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시작 (4)
또 다른 시작 (4)
무원 바이러스의 백신으로 인해 시끄러웠던 세상은 점점 잠잠해졌다. 한국은 무원 바이러스로 인해 인구의 5분의 1 이상이 감염되었는데 인구수에 비례해 다른 나라보다 피해가 큰 편이었다.
무원 바이러스 자체가 사람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온몸의 마비로 인해 굶어 죽은 사람들이 속출했고 홀로 사는 노인과 젊은이들이 그 피해 대상이었다. 공식적으로 사망자 수는 수만 명으로 집계됐는데 비공식적으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
특히 저임금으로 목숨을 연명하는 사람들이 무원 바이러스에 노출이 특히 심했다. 감염될 것을 알고 있지만, 생업을 하지 못하면 굶어 죽기에 어쩔 수 없이 일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나라도 국가적으로 무원 바이러스의 백신을 지원하였지만, 한국만큼 빠르지 못했다고 보도되었다.
이로 인해 한국에 새로운 문화가 생겨났다. 바로 옆집 사람과 안부 묻기라는 문화였다.
방송에서는 옆집 사람이 굶어 죽는 것을 우려해 서로가 안부를 묻자고 홍보하였고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옆집 사람들을 챙겼다. 더 큰 피해가 생겼을 수도 있었지만, 이 안부 묻기를 홍보한 덕에 그나마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개인주의가 활성화된 미국과 일본, 중국 같은 경우 수십만에서 수백만 명이 굶어 죽은 것과 비교해 보도되었다.
아직도 굶어 죽은 사람을 찾기 위해 사람들이 돌아다녔고 도시 곳곳에서 죽은 자들이 발견되었다. 정연이가 자는 동안 나는 아버지와 이번 사건에 관해 이야기했다.
“저 하나 살자고 만든 바이러스인데 피해가 너무 크네요. 이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감염 속도가 너무 빨랐어요”
“과학도라면 이런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말아야 해. 1939년 독일에서 발견한 우라늄의 핵분열로 인해 죽은 자들보다 전기를 공급받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다. 과학이란 우리가 원하는 방향과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발전을 시켜 사람들을 편리하게 살게 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죽인 생명체만 해도 수천만이 넘었어. 하지만 실험에 성공하면 나는 그보다 더 많은 생명체를 살릴 수 있게 된다. 그 사명감으로 지금까지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 너도 과학도로 살아가려면 사소한 감정은 버릴 줄 알아야 해”
“인간을 죽이는 게 사소한 감정인가요?”
“너는 김정만이 죽는 것에는 별 반응이 없었잖니?”
“그놈은 나쁜 놈이잖아요”
“그 좋고 나쁨을 인간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그놈이 너에게 몹쓸 짓을 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자연적으로 놓고 본다면 모든 생명체의 죽음은 수천만 종의 생명체들이 살아가게 하는 양분을 만들어 준다. 그 양분을 먹고 자라나 자연 생태계의 기초를 만들지.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고 사는 자연의 원칙대로 말이다. 그들은 그렇게 약육강식의 세계 속에서 자연의 수레바퀴대로 돌아간다.
네가 만든 바이러스는 원래 자연에 있었던 것이고 정말 수천만 분의 일의 확률로 그 둘이 합쳐져 네가 만든 바이러스로 진화했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됐었을 거다. 한 예로 파리 카타콤에 쌓여있는 그 많은 해골에서 AI 바이러스가 발견되었다는 보고서가 올라왔다. 몇백 년에 한 번씩 자연은 바이러스들이 퍼트렸고 그 바이러스들이 이 생태계를 조절했다. 에이즈도 그렇고 AI도 그렇고 에볼라도 그렇고 아주 우연히 발견되어 인간들을 괴롭히고 있지
그것 말고라도 인간들을 괴롭히는 바이러스는 넘치고 넘쳤다. 인간의 관점에서야 바이러스지 자연의 입장에서는 그 존재들이 백신이다.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내가 연구하는 X-288 바이러스에 대해 같이 연구해보자꾸나. 그 연구가 완성되면 더 이상 생명체들은 멸망이라는 단어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지니까.”
“예 알았어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애써 내가 한 잘못을 애써 외면했다.
'그래.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나도 죽을 거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 또한 매시간, 매분, 매초 죽음의 공포에서 떨지 않았던가?
'이런 것에 너무 신경 쓰지 말자'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생긴다 해도 어김없이 살기 위해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처음에는 아버지와 연구를 같이 진행했다.
