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7 부. 잃어버린 것과 찾은 것 - 111 화

잃어버린 것과 찾은 것 – 111

건수는 벌레라도 씹은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 말을 들어보니, 이디레이아님께서 무슨 일을 계획하셨을 수도 있어.”

“그 외계인 여자가 덫을 놓은 거라니까. 덫이라고. 덫! 그리고 이름 끝에 ‘님’자는 왜 붙이는 거야?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끄응... 그야 여신님이니까 그런 거지.”

건수가 의외로 여신에게 끝까지 공손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을 확인하게 된 싸이언스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너가 아직도 그 여신한테 깍듯하게 예를 갖추는 걸 보니, 생각보다 그런 타이틀에 약한 모양이구나. 야, 그깟 여신이란 게 대수냐? 자기가 뭐 이 세상을 창조하기라도 했대? 하! 세상을 창조하긴 무슨! 외계에서 왔다면서. 그리고 그렇게 대단한 여신이었으면 처음부터 널 속이려고 하지도 않지. 신이 뭐 하러 네 허락을 받겠어? 그냥 명령하면 되는데. 그런데 하는 행동을 봐봐. 여신은 무슨. 잡신이야. 그냥 귀신이라고!”

“으음. 쩝.”

건수는 친구의 말에 동의하긴 힘들었는지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목덜미를 긁었다.

“문제는 그런 게 아니고, 내가 여신님과 약속한 거를 지켜야한다는 데 있어. 솔직히 난 아직도 여신님이 오신 그 외계에 가고 싶지 않거든. 게다가 네가 말한 것처럼 만약 이 모든 일이 이디레이아님께서 계획하신 일이라면 내가 그분과 한 약속 자체가 무효가 되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서.”

“당연하지! 계획이니 약속이니 뭔 말을 그렇게 힘들게 해. 그런걸 사람들이 뭐라고 불러? 사기잖아. 그 여자가 사기꾼이라는걸 알았으니, 당연히 너가 그녀와 맺은 계약도 무효지!”

“그래, 나도 여신님과 약속했던 걸 무효로 돌리고 싶어. 그러면 문제는 여신님이 다시 찾아오신다면 난 어떻게 행동해야 하냐 이거야.”

“뭘 고민해? ‘계획된 사기인걸 알게 되었으니 약속했던 건 취소입니다’라고 말하면 되는 거잖아.”

“아니, 그렇게 간단할 거였으면 지금 내가 이 만큼 고민이 되지도 않지!”

건수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싸이언스는 그 모습을 보고 잠시 코를 씰룩거리며 생각해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아무래도 상대는 강력한 힘을 가진 여신이니까, 네가 그렇게 말한다고 어디 귓등으로라도 듣겠어? 게다가 자신은 이미 계약의 댓가를 지불했으니 너더러도 약속을 이행하라고 압박하겠지.”

“맞아. 그렇다면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으음, 일단 그 늑대신에게 물어.... 아니지, 여쭤보는 게 어떨까? 그도 일단은 신이라고 하니까 널 도울 수 있지 않을까?”

건수는 고개를 숙인 채로 대답했다.

“아직 이틀이나 남았어. 보름달이 되려면. 난 그 때나 되야 검은 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그 안에 여신님이 찾아오시면 케르케로우스님이 날 어떻게 도와주실 수 있을까?”

그의 목소리엔 힘이 빠져 있었다. 마치 여신이 그 안에 찾아올 것을 확신하는 것 같았다. 싸이언스는 다시 생각해보더니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아하! 맞아. 그렇다면 그 금발 아저씨는 어때? 그도 이계에서 넘어온 신이라고 했잖아.”

“금발이라면.... 텔리님?”

건수는 고개를 다시 들고 눈을 깜박였다.

“그래! 멧돼지 산신령의 거처에서 지낼 때, 날 치료해주던 광식이 형이 그 사람, 아니아니, 사람이 아니지. 그 신과 친했어. 죽음의 신인가, 파괴의 신인가 그랬잖아.”

“아, 텔리님이라면..... 그런 신이 아니시고 살육의 신이라고 하시던데. 그래. 그 분은 왠지 이디레이아님과 사이가 무척 안 좋으신 것 같았어. 그런데 괜찮을까? 그 분은 좀 독특하시거든. 음... 사실 그건 옳은 표현이 아니야. 무섭다는 게 맞지. 어휴, 난 그 분과 엮이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어. 그 분과 함께 있을 때 겪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갈 정도로 겁나. 너무 끔찍했어.”

건수는 텔리를 생각하게 되자 공포심에 온몸을 떨었다. 냉큼 손을 뻗어 테이블 위의 물 컵을 들더니 벌컥벌컥 마셨다.

