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8 부. 루시 - 58 화

루시 – 58

23번은 밧줄로 건수의 다리를 꽁꽁 묶었다. 11번만큼 능숙하게 하진 못해서 모양은 좀 울퉁불퉁했지만, 그럭저럭 사람이 움직이지 못할 만큼은 되어 보였다. 11번은 휴식을 끝내고 소파에서 일어나 거실 바닥에 23번이 가져온 이불을 넓게 펼치기 시작했다.

“자, 내가 컨시우스의 상체를 들 테니, 자네는 다리를 들어. 그리고 이 이불 위에 놓고 이놈을 꽁꽁 싸매는 거야. 그래야 밖에 있는 차에 가져갈 때 남들의 눈에 잘 띄지 않을 테니까.”

23번은 11번이 하라는 대로 하고 있지만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왜 우리가 잠자고 있는 컨시우스를 이렇게까지 결박해야 하는 거지? 그리고 왜 여신님은 그렇게 하라고 자네에게 명령하셨을까? 또, 왜 여신님은 컨시우스의 몸에 들어가신 걸까?”

11번은 그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기 귀찮은 듯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이봐, 내가 뭘 알고 있을 거라고 내게 자꾸 질문하나? 난들 뭐 다 알고 있겠나? 그저, 여신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하는 것뿐이지. 그리고 여신님께서 이 녀석 몸 안으로 들어가신 거야,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그저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그게 다 여신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신의 영역인데 우리가 그 이유를 어디 짐작이나 할 수 있겠어? 그러니 이제 그만 입을 다물고 일만 하자고.”

“신의 영역···. 물론 그렇긴 하네만······. 어엇! 이보게. 11번. 컨시우스가! 컨시우스가 이상해!”

11번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던 23번이 건수의 다리에 손을 대려다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11번은 펼치던 이불을 손에서 놓고 23번에게 다가왔다.

“이··· 이런. 엄청난 살기가 느껴져!”

몸이 밧줄로 꽁꽁 묶여 바닥에 놓인 건수의 몸에서 갑자기 엄청난 살기가 뻗어 나오고 있었다. 둘은 당황하며 한 발짝씩 뒤로 물러났다. 둘의 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이건 마치 우리 세계의 신이 몹시 노하셨을 때, 뿜어져 나오는 기운 같아.”

“그래, 그럼 그 주위의 사람들이 그 기운에 짓눌려 모두 겁먹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지. 그렇담, 어쩌면 이 기운은 이디레이아님께서 발산하고 계시는 게 아닐까 싶은데.”

23번이 이제야 뭘 좀 알겠다 싶은지 턱에 손을 대고 말했다.

“혹시 컨시우스를 이렇게 만들기 위해 여신님께서 이 친구의 몸 안으로 들어가신 게 아닐까?”

11번도 동료의 의견에 동의하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지도 몰라. 여신님께서는 컨시우스가 텔리놈의 시선을 잡아두는 역할을 담당할 거라고 하셨지. 그래서 이 녀석의 몸에서 이렇게 살벌한 기운을 발산하게 만드시기 위해 들어가셨던 걸 거야. 그런 용도로 이 녀석의 몸을 사용하신다는 거였어. 분명, 이 정도 기운이라면 그 빌어먹을 텔리놈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겠지. 그리고, 그놈이 이렇게 무서운 기운을 발산하는 컨시우스에게 한눈을 팔고 있을 때, 내가 재빨리 여신님이 주신 총과 총알로 그놈을 죽여버리면 된다 이거로군. 이건, 뭐 일이 너무 빨리 진행되겠어. 사실, 난 텔리놈이 고통받는 걸 보며 천천히 즐기고 싶었는데 말이야. 인사할 시간도 없이 보자마자 끝내야 하겠군.”

“그런 뜻이었구나. 아, 나 역시 여신님께서 주신 총을 잊지 말고 가져가야지.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23번의 말을 들은 11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마 내 순서에서 끝날 거야. 분명 그럴 게 틀림없어. 왜냐면, 내가 다른 건 전부 23, 자네에게 양보할 수 있어도 텔리의 목숨을 끊는 것만큼은 그럴 수 없거든.”

“그래. 알겠어. 물론 자네의 실력을 못 믿어서가 절대 아냐. 그래도······. 일단 나도 여신님께서 주신 총은 가져가겠네.”

“자네 맘대로 하게. 하지만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일 거야. 다시 한번 말하는데, 텔리, 그놈은 내 거야.”

사실, 11번과 23번의 말은 반만 맞았다. 그들의 말대로 이디레이아가 건수의 몸으로 들어가 살기를 내뿜게 한다는 것은 옳았다. 하지만, 그들이 감지한 살기는 온전히 건수가 내뿜는 것이었다. 즉, 이디레이아가 뿜어내는 기운이 전혀 아니었다. 이때는 건수가 김 일용의 모습으로 변한 이디레이아를 처음 만나게 되었던 시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둘이 깜짝 놀랄 정도의 살기가 나왔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후, 그녀의 괴롭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건수는 김일용을 닮은 괴생명체에게 잡혀 사지가 묶이게 되었고, 이디레이아가 그의 몸에 벌레를 부화하게 되었을 때부터는 뿜어내는 살기도 점점 심해졌다. 그때, 둘은 건수를 차에 싣고 이동하던 중이었는데, 이들은 거의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게 되었다.