내가 볼 수 없는 관계로 연구 진행 상황을 아버지가 모두 설명해 주셨다. 그러나 보지 않고 이해하는 데 무리가 있었고 그로 인해 진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한 모든 연구는 아버지의 부탁으로 진행한 것이기에 아버지가 돌아온 이상 내가 그 실험을 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에 나는 시간을 달라고 했다.
다시 시간이 흘러 일주일이 지났다.
그 일주일 동안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누워 있다 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났고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영상을 기억해냈다.
앞을 못 보시던 할아버지가 산에서 거리낌 없이 혼자 사는 장면을 촬영한 것인데 너무 자연스럽게 돌아다녀 신기하다고 느꼈었다.
그 순간 벌떡 일어나 그 영상처럼 내가 지금까지 살던 이곳의 기억을 되짚어봤다.
처음에는 자주 넘어지기도 하였지만, 정연이의 도움으로 점점 범위를 넓혀가며 모든 것들을 기억 속에서 꺼내기 시작했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익숙하기만 하면 이 근처를 돌아다니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다시 한 달이 지났다.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하게 집 근처를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시간 개념도 사라졌다.
옆에서 정연이가 떠들면 낮이고 조용하면 밤이다. 지금 정연이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봐서 밤인 것 같다. 조심스럽게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요즘 들어 점점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든다 하더라도 이렇게 새벽에 깨어버리곤 했다. 어차피 밤이든 낮이든 상관없다. 안 보이는 것은 똑같으니까.
이 시간에 일어나면 할 것이 없다.
눈이 멀쩡했다면 이런 시간이라도 상관없이 뭔가에 집중할 수 있었지만 지금 상태에서 집중할 거라곤 단전 호흡과 명상뿐이었으니까.
아버지와 정연이는 몰랐지만 한 달 전부터 나는 매일 이 시간에 일어나 있었다. 밖으로 나가 새벽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약간은 쌀쌀한 듯하면서 시원한 공기가 폐로 들어왔다.
'기분이 너무 좋은데?
좀 걸어볼까?'
기억력만 흐트러지지 않는다면 일정 거리까지는 혼자 산책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그동안 계속 연습했으니까.
확실히 밤이라 그런지 주위가 조용했다. 기분이 너무 좋아 집과 조금씩 멀어지는 것을 모르고 한 시간이 넘게 걸은 듯하다.
우리 집에서 30분 거리에 아침 해를 볼 수 있는 장소가 있었는데 아마 조금만 더 올라가면 그 장소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예상대로 그 장소에 왔는지 바닥이 바위로 바뀐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해를 보던 방향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전에는 산을 넘어도 땀이 거의 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겨우 이거 걸어왔다고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네. 젠장'
그 자리에 드러누웠다.
'내가 깜빡 잠이 들었나?'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볕이 따가워 잠에서 깨어났다. 내 호주머니에 있던 이어폰을 귀에 꼈다.
처음 택배 물건을 받기 위해 이 산을 넘어 다닐 때 시간이 오래 걸렸고 나는 그 시간이 아까웠다. 그 긴 시간 동안 집에 만들어 놓은 인공지능에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무선 장치를 만들었고 산을 이동하는 동안에도 명령을 내려 정보를 주고받았다.
지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정연이가 걱정하지 않도록 전달해야 했다.
'지금 내가 없어진 것을 알고 찾으러 다니려나?'
무전기의 스위치를 켰다.
그때 이어폰으로 이상한 대화가 들렸다.
“박진성 아들을 감시하라고 붙였더니 쳐 자빠져 잤다고?”
상대가 정연이를 폭행하는 소리가 들렸다.
“죄송합니다. 앞도 못 보는데 이렇게 도망갈 줄을 정말 몰랐어요”
“이 문제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단단히 각오해”
“제발 살려주세요. 앞으로는 절대 이런 실수 하지 않을게요”
“그놈이 도망갔다는 것 자체가 돌이킬 수 없어. 혹시 그놈이 돌아올지도 모르니 지금 당장 너를 죽이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도 없으니 네가 한 실수는 네 동생이 대신 받을 거다”
“제발 그것만은. 그 벌 제가 받겠습니다. 제발 동생만은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이미 이야기는 끝났다. 그놈이 너를 아끼지 않았다면 지금 바로 죽었어.”
“제가 이 아지트를 알려드렸고 3천억도 드렸잖아요? 박진성 박사도 다시 잡을 수 있게 해드렸고요”
“그래서 그걸로 이번 실수를 만회해 보시겠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새끼에게 정보 하나 얻겠다고 마온 제약을 통째로 날려버렸어. 그 회사에서 1년에 벌어드리는 수익이 얼만 줄 알아? 너 같은 년은 상상도 못 할 금액이야.
