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7 부. 잃어버린 것과 찾은 것 - 104 화

잃어버린 것과 찾은 것 – 104

건수가 홀로 허탈함을 느끼며 벤치에 앉아 있은 지 몇 십분이 지났을 때였다. 멀리서 그를 발견한 싸이언스가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건수야, 인마! 너 여기 있었어? 너 화장실 간다고 나간 다음에 한참 지나도 안 오길래, 내가 얼마나 너를 찾아다녔는지 알아? 너 여기서 쭉 있었던 거야? 추운데 밖에서 왜 이러고 있었던 거야?”

“아.... 그래.”

화장실에 간다고 자리를 떠났던 건수가 돌아오지 않자, 싸이언스는 여기저기 찾으러 돌아다녔던 것 같다. 그의 여러 질문에 건수는 짧게 대답했다.

“핸드폰은 왜 안 받았어? 걱정했잖아. 난 또 너가 어디 변기에 빠졌는 줄 알았다, 인마.”

“그냥.... 핸드폰은 무음으로 해놨었어.”

“그냥 무음으로 해놨다고? 뭐야? 무슨 문제 있냐? 가만.... 너 얼굴은 또 왜 그래? 얼룩덜룩한 게 꼭 울었던 것 같잖아?”

“아, 아냐? 울기는 무슨.”

“아냐. 너 분명 무슨 일 있어. 잠깐. 말하지 말아 봐. 내가 내 브레인 컴퓨터를 돌려서.... 위이이이잉~!”

“아냐, 진짜 아무 일도 아니야.”

“유레카! ......는 무슨. 이씨. 야, 안 되겠다. 난 오늘 빨리 집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널 만난 김에 2차를 가야겠다. 따라 와!”

“2차라니? 아이, 난 그냥 집에 들어갈래.”

건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려고 하는데, 싸이언스가 뒤에서 그의 어깨를 잡았다.

“잠깐. 잠깐. 잠깐. 네 친구가 지금 기분이 꿀꿀하다고. 인마. 그런데 술 한 잔 더 같이 안 해주겠다는 거야? 그게 친구야, 짜식아?”

“기분이.... 꿀꿀해?”

“그래. 너도 아까 봤겠지만 원광이 녀석이랑 좐슨 말이야. 둘이 사귄다잖아. 그 말을 듣고 꿀꿀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지금 우리 4 명의 우정에 금이 갔다는 거 아니냐.”

싸이언스가 도원광과 좐슨이 사귄다는 말을 꺼내자 자시 건수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그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면서 친구에게 물었다.

“야, 그건 잘 된 일이지. 둘이 사귄다니 얼마나 좋냐? 난 보기 좋더라.”

“웃기시네. 그러다가 둘이 깨지기라도 하면. 그럼 둘은 영영 안 보는 사이가 될 텐데, 좋긴 뭐가 좋아? 난 벌써 4인 우정에 금 가는 소리가 들린다. 으이구.”

“넌 꼭 그러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을 한다. 그럼 안 돼. 혹시 너도 좐슨한테 마음이 있었던 거 아니야?”

“뭐래? 미쳤냐? 그 난쟁이 똥자루만한 애한테 무슨 관심이 있어? 난 오직 알렉시스, 그녀 하나뿐이었다고. 아아아.... 알렉시스. 하아아아.... 야, 인마! 너 때문에 겨우 잊고 있었던 알렉시스 얘기까지 하게 되었잖아! 도저히 널 용서 못하겠다. 따라 와. 도저히 한 잔 더 안 걸치면 잠이 안 올 거 같으니까!”

“아니... 무슨 소리야.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지 혼자 알렉시스 얘기를 꺼내놓고는 왜 나한테 뒤집어씌우는 거야?”

“따라 와. 따라 와!”

“나 돈 없어!”

“내가 쏠 거야. 잔말 말고 따라 와!”

싸이언스는 건수에게 헤드락을 걸더니 그를 질질 끌고 갔다.

* * *

싸이언스가 건수를 끌고 간 곳은 다름 아닌 동네 편의점이었다. 둘은 편의점에서 소주 몇 병과 곱창을 사가지고 가게 앞 파라솔 테이블에 앉았다.

“어휴. 아까 양꼬치를 그냥 8 인분을 먹었더니 기름 때문에 그런가, 아주 속이 니글니글하다. 이럴 땐 소주랑 매운 곱창으로 위를 씻어야 돼.”

