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비를 거는 기업들 (4)
시비를 거는 기업들 (4)
“저를 찾아오셨다고요?”
“그렇네.”
“무슨 일로 오신 거죠?”
“우리 딸을 보기 좋게 물 먹였다고 해서 어떤 놈인지 얼굴이라도 볼까 하고 찾아왔네. 한데 이렇게 박대당할 줄은 몰랐어. 나를 기다리게 한 대가는 치를 각오하고 한 행동이겠지?”
“제가 어르신에게 이곳까지 와주십사하고 부탁드린 적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갑자기 찾아오셔서 이러시면 곤란하십니다. 후배 양성에 모범을 보이셔야 할 분이 까마득한 후배를 앞에 두고 이런 핍박이나 주시는 것을 타인이 알게 된다면 어르신의 명성에 누가 되실 겁니다.”
“어르신? 어디서 건방이에요?”
이건호 총수가 손을 들자 이수연은 바로 말을 끊었다.
“그렇다면 선배 예우를 좀 해주지 그랬나?”
“설마 1시간을 기다리셨다고 마음 상해 있는 건 아니시겠죠? 그렇다면 더더욱 실망입니다. 원래 3조짜리 회의였는데 어르신으로 인해 2조를 날리고 이 자리에 나온 겁니다.
저희 같은 조그만 기업에서 2조가 얼마나 큰 돈인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갑자기 찾아오셔서 이 정도는 양해해 주셔야죠? 세계 최고 기업을 운영하셨던 분이 이렇게 쪼잔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내 1시간이 자네의 2시간보다 더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십니다. 저는 전쟁터 한가운데서 싸우고 있는 군인이고 어르신은 전쟁터에서 벗어나 보급이나 맞고 계시는데 어떻게 같은 시간을 소비했다고 말씀하십니까?”
“화려한 언변으로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은 하지 말게.”
“어렁뚱땅이라뇨? 지금 저는 전쟁터 한가운데에서 계란을 들고 바위를 깨려 하고 있습니다. 목숨을 걸었단 말입니다.”
내 눈빛이 지금까지와 다르게 변한 것을 본 이건호 총수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자네와 이야기를 나눠보니 내 딸이 뭘 잘못했는지 알겠구먼. 역시 온실 속에 화초로 자란 우리 딸이 대하기엔 자넨 너무 거칠어.”
“역시 최전방에서 싸우셨던 경험이 많으셔서 그런지 바로 이해해 주시는군요. 역시 어르신을 잠시나마 좀생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은 취소해 드리겠습니다.”
“아주 사람을 가지고 노는구먼.”
“그런 재주는 없습니다. 한데 정말 이곳에는 왜 오신 겁니까? 설마 삼별 전자를 저에게 파시려고 오신 건가요?”
“내가 팔겠다면 사줄 돈은 있는가?”
“10년 상환 조건이라면 사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제가 큰 손해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3년이면 삼별 전자보다 더 큰 회사를 만들 수 있는데 굳이 부채까지 떠안으며 삼별 전자를 가질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자네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건 아닌가?”
“무일푼으로 시작해 3년 만에 30조를 만들었습니다. 이 정도면 과소평가 아닐까요?”
“대단하군. 그럼 내가 자네 기업을 200조에 사겠네”
“그럼 팔겠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200조 안에는 제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럼 내가 손해 보는 장사지 않은가? 자네의 스승이 누군가?”
“천재에겐 스승이 필요 없죠. 어르신도 천재 경영론으로 지금 그 자리에 오르신 게 아닙니까? 한데 어르신의 아드님이 이끄는 삼별은 천재를 너무 배척하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로 인해 제가 그 천재들을 흡수하고 있으니 천만다행이죠. 삼별에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저에게는 참 좋은 일입니다.”
“내 멍청한 자식들보다 훨씬 낫군.”
“과찬이십니다. 어르신의 천재 경영론에 부합되려면 천재를 이끄는 사람도 천재여야 하는데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이번 기회에 한국 최초로 전문 경영인에게 회사를 승계해보시는 건 어떠신가요?
사회에 모범도 보이고 아드님이 운영하는 삼별보다 훨씬 더 발전한 삼별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말입니다. 자식들에게는 어르신이 가지고 계신 자금만 내주셔도 평생 놀고먹을 수 있잖습니까?”
“내가 밀어줄 테니 자네가 삼별 기업을 이끌어 보는 것은 어떤가?”
뒤에 서 있던 이수연 사장이 너무 놀라 입을 막았다.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싫습니다.”
“이런 기회가 흔하게 오는 것은 아니네. 정 뭐하면 우리 딸과 결혼시켜주지.”
