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8 부. 루시 - 30 화

루시 – 30

“거기 누가 있어?!”

이디레이아가 크게 웃는 소리를 듣자, 11번과 23번이 화장실 앞까지 걸어왔다. 집 안에 자기들만 있는 줄 알았던 23번은 이디레이아가 미리 자기 집에 와 있었는지 몰랐던 터라 놀라는 눈치였다.

“아니, 여신님. 언제 오셨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어떻게 제 집의 주소를 아시고 찾아오셨습니까? 전 여신님께 주소를 말씀드린 적이 없었는데요.”

여신은 마치 실수를 했다는 것처럼 손을 이마에 얹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차차. 23번, 아니, 데피아우스에게 실례를 하게 되었네요. 이곳 인간의 세상에서는 집에 방문할 때는 주인에게 미리 연락해야 하는 건데. 워낙 이렇게 내 맘대로 방문하는 게 버릇이 되어서 말입니다. 오래 된 버릇은 참 고치기 힘들답니다.”

23번은 손사래를 치면서 대꾸했다.

“아, 아닙니다. 여신님. 전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아무 때나 오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저희를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어디, 무슨 차라도······. 아, 참. 그런데 집에는 어떻게 들어오셨나요? 열쇠는 제가 갖고 있었는데요.”

“아아. 전 여러분들이 도착한 이후에 온 겁니다. 빈집에 들어온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아요. 아, 그리고, 여기에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궁금하겠군요. 전 딱히 여러분처럼 현관문으로 들어오지 않아서요. 그냥 벽이나 창문으로 들어왔지요. 그러니 열쇠가 필요하진 않았답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들은 세 남자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잠시 비쳤다. 특히 건수는 그녀가 많이 무례하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바퀴벌레나 모기 같은 벌레나 벽이나 창문으로 들어오는 거지. 게다가 자기가 그런 짓을 해서 무례했다고, 잘못했다고 말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절대 사과하지 않고 있잖아? 이 여신님은 참 이상하기도 하구나.’

여신은 건수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그에게 얼굴을 돌려 차가운 눈초리로 그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니요, 건수. 전 사과를 하지 않습니다. 전 신이니까요. 신은 잘못된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과하지 않지요. 게다가 인간에게 사과하는 신은 없습니다. 왜요? 그게 뭐가 불공평한가요?”

그녀에게 생각을 읽혀버린 건수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의 차갑고 도도한 톤의 목소리가 그를 더욱 무안하게 만들었다.

“그, 그렇습니까? 저, 전 잘 몰라서.......”

23번은 당황해하는 건수를 대신해서 급히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사과했다.

“여신님, 컨시우스가 잘 몰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그러자, 쌀쌀맞은 여신의 태도가 누그러지는 것이었다.

“그래요, 건수는 잘 몰라서 그랬겠죠. 그래도 전에는 케르케로우스의 사제라는 신분을 얻기도 했었고, 이젠 나를 위해서 일하게 된 만큼, 우리 쪽에 더 가까운 사람이 되었으니, 그런 식의 불경한 생각을 갖는 것은 앞으로 그만하도록 해요. 한국에서는 몇 번 용서해주고 넘어갔습니다만, 나도 더 이상은 참기 어렵습니다.”

“예... 예.”

그녀가 위엄을 보이자, 건수는 저절로 머리를 숙이게 되었다. 이디레이아는 언제 그렇게 차가웠냐는 듯,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컨시우스라....... 꽤 좋은 이름이네요. 암살단원, 당신들이 건수에게 지어준 이름이군요. 마치 엘리시움 사람의 이름 같아요. 좋아요. 저도 이제부터 건수를 컨시우스라고 부르겠어요. 어때요? 건수, 엘리시움인의 이름이 맘에 드나요?”

“아, 예...... 예.”

사실 건수는 그 이름이 맘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엘리시움인의 이름처럼 들리는 줄도 몰랐다. 그저, 암살단원들이 자기의 이름을 잘 발음하지 못하는 것 같으니까 그들 마음대로 부르라고 내버려 두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왜 이 녀석은 맘에 든다고 하는 거야?

“좋아요, 컨시우스. 내가 당신과 내 믿음직한 조력자들을 위해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이제 곧 현관 밖에 도착할 겁니다. 내가 얘기할 때 가서 문을 열고 가지고 들어오시면 됩니다.”

선물을 가져왔다면서 또 그게 곧 도착할 거라는 뜻은 또 뭔가. 건수가 무슨 말인지 궁금해하고 있는데, 여신이 그에게 신호를 줬다.

“지금입니다. 가져오세요.”

건수가 현관문을 열자, 그곳에는 웬 동양인 남자가 손에 묵직한 물건이 들어있는 듯한 비닐봉지를 들고 서 있었다. 누가 문 앞에 서 있을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건수는 그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헉!”

남자는 손에 든 비닐봉지를 들어올리며 건수에게 주려고 했다.

“자, 이거 받아요.”

“아앗!”

여기서 건수는 또 한 번 놀라게 되었다.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바로 이디레이아의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여, 여신님?”

“네. 난 이디레이아에요. 뭐해요? 무거운데 빨리 물건을 받지 않고요.”

“아으으..... 아아.......”

건수는 뒤를 돌아 웨이트리스 재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디레이아를 보았다. 아니, 그런데 그녀도 자기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앞에도 여신, 뒤에도 여신이 있단 말인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어... 어떻게 여신님이 둘인 거지?’

“나 원 참. 물건은 받지도 않으면서 왜 우두커니 서 있는 겁니까? 꼭 얼빠진 사람처럼 말이에요. 호호호.”

받으라는 물건은 받지도 않고 놀라서 입을 벌리고 현관에 서 있는 건수를 밀치며 남자, 아니, 또 다른 이디레이아가 웃으며 집에 들어왔다. 웬 낯선 동양인이 집에 들어오자, 23번과 11번은 그에게 걸어왔다.

“당신은 누구요? 누군데 함부로 집에 들어오는 거야?”

“누구긴 누굽니까? 난 이디레이아랍니다.”

그들 역시 동양인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게 되었다. 분명 여신은 웨이트리스 재닌의 모습으로 자기들 옆에 서 있었는데, 또 하나의 여신이 다른 모습으로 집에 들어오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곧 이디레이아가 둘이란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11번이 먼저 두 번째 이디레이아에게 인사했다.

“여신님이 오셨군요. 못 알아뵈어서 죄송합니다.”

“오, 당신은 내가 왜 둘이 되어 있는지 알고 있는 눈치네요?”

“예. 예전에 텔리, 그놈이 자신과 똑같은 분신을 만드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마, 여신님께서도 그런 방법으로 지금 두 분이 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역시 게르네군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제일 빨리 깨달았어요. 굳이 말하자면, 전 텔리와 같은 방법을 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세히 얘기하기엔 번거로우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죠. 건수! 아 참. 조금 전부터 우리는 컨시우스라고 부르기로 했죠? 컨시우스! 어서 이리 좀 와봐요. 당신을 위한 웰컴 기프트를 가져왔어요.”

두 번째 여신이 부르자, 건수는 뒤통수를 긁으며 달려왔다. 그녀가 비닐봉지를 그에게 안겨주며 이렇게 말했다.

“자, 이 봉지를 받아요. 당신이 뉴욕에 온 후 무사히 하루를 넘긴 기념으로 제가 가져온 겁니다. 바로 김치와 갈비에요. 오늘 우리 모두 컨시우스가 태어나서 자란 나라, 한국의 음식을 먹어보죠. 두 가지밖에 가져오진 않았지만 이것들, 정말 맛있답니다.”