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8 부. 루시 - 34 화

루시 – 34

웨이트리스 재닌의 모습을 한 이디레이아와 11번이 서로를 노려보며 섰다. 11번은 그녀의 눈에서 뿜어나오는 흰색 빛을 보고 기죽었지만, 지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기합을 넣고 있었다.

“흥! 텔리의 암살단이라고 해도 어쨌든 인간이었던 자! 절대 내 손은 직접 더럽히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예외로 둬야겠군. 네가 지은 죄가 얼마나 엄청난지는 알고 있느냐?”

“텔리! 그 더러운 이름과 암살단을 연관시키지 마십시오. 그리고 저를 비롯한 암살단은 평범한 인간 전사 따위가 아닙니다! 한때는 전 엘리시움에 큰 풍파를 일으켰던 조직입니다. 여신님께서 여기서 절 해치시겠다고 하시면 전 운명으로 받아들이겠지만, 그렇다고 제 목을 순순히 바치지는 않겠습니다!”

당장이라도 격돌할 것 같은 둘 사이에는 엄청난 긴장감이 가득했다. 그때였다. 식탁에 앉아 있던 둘을 관찰하고 있던 동양인 남성의 모습을 한 또 다른 이디레이아가 입을 열었다.

“그만! 둘 다 그만하세요. 그리고 거기, 또 다른 나. 언제까지 한심한 모습을 보일 셈입니까? 나와 함께 당신을 보고 있는 23번에게 부끄럽지 않습니까?”

“뭐라고요? 한심하다고요? 내가요?”

웨이트리스 재닌의 모습을 한 이디레이아가 날카롭게 반응했다.

“그럼요. 지금 큰일을 앞둬놓고 이게 무슨 추태입니까? 그럴 시간이 있으면 하나라도 더 경우의 수를 계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계산은 무슨 계산! 이미 일이 다 틀어져 버렸는데요! 바로 이 멍청이가 다 망쳐버렸단 말이에요.”

동양인 남성의 모습을 한 이디레이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당신이 바보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때에도 난 혼자 부지런히 미래를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겁니까? 그리고 바보라니요! 감히 내게 그런 말을 하다니!”

또 다른 이디레이아의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웨이트리스재닌의 모습을 한 이디레이아를 계속 자극했다.

“호호호, 뭡니까? 11번과 시비가 붙더니 이젠 나와 싸우렵니까? 당신은 좀 별나군요. 나와는 아예 다른 성격으로 분화된 것 같네요. 우리가 분화할 때 가끔가다가 별종이 하나씩 튀어나오는 것 같던데, 오늘 그 중 하나를 만났네요.”

“뭐요? 별종? 아니,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웨이트리스 재닌의 모습을 한 이디레이아가 끝내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또 다른 이디레이아의 의도된 도발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몰라도 그녀의 모든 신경이 동양인 남자 모습의 이디레이아에게 집중되었다. 그 덕에 그녀와 거의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갔던 11번은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분위기는 두 이디레이아가 서로 붙을 것 같이 변했다.

“어차피 우리 둘이 싸워봤자, 가진 능력이 똑같은 마당에 결론은 나지 않을 거예요. 게다가 컨시우스는 사라져버린 상황입니다. 그러니 더욱 더 우리끼리 힘을 합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다 끝난 상황이잖아요! 이 멍청하고 놈이 더러운 몸뚱이를 긁느라고 재빨리 커튼을 닫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봤던 미래의 장면엔 분명 컨시우스가 있었습니다. 그가 사라진 마당에 뭘 할 수 있습니까? 그가 없으면 그 장면은 만들어지지 않아요!”

동양인 남성의 모습을 한 이디레이아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까 당신이 직접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작은 변화는 전체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을 거라고. 나도 거기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아직 그 미래의 장면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계산이 조금 복잡해지긴 했지만, 아직 우리에게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컨시우스가 사라진 곳은 바로······ 음. 그러니, 그를 어떻게 되찾겠습니까? 그건 아무래도 무리에요. 그게 다 이 멍청한 11번 때문에······. 아니아니아니, 어쩌면 내가 식탁에 앉기 전에 계획을 말해버렸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미래가 미묘하게 변해버렸기 때문에······.”

아무래도 웨이트리스 재닌의 모습을 한 이디레이아는 이미 그녀 자신이 일이 틀어지게 된 원인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11번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려고 했던 것이다. 동양인 남자 모습을 한 이디레이아는 대화 중에도 머릿속으로는 계산을 멈추지 않았다.

“틀립니다. 물론 당신의 섣부름 때문에 미래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지금 내가 다시 계산해보니 전부터 아주 미세하지만, 확인이 불가능한 부분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것들이 모여서 지금 방향이 크게 틀어지게 된 겁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검은 방!”

검은 방이란 단어가 웨이트리스 재닌의 모습을 한 이디레이아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녀도 뭔가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네, 컨시우스가 검은 방과 연관이 있어서 그런 거 같네요. 그는 검은 방의 주인인 케르케로우스의 하나뿐인 사제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검은 방에서 만들어진 육체를 사용하고 있고요. 그만큼 검은 방과 깊은 관계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계산이 미세하게 틀어진 겁니다. 우리가 유일하게 미래를 볼 수 없는 곳이 검은 방이니까요. 그러니 반드시 당신의 잘못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겁니다. 원래 컨시우스나 텔리 같이 검은 방과 관계있는 인물들에 대한 일의 경우, 완벽한 계산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내가 만전을 기하자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검은 방에서 우리가 하는 일을 방해할 이유가 전혀 찾을 수 없는데······. 그곳을 지키는 케르케로우스는 얼마 전 한국에서 출현했던 일 말고는 검은 방 이외에 어떤 일에도 참견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만약 방해하는 인물이 검은 방의 수호자라면요? 그는 텔리의 아버지였잖습니까? 아버지라면 아들을 위해서 개입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수호자라······. 그라면······ 글쎄요. 아뇨. 그가 아무리 예전에 신이었을 때, 텔리의 아버지었다고 해도, 이젠 세상의 일에 완전히 멀어진 자 아니겠습니까? 검은 방과 관계된 일이라면 몰라도, 굳이 텔리를 위해 일에 개입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차라리 케르케로우스쪽이 더 가능성이 있겠습니다만.”

두 이디레이아가 서로 위협적인 행동을 하기보다는 마치 회의를 하는 듯한 모습에, 11번은 일단 속으로 안심했다. 그리고 그가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니까, 무슨 내용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대충 건수가 사라진 일의 원천적인 원인이 자기가 아닌 것만은 정확히 알게 되었다. 즉, 자신의 실수가 무관하진 않지만 어차피 일어날 일이라는 것 정도는 알게 된 것이었다. 그는 조금 용기를 내어 23번이 앉아 있는 식탁 쪽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물론, 그의 그런 행동을 두 이디레이아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는 지나가면서 두 이디레이아를 번갈아 힐끔 쳐다봤지만, 역시 그의 예상대로 그들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특히, 그를 해하려고 했던 웨이트리스 재닌의 모습을 한 이디레이아는 그가 지나갈 때 그를 보고, 하는 짓이 귀엽다는 식으로 두 눈썹을 들어 올리며 피식 웃기까지 했다. 그를 해칠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표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