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8 부. 루시 - 24 화

루시 – 24

바빌로프에게 중요한 사실을 보고하러 갔던 그리고리는 그의 보스에게 진심 어린 충고를 하려고 했다가, 그의 태도에 실망하고 발걸음을 돌리게 되었다. 그저 발걸음만 돌린 게 아니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바빌로프에게서 거리감을 느꼈다. 바빌로프를 위해 그토록 열심히 일했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그리고리가 그의 뜻대로 하지 않는다면 가족을 해칠 수도 있다는 협박이었다. 바를 나와서 차를 운전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리고리의 마음속에는 바빌로프에 대한 증오심이 조금씩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난 보스를 위해 충성심에서 우러난 충고를 했던 것이었는데, 그는 내 얘기를 끝까지 듣지도 않았어. 내가 진짜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지금이라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신과 두 남자와 관계를 끊고 미스닉에 대한 모든 적대적인 행위를 중단해야 하자는 거였다. 하지만 보바는 내가 얘기를 끝까지 하도록 기회를 주지 않았어. 그리고 날 협박하기 시작했지. 만약 내게 힘이 조금 더 있었다면, 또 기반이 있었다면, 보바가 내게 저렇게 말했을 때 조금이라도 용기를 가지고 저항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리는 바빌로프의 광기가 담긴 눈빛을 떠올렸다. 운전대를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진짜 날 뭘로 생각하는 거야? 그런 눈빛으로 날 보면서 내 가족을 해치겠다고 말하다니! 하지만··· 지금 더 화가 나는 이유는 내게 함부로 하는 그에게 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는 거야. 그래, 분하지만 아까는 그의 기운에 완전히 압도당했었어. 바보같이!’

집으로 향하던 그리고리는 순간 운전대를 옆으로 확 꺾었다. 그의 차는 중앙선을 넘어 불법 U턴을 했다. 그리고 그는 잠시 갓길 빈 곳에 차를 주차하고는 주체할 수 없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표출했다.

“무기력함! 그래, 다른 게 아니라 그게 내 기분을 이렇게 더럽게 만드는 거야. 보바도 보바지만, 실은 나 자신이 제일 혐오스러워. 절대 다시 이런 더러운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아. 그 앞에서 다시는 이렇게 약해지고 싶지 않다. 다시는!”

그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속을 다스렸다. 그리고 다시 차의 시동을 걸었다. 오늘은 이대로 바로 집으로 들어가기엔 마음이 너무 심란했다. 잠시 일터를 들렀다가 어디 가서 맥주나 위스키라도 한 잔 마셔야 할 기분이었다.

* * *

그리고리가 향한 곳은 집이 아니었다. 대신 그는 불이 꺼진 한 스포츠 용품 가게 앞에 차를 세웠다. 그는 열쇠로 가게의 잠긴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다시 가게의 문을 잠그고 조심스럽게 밖을 내다보았다. 그는 가게 안 깊숙한 곳에 홀로 켜져 있는 램프 불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아무것도 없는 마룻바닥이었다. 그가 몸을 숙여 작은 힌지를 손으로 잡고 들어 올렸다. 그러자 밝은 불이 켜진 지하와 그곳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그리고리가 계단을 내려가자 졸고 있는 그의 부하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아까 잡아 온 차이니즈 갱스터 하나를 감시하고 있어야 했는데, 그의 보스가 가까이 와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졸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리는 부하에게 가까이 다가가 일부러 헛기침했다. 그러자, 부하가 눈을 뜨고 겸연쩍었는지 목을 긁으며 웃었다.

“어우, 보스. 저도 모르게 졸고 있었네요. 다시 돌아오신 줄도 몰랐습니다. 아까 댁으로 돌아가셨던 거 아니었나요?”

“아, 파칸을 뵙고 몇 가지 보고를 한 후에 집으로 돌아가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다시 돌아왔다. 잡아 온 차이니즈 녀석은 어떻게 하고 있지? 적당히 데리고 있었으니까 이제 놓아줘라.”

“에······ 그게··· 보스. 그런데 말입니다. 보스가 떠나신 후에 조금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상한 일?”

