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8 부. 루시 - 51 화

루시 – 51

그리고리가 막 그로서리 스토어를 나설 때였다. 밖에서 서브 샌드위치를 먹고 있던 한 노인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리는 모르는 이가 다가오자, 경계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노인이 그에게 뭐라고 말을 하는데, 그의 귀에는 익숙하지 않은 언어였다. 그리고리는 노인을 계속 경계하며 차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빨리 걸어갔다. 하지만, 노인은 그를 계속 따라왔다. 그리고리는 노인이 혹시라도 그의 생명을 노리는 사람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겉옷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머니 속엔 은색 권총이 있었다. 그는 언제라도 총을 쏠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풀었다. 그가 거의 한 블록을 걸어가는데도 그의 뒤를 따라오는 노인은 도중에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잔뜩 긴장하고 걸어가는 그리고리의 등 뒤에서 노인이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리, 옛 친구와 대화는 잘 끝났습니까?”

‘아니, 내가 앤디 공을 만났다는 것을 말하는 거잖아. 그렇다면 저 노인은······!’

그리고리가 등을 돌아보니, 그 노인은 이미 그의 등 뒤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리의 손이 아직도 겉옷 주머니에 있는 것을 본 노인은 몇 개 남지 않은 이를 드러내며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 안심하세요. 납니다. 이디레이아. 설마 그 권총으로 날 쏘려는 건 아니죠? 다시 안전장치를 걸어놓으세요.”

“아··· 이런. 당신이었군요.”

자신을 따라오던 노인의 정체가 사실은 이디레이아 여신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리고리는 긴장을 풀었다.

“이봐요. 여신. 어제도 그렇고 왜 오늘도 자꾸 이런 식으로 내 앞에 나타나는 겁니까? 차라리 전화하지 그랬어요?”

“다시 말하지만 난 당신들의 방식을 그리 선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군요. 아, 물론 당신이 말하지 않아도 난 이미 답을 알고 있습니다. 앤디 공이란 사람이 보바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고 싶다는 거군요. 사실 그 사람은 텔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도대체 텔리가 뭐하러 보바의 위치를 알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군요. 오늘 밤이면 죽어서 사라질 텐데 말입니다.”

분명히 조금 전 그가 그로서리 스토어 안에서 앤디 공과 대화를 나눌 땐, 노인의 모습을 한 이디레이아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이미 둘이 나눈 대화의 내용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는 처음엔 신기했지만 곧 ‘어디 이런 신기한 일이 한두 번이었어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당신은 어제 내가 앤디 콩으로부터 전화를 받을 것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젠 지금과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죠. 나더러 콩에게 오늘 저녁에 우리가 체스터 뭐라고 하는 그 흑인 녀석을 스모크 샵에 데려다줄 거라고 알려주도록 했고요. 오늘 아침에도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미리 예견했나 보군요. 당신은 나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뭐하러 내 앞에 자꾸 나타나는 겁니까?”

그리고리의 말을 들어보니, 어제 이디레이아는 검은 방에서 나온 건수를 데리러 갔던 것만이 아니라 그에게도 나타났었던 것 같다. 그동안 그녀가 보여주었던 행동을 보면, 그녀는 자신을 분열시켜서 여러 명의 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 그런 일이 가능했지 않았나 싶다.

“호호호호. 내가 당신 앞에 나타난 것은 어제와 비슷한 이유랍니다. 당신에게 당부할 일이 있기 때문이지요.”

“당부? 여신께서 내게 뭘 당부하신다고 굳이 이렇게 직접 찾아오시고······. 흥. 오늘은 유난히 아침부터 마주치는 이가 많군. 참 귀찮은 일이야. 그래서 그 당부할 게 뭡니까?”

“오늘 밤 당신과 동료들이 스모크 샵 앞에 있을 때 한 뚱뚱한 이탈리아인이 나타날 겁니다. 그가 바로 텔리입니다. 그를 보게 되면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 두세요. 아니, 가능하면 당신만이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좋을 거예요. 위험할 테니까요.”

“뚱뚱한 이탈리아인? 그가 미스닉이라고?”

예전 금발의 텔리의 모습만 기억하는 그는 그녀가 하는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네. 그는 지금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요. 겉으론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은 예전에 당신이 만났던 텔리입니다.”

“모습을 바꾼다고? 아니, 그게 말이 되나? 그러니까 영화에서 나오는 바디 스내쳐 같은 겁니까?”

그리고리는 예전에 봤던 영화에서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이 지구인의 몸을 빼앗아서 그들의 모습을 하고 있던 장면을 기억해냈다. 이디레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이해하는 게 제일 쉽고 정확하겠네요.”

