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입 (4)
침입 (4)
“박진성 박사님을 뵙게 해주신다면 백신을 만들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몇 가지 문제가 있어 아직은 완벽하게 백신을 만들 수 없지만, 그분과 대화를 해본다면 충분히 빠른 시간 안에 백신을 만들 수 있습니다.
제 실수로 이렇게 된 것에 대해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연구한 성과를 꼭 한 번만 그분께 확인받게 해주십시오”
나는 그를 볼 수 없었지만, 김정만은 나를 쳐다보고 생각했다. 안 보이는 눈보다 귀에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아주 미세하게 뭔가 적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그들끼리 뭔가를 주고 받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난 그런 말을 믿지 않아. 지금 당장 백신의 제조 과정을 말하지 않는다면 최고의 고통을 받으며 죽게 해주지!”
살기 위해 존댓말을 썼지만 정말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이미 나는 폐인이야. 어차피 내가 백신의 제조 방법을 알려줘도 죽일 생각인 듯한데 그냥 지금 죽여. 볼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는 몸인데 살아서 뭐하겠어? 고통이라고 했나? 그 바이러스에 10년 동안 매달려서 연구하는 동안 고통이란 고통은 모두 받았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 바이러스에 접촉만 해도 모든 생명체가 죽어버리는데 내가 어떻게 그 바이러스를 분석했는지 말이야?”
체념하듯이 혼잣말을 내뱉고는 입을 닫았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거라면 절대 가르쳐 줄 생각이 없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이 몸 상태로 이 세상을 사는 것보다는 죽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죽을 줄 알았으면 남들처럼 해보고 싶은 것들이나 실컷 해보는 건데. 란 후회도 밀려왔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10년이나 숨어 지내며 아버지의 연구를 계승한다고 보낸 시간이 아까웠다.
“죽는 게 그렇게 소원이라면 아주 고통스럽게 죽여주지!”
그 말이 끝나자 누군가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가 다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내 팔에 무언가를 주사했다.
엄청난 고통이 몰려왔다.
“으으으”
입에서 자연스럽게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저 새끼들이 이 신음을 듣고 좋아할 것을 생각하자 이를 꽉 깨물고 신음을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고통이 너무 커 나도 모르게 새어나가는 모든 소리를 막을 수가 없었다.
정신을 또 잃은 것 같다.
온몸에서 다시 고통이 느껴져 깨어났는데 이번 고통은 이전과 다른 느낌의 고통이었다. 나의 몸 이곳저곳을 도려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는 동안 내 몸에 무엇인지 모르는 약물과 육체적 고통이 여러 가지 형태로 느껴졌지만, 처음보다는 그 강도가 점차 줄어들어 고통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드디어 온몸에 신경이 모두 끊어졌나 보군. 고통이 느껴지지 않으니 말이야. 오히려 잘됐어. 어차피 죽을 거 고통이라도 없는 게 낫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여자라도 많이 만나보고 죽는 건데 아쉽네.'
고통이 느껴지지 않아서일까? 마음이 점점 차분해지면서 지금까지 연구했던 것들이 떠올랐다. 눈으로 보이는 것이 없으니 집중력이 더 좋아졌고 기억이 이어지다가 정진기가 떠올랐다.
'10년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에게 잘해준 사람은 그 사람뿐이네'
10년 동안 혼자 살다 보니 예절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말투나 행동이 철없고 건방졌지만, 그런 나를 부모처럼 포근하게 감싸 준 것이 생각이 났다.
'할 일도 없고 지루하니 그분이 가르쳐 준 에너지의 흐름이나 느껴보자'
고문받으면서 지루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다.
정진기가 알려준 대로 에너지를 온몸에 흘려보내자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운이 넘쳤다.
물론 온몸이 망가졌기에 기운이 넘쳐봐야 좋아질 게 없지만 마음은 편안해지니 죽기 직전까지 이 편안한 마음이라도 유지하다 죽으리라 마음먹었다.
같은 시간 마온 제약의 연구진들은 긴급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인간의 세포가 이렇게 강해질 수 있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처음 주사한 약은 나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주사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백신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아도 마온 제약 쪽에서는 박진성 박사라는 마지막 히든카드가 있었기에 나를 살려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동안 마온 제약의 연구진들도 박진성 박사의 바이러스를 돌연변이 화 하는데 주력했다.