* * *

두 명의 암살단원은 차를 타고 비피의 스모크 샵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트렁크에는 얇은 카펫에 싸여 있는 이디레이아가 사용했던 뚱뚱한 백인 여성의 육체를, 뒷좌석에는 이불에 둘둘 만 건수를 싣고 있었다. 둘은 침묵만 지킬 뿐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곧 그 무서운 텔리를 상대해야 해서 긴장한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더 직접적인 이유가 있었다. 바로 뒷좌석에 실은 건수 때문이었다. 지금 의식을 잃은 건수는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고 위험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는데, 그 기운에 눌린 그들은 정신이 다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인적이 드문 도로가 나오자, 11번이 입을 열었다.

“여기. 여기가 좋겠네. 잠깐 차를 세워.”

“그래.”

23번은 11번이 무슨 일을 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트렁크 개폐 스위치를 눌렀다. 11번은 조수석에서 내려 열린 트렁크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재빠르게 백인 여성의 육체를 꺼내 들었다. 그는 수풀이 자란 갓길에 그녀를 눕히고는 다시 차에 탔다. 그가 차에 타자마자 23번은 빠르게 차를 몰아서 순식간에 그 장소를 떠났다.

* * *

몇 분이 지났을까. 침묵을 지키며 열심히 운전만 하던 23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 이디레이아님이 사용하셨던 그 여자, 숨은 붙어 있었지? 그럼 다시 깨어날까?”

“몰라. 자네 말대로 숨은 붙어 있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죽진 않겠지?”

“모르겠어. 자네, 왜 자꾸 이상한 질문을 하는 거야?

“그 여자 몸 안에 계셨던 이디레이아님께선 지금 컨시우스의 몸 안에 계시잖아. 그렇다면, 혹시 그의 몸을 취하시려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다음엔 그도 아까 그 여자처럼 버려지는 게 아닐까?”

11번은 버럭 화를 냈다.

“이봐! 지금 그따위 일이 중요해? 컨시우스 녀석이 어떻게 되든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야? 지금 우리는 텔리를 죽이러 가는 길이라고!”

“아, 물론 그 일이 더 중요하긴 하지만······. 그래도, 컨시우스 일도 중요하지. 그는 늑대 신수, 케르케로우스의 대사제라고. 자네도 알다시피 늑대 신수는 검은 방의 주인이고. 그런데, 컨시우스가 이런 취급을 받았다는 걸 알게 되면, 그가 과연 나중에 우리가 검은 방을 통과하도록 해줄까? 이 일이 다 끝나면 우린 엘리시움으로 돌아갈 거 잖아?”

“음······. 하아.”

11번은 골치가 아픈지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자네가 컨시우스를 막 대할 때마다 그걸 좀 지적하고 싶었다네. 자네는 컨시우스를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그를 이상하게 대했잖아. 언제나 날 선 반응을 보였지. 어제만 하더라도 그를 만나자마자 배를 때리지 않나, 또 지금은 여신님께서 그의 육체를 강탈하실지도 모르는데, 우린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게 조금 걸려서 그래. 혹시라도 컨시우스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다면, 그리고 검은 방의 주인이 그걸 알게 되면 말일세. 나중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유리할 게 없어 보여.”

“에잇! 진짜!”

11번은 화가 났는지, 다리를 올려 글러브 박스를 찼다.

“그만! 그만 좀 해! 안 그래도 뒷좌석에 있는 저 자식이 내뿜고 있는 엄청난 기운 때문에 온몸이 짓눌려 숨도 쉴 수 없을 지경인데, 자네까지 왜 이렇게 신경 쓰이게 하는 말만 하냐고! 그냥 일단은 텔리 일에만 집중하자!”

11번의 말에 틀린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23번은 그와 생각의 궤를 달리했다. 11번이 건수를 텔리 제거 계획에 사용하는 물건 취급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계속 건수의 안전에 신경 쓰고 있었다. 왜냐면, 그가 지구인이지만 고향의 언어인 엘리시움어를 할 줄 안다는 것과 고향의 신수 중 하나인 늑대 신수의 대사제라는 걸 알았을 때부터 그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11번. 컨시우스는 말이야. 비록 지구인이지만, 우리랑 똑같이 우리 세계의 신이나 신수를 모시는 입장이야. 그냥 이렇게 쓰고 버리는 존재가 절대 아니란 말일세. 그랬다간 후에 큰 일이 날 거야. 난 지금 컨시우스가 당하고 있는 일이 부당하다고 봐. 이거, 벌 받을 일이야.”

“······.”

“내 말이 어디 틀렸는가? 자네도 늑대 신수의 사제인 컨시우스가 잘못되기를 바라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 11?”

“하아. 친구야. 부탁인데 제발 좀 닥쳐. 응? 제발.”

11번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동료의 말은 모두 사실이란 걸 도저히 부인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