“8 인분이나 먹고 뭘 또 먹는다고?”

“뭐, 인마. 넌 옛날에 더 먹었잖아. 아주 소 한 마리도 혼자 먹으라면 먹던 놈이 나한테 뭐라고 하네.”

싸이언스가 또 과거 얘기를 꺼내자, 건수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그는 말실수를 한 걸 깨닫고는 즉시 건수에게 사과했다.

“아, 미안. 내가 옛날 얘기를 하고 말았네. 자꾸 깜박깜박한다.”

“아니야.....”

“그때 네 인상이 워낙 강렬했었어야지. 그 때 이미지가 뇌리에 박혀서 그런가봐. 미안해. 앞으로는 진짜 조심할게.”

“아니야.... 괜찮아....”

건수와 싸이언스는 잠시 서로 아무 말도 없었다. 왠지 분위기가 급격히 얼어붙는 것을 어떻게든 깨보려고 싸이언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 왜 아까 나가서는 혼자 거기 앉아 있었던 거야? 혹시 무슨 일 있어? 고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 봐. 난 너랑 원광이, 그리고 좐슨 말고는 친구도 없어서 어디 소문도 못내.”

“아니야. 고민 없어.....”

싸이언스는 소주 한 병을 까더니 자신의 종이컵과 건수 앞에 놓인 종이컵에 술을 따르며 다시 물었다.

“에이, 진짜 난 입이 무겁다니까. 내 몸무게의 대부분은 내 입에 올라가 있어. 정말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할 테니까 혼자 끙끙거리지 말고 털어놔 봐. 그렇게 혼자 고민하면 스트레스 받아서 병 된다니까.”

건수는 힘없이 대답했다.

“진짜야. 없어.”

“에이, 문제 있는데? 고민 있는데?”

“없어.....”

싸이언스는 술 한 잔을 입에 털어 넣더니 종이컵만 바라보고 있는 건수를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야, 너..... 설마? 좐슨? 에이..... 말도 안 돼. 아니야. 진짜야? 너 설마? 설마?”

싸이언스는 건수가 왜 이상한 행동을 하는지 이미 대충 감을 잡은 것 같았다. 건수도 그걸 느꼈는지, 눈을 질끈 감고 그 앞에 놓인 종이컵의 소주를 단 번에 마셔버렸다.

“크으으.... 쓰다.”

그리고는 싸이언스 앞에 놓인 소주병을 낚아채더니 다시 한 잔을 채웠다.

“야야. 넌 술도 약한데 좀 살살 마셔.”

“됐어!”

아무 말도 없이 연거푸 소주를 들이키는 건수를 보자, 싸이언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진짜야? 진짜 좐슨한테.... 와, 몰랐어. 아니, 내가 왜 그걸 몰랐지? 언제부터야?”

“좀 됐어..... 하아아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건수를 보자, 싸이언스가 건수에게 술을 한 잔 따라주었다.

“그래. 오늘은 작정하고 너랑 좀 마셔야겠다. 어떻게 일이 있냐.... 와. 진짜 알다가도 모르는 게 사람 일이다. 운명이다. 와아.... 밤 새자. 내일 알바는 짼다. 와아.....”

건수는 또 말없이 파란 테이블만 한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좐슨한테 그런 마음을 가졌던 건 좀 됐는데, 내가 기회를 놓쳐버렸어. 그 땐 그게 기회인 줄도 몰랐거든. 오늘에야 알게 된 거야. 바보같이....”

건수는 또 한 번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놓고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술이 좀 들어가서 그런 것일까? 그는 친구에게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을 털어놓게 되었다. 과거 어렸을 때, 케르케로우스에게 허벅지를 물린 일부터 시작해서, 기억을 되찾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양떼목장을 방문했던 일, 돌아와서 아까 앉아 있었던 작은 놀이터에서 좐슨을 만났던 일, 그리고 그녀의 쪽지, 심지어는 강원도에서 KTX를 타고 서울로 오는 길에 그녀에게 고백할 수 있었던 기회까지 전부 다 말해주었다. 그 모든 것을 싸이언스에게 털어놓고 그대로 기억을 잊고 싶었다. 대신 술로 그 기억의 빈 칸을 채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야만 지금 자신이 느끼는 허탈감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