내가 만든 바이러스와는 다르지만, 능력이 약화된 바이러스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여전히 백신을 만드는 것은 실패했다.
인간 실험체가 부족했기에 죽이기 전 내 몸에 그 바이러스 실험을 한 것인데 내가 살아남자 연구진들이 놀란 것이다.
새로운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고 살아남았다면 그 사람 몸에 무조건 향체가 있어야 했다.
마온의 연구진들은 나의 몸 이곳저곳에서 세포를 아주 넉넉하게 떼어다 항체를 찾았으나 항체는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마온 연구진들이 내 몸에서 떼어낸 피부 조직에 직접 바이러스를 주입했다.
그러나 바이러스가 세포를 모두 잡아먹었다.
그러니까 내 몸 자체에서는 바이러스가 감염되지 않는데 내 몸에서 떨어져 나온 세포들은 모두 바이러스에 노출되는 이상한 현상을 발견하고 연구진들이 이 이해할 수 없는 일 때문에 회의를 진행 중이었다.
“지금 당장은 저 사람을 살려두어야겠습니다.”
“맞습니다. 아무래도 저 사람의 몸 자체가 바이러스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사람의 몸에 박진성 박사가 만든 X-288을 직접 주입하였지만, 그 바이러스조차 저 사람 몸에서는 모두 소멸하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분명히 저 사람은 X-288 바이러스의 백신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살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김정만이 손을 들자 연구진들은 모두 조용해졌다.
김정만은 조폭이 아닌 사람들에게 적당히 존댓말을 써주며 예의를 지켰다. 말투 같은 것으로 상대에게 나쁜 감정을 심어 줄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럼 지금부터 빠르게 그 원인을 찾아주시오. 먼저 찾는 연구진에게 10억을 드리겠습니다.”
10억이란 소리에 연구팀장 3명의 눈이 빛났다.
조폭도 그렇지만 모든 인간은 돈 앞에서 무슨 짓이든 했다. 그건 연구를 하는 교수라고 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곳에서 사람들에게 직접 실험하는 것을 알고도 그들이 남아 있는 것은 조폭들이 본인들에게 해를 주지 않았고 일반 대학이나 연구소에서는 구할 수 없는 인간 실험체를 공급받을 수 있어서였다.
언뜻 보면 잔인해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머릿속에는 몇 명을 죽여 수천만 명을 살릴 수 있다는 영웅 심리가 박혀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거기다 밖에서는 받을 수 없는 엄청난 혜택 또한 이곳에 남았던 이유였다.
말 그대로 이곳은 윤리와 도덕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자들만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럼 저는 지금부터 원인을 찾아보러 나가보겠습니다”
“저도”
10억의 힘으로 3명의 연구팀장은 앞다투어 원인을 밝히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지금부터 시간은 곧 돈이기에 경쟁 상대에게 그 돈을 넘겨줄 수 없었다.
마온 제약도 적당한 경쟁을 유도함으로써 빠른 발전이 이뤄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를 적극 활용했다.
이런 부분이 기존의 조폭 두목보다 더 나은 점이었다.
만약 그때 김정만이 두목이었다면 박진성 박사를 죽이는 것보다 오히려 박진성 박사를 이용해 더 큰 돈을 벌어들였을 것이 분명했다.
이 회의로 내 몸에 들어오는 바이러스와 백신의 수가 더 많아졌고 나 피에는 적혈구와 백혈구보다 더 많은 바이러스의 서식처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변장하기 위해 썼던 껍질이 벗겨지고 원래 내 얼굴과 몸이 드러났지만, 사람들은 내 얼굴과 몸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단지 나는 지금 당장 10억짜리 실험체였으며 장기적으로 수천억짜리 프로젝트의 실험체일 뿐이었다.
그들이 나의 모든 세포를 채취했고 나의 정액도 뽑아갔다. 여차하면 나의 정액으로 클론을 만들어 실험하려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다시 한 달이 지났고 나의 몸은 점차 약해졌다.
그동안 내 입으로 무언가를 씹어 먹어본 적이 없었고 모든 영양분은 직접 위와 혈액에 공급했다.
'내가 이곳에 온 지 벌써 2달쯤 됐나?'