“전 아직 20대 중반입니다. 30대 초반이라곤 하지만 연상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잠시 이수연 사장의 얼굴을 쳐다보다 다시 말했다.
“거기다 지금 뒤에 계신 따님 얼굴이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원래 남녀관계라는 것이 자주 만나다 보면 좋아지기 마련이네. 아직은 내 철없는 딸이 세상 물정을 모르고 보는 눈이 어두워 자네를 못 알아보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혜안이 열릴 거야. 어떤가? 내 제안이?”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3년이면 지금 키우고 있는 이 회사로 삼별 전자를 앞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내부의 적을 만들면서 삼별을 이끌고 싶지는 않습니다.”
“자네는 내 멍청한 자식들과는 아주 다르군. 역시 천재라는 건가? 내 멍청한 자식들은 본인들이 만들어 갈 생각은 하지 않고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뺏으려고만 생각하는데 말이야.”
“아직 한국은 집안싸움을 하지 않고도 더 많은 물건을 판매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집안싸움까지 해가면서 뺏으려고 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죠.”
“그 자신감과 패기로 인해 그 자리까지 온 것이겠지? 하지만 이 나이까지 살아보니 그 자신감과 패기가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온다네.”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뚫고 지나가면 그뿐입니다. 그런 것이 무서웠다면 이 자리까지도 오지 못했습니다. 모든 일은 인간이 하는 것입니다. 이것만큼 진리도 없죠.”
“맞는 말이네. 자네 보면 볼수록 내 맘에 쏙 드는군. 난 그 독을 피하려고 40년을 허비했네. 하지만 결국 내가 만든 독에 내가 걸리고 말았지. 내가 만든 그 독을 피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겪어봐서 잘 아네.”
“어르신의 충고 잘 새겨듣겠습니다. 하지만 전 돈이 인생에 전부가 아니거든요. 인생의 모든 것을 돈에 걸기에는 이 세상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런 감성적인 말을 하는 사업가가 아직도 망하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군. 어디서 천둥벌거숭이가 나타났나 했더니 의외로 즐거운 대화였네.”
“제가 안하무인은 아닙니다. 단지 업무의 효율성을 따질 뿐이죠.”
“그래. 그래도 날 기다리게 한 벌은 받아야겠지?”
“참 뻔뻔도 하시네요. 하긴 그런 뻔뻔함이 있으셨으니 그 자리까지 오르신 거겠죠? 좋습니다. 저에게 1조를 주신다면 저도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무슨 선물을 돈을 받고 팔려고 하는가? 줄라면 통 크게 줘야지.”
“그건 제 마음입니다. 싫으시면 그만두시죠? 전 손해 볼 게 없으니까요.”
“젊어서 그런지 성격도 급하군. 이야기해 보게.”
“삼별 전자에서 개발하고 계신 메모리의 한계를 느끼고 계실 거로 생각합니다. 그 메모리의 마지막 단계 회로도를 드리겠습니다. 그 이후에는 같은 방법으로 메모리의 용량을 늘릴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다른 방법을 찾으셔야 합니다.”
“그 말은 기존 형태가 아닌 다른 형태의 메모리도 만들 수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삼별 전자를 3년 안에 따라잡을 수 있겠습니까?”
“자네가 팔면 큰돈을 벌게 될 텐데 왜 나에게 넘기려 하는가?”
“당연히 제가 만들어 팔고 싶지만, 설비 생산 공장이 없어서 만들 수가 없습니다. 공장 짓는 데만 해도 3년은 걸릴 텐데 언제 그걸 만들고 있습니까? 이래 가지곤 삼별 기업을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찾아오신 어르신에게 선물로 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군요.”
“무슨 생각인가?”
“오늘 아침에 본 신문 기사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는 것 같아서요.”
이건호 총수는 오늘 어떤 뉴스가 나왔는지 기억해봤으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눈에 띌만한 뉴스는 없었다.
“어떠십니까? 제 제의를 받아들이시겠다면 1조만 주시면 됩니다.”
“선물로 준다더니 아주 날강도가 따로 없군.”
“돈도 많으신 분이 푼돈에 집착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리고 1조면 나도 바로 만들 수 없는 큰돈이네.”
“좋습니다. 그럼 주식으로 주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다른 건 필요 없고 삼별 전자 주식으로 1조 원어치를 주시면 됩니다. 유상 증자로 지급해 주셔도 상관없습니다.”
나쁜 계약은 아니었다.
삼별 전자는 주식 수가 아무리 많아도 인수·합병을 할 수 없는 특수 기업으로 분류되어 있다. 그러니 1조 원어치 주식을 준다고 해도 전혀 손해 볼 것이 없었다.
거기다 받는 정보가 진실이라면 매년 수십조 이상의 값어치가 생기는 일이었으니 더더욱 손해 볼일은 아니었다. 그 정도면 한동안 시장을 독점할 수도 있었다.
