용해 그것들을 모조리 쳐냈지만, 그가 고개 돌린 지면 위에선 대지 자체가 격동하기 시작했다.
- 콰아아아-!
뻗어 오른 암벽을 루카스가 보기좋게 반으로 가르며 하강했다. 하지만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절단면에서 송곳같은 바위기둥들을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뿜어나오며 공격했다.
물론 그런다고 루카스의 돌진 자체를 저지하는데엔 모자랐으나, 모디얼이 다음을 준비할 시간벌이용으론 충분한 역할을 해냈다.
'이런... 씨...!'
다시 루카스의 시야에 포착된 모디얼은 이미 또 2개의 마법진을 활성화시킨 상태였다. 그가 용의 숨결처럼 머금었던 마력를 한데 겹쳐놓은 마법진들 사이로 연이어 통과시키자, 그것은 거대한 용암 줄기와 같은 모양새로 돌변하여 루카스를 덮쳤다.
- 쿠아아아아아-!
과연 모디얼은 타락천사들의 군주 자리에 앉을 법한 마족이었다. 그가 완성해낸 공격에선 최초의 마룡인 알베른의 마력숨결조차 한 수 접을 법한 강렬한 열기가 느껴졌다.
{끄으으으음......}
만일 루카스가 대악마의 권능을 일정수준으로 개화시키지 못했더라면, 이대로 치명상과 함께 승패가 갈렸을 것이다.
더불어 만약 그의 손에 루치펠의 유산인 포르투스 클라베스가 들려 있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쯤에서 무기를 잃고 한발짝 물러나 다른 공격방법을 강구해야 했을 것이다.
{...이... 염병할 마귀 새끼가...}
그러나 오늘날의 루카스는 어떤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네놈만은! 반드시!!!}
한 마디로 현재 그는 모디얼의 마법을 견딜 수도 있었거니와, 나아갈 수단 또한 가지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아!}
- 푸화확-!
{...아, 아니?!}
모디얼은 루카스가 내지른 한방에 자신의 마법이 바위에 닿은 물줄기처럼 여러 갈래로 분사되는 현상을 보곤 아연실색했다.
{새파란 놈이 어딜 감히!!!}
몹시 다급해진 그가 남은 마법진 3개를 연달아 쓸어모으며 이어지는 루카스의 돌진에 대비코자 수를 썼다.
또한 여력을 남겨뒀던 조직변이와 육체강화 권능을 완전히 사용했다. 이로 인해 그의 피부는 뒤집어지듯 용비늘처럼 변했으며, 팔에 환도의 칼날 같은 가시가 곡선으로 폭넓게 돋아났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모디얼은 루카스가 자신이 새로 구축한 방어선을 격파하느라 잠시 느려질 그 순간을 독사처럼 노리며 기다렸다.
- 팟!
하지만 놀랍게도 마력숨결을 거칠게 상쇄해오던 루카스의 돌격궤도가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으헛?!!!}
모디얼이 허상이라고 착각했을 만큼 빠른 공격이었다. 최후의 방어막을 매끄럽게 타고 좌측상단으로 우회했던 루카스의 대검이 모디얼의 좌측 어깨부터 대각선으로 낙하한 것이다.
- 콰직!
이 일격으로 허파에 바람구멍이 난 모양인지, 모디얼은 비명 대신 처참한 헛바람부터 삼켰다.
{허흡! 이... 이놈... 내가... 누군줄 알...!}
두 눈 부릅뜨며 호통치던 모디얼은, 어느 순간 자신의 남은 뿔 중 하나를 움켜잡은 차가운 손길을 느꼈다.
{?!}
- 뚜드드드득!
{끄허허허엌!}
루카스는 우악스럽게 뜯어낸 큰 뿔을 모디얼의 심장 부근에 말없이 가져다 댔다.
이미 대검을 통해 손상이 심할 것이라 추측됐지만, 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모디얼의 영멸. 때문에 목표달성 위해선 무엇보다 기타 회복이나 재생 등등으론 어찌할 수 없는 죽음에 이르게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사, 살려..다오! 난... 흐업... 난 네가... 누군지도... 모른다.}
말뚝으로 사용될 본인의 뿔만으로 루카스의 의도를 깨달은 모디얼이 최선을 다해 애원했다.
{타인의... 권능을... 이식하는... 허헉... 방법을... 알려주겠다... 흐흡... 그러니... 영멸만은.. 부디...}
{전투 중에 말이 많군.}
언뜻 보면 검게 이글거리는 갑주 형상인 루카스에게 표정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의 무미건조한 음성에서 싸늘한 감정을 쉽게 추론가능했다.
{마, 망할... 유리아나의... 권능만... 빼앗았어도... 이깟 상처 따ㅇ...}
- 콰콱!
{끄으윽!}
- 으직. 으지직.
모디얼의 심장을 후벼파며 파괴시킨 루카스는 곧바로 그의 뇌수마저도 곤죽으로 만들었다. 그러자 모디얼의 신체가 부스스 재로 변하며 곧바로 영체가 빠져나왔다.
- 끼에에에에에-!!!
- 작가의말
.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