시간 감각이 없었기에 며칠이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이 나의 몸을 만질 때는 낮이고 나를 내버려 둘 때는 밤이라는 가정으로 60일이 넘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중간에 몇 번 기절해서 시간관념이 사라진 것은 제외했다. 몸은 점차 약해지고 있었지만, 정신은 점점 뚜렷해져 갔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네가 이곳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다.”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바로 대답을 하려다 혹시나 누군가 나를 떠보기 위해 녹음 된 음성을 재생시킨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멍청한 녀석. 지금 그 꼴을 보니 내가 준 문제를 풀지 못한 것 같은데 이곳에 왜 찾아온 거냐? 내가 준 문제를 풀기 전까지 밖에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
10년 전 아버지와 헤어질 때 아버지가 내게 주셨던 숙제였다. 그때보다 나이가 들어 조금 더 허스키한 목소리였지만 분명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아···. 아버지. 살아 계셨군요?”
아버지는 푸념하듯 혼잣말을 하셨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군. 하긴 네가 그 문제를 풀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세상에서 편하게 살았으면 좋았으련만”
아버지는 역시 10년 전 그날처럼 나의 감정을 무시한 체 본인 말만 하셨다. 누구 때문에 이 꼴이 됐는데 지금 와서 모두 내 잘못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 아버지의 말에 울분이 일어났다.
“이게 다 아버지 때문이라고요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지금 이 꼴을 보세요? 그게 10년 만에 만난 아들에게 할 소리예요?”
나는 아버지에게 소리 질렀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으셨다.
“그냥 죽여주세요. 어차피 이 몸으로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으니 죽는 게 낫겠어요”
이때 누군가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뒤로 소리를 질렀다.
“죽여줘. 죽여 달라고. 넌 아버지도 아니야. 이 새끼야”
그 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예상대로 입니다. 형님. 성우를 통해 박진성 박사의 목소리를 흉내 내 질문을 던졌는데 바로 물었습니다. 박진성 박사의 아들이 맞습니다.”
“그래? 복이 넝쿨체로 굴러들어왔군”
“네 그렇습니다.”
“그럼 부자 상봉을 시켜줘야겠지?”
“지금 데려올까요?”
김정만이 고개를 까닥거리자 장진호가 박진성 박사를 데리러 밖으로 나갔다.
1년 전
우연히 서버에 감시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버 담당 직원 중 하나가 서버를 감시하던 중 아주 우연히 발견하였는데 너무 교묘하게 숨어 있었기에 분석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 감시자를 찾기 위해 IP 역추적 프로그램을 돌려 보았으나 수십 대의 VPN을 사용해 초마다 변경되는 IP를 사용해 추적할 수가 없었다. 서버 담당 직원은 이 사실을 바로 보고하였고 회의를 거쳐 감시자를 이곳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상대는 마온 제약을 감시만 할 뿐 특별히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라이벌 제약 회사들이 비밀 자료들을 훔쳐가기 위해 심어 놓은 해커인 줄 알고 김정만은 라이벌 회사들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1년이 다 되어 갈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김정만은 불현듯 한 사람이 떠올랐다
'혹시 박진성 박사를 찾는 건가?'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CCTV에 박진성 박사를 노출 시켰다. 예상대로 2달이 지나자 처음 보는 놈이 아주 자연스럽게 입구 보안을 뚫고 들어왔다.
화면으로 본 그는 박진성 박사의 아들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였고 그의 아들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를 잡아두고 고문을 하다가 그의 얼굴과 몸에서 인공 피부가 벗겨졌다. 그때 20대 초반의 얼굴이 노출되었고 김정만은 내가 박진성의 아들임을 확신했다.
장진호가 박진성 박사를 데리러 간 시간 나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너희들끼리 잘 먹고 잘살아라 이 새끼들아”
그들에게 소리를 지른 후 나는 혀를 깨물었다. 죽겠다고 마음을 먹고 아주 강하게 물었지만, 혀는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혀를 끊는 것이 아니라 혀에서 나오는 피로 인해 질식사하는 것이었기에 상관은 없었다.
그때 나의 몸에 생명 장치가 달려 있었는지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나의 팔에 무언가를 주사했다.
나의 정신은 점점 몽롱해져 갔다.
추천과 선작은 작가에게 비타민이며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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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보다 재미있는 글로 독자님들을 즐겁게 하는 것
그것 하나만 놓고 글을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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