“예. 바로 방 안에 잡아 둔 차이니즈 놈 말인데요.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발버둥을 치길래 제 동료, 릭이 진정시키려고 한 대 쳤는데, 그만 저놈이 까무러쳤습니다. 그래서 봤는데, 아무래도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아서······.”

“뭐야? 그래서 죽었다는 거야? 지금 저 방 안에 시체를 두고 있다는 말이냐고? 이런 미친놈들! 빨리 문을 열어 봐!”

그리고리가 빽 하고 소리를 지르자, 부하는 재빨리 몸을 움직여서 잠긴 방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잡혀 온 차이니즈 갱스터가 의자에 묶여있었다. 그리고리는 그에게 다가가 코 밑에 손가락을 대보았다. 과연 부하의 말대로 그는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리는 고개를 돌려 부하에게 말했다.

“하! 이것 정말 어이없군. 이 자식들아. 사람이 죽었는데도 너희들 중 단 한 명도 내게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냐?”

“그게··· 뭐, 아까 이 녀석이 너무 시끄럽게 굴어서요. 그리고, 우리에겐 이런 녀석들 해치우는 게 그리 큰일도 아니고 말이죠. 게다가, 보스는 이미 퇴근하셨으니까 굳이 이런 사소한 일로 연락드려서 신경쓰이게 라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일 오시자마자 바로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쩝.”

“사소한 일? 하아. 멍청아, 그래도 이런 건 내게 바로 연락을 했어야지. 지금 아무리 차이니즈 애들 조직이 무너졌다고 해도, 그들 중에 누가 이 사실을 알기라도 해봐. 나중에 우리에게 뭐가 득이 되겠냐.”

“죄송합니다.”

“알겠다. 일단 이놈, 로프로 의자에 묶여있으니까, 그것부터 풀고 어서 여기서 치워버리자.”

그리고리가 의자에 묶인 시신을 수습하려고 할 때였다. 그가 시신을 묶고 있는 로프에 손을 대었는데, 갑자기 시신이 움직였다.

“끄으으으.... 흐으......”

“뭐야, 이건!?”

시신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오더니 곧이어 ‘딱딱’거리며 이를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리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조금 전까지 숨을 쉬지 않길래 죽은 줄만 알았는데, 맙소사, 차이니즈 갱스터는 살아 있었던 것이다.

“끄어어........”

“이놈, 살아 있었어!”

그런데, 다시 살아난 차이니즈 갱스터의 얼굴이 좀 이상했다. 그의 눈은 뒤집혀 흰자위만 보이는데, 입으로는 신음 소리와 함께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거였다. 그러다가 또 가끔씩 큰 소리로 고함을 쳤다. 그리고리의 부하가 손가락으로 차이니즈 갱스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스! 보스! 저 자식이 아까도 저랬어요! 이상하게 중얼거리다 소리를 빽 지르는데, 하는 짓이 너무 이상해서 릭이 때렸던 거라고요!”

그리고리도 좀 이상함을 느꼈는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눈이 뒤집힌 차이니즈 갱스터는 씨익 웃으며 웃기 시작했다. 웃음소리가 벽을 때리며 빈 지하방 안을 채웠다.

“호호호호호.”

겁을 먹은 그리고리의 부하는 문 앞까지 달아나서는 외쳤다.

“보스! 저 새끼, 영 재수 없는데 당장 총으로 쏴서 죽여버리죠! 죽었던 놈인데 다시 살아나서 저 지랄입니다. 저거, 분명 악령이 씌인 거라고요!”

그리고리도 영 꺼름칙했는지, 바로 주머니 안에 있는 권총을 꺼낼 준비를 했다. 차이니즈 갱스터는 웃음을 멈추더니 그리고리에게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오, 침착한 그리고리, 역시 그 이름값을 하네요. 이 와중에도 멀리 떨어져 있는 멍청한 부하처럼 흥분하지 않는군요. 대단해요. 호호호.”

그리고리는 차이니즈 갱스터의 목소리를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것은 그가 전에도 한 번 들었던 목소리였다. 바로 여신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