“넌 외계에서 온 신이라고 하는 양반들을 셋이나 알고 있었구만. 그런데도 뭐 뽀죡한 수가 없냐? 그러지 말고 그 살육의 신에게 부탁을 해보는 게 어때?”

건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그 분은 다른 사람과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하신 것 같았어. 그리고 난 그 분이 어디 계신지도 모른다고.”

싸이언스가 또 한 번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내가 방금 전에 말했잖아. 그 분과 친했던 광식이 형이 날 치료해줬다고. 그 형이라면 텔리신이 어디 있는지 혹시 알고 있지 않을까? 우리 아버지, 그 형의 연락처를 가지고 계셔.”

건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곧 울상을 지었다.

“글쎄. 그 형은 텔리님의 사제니까 그 분이 어디 계신지 알고 있을 거야. 다만 이틀 안에 뵐 수 있을지, 또 과연 날 도와주실지 너무 불확실한 게 많은 게 문제네. 이거 아무래도 난 힘들겠다. 꼼짝없이 엘리시움으로 가야 할 것 같아. 어쩌지, 싸이언스? 하아아.....”

싸이언스는 건수가 자신을 위해 여신과 그런 계약을 한 것이기 때문에, 긴 한숨을 쉬며 고민하고 있는 친구의 모습이 무척이나 걱정되었다. 그래서 정말 자기 일처럼 여기고 최대한 지혜를 짜내려고 애썼다. 그는 식당 주방에서 국밥이 나오는 것을 보자 잠시 대화를 중단했다.

“일단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진 말자. 그래도 둘이 머리를 맞대고 있으니까 자꾸 아이디어가 나오고 있잖아. 일단, 국밥을 먹으면서 더 좋은 생각을 떠올려보자고.”

식당 안에는 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 뒤, 한 쪽 구석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이른 아침부터 소주와 함께 국밥을 먹고 있었다.

“아, 자알 먹었다. 흠흠.”

그는 식사를 다 끝냈는지 수저를 테이블에 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카운터로 걸어가면서 슬쩍 건수의 어깨에 손을 대더니 두 번 가볍게 두드리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건수는 고개를 돌리며 반응했다.

“으응? 왜 내 어깨를 두드리셨지? 혹시 내가 아는 분인가?”

건수는 카운터에 서서 음식 값을 계산하는 노인을 계속 쳐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건수와 시선을 맞추었다.

“내가 너희들 것까지 다 계산했어. 이 집 국밥 잘 하네. 흠흠흠.”

건수는 재빨리 일어나서 고개를 숙이며 노인에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노인이 식당에서 나가자, 그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한하네. 난 전혀 모르는 분인데. 혹시 저 분, 싸이언스, 널 아시는 분 아니야?”

“.......”

건수의 물음에 싸이언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듯 했다. 그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잔뜩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잔뜩 식은땀을 흘리며 얼음처럼 굳어있는 모습을 본 건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의 표정을 살피면서 다시 물었다.

“싸이언스, 왜 그래? 뭐야? 응? 어디 몸이 안 좋아?”

싸이언스는 이를 딱딱 부딪치면서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네 어깨를 두드리고 간 그 여자....”

“무슨 소리야. 할아버지셨는데.”

“그 여자.... 여신이야. 이... 이디레이아였다고.”

“뭐? 여신님?”

며칠 전에 레슬링 시합에서도 그랬듯이, 건수 눈에는 이디레이아가 다른 사람으로 보였지만, 싸이언스는 그녀의 본 모습을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아마 그녀는 잠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싸이언스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말을 이어갔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카운터에 서서 우리 쪽을 보고 있던 할아버지에게서 그 여신의 모습을 봤어. 내가 분명히 봤어. 금발머리 백인.... 이디레이아, 그 여자가 맞아. 맙소사! 우리 대화.... 다 듣고 있었던 거야!”

* * *

싸이언스의 말대로 노인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있는 이디레이아는 식당에서 나와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녀는 한 번 피식 거리더니 미소를 지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어. 아까 그 녀석, 서 있는 날 보고 흠칫 놀라는 눈치였어. 내 진짜 모습을 봤던 게 분명해. 하지만 이거 좀 놀랍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아케나이온의 후손을 이 한국 땅에서 보게 되다니 말이야. 그것도 그가 가진 눈의 능력을 어느 정도 이어 받았다니. 이것 참, 놀라워, 놀라워. 호호호. 아마 그건 검은 방에 쳐박혀 있는 아케나이온도 모르고 있을 거야. 자신의 실제 피와 살을 가지고 있는 후손이, 아주 조금이나마 그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 땅에 아직 존재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겠지? 알게 되면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정말 그 운명이란 게 우습네. 호호호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