“그럼,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당신도 그렇게 모습을 바꾼다는 거라는 겁니까?”

“그야 나와는 전혀 결이 다른 경우입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에게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난 다만 당신이 모습이 달라진 텔리를 잘 모르고 건드렸다가 그에게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막기 위해 찾아온 겁니다.”

“뭐요? 내가 오늘 죽는다고?”

하마터면 오늘 밤 죽을 운명이었다는 말을 듣고 그리고리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피식 웃었다.

“만약 내가 와서 미리 알리지 않았다면요. 이젠 미리 알았으니 그 운명은 피해가겠죠?”

“하! 어이없군. 어떻게 내 죽을 운명을 미리 알고 있다는 거야? 그게 말이나 돼?”

“난 미래를 볼 수 있는 운명의 여신입니다. 당신은 정말 의심이 많군요. 침착한 그리고리라고 하던데, 차라리 의심 많은 그리고리가 더 어울리겠어요.”

“끝입니까? 겨우 그걸 말하려고 이 아침부터 날 찾아온 겁니까? 이거야 원. 그럴 거면 어제 내게 찾아왔을 때 그냥 말하지 그랬습니까?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두 번이나 찾아오고 말이야. 불쾌하게 사람을 깜짝깜짝 놀래키고 말이야.”

“그야······. 음, 그건 텔리에 대한 계산이 시시각각 달라져서 그러는 겁니다. 오늘 아침에도 갑자기 바뀌는 바람에······.”

“계산? 도대체 뭔 계산을 말하는 거야?”

“그런 게 있습니다. 당신에게 말해줘도 잘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내가 말하는 것은 전부 사실이니 그냥 그렇게 믿으면 됩니다.”

이디레이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빌어먹을 검은 방. 텔리 녀석처럼 검은 방의 영향을 받은 녀석들은 자꾸 미래의 계산이 바뀐단 말이야. 특히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하려고 할 때면 더욱 문제가 생기지. 정말이지 짜증나”라며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그런 이디레이아의 모습을 보고 그리고리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뭐라고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는 거요? 이봐, 여신. 오늘은 왠지 자신감을 좀 잃은 듯한 모습인데요? 당신들, 제대로 미스닉을 해치울 수는 있는 겁니까? 이건 뭐, 갑자기 나타나서는 계산이니 뭐니, 알 수 없는 얘기나 하고 말이요. 혹시 인제 와서 발을 빼려고 하는 거 아니야?”

순간, 그리고리를 보고 있는 이디레이아의 눈빛과 목소리가 차갑게 변했다.

“그나마 쓸만한 재목이라고 생각해서 허무하게 죽을 뻔한 놈을 살려줬더니만. 쯧쯧쯧. 내가 아무리 신경을 써줘도 감사할 줄도 모르고 네 놈이 명을 재촉하는구나.”

그녀의 눈빛에서 살기를 느낀 그는 불필요하게 그녀를 자극한 것을 마음속으로 후회했지만 이미 한발 늦었나 싶었다. 이디레이아는 잠시 눈을 감고 뭐라고 중얼중얼했다.

“으으음. 다시 한번 계산해보니 그새 또 새로운 결과가 나오는구나. 텔리 녀석. 그놈의 미래가 왜 이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불투명해지지?”

이디레이아는 이때까지 여유 있었던 태도를 지우고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그리고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리, 잘 들어요. 당신의 생사유무는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는 데 있어서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다만, 당신을 나의 계획에 포함하겠다고 생각한 이상, 그만큼 생각해서 이렇게 앞에 나타나 다가올 위기를 피할 방법을 알려주는 겁니다.”

“전에도 계획 운운 하더니, 도대체 그 계획이 뭡니까? 적어도 내가 뭔가를 알아야 당신 계획에 함께 뛰어들든 뭐든 할 거 아니요? 무작정 날 한배에 태우지 말고 적어도 배가 어디로 향하는지, 뭐라도 알려줘야······.”

“지구를 리셋할 겁니다.”

그리고리는 방금 자기가 뭘 들었는지 귀를 의심했다.

“리셋이라니?”

“들은 대롭니다. 내 고향의 문제를 다 해결하면, 그리고 내가 검은 방의 새로운 주인이 되면, 난 우리 세계의 신들을 여기로 데려와서 지구를 정화하고 다시 처음부터 세울 거에요.”

“···정화? 리셋? 그게 다 무슨 개··· 소리야?”

“전부 다 지우고 새로 역사를 쓸 거라고요. 이미 각지에서 여러 명의 내가 그것을 위한 작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 여러 명의 당신··· 이미 각지에서 시작··· 했다고?”

“네. 그리고 당신도 그 계획의 일부고요.”

이디레이아는 히죽거리며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