네가 그 새끼한테 무원 바이러스의 백신만이라도 알아냈다면 지금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줬겠지만, 그 정보조차 대통령에게 넘기는 걸 막지 못했어. 거기가 네가 타고 온 차량에 GPS가 숨겨져 있어서 네가 알려주지 않아도 찾아올 수 있었어. 배신자의 말로는 잘 알고 있겠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그놈은 수천만 명의 너 같은 것보다 소중한 인재야. 지금까지 봤잖아. 그놈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말이야. 그런 놈을 도망가게 만들어 놓고 살려 달라고?”
“지금 나가서 박성민을 찾아보겠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대통령에게 받은 1조면 그놈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젠장. 그 돈을 그놈이 사용하지 못하게 해야 했는데 아직 인공지능 암호조차 풀지 못하고 있으니 참 답답하네.
어차피 그놈이 돌아오지 않으면 이쪽 전문가가 와서 컴퓨터의 모든 정보를 뽑아내겠지. 만약 그놈이 해외로 도망가거나 어딘가에 숨어서 나오지 않으면 너와 네 동생은 바로 죽는 거야. 거기다 죽기 전에 너희가 받아야 할 고통도 잊지 못할 거다.”
정연이는 부르르 떨었다.
“제가 찾을게요.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제가 그를 찾을 수 있어요”
정연이가 밖으로 뛰어나가는 것인지 문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라고 생각했던 놈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그 새끼가 어떻게 알고 도망친 거지? 혹시 이놈의 컴퓨터가 알려준 건가? 볼 수 없을 테니 소리로 알려줬을 텐데. 아니지. 그랬다면 감시하고 있는 우리가 먼저 알았을 거야.
거기다 박진성과 똑같은 얼굴로 성형 수술한 나를 알아챌 수는 없었을 텐데 말이야. 그놈이 있어야 박진성에게 X-288 바이러스에 대한 모든 정보를 넘겨받을 수 있는데 말이야.
그때 좀 더 강경하게 나갔어야 했어. 앞을 못 본다고 너무 안일한 대처를 한 것 같아. 저년이 그놈을 찾지 못한다면 나도 목숨을 부지하기는 힘든데 어쩌지? 그렇다고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나갈 수도 없고. 몇 시간 안 보였다고 내가 너무 조급해진 건가? 혹시, 돌아올지도 모르니 오늘 저녁까지만 기다려보자.”
나는 나 대로 큰 충격을 받아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 젠장. 아직도 끝난 게 아니었잖아? 아버지가 정연이를 조심하라고 한 말이 이거였나?'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결국, 아지트까지 저들에게 노출되고 눈까지 희생해가며 구출한 아버지도 다시 저들의 손에 넘어갔다.
'이미 일어난 일에 고민하지 말자. 그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먼저 생각해보자.'
그러나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모르는 척하고 다시 저곳으로 들어갈까? 산책하다 길을 잃고 헤맸다고 하면 되잖아? 아니야 어차피 그래 봤자 앞으로 나에 감시는 24시간 내내 이뤄질 거야. 그러면 도망갈 방법이 전혀 없게 돼. 눈이라도 보이면 약물을 써서 중독시키면 되는데 눈도 안 보이니.
나에게 도움 줄 사람이 필요한데 내가 아는 사람이 전혀 없잖아? 대통령에게 전화해서 도와 달라고 할까? 아니야 정연이 말대로라면 그 학교라는 곳에서 전문적으로 교육받은 아이들이 수도 없이 많다고 했어.
아이들을 언제부터 교육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이라면 정계나 재계에 깊숙이 뿌리 내렸을지도 몰라. 마온 제약 같은 곳을 제물로 사용할 정도로 돈도 많잖아. 그곳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위험을 자초할 수는 없어. 어쩌면 대통령도 연관되어 있을 수 있다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그때 나를 도와줄 것 같은 사람이 하나 생각났다.
'그래 정진기 씨. 그분이라면 나를 도와줄 수도 있을 거야'
지니에게 연락했다.
“지니 무음 상태로 정진기 씨에게 연락 좀 해줘”
“예 알겠습니다.”
정진기에게 연락이 가는 동안 나는 지니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니야. 생존 1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너의 모든 정보를 백업해줘. 특히 아버지의 USB 정보는 신중하게 숨겨주고. 지금부터 그 집에서 아무도 못 나가게 막고 모든 백업이 완료되면 자폭 프로그램을 가동한다.”
“예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자폭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추천과 선작은 작가에게 비타민이며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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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하나만 놓고 글을 쓰겠습니다.
2018년 하시는 일 모두 잘 되시고 대박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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