“자네가 나를 사업에 제일 왕성할 때로 돌려주는구먼.”
“아무리 생각해보셔도 이것만큼 좋은 조건은 없으실 겁니다. 이 회로도에 개발비가 1조는 넘을 테니까요.”
“그래서 하는 말이네. 너무 좋은 조건이라 선뜻 마음이 가지 않거든.”
“정 그러시다면 로열티로 판매 금액에 3%를 더 받겠습니다. 그럼 마음에 드실 겁니다.”
말도 안되는 제시였다. 하지만 이건호 총수의 반응은 달랐다.
“이제야 구미가 좀 당기는군. 그러지 말고 내가 판매 금액에 7%를 채워 10%를 주겠네. 어떤가?”
“마음에 들지 않는 조건이군요. 그러지 마시고 그냥 제가 로열티를 낮춰 2%만 받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대화였다. 싸게 판매하려는 판매자와 비싸게 구매하겠다는 구매자. 돈을 더 주겠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안 받겠다고 버티고 있는 이 상황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뒤에 서 있는 이수연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5%로 하세. 내가 자네를 너무 괴롭히지는 않겠네”
“정 그러시다면 계약서를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만약 계약서 내용에 0.1%라도 저를 괴롭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면 선물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 선물을 줄 곳이 아직도 두 곳이나 더 있거든요”
“잘 나가다가 갑자기 협박을 하는군.”
“아 그렇게 들리셨습니까? 어르신? 제가 거의 거저 드리는 건데 정말 받기 싫으신 줄 알고 말씀드린 겁니다.”
“하여튼 그 말발은 못 당하겠군.”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알았네. 우리 직원이 자네가 원하는 대로 계약서를 작성해 보내줄 거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USB 메모리는 지금 바로 가져가셔도 됩니다.”
“내가 이 USB 메모리만 먹고 돈을 안 주면 어쩌려고 그러나?”
“그럼 정말 선물로 드린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어르신께 빚을 남겨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니 말입니다.”
“오히려 내가 더 부담되는군. 알겠네. 이 건을 최우선으로 처리하도록 지시하겠네.”
“급할 일은 없습니다. 천천히 처리하셔도 됩니다.”
“심심할 때 놀러 오게 내가 박대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야.”
“저도 한 시간씩 기다리게 하시려고 말입니까?”
“하하 설마 내가 그렇게 쪼잔해 보이나?”
“아. 아닙니다.”
“왜 말을 더듬고 그러나. 난 그렇게 쪼잔한 늙은이가 아니라네.”
“네. 알겠습니다. 시간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가끔 놀러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알았네. 바쁜 것 같으니 일보게.”
“네. 알겠습니다.”
회사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이건호가 이수연에게 말했다.
“저자의 이름이 정인이라고 했던가?”
“예 그렇습니다. 아버지.”
“그자가 말한 대로 주식을 1조 어치···.”
이건호는 말을 끊고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말했다.
“시가에 75%로 계산해서 1조 어치를 넘겨주도록 해라. 세금은 우리 쪽에서 처리해 주고.”
“그렇게 많이? 거기다 세금까지 우리가 처리해 주시려고요? 너무 과한 거 아니세요? 아버지?”
후계자가 될 아들이었다면 아무리 자동차 안이라고 해도 절대 용납하지 않을 말투였다. 이수연이 딸이었기에 애교로 봐준 것이다. 이수연도 이 부분을 알고 있었기에 이런 대화가 가능했다.
“넌 아직도 멀었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친구와의 친분을 절대 유지해야 한다. 역사에 한 획을 긋는 큰 인물이 될 거야. 너희들에게는 저자와 동시대에 태어난 것이 슬픈 일이겠지만 다행히도 심성이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는구나. 그러니 그의 역린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든든한 동반자가 될 것이다.”
“그렇게 보셨어요? 그냥 양아치로 보이는데요.”
“그래서 네가 아직 그 자리에 있는 거다. 사람은 절대 겉으로만 판단하면 안 돼. 큰 애에게도 절대 저자와 대치하지 말라고 알려주도록 해라. 그리고 이번 주 신문들 분석해서 저자가 관심을 보일 만한 기사가 어떤 건지 알아보라고 해”
아버지의 말로 인해 얼굴이 붉어졌지만 바로 대답을 했다.
“예 알겠습니다. 아버지”
다음날.
삼별에서 계약서가 도착했다.
추천과 선작은 작가에게 비타민이며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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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보다 재미있는 글로 독자님들을 즐겁게 하는 것
그것 하나만 놓고 글을 쓰겠습니다.
2018년 하시는 일 모두 잘 되시고 대박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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